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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번방 이후, 교육을 말하다 - 페미니즘의 관점
김동진 외 지음, 김동진 기획 / 학이시습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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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읽어야 할 책이라고 생각했다. 동시에, 누구나 읽기 어려운 책이라고도 생각했다. 모든 텍스트가 그렇듯 책은 독자에게 특별히 선택되어야 하고, 시간을 들여 읽어져야 하고, 읽은 내용이 머리와 행동에 남아 체화되어야만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나 이 책은 더 그렇다. 더 많이 읽어져야 하고, 더 많이 시간을 들여 생각해야 하고, 더 많이 행동을 변화시켜야 한다. 가볍게 읽을 수가 없다. 나는 이 책의 행보를 걱정하고 있다. 내가 누구에게 이 당의정을 강제로 입을 벌려 먹일 수 있을 것인가. 스스로 필요를 느끼지 않고서는 이 책을, 잠시도 딴 데 정신을 팔 수 없는 425페이지를, 요약조차 하기 어렵고 내용을 어디서부터 설명해야할 지 막막해지는 이 내용을 읽게 만들 수 있을지 모르겠다.

 

문제의식.

여성을 인간으로 보지 않고 남성을 위한 부차적인 존재, 2등 시민으로 보는 뿌리 깊은 편견을 어떻게 바꾸어 나갈 수 있을지, 생각이 변화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어떻게 하면 이 사회의 젠더 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나 자신과 내 주변 사람들에게 던질 수 있을지 정말로 생각하게 되었다.

교육이란 나 자신과 타인, 그리고 우리가 속한 사회에 대해 비판적인 질문과 성찰을 하도록 만드는 것이어야 한다. 그리고 그런 교육에서는 가르치는 사람이 아니라 배우는 사람이, 즉 스스로 변화할 힘을 가진 개개인이 교육 장면의 주체가 된다. 아이 둘을 키우며 나는 매일 현장 그 자체에서 살며 교육의 주체가 되고, 내 자식도 마찬가지이다. 서로에 대하여 적극적인 성찰이 일어나고 서로에게 영향을 받아 변화한다.

내가 괴로운 부분은 이런 것이다. 나는 젠더 문제에 대해 관심이 많으며 교육 이슈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이런 문제가 실생활에 왔을 때 내가 잘 해 나가고 있는지 확신을 갖기가 어렵다.

내 딸은 작년부터 머리를 투블럭 스타일로 자르고 다닌다. 이유는 그 아이 속에서 여러 갈래로 자라났겠지만, 본인 입으로 내뱉은 가장 큰 이유는 아빠와 머리를 세트로 하고 싶고, 까슬까슬한 느낌이 좋단다. 그런데 나는 정작 두려운 마음이 들었었다. 얘가 사람들에게 놀림 받거나 이상한 애로 낙인찍히면 어떡하지. 내가 여자 복장 남자 복장 경계가 없다고 너무 세뇌(??)를 시켰나 등등. 나조차도 세상이 주는 경계를 넘어서는 것이 어려웠다. 머리 하나 자르는데 왜 이렇게 용기가 필요한 것인지.

실제로 아이가 머리를 자르고 나서 여러 불편한 지점들이 생겼다. 생면부지의 수많은 행인들이 일부러 애를 불러세워서 너 남자냐, 여자냐?’ 물어본다든지(생식기의 차이를 당장 말하라는 건가?), 놀이터에 놀러 가면 아이들이 우루루 몰려와서 쟤 여잔데 머리 저렇게 잘랐대! 근데 또 치마 입었대!’하고 입방아를 찧는다든지, 나를 낳아준 여성과 남편을 낳아준 여성이 합동으로 왜 애 머리를 저렇게 잘랐냐, 남자 만들고 싶어서 그런거냐, 예쁜 애를 왜 저렇게 해놨냐하고 만날 때마다 일장 연설을 듣는다든지 하는 일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났다. 나는 그런 사소한 일상에서 오는 공격들에 솔직히 지쳤다. 그냥 머리를 기르게 만들어버릴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대체 여자 모습이 무엇이고, 왜 이렇게 중요한 것일까? 내 아이가 젠더 이슈에 대해 적극적으로 사고할수록 세상에서 요구하는 어떤 기준에서 벗어날 가능성이 높을 것이고, 그래서 받을 비판이 먼저 걱정되는 것은 내가 진정 페미니스트가 아니어서일까?

