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은 위로다 - 명화에서 찾은 삶의 가치, 그리고 살아갈 용기
이소영 지음 / 홍익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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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글도, 그림도 이 세상에 원래 없던 것을 내 스스로 창조하는 과정이기에 괴롭고, 누구도 나에게 열심히 하라고 등 떠밀어 주지 않기에 때로 외롭고 고독한 작업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책에 소개된 많은 화가들의 삶이 괴로웠던 이유는 작품을 만들어 내는 것이 나 혼자 시작하고 나 혼자 마쳐야 하는 오롯이 홀로 감당해야 할 작업이었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그렇게 괴로워하며 한 작품을 완성해도, 세상에서 받는 평가가 비난뿐이라면 어떻게 계속하여 자기 자신을 화가로서 살게 만들 수 있을지 답이 없어 헤어나올 수 없는 고민 가운데 늘 있었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런 고민의 깊이를 떠올려보며 <꽃피는 아몬드 나무>를 보았습니다. 고흐의 일생에 대해서도 다시 한 번 생각했습니다. 고흐, 비운의 화가 정도로만 생각했었는데 이 책을 통해 다시금 생각해았을 때 어떻게그런 열악한 환경 가운데서 작품을 계속하여 만들 수 있었을까, 또 이러한 그림을 그릴 수 있었을까 하는 데까지 생각이 미치자 그만 가슴이 먹먹해지고 맙니다. 고흐와 테오의 편지를 모은 것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둘 사이의 신뢰와 깊은 사랑이 편지에 절절하게 묻어났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끊임없이 불안하고 소용돌이쳤던 내면 가운데서 테오는 고흐에게 멀리서 반짝이는 오롯한 빛 같은 존재였을 것입니다. 그런 테오를 위해, 자신의 새로 태어난 조카를 위해 그림을 그릴 때 고흐의 마음은 참으로 오랜만에 잔잔한 바다 같지 않았을까 생각했습니다. “물감이 완전히 마르기 전에는 기름을 망칠 각오를 하지 않고는 붓질 한번 마음대로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수정할 때는 작은 붓으로 냉정하고 침착하게 해야 해.”라는 고흐의 말은 불가사의하게 여겨지기까지 합니다. 파멸에 가까운 상황에서 어떻게 냉정과 침착이란 단어를 사용할 수 있었을까.


이 책의 85쪽이 이런 글이 인용되어 있습니다. “결함으로 여겨지는 것들과 우리의 위대한 창조적 능력은 동반 관계에 있다. 역경을 부정하고 피하고 숨기는 데에 급급하기보다 그 안에 감춰진 기회를 찾는 데 공을 들여라(에이미 멀린스).” 저 또한 그랬습니다. 제 인생에서 가장 잠을 자지 않고 가장 열심히 글을 쓰고 가장 열심히 책을 읽었던 시기는 아기를 갓 낳고 '아줌마'와 '경력단절녀'라는 꼬리표를 동시에 붙였을 때입니다. 그 때 그렇게 맹렬하게 책을 읽고 글을 썼던 이유는 내가 생각해왔던 나 자신이 사라질 것 같아 너무나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직장이 없는 나, 더 이상 날씬하지도 않고, 깨끗한 옷을 입지도 않고 가슴에서 젖이 뚝뚝 떨어지는 나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기가 너무나도 어려워서, 미치도록 절박한 마음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주로 아기 낳고 난 이후 달라진 삶과 내면의 불안에 대하여 글을 썼습니다. 칭얼대는 백일도 안된 아기를 바운서에 눕혀 건성으로 얼러 가며 사납고 거세게 글을 썼습니다. 내가 생각했을 때 결함이라 여겨지는 것들이 내 안의 창조 능력에 불을 지펴주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이제는 듭니다. 오히려 아기가 어린이집에 가고부터는 제 안의 맹렬함도 함께 사라져 빈둥빈둥 보내는 시간이 더 많아졌습니다.

얼마 전에 ‘나는 때때로 일부러 자신을 우울증과 불안증 안에 던져둘 때가 있다’는 한 화가의 글을 읽었습니다. 불안하고 우울하고 고독할 때 오히려 작품에 더 매달리게 되고, 그 결과 더 좋은 작품이 나온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에이미 멀린스의 말은 얼마나 옳은지요. 또 그런 말을 남기기까지 에이미 멀린스가 얼마나 고통을 겪었을지요. 모든 창작자들이 겪는 고통이 결함과 창작 능력 사이에서 균형점을 찾 는 부분이 아닐까합니다.


150쪽에서 ‘목숨을 건 내 사랑들은 다 어디로 갔나’를 읽으며 마리안네 폰 베레프킨의 삶에 대해서도 생각했습니다. 내 자신을 갉아먹으며 그 사람을 내 자신보다 더 우위에 두어 내 자신을 놓아버렸던 그런 사랑이 몇 번이나 있었습니다.

