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식회사 히어로즈
기타가와 에미, 추지나 / 놀 / 2017년 9월
평점 :
절판



주식회사 히어로즈_기타가와 에미
출판사_다산북스




누구의 인생이든, 평생에 히어로 한 명쯤은 존재한다.
어, 어, 어? 하는 사이 휘말려 나도 모르게 활약하게 된다.
덮어놓고 재미있는 남의 인생 응원스토리!

     
 <주식회사 히어로즈>는 개인적인 사정으로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던 슈지가 주식회사 히어로즈에 입사하면서 벌어지는 재미있고 감동스러운 이야기였다. 
       
‘아무런 재미도 없는 인생이었어.’
90년이라는 엄청난 세월을 거쳐 온 할아버지는 무슨 생각을 하며 그렇게 말했을까. -p.33
 
슈지는 개인적인 사정으로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급한 대로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오랜만에 할아버지 병문안을 다녀오면서, 매미에 얽힌 할아버지와의 옛 추억에 잠긴다.
 
그러던 어느 날, 같은 편의점 직원 알바생인 다쿠로부터 수상한 아르바이트를 소개 받게 된다. 구인 광고에는 ‘당신도 히어로가 될 수 있다!’라는 커다란 글자가 있었다. 딱 봐도 수상한 문구였지만, ‘히어로 제작’이라는 업무와 함께 안내된 설명을 보고는 ‘히어로 코스튬 제작 따위의 업무’로 생각하고 나가기로 한다.
 
그리고 첫날, 그가 맡은 일은 그가 평소 좋아하던 만화, ‘톤 앤 톤’의 작가인 도조 하야토를 히어로로 만드는 일이었다.
 
 
“만화의 내용에 관한 협력은 프로 편집자가 합니다. 그 부분은 제가 나설 부분이 아닙니다. 제 업무는 그 밖의 서포트로 도조 선생님을 ‘히어로로 만드는’ 일입니다.”- p.59
 
"도조 선생님께서 재미있는 만화를 그려주셔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라면 저희는 뭐든 합니다.“p.103
     
그 ‘히어로로 만드는’ 일이라는 것이 참 아리송하다. 히어로가 되고 싶다고 의뢰한 사람을 돕는 일인 건 확실한데, 그렇게 만들어내는 히어로가 슈퍼맨이나 배트맨과 같은 그 ‘히어로’가 아니다. 하지만 그래서 더 재미있다. 왜냐하면 ‘누구든’ 히어로즈에 의뢰하는 사람은 히어로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재미있는 만화를 그리고 싶은 작가를 히어로로 만들기 위해 만화 제작을 위한 모든 서포트를 한다. 그런데 그 서포트라는 것이, 독특한 스트레스 해소법을 받아주는 것,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들이다. 혹은, 원하는 배역을 얻기 위해 평범한 삶을 느끼고 싶은 여배우를 위해 ‘펑범한 생활’을 느끼게 도와준다. 망한 나사 공장 직원들을 도와 유명한 파이 가게를 열도록 만들어주었다.
 
어쩌면 사소한 일들이지만, 누군가에게는 중요한 일들이고, 또 사소한 일들이기에 더욱 공감이 갔던 일화들이었다. 또, 문득, 담담하게 오는 위로 같은 문장들이 가슴을 울리는 작품이었다.
 
 
처음에는 수상한 회사 아르바이트에 엮이면서 벌어지는 다소 유쾌하고 독특한 이야기 모음이라고 생각했는데, 담백한 문장들 속에서 은은한 감동이 나오는 작품이었다.

 
"산다는 건 어려운 일이네요.“
“사는 건 아주 쉽답니다.”

“하지만.....”
 
“슈지군. 숨을 한번 들이쉬어보세요.”
“숨을? 이렇게요?”
나는 코로 후욱, 하고 소리를 내며 숨을 힘껏 들이쉬었다.