 

하지만 나는 안다. 단 하나의 페미니즘적 해결책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언제나 성장, 향상, 재고, 확장의 여지가 있다는 것을. 중요한 것은 성찰을 멈추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나는 안다. 성차별적인 사회 구조와 관습을 묵인하지 않는 작은 한 발걸음이 크다는 것을.

 

내 자식에 대해 좀 더 이야기해보자면, 결국 모든 것은 내 문제이고 기우였다는 것이다. 청소년들을 지켜줘야 하는 대상으로 여기는 지켜주지 못해 미안해라는 말이 불편한 것처럼, 나는 아이를 내가 지켜주어야 하고 모든 공격으로부터 막아주어야 할 연약한, 나와 대등하지 못한 존재로 여겼던 것이다. 문제가 생겼을 때 나보다 내 아이가 더 지혜롭게 대처했다. 모르는 할머니가 아이구~너 장군이네. 남자애라 힘이 좋네라고 하시며 칭찬하고 지나가면 할머니 뒤에 대고 메롱을 한다든지(물론 바람직하다고는 못하겠다, 그래도 속은 시원하다), 초등학생들이 몰려와 너 왜 여잔데 머리 짧아? 너 여자야 남자야?’하고 물어보면 나 여잔데?’하고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고 신나게 논다든지 하며 나보다 더 마음이 단단하고 대처가 유연하다.

 

, 나의 성생활에 대한 생각 전반을 돌아본다. 동의를 단편적인 말이 아니라 사회적인 맥락과 위계를 고려하는 개념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생각을 그 전엔 해본 적이 없었다. 나도 모르게 가해자중심으로 생각한 부분도 많았다. 안희정 사건 이후로 각성이 되었지만 무의식 속에서는 그래도 좀 조심했어야 하지 않나하는 마음이 있었다. 사회 문화적 환경에 따라 관성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알면서도 말이다.

 

교사로서의 나의 모습도 돌아본다. 교육 현장에서 내가 얼마나 권력을 갖고 있는 사람인지, 그 권력을 함부로 휘두르지는 않았는지 돌아본다. 물론 많은 권력을 휘둘렀다. 젠더 이슈에 눈 뜨고 나서는 내 생각이 바른 생각이라고 강하게 이야기했던 부분도 있다. 이런 내 모습이 아이들의 공감 능력을 상실하게 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반대 의견을 수용하는 것. 의견의 합치가 일어나지 않아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것. 비판을 비난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 다양한 의견의 장을 열어주는 것이 나의 진짜 역할이라 생각한다. 특히 공부 열심히 했다고 상으로 치킨을 시켜주며 많이 먹으라고 했던 것, 고깃집에 아이들을 데려가 배불리 먹이는 동시에 둥물권에 대해 교육했던 모순에 대해 뼈저리게 반성한다. 나는 얼마나 많은 폭력을 당연하게 행했던가.

 

이 책을 읽는 중에 발생했던 첫째 아이 일에 대해 쓰고 싶다. 요즘 한국 역사에 관심이 많기에 어린이 삼국유사 시리즈를 사주었다. 그 시리즈를 몇 주째 탐닉하더니 나는 커서 스님이 되겠다라고 선언했다. 삼국유사에는 도술을 부리는 여러 스님, 법사 이야기가 나오는데 스님들의 그 능력에 감복한 나머지 장래 희망을 스님으로 결정한 것이다.

잠이 안 오는 밤, 나는 내 아이의 미래에 대하여 다양한 시뮬레이션을 돌려 보곤 했다. 1.내 자식이 커밍아웃을 한다면 1)대처 2)지지 방법 2. 내 자식이 학생인데 임신을 했다고 한다면 1)대처 2)지지 방법 3. 내 자식이 학교를 그만두겠다고 한다면 1) 대처 2)지지 방법 등등을 머릿속에서 문서로 작성해본다. 그런데 그 수많은 미래 예측 시뮬레이션 중에 자식이 스님이 된다면이란 선택지는 없었다(우리 집은 4대째 독실한 기독교 집안이다). 예상을 너무나도 벗어난 자식의 발언에 나는 표정 관리를 못 했다.