마리안네 폰 베레프킨은 저 자신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작품 <비극적 분위기>를 보며 저의 과거를 들여다보았습니다. 작품은 암울한 색감이지만, 그림 안의 여인은 어찌되었든 뒤에 사랑했던 사람을 남겨두고 혼자 떠나는 용기를 지닌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저 또한 그 이상한 헌신을 바쳤던 사랑에서 빠져나온 것에 이제는 감사합니다. 암울하고 비극적인 가운데서도 결국엔 제 자신을 끄집어내어 그 사랑을 뒤로 하고 떠나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165쪽에서 추사 김정희의 “가슴 속에 만 권의 책이 들어 있어야 그것이 흘러넘쳐서 그림과 글씨가 된다”라는 글을 읽으며 또 저를 돌아봅니다. 빨리 남에게 인정받는 글을 쓰고 싶다는 마음에 준비가 안 된 글을 공모전에 낸 적이 있습니다. 결과는 당연하게도 번번이 탈락이었습니다. 겨우 몇 번의 실패에 좌절하고 자존심이 상해 ‘글을 꼭 써야 하나. 나는 작가가 될 자격이 없다’라고 생각해 그 이후로 더 이상 글을 쓰지 않았습니다. 글을 안 쓸 좋은 핑계가 생긴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는 글을 안 쓸 생각이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또다시 제 인생의 돌파구로 공무원 시험 준비가 아닌 글쓰기를 선택하고야 말았습니다(얼마나 오래갈 지는 모르겠지만.). 잭 런던이 말한 것처럼, 창의적인 아이디어는 기다린다고 오는 것이 아니기에, 몽둥이를 들고 찾아 나서기로 한 것입니다.


강익중 작가에 대해서도 생각합니다. “시험 없어도 공부하는 학생, 전시 없어도 그림 그리는 작가. 그들이 진짜 학생이고 진짜 작가”라는 말을 생각합니다. 출판하지 못하더라도, 어떤 공모전에도 당선되지 못하더라도 글을 계속 쓴다면 저도 작가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최소한 저 자신만이라도 아는 떳떳한 부분이 생길 거라 생각합니다.
236쪽의 그웬 존의 <자화상>도 좋았습니다. 웃지 않는 여인의 모습이 묘사된 그림을 볼 때 느끼는 감동이 있었습니다. 여성은 많은 부분에서 ‘환하게 웃는 얼굴’을 강요당할 때가 많으니까요. 로댕의 삶에 휘말려 자신의 삶을 잃고 말았으나 자신의 미술적 재능을 져버리지 않고 그림을 그린 그녀의 애씀에 박수를 보내고 싶습니다. 제가 결함을 가진 여성이다보니 여성의 삶과 여성의 얼굴에 대해 자꾸 눈길이 더 갑니다. 그녀가 로댕에게 보낸 절절한 편지 내용을 읽었을 때, 일생일대의 사랑에서 응답받지 못한 절망감이 얼마나 심했을까 헤아리게 됩니다. 제 수많은 응답받지 못했던 사랑들을 생각해보면 그 때마다 얼마나 우울하고 자존감이 바닥을 쳤었던지, 또 얼마나 내 자신을 자책하고 미워하게 되었던지에 대해 생각합니다.

그림을 보는, 혹은 책을 읽는 이유는 디팩 초프라의 말처럼 ‘멈춰 서서 돌아볼 기회’를 가질 수 있는 것일 것입니다. 이 책을 읽으며, 그림을 보며 많은 순간을 돌아보았습니다. 그러면서 다시 한 번 일어나 앞을 향해 나아갈 힘 또한 얻었습니다. 오늘은 아이들에게 한 번도 화를 내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책으로부터, 사람으로부터 나 혼자 낼 수 없는 에너지를 넘치게 얻었기 때문입니다.

책에 대해서 쓰면 제 내밀한 이야기들을 자꾸 내밀게 됩니다. 그럴 때마다 제 곁에 많은 사람들이 떠나갔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쓰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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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이 - 심윤경 장편소설
심윤경 지음 / 한겨레출판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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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아름다운 정원도 가슴을 울리는 글이었는데 설이도 마찬가지다.

나도 탐정이 되고싶다.

내인생도 분실물투성이었다. 뭔지 몰라도 잃어버린 무언가를 찾아 헤매야 하는 내 운명에 대한 자각. 자각도 없이 때로는 무언가를 하염없이 찾고, 때모르는 열정을 불태우며 비어있는 부분을 채우려 애썼다. 지금도 마찬가지고.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그러고 있는 것을 안다. 내가 별나게 불행하지도, 슬프지도 않다는 것도 안다.

화장에 대한 다양한 의미들을 안다. 화장한다고 이 세계의 질서에 복종하는 것도 아니며, 불량학생이 아니며, 아이답지 않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설이를 통해 본다.

내가 곽은태선생님같은 거짓말을 하고있지는 않는지 늘 두렵다. 그 두려운 마음을 잊지 않으려고 한다. 나도 모르게 곽은태선생님같은 태도를 자식에게 취할 때가 많기 때문이다. 왜 감사하질 못해. 니가 얼마나 많은 것을 누리고 있는데. 나는 그러지를 못하고 자랐는데 너는 왜 가진것에 감사하지 못해. 같은 말도 안되는 논리를 어른의 권력으로 밀어부쳤다.