 
“그다음에 뱉어보세요.”
시키는 대로 이번에는 입으로 하아, 하고 숨을 뱉었다.
“당신은 지금, 살아 있습니다.”
미치노베 씨는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보세요, 사는 건 아주 쉬운 일이지요?”
그러고는 씩 웃었다. - p.109

 
 
갈수록 살기 힘들다는 생각이 더욱 부쩍 들었다. 한 고비를 넘기면 새로운 고비가 나오고, 또 고비가 나오고, 그러더니 겨우 다 올라왔나 했더니 이제 산맥이 보인다. 넘어야 할 고비가 끝이 없구나, 싶은데 달리 갈 곳이 없다. 이렇게 살려고 그 고생을 하고, 해야 했고, 앞으로 더 해야 하나 싶고, 이게 사는 건가 싶었다. 그런데 이 문장을 만난 거다.
 
사는 것, 저 문장처럼 훈훈하게만 답을 낼 수 없지만, 요즘 괜히 울컥 울컥하고, 아무 것도 하기 싫을 때면 깊게 숨을 내쉬어 보기 시작했다.
     


 

 

"만약 성공으로 가는 지름길이 있다면 방법은 딱 한 가지일 겁니다.“
“뭐죠?”
“멀리 돌아가는 겁니다.”-p.176


    
성공이란 무엇일까, 행복이란 무엇일까. 슈지와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보면서는 ‘행복’에 대한 생각을 하고, 히어로 업무를 하는 슈지를 보면서는 ‘성공’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좋은 성적을 받고, 명문대에 진학해서 좋은 직장을 갖는 걸까, 아니면 돈을 많이 벌어 부자가 되는 걸까. 자신만의 사업을 갖는 것, 어떤 분야의 전문가가 되는 것. 아니면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가정을 이루는 것?
 
성공과 행복에 대한 정의가 너무나도 다르고 다를 수밖에 없는데, 생각보다 나만의 성공과 행복을 정의하고, 그것들을 강단 있게 지키기 힘든 것 같다.
 
 
"모든 사람이 누군가의 ‘대타’가 될 존재임과 동시에 모든 사람이 ‘유일무이’한 존재이기도 하다고 봅니다.“-p.175
    


그러다보니 대게 꿈도, 행복도, 성공도 그 기준이 비슷비슷해지는 건 아닐까 싶기도 했다. 당연히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많지만, 내가 강단이 없는 편이라서인지, 더욱 더 ‘인생의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는 것에 집착하고, 항상 누군가와 비교하게 되면서 더 힘들지 않았나 싶었다.
 
난 유일한 사람이지만, 동시에 충분히 누군가의 대타가 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건, 조금이라도 방심하면, 바로 내 자리를 빼앗긴다는 뜻이니까.
 
그런 생각 때문에 더 타인을 의식하고, 세상의 기준에 집착하고, 그래서 더 사는 게 힘들었던 것 같다. 모 작품처럼 ‘화성에 가서 살지 않는 한’, 이 고민은 끝나지 않을 것 같지만.
    


 

아무런 재미도 없는 인생이었어.
나는 할아버지의 나이가 되었을 때 어떤 일을 떠올릴까.
옛날에는 좋았다고 생각할까. 아니면 더없이 평범한 인생이었다 싶을까. 어쩌면 옛날에는 너무 괴로웠으니 차라리 지금이 제일 행복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대체 어떤 인생이 ‘정말 행복한 인생’이라 할 수 있을까.-p.193 
    


 

행복한 인생에 대해 고민하는 슈지에게 할아버지는 자신의 인생은 재미없었지만, 행복한 인생이었다고 한다.
     


 

"할아버지 인생은 어떤 인생이었어?“
할아버지는 미소 지으며 말했다.
 
“아무런 재미도 없는 인생이었지.”
지난번과 똑같은 말을 했다.
 
“일만 죽어라 하고, 사치도 한 번 못부렸어.”
 

그래도 말이지, 하고 할아버지는 말을 이었다.
 