으으으응, 그런데 스님 되면 너 소시지도 못 먹을 것이고 머리도 빡빡 깎아야 할 텐데……. 불경도 읽을 줄 알아야 하는데 괜찮겠어? , 모든 스님이 도술 부릴 수 있는 건 아닌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첫째는 머리 뿌리는 남기고 싶다며 스님이 되는 것을 재고하기로 했다. 하지만 자식이 한 선택을 일단 지지해주지 못하고 결국 내가 원하는 것을 먼저 말한 나의 이중성에 나 스스로 상처 받았다. 스님이 되고자 하는 자식의 열망은 하나의 성장 에피소드로 지나갈 수 있는 부분이었으나 앞으로 자식이 자라나며 내뱉을 수많은 말들, 내 생각에 반하는 선택들을 과연 나는 자식을 대등한 한 인간으로서 온전히 지지해줄 수 있을까. 표정으로, 태도로 자식을 배신하고 있지는 않을까. 아이들이 학교에서 배우는 것 중에 수업 시간을 통해 배우는 건 3퍼센트 정도고, 나머지 97퍼센트는 학교 공간과 구성에서 배운다는 말처럼 나의 행동 언어는 많은 것을 자식에게 이미 말하고 있다.

 

, 외모 평가.

 

내가 가르치는 학생은 거의 여성이다. 아이들은 수업 시작 전에 외모 이야기를 많이 한다. 머리 잘랐네, 티셔츠 새로 샀네, 너 운동화 예쁘다 등등. 얼마 전 중 3 아이들과 <거울 앞에서 너무 많은 시간을 보냈다>를 읽고 오랜 대화를 나누었다. 사람 만났을 때 가장 먼저 하는 이야기가 뭐냐. 왜 그런 말을 하는 것 같냐. 만약 성별이 달라진다면 대화 내용도 달라질 것 같냐고 질문을 던졌다. 끊임없는 외모 평가 속에서 여학생들은 자신의 외모를 스스로 검열한다고 고백하면서도 외모 칭찬을 받으면 기분 좋다고 이야기했다. 그게 잘못되었고 이상하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수업 시간이 길지 않아 일단 신체의 외형 말고 기능에 초점을 맞춰 내 팔아, 나를 철봉에 오래 매달리게 해 주어 고맙다라는 맥락으로 긴 글을 쓰게 하고 마무리했다. 그다음 수업부터 여자아이들은 적어도 내 앞에선 외모에 관련된 얘기를 하지 않으려 애쓰는 게 느껴졌고, 나도 외모에 관련된 이야기를 의도적으로 피했다. ‘맨날 여자만 깨닫고 여자만 달라지는구나하는 생각이 들어 짜증이 나기도 했지만 학생들의 회복 탄력성에 대해 감사하게도 되는 수업이었다.

 

 

나는 여자로 태어난 것을 원망하는 수많은 날들을 보냈다. 술에 취해 몸을 못 가누는 나를 자신의 자취방으로 끌고 갔던 선배와 아무렇지 않게 계속 같이 학교를 다녀야 했을 때도 그랬고, 결혼하고 나서 봤던 면접에서 결혼한 줄 알았으면 면접까지 안 올렸는데 잘못했네라는 노골적인 차별 발언을 들을 때도 그랬다. 임신했을 때도, 모유 수유할 때도, 경력 단절 후 재취업에 허덕일 때도 그랬다.

하지만 요즘 들어 곰곰이 생각해보니 나는 여자로 태어나서 정말 다행이다. 내가 남자로 태어났다면 그야말로 가부장제 수호 끝판왕이었을 것이라는 확신이 든다. 집에서도 나는 상당히 권위적인 엄마인데 남성 권력까지 지녔으면 어떤 태도를 취했을지 불보듯 뻔하다. 이제는 주께 감사한다. 내가 여성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연약한 타인을 이해하려 더 애쓰고, 그들의 자리에 함께 서서 연대하려 애쓴다. 귀를 열고, 배우려고 애쓴다. 그들의 아픔을 진심으로 공감하려 애쓴다. 이 모든 것은 내가 여성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들이었다.