삶에 쫓겨 많은 거짓말을 하며 어른으로서만 살아가는 삶에서 설이가 나에게 콜론을 찍어주며 되짚어 보라 한다.

독서토론 중에 내 스스로 던진 질문에 혼자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인간은 너무나도 불완전하며, 자식으로 인해 철없고 악한 부분들이 개선된다면, 자식은 무슨 죄가 있냐고. 자식이 한 개인의 성장 발판이 될 수 있냐고. 인간이 인간의 도구가 될 수 있는거냐고.

나름대로 내린 결론은, 인간은 상호작용하는 존재이며, 자식에게 내가 다가 아니며, 모든것이 좋거나 모든것이 나쁠 수 없으며, 우리가 자식에게 빚지면서 내 자신을 바르게 세워 가듯이 우리의 자식들 또한 그 다음 세대들에게 빚지며 살아갈 것이라는 것이다. 자식을 낳든 안 낳든, 우리는 우리보다 약한 자들과 어린 자들에게 빚지며 살고 있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 동물들, 어린 자들, 노인들... 우리보다 약한 자가 있다는 것은 우리를 깨닫게 하며, 내 자신 또한 그들에 속한다는 것을 알게 하고, 나 혼자 잘나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없다는 것 또한 깨닫게 한다.

설이.

세상에서 가장 약하게 태어나
많은 사람을 깨닫게하고
너 스스로도 깨달으며 사는 모든 존재의 통칭.

나도 한 사람의 설이로서
설이의 몫을 다하며 살아가고 싶다.

감사를 생각하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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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고통 이후 오퍼스 10
수잔 손택 지음, 이재원 옮김 / 이후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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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전 손택의 <타인의 고통>에 대하여 읽고 난 후부터 말 그대로 타인의 고통에 대하여 함부로 조언하거나 첨언하는 것을 삼가려 노력하고 있다. 세상의 다양한 사건들, 생리컵 문제에서부터 신한은행 여성 채용 사태와 같은 여성에게만 적용되는 유리천장, 세월호 금식투쟁 앞에서 저지르는 폭식투쟁, 상습적으로 일어나는 데이트폭력, 소아 강간, 외국인 노동자와 난민 추방 등에 대하여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의견을 가감없이 피력한다.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데 제한을 두긴 어려우나 자신의 발언이 타인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까 깊이 생각을 해 보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자기반성, 자기 검증, 저어함, 두려움 같은 것들 말이다. 내 생각이 정말 옳은가, 다양한 부분에 있어 다른 입장에 있는 사람에게 해를 끼치지는 않는가, 혐오를 조장하지는 않은가, 너무 납작한 의견은 아닌가, 편견에 치우치거나 지나치게 감정적으로 생각하지는 않았나 하는 필터가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요즘이다. 뒤돌아보지 않은 확신과 자기 신뢰, 지나치게 강한 자기 주장은 그만큼 큰 실수나 상처를 불러온다고 생각되는 사례가 많다. 나는 너무 쉽게 사람들에게 내 짧은 경험과 소견 안에서 조언하고 가르치려들지는 않았는지 생각을 더듬어보게 된다. 약자들, 신체적·정신적·물질적으로 약한 자들에게 가혹한 현실을 보며 나는 성급한 일반화, 이 책에 따르면 천박한 연민을 하지는 않았는지 돌아본다.


수전 손택은 말한다. “일단 누군가를 ‘야만인’이라고 부르게 된다면, 사람들은 그 야만인에게 “그저 다른 사람들이 했던 것처럼 행동했다”라고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문제는 다음과 같다. 우리는 누구를 비난하고 싶어하는 것일까? 좀 더 간단히 말해서, 우리는 누구를 비난할 권리가 있다고 믿는 것일까?(중략) 흔히 사람들은 타인의 고통이 자신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잘 받아들이지 못한다.”
이번 제주도에 예멘 난민들이 머물며 올라온 국민 청원을 본다. 무려 몇 주만에 20만명 넘는 사람들이 찬성한 그 청원을 본다. ‘우리’나라에 ‘우리나라’사람 아닌 자들, ‘범죄를 잘 저지르는’자들이 들어왔다며 법으로 강제 추방해달라는 그 혐오로 가득한 글과 그에 동의하는 사람들, 수많은 그 ‘강한’ 자들을 본다. 그리고, 집을 빼앗기고 재산을 빼앗기고 나라를 빼앗겨 목숨을 걸고 어쩔 수 없이 떠밀려 혐오로 가득한 이 작은 나라에 오게 된 난민들에 대해 생각한다. 아직도 그 곳에 머무를 수밖에 없는 그 ‘사람’들을 생각한다. 그리고 함부로 연민하려 드는 내 뻔뻔스러움에 대해 생각한다. “우리가 보여주는 연민은 우리의 무능력뿐만 아니라 우리의 무고함도 증명해 주는 셈이다. 따라서 (우리의 선한 의도에도 불구하고) 연민은 어느 정도 뻔뻔한(그렇지 않다면 부적절한) 반응일지도 모른다. 특권을 누리는 우리와 고통을 받는 그들이 똑같은 지도상에 존재하고 있으며 우리의 특권이 (우리가 상상하고 싶어하지 않는 식으로, 가령 우리의 부가 타인의 궁핍을 수반하는 식으로)그들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숙고해 보는 것, 그래서 전쟁과 악랄한 정치에 둘러싸인 채 타인에게 연민만을 베풀기를 그만둔다는 것, 바로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과제이다.”