“정말로 행복한 인생이었어.”
그렇게 말하며 내가 사 온 쿠키와 사과를 번갈아 먹는 할아버지는 정말로 행복해 보였다. -p.295


     
사랑하는 손자와의 추억을 끌어안고, 사랑하는 손자가 사준 쿠키와 사과를 맛있게 먹으면서 행복하다고 말하는 할아버지의 말은 가슴 한 켠을 먹먹하게 만들었다. 나도 먼 훗날, 지금 힘든 일도 웃으면서 그땐 그랬지, 하고 말할 수 있을 날이 왔으면 싶었다.
 
 
이 외에도 좋은 문장들이 너무 많았던 <주식회사 히어로즈>
    


"슈지 씨가 신용 받지 못한 것이 아니에요. 슈지 씨 주변 사람들은 다들 생각하기를 포기한 거에요. 인간은 휩쓸리는 동물이죠. 생각하기를 포기하고 의견이 많은 쪽으로 흘러가요. 그러는 편이 편하니까요. 슈지 씨의 예전 애인도 상사도 다들 휩쓸린 거에요. 인간은......“
 
미야비는 뭔가 심키듯이 말을 끊더니 잠시 입을 다물었다.
 
“인간은 생각하기를 포기한 순간, 인간이 아니게 됩니다.” -p.140
 
 
한번쯤 무리에서 겉돌던 때, ‘내가 문제일까?’하고 고민했던 적이 있었다. 어울리지 못한 내가 잘못한 걸까, 왜 나는 언변이 좋지 못한 걸까, 책을 읽고, 말 잘하는 사람들을 유심히 관찰하고 배워보려 해도, 무리에 잘 어울리지 못하던 일로 우울해 하던 적이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 잘못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다른 조직이나 팀에서는 별 탈 없이 잘 지냈던 걸 보면 말이다. 그런데 그 순간만큼은 내가 사회 부적응자가 된 것 같아 속이 쓰리고, 사회에 나가기도 전에 이미 패한 것만 같은 무력감을 느꼈던 기억이 난다. 다행히 지금은 아닌 걸 알지만, 그래도 우울한 기억은 어쩔 수 없었는데, 그때의 슬픔을 위로 받은 기분이 들었다.

 
“인간은 항상 누군가와 엮이며 살아갑니다.”-p.270


    
누군가가 나의 히어로가 되듯, 나 역시 누군가의 히어로 일지도 모른다. 나는 스스럼없이 툭 던진 말이 엄청난 의미로 다가갔을지, 그건 당사자가 아니고서는 모를지도 모른다. 그리고 우리는 그렇게 서로의 히어로가 되어 엮여 살고 있다.
 
인간이지만 인간답게 대우받고 살기 힘든 현실이지만, 상상 이상으로 얽히고설킨 인연의 매듭 속에서 나도 모르는 사이 능력을 발휘하고 있었다면. 훗날, 나도 조금은 행복한 삶을 살았다고 회고할 수 있을까.
 
슈지도, 이치노베씨도 보고 싶었다던, 시가를 입에 물고 의자에 앉아 있는 날개달린 남자를, 재능이라는 이름의 그 남자를 나도 빨리 만나보고 싶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자유롭게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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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의 공부지능 - 3세부터 13세 부모가 꼭 알아야 할 공부 잘하는 머리의 비밀
민성원 지음 / 다산지식하우스(다산북스)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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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의 공부지능>은 아이들의 학업성취도 뒤에 어떤 요인들이 작용하는지 분석하고, 지능 개발을 높이기 위해서는 어떤 것들이 필요한지 정리해보는 아이지능개발서였다.

그리고, 핵심은 높은 IQ와 높은 학습지능은 서로 필요충분조건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IQ가 높은 아이들 대부분이 공부를 잘하겠지만, IQ가 낮다고 공부를 못하는 것도 아니고, IQ가 높다고 꼭 공부를 잘하는 건 아니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저자는 '공부지능(Study Intelligence)'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공부지능이란, 지금까지 우리가 흔히 들어왔던 '공부'의 개념과 학업성취나 성공을 예언하는 지수인 'IQ'를 융합한 새로운 기념이다. 즉, IQ만으로는 예측할 수 없었던 부분을 보완하여 학업성취를 좀 더 정확하게 예언할 수 있는 새로운 '예언 지수'라고 할 수 있다. - p.4