 

나는 나의 페미니즘이 다만 성토대회에 그치지 않기를 바란다. 나의 경험이 지식으로, 학문적 정보로 연결되고 확장되기를 바란다. 나의 불완전성으로부터 누군가가 배우는 것이 있기를 바라기에 나의 연약하고 부끄러운 부분들도 글로 쓸 수 있기를 바란다. 우리는 서로에게 친절한 감시자가 되어야 하며, 건강한 친밀함을 공유하는 대상이 되어야 한다. 나는 좋은 어른이 되고 싶다. 희망을 잃지 않는, 함께 길을 찾아가는, 그런 엉뚱하고 단호한 길치가 되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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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르몬의 거짓말 - 여성은 정말 한 달에 한 번 바보가 되는가
로빈 스타인 델루카 지음, 황금진 옮김, 정희진 해제 / 동양북스(동양문고)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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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스럽다’ ‘여자답다’, ‘남성답다’ ‘남자답다라는 표현은 어떤 의미일까? , 언제부터 그런 의미로 기능하게 되었을까?

책머리의 “‘변덕이 심하고, 신경질적이고, 감정적이며, 까탈스럽다는 비난을 피하기 위해, 지금도 많은 여성들이 여성호르몬의 희생자를 자처한다. 그사이에 이익을 챙기는 자는 누구일까?”라는 글은 읽는 이로 하여금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예나 지금이나 여성의 인격과 행동은 늘 몸과 결부되었던 반면 남성의 인격과 행동은 정신과 결부되어왔다.여자라서 감정적이잖아라거나 여자라서 예민한가봐같은 말을 스스로 인지할 능력이 없을 때부터 수없이 들어왔다. 페기 오렌스타인의 신데렐라가 내 딸을 잡아먹었다에 따르면, 고대에서 중세에 이르기까지는 여자는 파란색, 남자는 빨강 혹은 분홍색 옷을 입히기가 권장되어왔는데, 그 이유는 여자는 이성적이지 못하고 감정적인 존재이기에 차분한 느낌의 파란색 옷을 입혔으며, 남자는 열정 또는 정열을 뜻하는 빨간색과 그 계열인 분홍색 옷을 주로 입혔다고 한다. 핑크는 여자색, 파랑은 남자색이 된 것은 근대에 이르러 유아 광고 사업 등을 통한 변화라 한다(그래서 신데렐라 등 옛날 공주들의 드레스는 주로 파랑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남자는 동물적이라 어쩔 수가 없어라든지, ‘남자는 원래 욕망에 충실하잖아, 그러니까 이해해라는 말도 많이들 하고 있으니 어찌된 결과일까?

성별은 태어날 때부터 정해져 있는 필연적인 것이 아니라, 원하는 대로 변경이 가능하며 끊임없이 바뀌는 정체성, 자아 표현, 지향으로 바뀐다. 인간은 잘 모르는 대상을 범주화시키면 그 대상을 이해하기 더 쉬워지기에 타인을 쉽게 범주화시킨다고 한다. 그 중 가장 쉬운 범주화가 바로 성별이다. 저 사람은 여자/남자니까 아무래도 그렇지, 저 사람은 한국/외국 사람이니까, 저 사람은 30/40대니까 그렇지 같은 사고방식이 모두 범주화를 통해 대상을 쉽게 이해하기 위한 방법이다. 사람의 뇌는 여러 가지 정보를 한꺼번에 처리하기 어려우므로, 마주하는 사람/사물을 범주화시켜 생각하기가 쉬운 것이다. 그런 범주화에 가려 타인을 만났을 때 그 사람이 어떤 생각을 하며 살아왔는지, 앞으로는 어떻게 살고 싶은지, 어떤 희망을 갖고 사는지 등 관계에서 훨씬 중요한 사실들에 접근하지 않고 쉽게 판단하려 하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모성 신화