인간은 세상 모든 가슴 아픈 일들을 직접 경험해 깨달을 수 없는 존재이기에 다만 함께있기를 선택할 수 있을 뿐이다.


경험함으로써 깨닫는 지식에 대해서는 할 말이 있다.


바로 출산과 육아에 대한 이야기이다.


아기를 갖기 위해 노력하고, 갖고, 낳고, 키워보기 전의 나는 현재의 나와 완전히 다른 인격체나 마찬가지이다. 아기를 갖고 싶은데 가질 수 없던 시간들에서 느꼈던 초조와 불안, 기적적으로 아기를 임신하고 나서 받은 질문들(가장 많은 질문:아기의 성별에 관련한 것)에서 느낀 짜증과 염려, 아기를 출산할 때 느낀 두려움과 고통, 아기를 키우며 제대로 내가 하고 있는지에 대한 불확신에서 오는 끊임없는 걱정, 아이를 데리고 다니며 느끼는 수많은 불편(수유실과 기저귀 교환대가 없으며 계단이 많은 바깥환경과 노키즈존들)에 대해서는 직접 경험해보지 않고서는 감히 ‘이해한다’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비단 아이 문제 뿐이랴. 장애인으로서 겪는 고통, 소수민족으로서 겪는 고통, 가난해서 겪는 고통 등 타인의 고통에 대하여 우리는 백프로 이해하거나 공감할 수 없다. 심지어 내가 전에 겪어본 고통에 대해서도 금새 잊어버리고 타인의 고통은 경하게 여길 때도 많다. 노동자를 등쳐먹는 노동계급 출신 사장, 가정폭력을 심하게 겪고 그 폭력상을 똑같이 되물림하는 부모들이 참으로 많으니 말이다.
얼마 전에 집에 손님이 와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 사람들이 쉽게 퍼뜨리는 편견에 대하여 깊이 생각해 볼 수 있는 사건이 생겼다. 첫 번째 사건은 손님의 직장 내 장애인 채용에 대한 이야기였다.


“이런 말 하면 안되지만(사람들은 감히 말하면 안 되는 주제에 대해 말하고 싶을 때 이런 사족을 잘 붙인다) 장애인 채용하면 힘들기만 해. 몸이 불편하면 정신도 이상해지는 경우가 많거든. 피해의식으로 가득 차 있어서 별 생각없이 한 말을 꼬아 듣고 물고늘어져 사람을 미치게 만든다구. 밤늦게 계속 문자오고 전화오고... 정말 미치는줄 알았다.”


나는 장애를 가지지 않은 사람으로서 장애를 가진 사람들을 대할 때, 내가 ‘생각없이’ ‘아무렇지 않게’ 누리고 있는 편의에 대해 응당 부끄러움이나 미안함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아무렇지 않게 이용하는 계단, 난간, 의자들에 대하여. 남을 욕할 때 ‘애자냐? 장애냐? 미쳤냐?’하고 쉽게 사용하는 언어에 대하여.


두 번째 사건은 이런 것이다. 만 4개월된 우리 집 둘째를 보고,


“역시 남자애라 활동성이 다르다. 이목구비도 전혀 달라. 뼈대도 굵고. (내가 딸이라고 말하자) 정말? 난 파란색 옷을 입혀서 남자앤 줄 알았네.”
이 작은 대화 안에 얼마나 많은 편견이 점철되어 있는지.


우리는 좀 더 조심해야 한다. 좀 더 두려워해야한다. 내가 함부로 말하고 있지는 않는지. 사회에서 나에게 주는 프레임에 나도 모르게 길들여져 타인의 고통을 재단하고 있지는 않는지.


“우리가 아닌 다른 사람이나 우리의 문제 아닌 다른 문제에 감응할 능력이 없다면, 도대체 인간이란 어떤 존재이겠습니까? 아주 잠깐만이라도 우리 자신을 잊을 능력이 없다면, 도대체 인간이란 어떤 존재이겠습니까? 무언가를 배울 능력이 없다면, 용서할 능력이 없다면, 도대체 인간이란 어떤 존재이겠습니까?(수전 손택, <타인의 고통>, 이후, 208쪽)”
누구도 타인의 고통에 대하여 함부로 말할 수 없다.
누구도.
누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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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르몬의 거짓말 - 여성은 정말 한 달에 한 번 바보가 되는가
로빈 스타인 델루카 지음, 황금진 옮김, 정희진 해제 / 동양북스(동양문고)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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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누기 불편한 이야기들


여성스럽다’ ‘여자답다’, ‘남성답다’ ‘남자답다라는 표현은 어떤 의미일까? , 언제부터 그런 의미로 기능하게 되었을까?