공부지능은 IQ와 다르다. 앞으로 자세히 소개하겠지만, 공부지능은 간단히 말해 IQ뿐만 아니라 EQ, 집중력, 창의력을 모두 아우르는 지능이라 할 수 있다. 결국 이 4개 영역의 지능이 골고루 발달한 아이들이 공부를 잘하는 것이다. -p.10
 


즉, 선천적으로 주어진 지능으로 꼭 학업 성취도가 판가름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공부를 시작하기 전부터 낮은 IQ 때문에 낙담할 필요는 없다는 거다. 앞 장의 서울대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연구 결과는 이를 뒷받침 해준다.
 


십여 년 전 서울대학교가 자체적으로 서울대 학생들의 IQ를 검사한 적이 있다. 그 결과가 무척 흥미로웠다. 검사 결과 당시 재학생 중 약 10퍼센트가 IQ 100이하였던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머리가 평균치에 못 미치는데도 서울대에 갈 수 있을 정도로 공부를 잘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좋은 사례다. -p.22
 


물론, 저 통계는 서울대생 전부를 대상으로 했다는 말은 없다. 그러니 통계만 믿고 전체가 그렇다고 여기는 우를 범하면 안되겠지만, IQ가 낮다고 해서 아주 공부를 못하는 것은 아니라는 걸 증명해주는 사례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편, 조금 더 읽다보면 SQ(공부지능)=IQ(인지능력)+EQ(정서지능)+a(집중력과 창의력)이라는 공식이 나온다. IQ는 암기력, 처리속도, 어휘력, 연산력과 같은 인지능력을, 정서지능은 자기 통제력, 인내력, 긍정적 자아(자존감)을 의미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부가 요소(a)인 집중력과 창의력 역시 IQ와 EQ와 연관되어 있으며, 집중력은 기억력과 자기통제력으로, 창의력은 유창성, 융통성, 개방성, 모험심 등. 마찬가지로 IQ와 EQ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요인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저 이론과 중간 중간 배치된 일화를 보고 있노라면, 학창 시절에 공부를 잘하던 친구들이 떠오른다. 공부 잘하는 친구들은 성적 관리는 기본이고, 교우 관계도 좋았고, 항상 자신감에 넘쳤던 것 같다. 일반화 시킬 수는 없지만, 기초 인지능력의 발달이 이뤄진 후부터는, 학습 능력 이상의 다른 요인들이 작용하는 것은 확실한 것 같다.

그런데 읽다보면 몇 가지 의문이 들기 시작한다. 은연중에 계속해서 'IQ가 낮아도 공부를 못하는 건 아니다.'라는 이야기가 묘하게 반복되는 것 같고, 그러다 '그러니 노력하면 된다.'와 같은 당연한 말이 약간의 사례와 함께 구체적으로 나열된 것 같기 때문이었다.

그러다보니, 결국 '공부 말고 다방면으로 발전시켜야 한다.'를 세세하게 연구한 결과를 담은 책인가. 싶을 쯤. '적기 교육'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서부터 조금 흥미로워졌다.
 


조기교육이 꼭 나쁜 것은 아니다. 일찍 시작할수록 효과적인 것이 분명히 있다.
...... 적기이면서 조기일 때는 교육의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지만, 적기를 고려하지 않고 무조건 조기교육을 하면 자칫 역효과가 날 수 있다. 공부지능 중 한 축을 담당하는 집중력의 경우 적어도 만 6세는 되어야 성숙해지기 시작한다. -p.62~63 <조기보다 적기가 더 중요하다>

2014년 미국 국립과학원 회보에 흥미로운 연구 결과가 실린 적이 있다. 각 능력별로 정점을 찍는 시기를 조사한 것인데, 사람들의 예상을 뒤엎는 내용들이 제법 많았다. ...... 사실 이 연구 결과에 많은 사람이 관심을 보인 이유는 나이가 많이 들어서도 계속 발달하는 능력이 존재한다는 데 있다. 대부분의 능력이 최소 20대가 지나면 퇴화한다고 알고 있던 사람에게 40~50대 이후에도 더 크게 발달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새로운 사실은 충격과 희망을 동시에 느끼게 했다. -p. 67~78 <능력별로 정점을 찍는 시기가 다르다>
 


