세이초 월드 가운데 10만 분의 1의 우연과도 같은 작품 - 마쓰모토 세이초 『10만 분의 1의 우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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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만 분의 1의 우연
마쓰모토 세이초 지음, 이규원 옮김 / 북스피어 / 2013년 10월

※읽기에 따라서는 작품의 중요 내용을 미리 파악할 수 있는 요소가 있으므로, 작품을 아직 읽지 않으신 분이나 읽을 예정에 있으신 분들은 작품을 완독한 후에 본 글을 읽으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10만 분의 1의 우연'.
 제목을 본 순간 두 가지 생각을 딱 떠올렸습니다. 무려 10만 분의 1의 우연에서 비롯된 사건 혹은 진실은 무엇일까 하는 궁금증, 그리고 추리·미스터리 작품에서 '우연'이란 결코 달가운 요소가 아닌데 하는 안타까움 입니다. 그것도 무려 '10만 분의 1'의 우연이라니. 기대 반 우려 반의 기분으로 책장을 펼쳤습니다.

 시대를 반영하고, 풍광을 자세히 끌어들이고, 사건 그 자체 보다는 사건이 일어나게 된 배경과 원인에 집중하는 일본 사회파 추리·미스터리의 아버지 격인 마쓰모토 세이초. 이번 작품 역시 일련의 사건이 벌어지고 행해진 곳의 지리나 풍경을 (비록 쓰여진지 수십 년이 지나 한국에서 한국어로 읽는 우리나라 독자들에게는 지명과 풍경 모두가 생소하게 다가올 지언정) 세세히 묘사하고 있고, 마치 그 시대가 손에 잡힐 것 처럼 여러가지 보도 자료나 부수적인 장치들을 동원해 극을 꾸며나갑니다. 또한, 사건이 일어나게 된 원인과 배경을 파고들어 읽는 이로 하여금 인간적인 고민과 고뇌에 빠져 작품 자체와 작중 인물들의 언행을 곱씹지 않을 수 없게 만들고 있습니다.

 이러한 마쓰모토 세이초가 지닌 마력과 장점이 그럭저럭 녹아 있는 작품이지만, 그의 다른 작품들에 비하면 그 고뇌와 마력의 깊이가 생각보다는 얕습니다. 말할 것도 없이 작중 야마가 교스케가 범한 행동은 독자로 하여금 고민이나 고뇌를 불러 일으킬 것도 없는 명백한 범죄 행위이며, 여기에는 일말의 정상 참작 요소나 안타까운 사연이 전혀 스며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권말 첨부된 미야베 미유키의 평에서 그녀가 내세운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할 처지에 몰렸을 경우 저널리스트는 보도의 사명과 인명 구조 중에 무엇이 더 중요할까?>라는 명제 역시 핀트가 조금 어긋나 있습니다. 촉발된 사고 자체가 범죄 행위에 의해 의도적으로 일어난 것이라면 '보도의 사명과 인명 구조'간의 무게를 저울질 하고 있을 여지조차 없게 되는 것이지요.

 불의의 사고에 의해 연인을 잃은 누마이 쇼헤이가 벌이는 생각과 행동에는 어느 정도 '인간적인 고뇌'가 스며들 여지가 있습니다만, 각고의 노력으로 함정을 판 뒤에 좀 더 공공연하고 합법적인 수단으로 응징하고 세상에 그 사건의 진실을 낱낱이 밝혔더라면 좀 더 통쾌하고 눈부신 결말로 이어질 수 있었을텐데, 그러지 않은 채 슥삭 끝내버리고 어둠속에 묻어버렸다는 것이 못내 아쉽습니다.

 또한 작품의 심장과도 같은 의혹과 진실, 거기에 쓰인 트릭도 여타 작품에 비해 너무 어설프고, 플롯 자체도 매우 단조롭습니다. 마쓰모토 세이초의 작품들이 그렇듯 트릭이나 의혹 그 자체보다 그 사건이 벌어지게 된 원인과 인간적인 배경에 방점이 찍혀있어 그런 것은 아닌가 싶은 생각으로 끝까지 읽어 나아갔습니다만, 아쉽게도 그 뒤에 놓인 것은 어둡고 공허하고 스산한 '밤의 산'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을 뿐입니다.

 차라리, 뻔히 보이는 의혹과 일련의 행동에 전혀 공감가지도 연민이 느껴지지도 않는 야마가 교스케의 진실이 모두 밝혀진 이후의 이야기에 방점을 찍었더라면. 누마이 쇼헤이가 벌인 행각과 그로부터 비롯된 고뇌, 그의 범행이 발각된 후 그를 어떻게 바라보고, 어떻게 처분할 것인가에 대한 인간적·사회적 반향을 진하게 그려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해 보았습니다. 밍숭맹숭 갑작스레 맺어져 버린 이야기의 끝에 수사 시작을 촉발하는 마지막 단서와 증언 역시 이토록 우연적일 수가 없으며, 이토록 뜬금없게 느껴질 수가 없었네요.

 이것저것 불필요한 요소들을 과감히 잘라버리고 단편 혹은 중편으로 압축해 만드는 것이 더 좋았을 법한 작품, 담백 건조하지만 진하게 피어나는 인간적인 잔향이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마쓰모토 세이초의 명작들에 비해서는 꽤나 범작이구나 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던 작품, 그 마쓰모토 세이초의 세계에서 그야말로 '10만 분의 1의 우연'과 확률로 탄생되고 쓰여진 것이 아닌가 했던 작품입니다.

 마쓰모토 세이초의 작품을 좋아해서 그의 전작을 주욱 읽어나가는 독자라면 당연히 거쳐가야 할 역驛 가운데 하나겠지만, 그의 세계로 처음 여행가는 독자에게 목표삼고 들러보라고 권하고 싶은 정거장은 아닙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지극히 전자에 속하는 독자이니 볼거리 먹을거리 많은 곳이건, 그렇지 않은 곳이건 간에 차곡차곡 정차하며 그곳의 풍물과 먹거리와 냄새를 샅샅이 살피고 취하겠지요. 이번 역에서 얻은 성패 혹은 성취와는 관계없이, 마쓰모토 선線 세이초 호號가 정차할 다음 역이 못내 기다려집니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