책머리의 “‘변덕이 심하고, 신경질적이고, 감정적이며, 까탈스럽다는 비난을 피하기 위해, 지금도 많은 여성들이 여성호르몬의 희생자를 자처한다. 그사이에 이익을 챙기는 자는 누구일까?”라는 글은 읽는 이로 하여금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예나 지금이나 여성의 인격과 행동은 늘 몸과 결부되었던 반면 남성의 인격과 행동은 정신과 결부되어왔다.여자라서 감정적이잖아라거나 여자라서 예민한가봐같은 말을 스스로 인지할 능력이 없을 때부터 수없이 들어왔다. 페기 오렌스타인의 신데렐라가 내 딸을 잡아먹었다에 따르면, 고대에서 중세에 이르기까지는 여자는 파란색, 남자는 빨강 혹은 분홍색 옷을 입히기가 권장되어왔는데, 그 이유는 여자는 이성적이지 못하고 감정적인 존재이기에 차분한 느낌의 파란색 옷을 입혔으며, 남자는 열정 또는 정열을 뜻하는 빨간색과 그 계열인 분홍색 옷을 주로 입혔다고 한다. 핑크는 여자색, 파랑은 남자색이 된 것은 근대에 이르러 유아 광고 사업 등을 통한 변화라 한다(그래서 신데렐라 등 옛날 공주들의 드레스는 주로 파랑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남자는 동물적이라 어쩔 수가 없어라든지, ‘남자는 원래 욕망에 충실하잖아, 그러니까 이해해라는 말도 많이들 하고 있으니 어찌된 결과일까?

성별은 태어날 때부터 정해져 있는 필연적인 것이 아니라, 원하는 대로 변경이 가능하며 끊임없이 바뀌는 정체성, 자아 표현, 지향으로 바뀐다. 인간은 잘 모르는 대상을 범주화시키면 그 대상을 이해하기 더 쉬워지기에 타인을 쉽게 범주화시킨다고 한다. 그 중 가장 쉬운 범주화가 바로 성별이다. 저 사람은 여자/남자니까 아무래도 그렇지, 저 사람은 한국/외국 사람이니까, 저 사람은 30/40대니까 그렇지 같은 사고방식이 모두 범주화를 통해 대상을 쉽게 이해하기 위한 방법이다. 사람의 뇌는 여러 가지 정보를 한꺼번에 처리하기 어려우므로, 마주하는 사람/사물을 범주화시켜 생각하기가 쉬운 것이다. 그런 범주화에 가려 타인을 만났을 때 그 사람이 어떤 생각을 하며 살아왔는지, 앞으로는 어떻게 살고 싶은지, 어떤 희망을 갖고 사는지 등 관계에서 훨씬 중요한 사실들에 접근하지 않고 쉽게 판단하려 하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모성 신화

엄마가 되면 여성에게는 여자다움의 기준이 더 요구된다. 바로 행복하고 만족스러우며 불평 없는 엄마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많은 여성이 이에 도전한 끝에 이 위치에는 도저히 도달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때로는 평소 자신에게 요구되는 책임, 특히 집안일을 면하기 위해 생리전증후군을 이용함으로써 그 압박감을 이겨내기도 한다. 남성들이 가사 분담률을 높여가고는 있지만 그중 대부분은 여전히 여성의 몫이다. 기분이 오락가락한다거나 짜증이 나고 혼자 있고 싶거나 불만을 표출하고 싶을 때 여성들은 위협을 느낄 수 있다. 왜냐하면 그런 행동들은 여성다움의 기준과 정반대되는 행동이기 때문이다. 이상적인 남성성은 뭔가를 하는 것(활동적이고 적극적)’으로 대표되는데 반면 이상적인 여성성은 뭔가를 하지 않는 것(나대지 않는 것, 상스럽게 굴지 않는 것, 과음하지 않는 것, 이기적으로 굴지 않는 것)’으로 대표된다. , ‘숙녀답게 구는 것이란 예의 바르고, 차분하고, 우아하고, (무엇보다도)군말없이 남들을 보살피고 남들을 위해 희생하는 것이다. 이런 이상형에 도달하는 데에는 엄청난 자기 규제가 수반된다.

심리학자들이 알아낸 바에 따르면 임신 중 여성의 심리적 안녕감을 좌우하는 예측 변수는 임신에 대한 신체 반응, 계획 임신인지 아닌지 여부, 아이 아빠와 맺고 있는 관계의 질 그리고 경제 상황이다.

 

산후 우울증

 

여러분이 지금까지 산후우울증에 관하여 들어본 말과 정반대되는 말일 수 있다는 건 나도 알지만 과학은 분명히 말하고 있다. 여성이 산후우울증에 걸리는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지만 호르몬 변화는 거기에 속하지 않는다고. 사람들이 산후우울증을 자꾸만 호르몬 탓으로 돌린다면 산후우울증이 불가피한 것이고 치료를 요하지 않는 것이라 여기게 될 것이다. 혹은 그토록 많은 새내기 엄마들이 필요로 하는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도움을 주기보다 약만 있으면 된다고 여기게 될 것이다. 이는 여성의 생식 인생에서 신화가 사실보다 극성스러운 나머지 진짜 문제에 손도 대지 못하는 또 하나의 이유다.