서로 다른 능력, 각 영역별로 발달할 수 있는 최적의 시기가 있다는 건 정말 흥미로운 내용이었다. 계속해서, 연구 결과에 따르면, 인지능력은 태어날 때부터해서 초등학교 때 가장 활발하게 발달한다고 한다. 그리고 18세, 즉, 우리나라로 따지면 고2 때 인지능력이 정점을 찍는다고 한다. 그러니 결국 본격적으로 공부를 시작하는 중학생 때부터 고2 때까지 꾸준히 공부를 해야한다는 말이 된다.

물론 빨리 시작하는 게 늦게 시작하는 것보다 좋을 수도 있다. 하지만, 수능이 가까워질 무렵, 실태조사로 함께 나오는 수포자나 공부에 회의감을 느끼는 아이들을 다룬 뉴스 기사를 보고 있으면, 적기 교육이라는 단어가 갖는 함의가 크게 다가온다.

이어서 나오는 이야기는 '뇌 발달'과 관련한 적기 교육에 대한 이야기였다. 여기서는 '피아제'의 인지 발달 이론이 함께 나오는데, 한창 공부하는 부분이라 더 반가웠다.

피아제는 인지 발달 단계를 4단계로 나누고 있는데, 감각운동기(0~2세), 전조작기(2~7세), 구체적 조작기(6-7~11~12), 형식적 조작기(11-12~성인 초)로 나누고 있다. 책에서는 각 인지 발달 단계에 따라 뇌의 어느 부분이 발달하는지를 덧붙여 설명하면서, 각 단계에서 필요한 학습 활동을 함께 언급해주고 있었다.

한 예로 감각 운동기만 조금 언급하면, 0~2세 사이에는 뇌가 가장 빠르고 활발하게 발달하는 시기로, 뇌의 전 영역이 고루 발달하면서 IQ와 EQ의 바탕이 형성된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전 영역이 고루 발달하게 도와줘야 한다고 한다.

가장 좋은 방법은 '오감 체험'인데, 옛날에 <슈퍼맨이 돌아왔다> 초창기에 이휘재가 서언이 서준이를 데리고 가서 밀가루 반죽 체험(?)을 하게 해줬던 일화가 떠올랐다. 또, 이 시기에 한창 모유 수유가 이뤄질 텐데, 이때가 아기와 부모와의 '애착'이 형성되는 시기이기 때문에, 모유 수유도 EQ 발달에 영향을 줄 수 있다고도 한다.

이외에도, 하루 30분씩 꾸준한 운동은 전두엽 발달에 도움이 된다는 것, 충분한 수면이 집중력을 높일 수 있다는 것, 과잉행동장애(ADHD)가 있는 아이들은 수면 장애는 없는지 확인해 봐야 한다는 것 등..... 은연중에 알 것 같지만, 바쁘게 사느라 놓치고 살았던 공부 지능과 관련된 생활 습관이나 상식 등이 연구 사례와 함께 언급되어 있었다. 
 
이후 부터는 공부 지능의 개발 단계, 그리고 IQ 검사 방법의 해석과 IQ에서 다루는 인지 능력을 어떻게 발달시켜야 하는지를 살펴본다. 그러면서, 왜 우리가 학교에서 수학 문제를 풀고, 시를 외워야 했는지. 그런 이유들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을 갖는다. 그리고 EQ와 관련해서는 '자기 절제'를 잘하는 아이들이 '학습지능'도 높다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마시멜로 이야기'가 떠오르는 대목이었다.

또, 아이가 어떤 지능이 발달해 있는 지를 알기 위해서는 아이의 노력뿐만 아니라, 이를 발견하기 위한 부모의 관심과 환경 조성 노력도 필요하다는 이야기도 함께 언급되어 있었다.