엄마가 되면 여성에게는 여자다움의 기준이 더 요구된다. 바로 행복하고 만족스러우며 불평 없는 엄마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많은 여성이 이에 도전한 끝에 이 위치에는 도저히 도달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때로는 평소 자신에게 요구되는 책임, 특히 집안일을 면하기 위해 생리전증후군을 이용함으로써 그 압박감을 이겨내기도 한다. 남성들이 가사 분담률을 높여가고는 있지만 그중 대부분은 여전히 여성의 몫이다. 기분이 오락가락한다거나 짜증이 나고 혼자 있고 싶거나 불만을 표출하고 싶을 때 여성들은 위협을 느낄 수 있다. 왜냐하면 그런 행동들은 여성다움의 기준과 정반대되는 행동이기 때문이다. 이상적인 남성성은 뭔가를 하는 것(활동적이고 적극적)’으로 대표되는데 반면 이상적인 여성성은 뭔가를 하지 않는 것(나대지 않는 것, 상스럽게 굴지 않는 것, 과음하지 않는 것, 이기적으로 굴지 않는 것)’으로 대표된다. , ‘숙녀답게 구는 것이란 예의 바르고, 차분하고, 우아하고, (무엇보다도)군말없이 남들을 보살피고 남들을 위해 희생하는 것이다. 이런 이상형에 도달하는 데에는 엄청난 자기 규제가 수반된다.

심리학자들이 알아낸 바에 따르면 임신 중 여성의 심리적 안녕감을 좌우하는 예측 변수는 임신에 대한 신체 반응, 계획 임신인지 아닌지 여부, 아이 아빠와 맺고 있는 관계의 질 그리고 경제 상황이다.

 

산후 우울증

 

여러분이 지금까지 산후우울증에 관하여 들어본 말과 정반대되는 말일 수 있다는 건 나도 알지만 과학은 분명히 말하고 있다. 여성이 산후우울증에 걸리는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지만 호르몬 변화는 거기에 속하지 않는다고. 사람들이 산후우울증을 자꾸만 호르몬 탓으로 돌린다면 산후우울증이 불가피한 것이고 치료를 요하지 않는 것이라 여기게 될 것이다. 혹은 그토록 많은 새내기 엄마들이 필요로 하는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도움을 주기보다 약만 있으면 된다고 여기게 될 것이다. 이는 여성의 생식 인생에서 신화가 사실보다 극성스러운 나머지 진짜 문제에 손도 대지 못하는 또 하나의 이유다.

 

동안 숭배와 완경

우리는 우리를 동안으로 만들어줄 거라는 제품과 서비스를 구매한다. 특히 여성에게 젊다는 것은 아름답고, 신나고, 활발하고, 사회적 가치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반면 늙었다는 것은 지루하고 소외되고 주름이 자글자글하므로 못생기고 사회적 가치도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이러니한 것은 나는 지금 내 나이가 좋다는 점이다. 열정을 가직 일을 하면서 개인적 관심사와 욕구에도 전념할 수 있는 시기다. 그런데도 젊어 보이고 싶다는 욕망은 떨칠 수가 없다. 나는 어떻게 내 노년을 받아들일 것인가? 타인을 첫눈에 매혹시키거나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외양을 70대에 가질 수는 없을 것이다(현재 앤터테인먼트 사업의 추이를 살펴보면, 여성이 사회적인 아름다움의 절정을 드러내는 시기는 20대에서 10대 중반, 이제는 초반으로 점점 하향하고 있다.). 타인에게 인정받고 주목받고 싶은 인간의 욕구를 어떻게 다스리며 살아가야할까? 나이 든 여성의 가치하락에 대해 미디어에서 계속하여 떠들 때 나는 어떻게 자아가치감을 유지할 수 있을까? 그리스, 멕시코, 인도 같은 국가의 여성들은 일반적으로 완경에 대해 긍정적인 관점을 가지고 있었는데 특히 나이 든 여성이 크게 존중받는 곳일수록 그러했다. 완경기에 접어든 여성들은 남들의 호감을 사는 것보다는 스스로 진국이 되고 생산성을 높이는 데 더 신경을 쓴다. 하지만 그런 순간이 60대에 이르러 갑자기 짜잔! 하고 오는 것은 아닐 것이다. 살아가는 매 순간을 그저 흘려보내지 않고 자신에 대한 깊은 고찰을 해 온 사람만이 그런 경지에 이를 수 있다. 인생의 각 단계에서 집중할 대상이 변하는 것은 호르몬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이는 발달 단계상 적절한 변화인 것이다. 그러나 생물학적으로 아주 조금이나마 운명 지워진역할에서 벗어나려고 하면 여성들은 도처에서 저항에 직면한다. 그런 이타적인 보살핌에 익숙했던 가족과 배우자, 때로는 고정된 성 역할을 앞으로도 쭉 완벽하게 이행하려는 다른 여성들의 비난까지. 완경 이후 삶에서조차 우리 자신과 우리의 자리를 재고하기란 정말 어렵다.