 

동안 숭배와 완경

우리는 우리를 동안으로 만들어줄 거라는 제품과 서비스를 구매한다. 특히 여성에게 젊다는 것은 아름답고, 신나고, 활발하고, 사회적 가치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반면 늙었다는 것은 지루하고 소외되고 주름이 자글자글하므로 못생기고 사회적 가치도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이러니한 것은 나는 지금 내 나이가 좋다는 점이다. 열정을 가직 일을 하면서 개인적 관심사와 욕구에도 전념할 수 있는 시기다. 그런데도 젊어 보이고 싶다는 욕망은 떨칠 수가 없다. 나는 어떻게 내 노년을 받아들일 것인가? 타인을 첫눈에 매혹시키거나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외양을 70대에 가질 수는 없을 것이다(현재 앤터테인먼트 사업의 추이를 살펴보면, 여성이 사회적인 아름다움의 절정을 드러내는 시기는 20대에서 10대 중반, 이제는 초반으로 점점 하향하고 있다.). 타인에게 인정받고 주목받고 싶은 인간의 욕구를 어떻게 다스리며 살아가야할까? 나이 든 여성의 가치하락에 대해 미디어에서 계속하여 떠들 때 나는 어떻게 자아가치감을 유지할 수 있을까? 그리스, 멕시코, 인도 같은 국가의 여성들은 일반적으로 완경에 대해 긍정적인 관점을 가지고 있었는데 특히 나이 든 여성이 크게 존중받는 곳일수록 그러했다. 완경기에 접어든 여성들은 남들의 호감을 사는 것보다는 스스로 진국이 되고 생산성을 높이는 데 더 신경을 쓴다. 하지만 그런 순간이 60대에 이르러 갑자기 짜잔! 하고 오는 것은 아닐 것이다. 살아가는 매 순간을 그저 흘려보내지 않고 자신에 대한 깊은 고찰을 해 온 사람만이 그런 경지에 이를 수 있다. 인생의 각 단계에서 집중할 대상이 변하는 것은 호르몬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이는 발달 단계상 적절한 변화인 것이다. 그러나 생물학적으로 아주 조금이나마 운명 지워진역할에서 벗어나려고 하면 여성들은 도처에서 저항에 직면한다. 그런 이타적인 보살핌에 익숙했던 가족과 배우자, 때로는 고정된 성 역할을 앞으로도 쭉 완벽하게 이행하려는 다른 여성들의 비난까지. 완경 이후 삶에서조차 우리 자신과 우리의 자리를 재고하기란 정말 어렵다.

 

나는 왜 이렇게 우울하고 짜증이 나는가?”

 

자식을 낳고 난 이후, 나의 삶은 오직 이후만이 있다. 가치관이 달라졌으며,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이 완전히 달라졌다. 임신 및 출산 후 직장을 그만두고 가정 주부또는 엄마로 어떻게 살아가야할지 몰라 끊임없이 자책하고 괴로워했다. 삶의 순간 순간 우울은 쉽게 찾아왔다. 남들처럼 아침 상을 멋지게 차리지도 못했으며, 집을 깨끗하게 치우지 못한다는 것 등 이상적인 여성 주부의 삶에 미치지 못해 괴로워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산후 우울증이 너무 심해라는 말로 내 요동치는 감정들을 이름 붙였다. 그렇게 하면 많은 시간 마음이 가라앉고 괴로운 원인을 내 자신에게도, 타인에게도 납득시키기 쉬웠다. 하지만 내 우울의 이유는 산후 우울증(정신병) 때문이 아니었다. 임신 및 출산 후 너무나도 달라진 상황(실직, 엄마 역할, 살림을 책임지는 가정 내 역할 변화, 남편의 잦은 야근, 이상적인 여자상에 대한 압박 등) 때문이었다. 세상은 자식을 올바르게 양육하는지 여부를 항상 나에게 점검했다. 하지만 답을 몰랐다. 그래서 자식 양육과 관련하여 많은 책을 읽고 많은 사람들에게 조언을 구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현실에서는 내 자식이 이라는 부분이 참 많은 것을 좌우하는 것이었다. 딸이니까 이렇게 입혀, 딸이니까 이렇게 키워, 딸이니까 이런 행동을 하는구나 같은 이야기와 조언들을 끊임없이 들었다. 그런 상황에 직면할 때마다 내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되었다. 나는 어떻게 자라왔으며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이 세상에서 여성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지, 내 삶의 결정들이 내 자식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인지. 그런 생각을 하게 될수록 결국 답은 내 자신이 온전히 서야 타인에게도 올바른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거였다.

나의 짜증이나 우울, 화나는 감정들이 생리주기나 출산 때문이 아니라 내 상황과 제도적인 문제들이 영향을 미친 부분이 있는 것은 아닌지 매 순간 직면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내 삶에 온전한 책임을 지는 것은 나 자신이며, ‘호르몬때문이 아닌 나의 우울이나 걱정의 진짜 원인을 찾아낸다면 결국엔 이를 해결할 방법 또한 찾기 쉬울 것이며 내 자신의 행복에 좀 더 가까워질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이는 타인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다.