책에 나와있는 것 말고도, 인지 능력에 대해서는 학자별로 다양하다. 우연히 오늘 공부하다가 다시 보게되었는데, 인지 능력을 두 가지 요인으로 나눈 학자부터, 가드너처럼 9가지 다중지능을 언급한 학자도 있었다. 

이런 연구결과들을 읽을 때면 흥미롭다. '혹시, 이중에 내가 눈치 치재 못한, 내 특기 분야도 있지 않을까?'하는 일말의 기대 심리도 있고, '나중에 아이를 낳게 된다면 참고해야지.'라는 생각도 있기 때문이다. 낳을지는 미지수지만, 책을 읽으면서 얻은 가장 큰 정보는 '적기 교육'이었다. 기초 학습 능력은 학교든, 학원이든, 기타 교육 기관에서 스스로 배워나가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단지, 아이들이 아직 인지 능력이 제대로 발달하지 못한 영유아기의 발달 과정에서는 부모가 일정 부분 도와줘야 하는 일이나 조성해야 할 환경이 있을 텐데, 그 시기에 필요한 것들을 조금이라도 알아두면,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다시 책 앞으로 넘어와서,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었다. 바로 강남 학군을 저자가 나름 분석한 내용이었다. 그 전에, 책을 읽으면서 확인 사살을 당한 것이 있었는데, IQ는 유전이라는 것이다. (언젠가는 태어날지도 모를 미래의 자식에게 벌써 미안해진다.) 그런데 IQ말고도 유전되는 것이 열심히 노력하는 EQ라고 한다. 
 


같은 강남이라도 지역에 따라 거주하는 사람들의 특성이 다르다. 주로 전문가들이 사는 지역이 대치동과 서초동이고, 전문가가 아니면서 부자들이 사는 지역이 청담동이다. 경제적 수준으로는 청담동이 더 높지만 명문대 진학률은 청담동 고등학교보다 서초동과 대치동이 더 높다. 그 이유는 대치동과 서초동에 어떻게 전문가들이 모여들었는지 살펴보면 알 수 있다.-p.46<높은 명문대 진학률을 만든 진짜 비결_확고한 교육 의지가 경제력을 뛰어넘는다>
 


즉, 타고난 지능에 열심히 공부한 노력(EQ)이 그대로 이어져, 아이들의 높은 대학 진학률을 높일 수 있었다는 이야기였다. 이 역시 일반화할 수는 없지만, 틀린 말은 또 아닌 것 같았다. 아무래도 가족들이 공부하는 사람들이라면 자연스럽게 그쪽 분야에 가까이 지낼 수밖에 없지 않을까 싶다.

그러니 난 (과연 생겨날지 모르겠지만) 내 아이가 '천재'라든지, '영재'라는 생각은 눈곱. 아니 티끌만큼도 없다. 그저, 막상 '내 아이는 천재야'라는 '부모 콩깍지'가 쓰이면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다. 다만, 아이가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까지 필요한 경험을 쌓는 그 적기에, 함께 있어주고 싶다.

이건 우리 어머니도 매번 아쉬워하는 부분인데. 어렸을 때 바빠서 함께 돌아다니지 못한 게 아쉽다는 이야기를 종종 하시고는 했기 때문이었다. 기왕이면 아이에게 도움이 되는 쪽으로, 그게 교과서적인 학습을 위한 것이어도 좋고, 꼭 그렇지 않더라도, 아이가 살아가는데 필요한 능력을 기르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들었다. 기왕이면 그게 행복하면 더 좋겠다.

멘토링을 할 때면, 공부하기 싫어서 매번 딴청 피우고, 놀자고 하는 아이들에게 애써 하는 이야기가 있었다.
'문제 하나 더 맞추면 당연히 좋지, 근데 나중에 너희들이 뭐가 될지 모르잖아?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서는 어려워도 배워야 할 것들이 생길 수 있어. 그때 지금 꾹 참고 공부한 게 도움이 될지, 그건 아직 모르는 거야.'