 

나는 왜 이렇게 우울하고 짜증이 나는가?”

 

자식을 낳고 난 이후, 나의 삶은 오직 이후만이 있다. 가치관이 달라졌으며,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이 완전히 달라졌다. 임신 및 출산 후 직장을 그만두고 가정 주부또는 엄마로 어떻게 살아가야할지 몰라 끊임없이 자책하고 괴로워했다. 삶의 순간 순간 우울은 쉽게 찾아왔다. 남들처럼 아침 상을 멋지게 차리지도 못했으며, 집을 깨끗하게 치우지 못한다는 것 등 이상적인 여성 주부의 삶에 미치지 못해 괴로워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산후 우울증이 너무 심해라는 말로 내 요동치는 감정들을 이름 붙였다. 그렇게 하면 많은 시간 마음이 가라앉고 괴로운 원인을 내 자신에게도, 타인에게도 납득시키기 쉬웠다. 하지만 내 우울의 이유는 산후 우울증(정신병) 때문이 아니었다. 임신 및 출산 후 너무나도 달라진 상황(실직, 엄마 역할, 살림을 책임지는 가정 내 역할 변화, 남편의 잦은 야근, 이상적인 여자상에 대한 압박 등) 때문이었다. 세상은 자식을 올바르게 양육하는지 여부를 항상 나에게 점검했다. 하지만 답을 몰랐다. 그래서 자식 양육과 관련하여 많은 책을 읽고 많은 사람들에게 조언을 구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현실에서는 내 자식이 이라는 부분이 참 많은 것을 좌우하는 것이었다. 딸이니까 이렇게 입혀, 딸이니까 이렇게 키워, 딸이니까 이런 행동을 하는구나 같은 이야기와 조언들을 끊임없이 들었다. 그런 상황에 직면할 때마다 내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되었다. 나는 어떻게 자라왔으며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이 세상에서 여성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지, 내 삶의 결정들이 내 자식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인지. 그런 생각을 하게 될수록 결국 답은 내 자신이 온전히 서야 타인에게도 올바른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거였다.

나의 짜증이나 우울, 화나는 감정들이 생리주기나 출산 때문이 아니라 내 상황과 제도적인 문제들이 영향을 미친 부분이 있는 것은 아닌지 매 순간 직면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내 삶에 온전한 책임을 지는 것은 나 자신이며, ‘호르몬때문이 아닌 나의 우울이나 걱정의 진짜 원인을 찾아낸다면 결국엔 이를 해결할 방법 또한 찾기 쉬울 것이며 내 자신의 행복에 좀 더 가까워질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이는 타인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다.

화를 내도 되고, 화를 냈다고 해서 사과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이미 어려운 일들을 척척 해내고 있다. 끊임없이 바른 여성의 삶을 살고 있는지 자기검열을 했던 과거에서 벗어나, 숨겨야 했던 여성들의 삶을 드러내고, 자신의 생각을 자유롭게, 함께, 많이 나누고 싶은 마음에 이 책을 선택했다. 우리에게 그런 이야기의 장이 계속해서 열리길 간절히 바란다.

 

생물학적 본질주의가 위세를 떨치는 한은 누구도 인간이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온전히 체현할 수도, 표현할 수도 없다.

 

우리의 의심은 정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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