화를 내도 되고, 화를 냈다고 해서 사과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이미 어려운 일들을 척척 해내고 있다. 끊임없이 바른 여성의 삶을 살고 있는지 자기검열을 했던 과거에서 벗어나, 숨겨야 했던 여성들의 삶을 드러내고, 자신의 생각을 자유롭게, 함께, 많이 나누고 싶은 마음에 이 책을 선택했다. 우리에게 그런 이야기의 장이 계속해서 열리길 간절히 바란다.

 

생물학적 본질주의가 위세를 떨치는 한은 누구도 인간이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온전히 체현할 수도, 표현할 수도 없다.

 

우리의 의심은 정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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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스트도 결혼하나요? - 결혼한 여자들의 페미니즘
엄마페미니즘탐구모임 부너미 지음 / 민들레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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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스트도 결혼하나요>는 제가 2년 전 기혼 페미니스트로 외로움과 괴로움 속에서 헤맬 때 끌어올려 준 목숨같은 책입니다.

2019. 9. 17

'기혼여성은 가부장제의 부역자다.'

라고 누군가 쓴 글을 보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래.

나도 페미니즘을 미리 알았더라면, 혼자 살 수도, 가부장제의 부역자가 아닐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난 이 삶도 마음에 드는 부분이 있다.

나도 이 생이 처음이라, 좌충우돌하며 애쓰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혼 래디컬 페미니스트에게 변명하게 된다.

나도 그대의 편이야. 여성의 편이야. 누구보다도 그렇다고 생각해. 하지만 이 삶도 마음에 드는 부분이 있다고. 그건 안 되는 거냐고.

30대가 넘어서야 페미니즘을 만났고, 매트릭스의 빨간 약을 먹은 것처럼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삶의 방식들이 약자 및 소수자의 인권을 후려치는 프레임 안에 있었다는 걸 이제야 깨달았다. 그래서 나 자신도, 내 남편도, 내 자식들도 이 기울어진 세상 속에서 바르게 살아가게 하려고, 구조를 조금이라도 바꿔 보려고 많은 것을 시도했고 또 많은 것을 포기했다. 출산 후 재취업이 안 되더라도 이 작은 도시, 경상도라는 틀 안에서 면접 문화 및 여성 채용 문화를 바꾸려고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그런 일련의 행위들을 뭉뚱그려 '그건 네가 싼 똥 네가 치우는 것이지 뭐냐'라는 말을 비혼 페미니스트한테 듣는 일만은 그냥 넘어가지지가 않는다.

구조의 모순을 이제야 깨달았지만, 그 안에서 가부장제를 타파하려, 적어도 내 작은 가정 안에서만큼은 그 틀 안에 갇히지 않으려, 내 자식이 살아갈 미래를 바꾸려 그야말로 온 힘을 다하며 매일을 견디고 있는데.

결국은 '기혼'이 죄가 되어 내 발목을 잡다니.

가슴이 너무 답답하던 차에 이 책을 읽게 되었고, 작가님을 만나게 되었고, 나름의 돌파구를 찾았다고 생각한다.

'분노의 말은 힘이 없다'

'희망의 페미니즘'

'일상에서의 작은 승리들'

'곁을 바꾸는 작은 생각의 역전'

책을 읽으며, 강의를 들으며 나에게 박힌 말들이다.

_

모든 여성은 연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직 페미니즘을 모르는 여성들조차도,

심지어 그들이 지금은 구조 안에서 그 구조를 공고히 하는 역할을 돕고 있더라도,

우리는 연대해야 한다.

메갈리아의 기조를 떠올려야 한다. '여성들의 무임승차를 격하게 환영한다'.

우리 모두가, 지금 살아있는 모두가 구조의 모순과 불평등을 언젠가 깨닫고 '제대로' 살아갈 삶과 세상을 위해 페미니즘이 존재하는 것이 아닌가?

날 때부터 소수자의 인권, 여성인권에 대해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세상의 문화는 오히려 강자를 두둔하고 강자의 편에 서게 가르친다. 약자를 끊임없이 점검하고 검열한다.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아무것도 안 하고 서 있으면 자연스레 기울어진 편에 서게 되는 것처럼.

그 누구도 처음부터 '깨어 있었던' 사람은 없다. 어떤 계기를 통해 먼저 깨달을 기회를 얻었던 우리가 있었고, 그 깨달음을 통해 함께 연대하기를, 함께 걷기를 선택해야 한다. 하지만 그 먼저 깨달음이 나중 깨닫는 자-시스템의 피해자들-과거의 나 자신이기도 한-들을 후려치기를 선택하는 것은 오히려 비겁한 행동이라 생각한다.

리베카 솔닛이 말한 것처럼 우리는, 인간답게 살아가기를 선택한 우리는, 결국엔 모두 함께 연대하기를 선택해야 한다. 각자 현재 자신의 삶 안에서 매일의 최선을 다하여, 개인이 단독으로 극복하기는 어려운 이 거대한 구조적 모순을 함께 조금씩 깨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우리가 지향해야 할 진정한 페미니즘이 아닐는지.