벌써 3년이 지나가니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저런 이야기를 했던 것 같다. 답이 틀려도 풀려고 노력하면서 기른 인내심 자체만으로도 나중에 도움이 될지 모른다는..... 그런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 같다. 책을 읽고난 지금 다시 생각해보니 EQ랑 관련된 이야기 인 것도 같다.

무튼, 그렇게 싫어했던 수학이 인생을 살아가는데 어쩌면 큰 도움이 되는 학문이었다는 점이 또 가장 큰 충격이었다면 충격이랄까. 그리고 나이를 먹어서도 계속 발달하는 능력이 남아 있다는 것은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인가.

이제 저 책에 담긴 연구 결과와 이론을 적용할 나이가 훌쩍 지나버려 씁쓸하기도 하지만, 흥미로운 정보와 저자 나름의 생각들이 재미있었던 책이었다.  

<본 서평은 '다산 북클럽 나나흰 7'로 활동하면서 해당 도서를 무상으로 지원받아 직접 읽어본 후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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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울 수 있을 때 울고 싶을 뿐이다
강정 지음 / 다산책방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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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내자는 제안을 받은 건 5년여 전이다. 처음 기획은 '자전적 글쓰기'였다. 시를 쓰면서 살게 된 계기, 그러면서 깨닫게 된 것들, 그리하여 시를 쓰고자 하는 독자들에게 전해줄 만한 이야기들을 책으로 엮어보자는 제안이었다." - p.7 프롤로그

저자가 자전적 글쓰기를 기획하면서 세상에 나온 <그_저 울 수 있을 때 울고 싶을 뿐이다>. 프롤로그 이야기처럼, 저자가 지난 인생을 회고하며 집필한 글들로, 약간은 중구난방에 의식의 흐름대로였지만, 솔직함이 담긴 잔잔한 에세이였다.

사실은 제목만 보고서는 작가가 살아오며 느꼈을, '울고 싶은 순간들에 대한 감상'이 모인 글인 줄 알았다. 예상을 완전히 깬 에세이에는 저자의 출생부터 성장 과정, 그리고 취미부터 살아오면서 포착한 삶의 순간순간에 대한 자잘한 감상들이 곳곳에 포진해 있었다.

에세이니까. 달리 글 하나하나에 대한 주제같은 건 생각하지 않고 읽으려고 했는데, 이상하게 읽으면서도 내가 무얼 읽고 있지?..... 라는 생각이 들도록 정말 '의식의 흐름'에 따라 쓰여진 글을 읽는 기분이었다. 내 일기를 읽는 사람들이 이런 기분일까 그런 생각도 들었다.

이상하게 그런 부분에서 또, 친근해져서 글을 읽기도했고, 공감가는 문장들이 많아서 집중이 끊기다가도 읽고, 또 끊기다 읽고, 그랬던 것 같다.

아픈 줄 모르는 것도 아픔의 원인이지만, 아픔을 아는 것 역시 아픔의 시발(始彂)이다.
-p.21 <한의원 방문>


그런데 작가님이 시를 쓰셨다고 해서인지, 비유적 표현들이 종종 나왔는데, 어떤 부분은 감탄하면서 읽은 반면, 어떤 부분은 난해하기도 했다. 가령,

이 글은 매우 개인적이고 불합리하고 편협하기 그지없다. 내게 만약 시와 음악의 트랜스라는 설정이 가능하다면 그것은 어떤 내재적 접합이나 교통이 아닌 항시적 분열과 잠재적 합일의 양상으로 흐를 것이기 때문이다.
- p.87 <나는 왜 모조 라이진 씨에게 다시 열광하는가>


서울 삶이 인생의 가장 중요한 터닝 포인트이고, 학창 시절에는 록음악에 열광하고, 스물 둘의 나이에 예상하지 못했던 시인이 되어 이제 마흔을 바라보던 작가. 서울의 모습에 놀라는 모습이라든가, 사춘기에 빠져든 음악에 열정을 느끼며 보여준 순수와 허세의 줄타기라든가, 그런 이야기들은 꼭 우리들 성장 이야기 같아서 공감가기도 했지만,

아. 역시 시인의 글은 어려웠다. 저번에 읽은 <은유의 힘>에서 느낀 그때의 감탄과 탄식의 사이를 오가는 글이었다.