유가족이 많은 법을 바꾸는 것처럼.

_

이 때, 강연과 관련해 페미니즘에 대하여 독서모임 회원님들의 의견이 분분했었다.

이에 요즘 이슈가 되고 있고 나도 나름대로 동참중인 <탈코르셋>에 관련된 책을 읽고 생각한 바를 덧붙여 보았다.

_

꾸밈노동:

계속해서 논의중인 탈코르셋 담론에 대하여

_

머리를 아주 짧게 잘랐다.

화장을 하지 않았다.

여성신체의 곡선을 드러내지않는 펑퍼짐한 티셔츠와 바지를 입었다.

운동화를 신었다.

내몸의 기본값을 한참을 쳐다보았다.

사회에서 요구하는 "여성스러움" 또는 "예쁨"의 기준을 하나도 지키지 않은 모습이었다.

사실 그 모습이 자연스럽게 여겨지기보다 어색했고, 사회적 규범을 벗어난 것 같아 마음이 편치만은 않았다.

하지만 [탈코르셋:도래한 상상] 을 읽으며, 탈코르셋을 한 외양을 취한다는 것은 '내가 지금 당장 편함을 얻는다'는 것과는 대척점에 있다고도 생각된다.

미래에 올 수많은 여성들의 진정한 기본값의 재조정을 위하여, 당장에 맞이할 일상의 귀찮음과 고통을 무릅쓰는 것이다.

[쌩얼:얼굴(화장한 얼굴)]이 기본값이 아니라, [얼굴:화장한 얼굴] 이 기본값이 되는세상을 위해서 말이다.

한편으로는,지금이라도 머리를기르고 화장을하고 원피스를 입어 "세상의 예쁨"을 획득하고 싶은 마음과 매일 싸운다.

일상속에서 소소하게,그러나 지속적으로 '머리길러라, 여자같이 하고 다녀라'하는 가스라이팅과 매일 싸운다.(생각보다 에너지소비가 심하다.)

내 자식이 미래에 대할 조금이라도 덜 기울어질 세상을 위해 이렇게 탈코르셋에 동참하고 있건만, 막상 자식은 내가 머리를 기르고, 원피스를 입어 세상이 요구하는 예쁨에 동참하기를 원한다.(나중엔 어떨지 모르지만.)

여성에게 '못생길' 자유가 있기를 바란다.

있는 힘껏 못생기고 싶다.

이미 사회에서 요구하는 미의 기준에 적합한 얼굴이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젖먹는 힘을 다하여 못생길 자유를 추구하고 싶다. 이는 온오프라인에서 진행되고있는 탈코르셋 담론과도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못생긴 여자의 역사>란 책을 보면, 얼마나 수많은 시대, 역사, 시간동안 못생긴 여자가 배척당하고 사회적으로 마녀, 악마, 괴물 취급 받아왔는지 알 수 있다.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중립에 기어를 넣으면 기울어진 곳으로 가기 마련이라는 말이 마음을 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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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한 여성들을 향해 '가부장제의 부역자'라고 비판하는 말을 냉정하게 들여다보면 인정해야 할 부분도 있습니다. 엄마, 아내, 며느리 노릇을 하며 성역할을 재생산하고 강화하니까요. 착취당하는 줄 알면서도, 억압인 줄 알면서도 벗어나지 못하니 스스로도 정말 괴로운 일입니다. 벗을 수 없는 굴레를 쓰고 있다는 것은 슬픈 일입니다. 혁명을 원하지만 현실은 녹록치 않기에 적당히 타협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한 번 더 생각해보면, 가부장제 안에서 싸우는 것은 밖에서 싸우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려운 일이기도 합니다. ... 친밀한 사이에서 빚어지는 갈등은 더 깊은 상처를 남깁니다. ... 결혼한 여성들의 저항이 사소해 보일지 모르겠지만, 관습과 기대치에 반문하는 것만으로도 삶이 크게 흔들리기에 특별한 용기와 각오가 필요합니다."

<들어가며>에 쓰인 이 글을 왜 2년 전엔 그냥 읽고 넘겼는지 모르겠다. 후기를 쓰려 다시 읽으니 너무나 새롭고 새로운 힘이 된다. 나는 '내가 제일 힘들어, 기혼 페미니스트가 비혼 페미니스트보다 훨씬 힘들다고'라고 생각하며 내가 만들어낸 도덕적 우월성 안에 갇혀 있었다. 내가 옳다. 빻은 소리 하는 너네는 틀렸다. 강한 페미니즘적 기준에 따라 남도 판단하고 나도 판단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옳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과거에도 현재도 미래에도 나는 옳지 않을 수 있다. 도덕적으로 완전무결하지 않을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더 중요한 것은, 내가 옳은 방향을 향해 나아가려고 끊임없이 애쓰는 것이다. 귀를 열고, 마음을 여는 일을 멈추지 않는 것이다. 그 방향 안에 페미니즘이 있고 연대가 있고 공감이 있다. 그 길을 잃을 것 같을 때마다 이 책을 열어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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