그리고 역시나, 시인이 산문을 쓰면 이런 느낌일까, 라고 생각하게 만든 부분은 작가가 프랑스에 여행가게 된 일화였다.

좌석 모니터로 살핀 하늘은 구름의 끝없는 행렬, 고도 삼만 팔천 피트라는 게 사람을 얼마나 작가도 첨예한 미물로 만드는지 새삼 실감했다.

천공의 잠은 지상에서의 오랜 나날들을 꿈으로 되돌리고 있었다. 깨기 싫었고, 일체의 속도감도 느껴지지 않는 비행기 안이 수백 명을 집단으로 배태한 우주의 자궁 같았다. 깨고 나면 마주칠 세상이 두렵고 아스라했다. 곧 도달할 그곳이 다른 나여서가 아니었다. 고백건대, 내가 내가 아닐 것 같아서였다.
-p.108-109 <내 어둠이 당신에게 빛의 소리로 울릴 수 있다면>

최근 외국에 다녀와서 였을까, 이 부분을 읽는데 미묘하게 공감이 가면서도 엄청난 거리감이 느껴졌다. 내 일기 속 기내 속 나의 감상은 '두려움' 뿐이었는데. 물론 이륙하면서 본 미니어처 같은 지상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서, 난류에 덜덜 떨면서, 정말 우리는 한낱 미물이구나도 싶고, 꿈같기도 했지만.

베토벤의 음악을 들으며 공기의 파동같은 건 느껴보지도 못했다. 옥상 달빛 노래를 들으며 심호흡하고 있었고, 비행기를 타며 삶의 강렬한 의지를 느낀 경험은 더더욱 생각치도 못한 것이었다. 무엇보다 죽기 싫어서 떨고 있던 자신만 마주했을 뿐.

역시 같은 상황도 은유적으로 표현할 수 있다는 건 작가들이 지닌 재능인걸까. 내가 쓰면 허세같았을 글이 문학 작품처럼 보여서 감탄의 연속이었던 것 같다.

울음에 대한 이야기는 책의 중반에 가서야 나오지만, '울음'이라는 행위를 분석하듯 그리고있는 저자의 사색이 펼쳐져 있었다.

다시, 아기 울음 또는 고양이의 소리 파형이 떠돈다. 덩달아 따라해보지만, 여전히 엉성하다. 음역과 음색을 따져본다. 분명히 여성적이다. 그러면서 약간은 새소리 같기도 하다. 사람의 아이도 말문이 트이고 직립을 하기 전엔 남자나 여자나 비슷한 소리를 낸다.
-p. 138 <울고 싶은 여자의 못 우는 울음>

그래도 공감가는 부분들도 있었다.

어릴 땐, 울음에 관한 한 도사였다.
삼촌과 삼촌 친구들이 지어준 별명은 '짬보'였다.
아침 식탁에 계란 프라이가 없어서 울고,
혼자 화장실 가는 게 무서워 울고,
어머니가 집을 비워도 울었다.

그런데 세상의 눈치와 분별 탓일까.
어느 날 나는 울지 못하는 어른이 되어 있었다.
가슴을 가로막고 있는 게 너무 많다.
나는 '내가 생각하는 나' 속에 갇혀 있는 걸까?
그저, 울 수 있을 때 울고 싶을 뿐인데.
-p. 136 <울고 싶은 여자의 못 우는 울음>


어쩌면 이 페이지를 읽으려고 이 책을 만난 건 아닐까도 싶었다. 왜 울고 싶을 때 울지 못하는, 아니 울 수 있어도 소리 죽이고 울어야 하는 사람으로 자라게 되는 걸까.

어렸을 때는 감정에 충실했다. 행복하면 웃고, 화나면 화내고, 속상하면 울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눈물을 보이는 내게 상대방은 '뭐 이거 가지고.'라는 표정으로 일관했다. 혹자는 눈물이 많은 나를 정신력이 약하고, 여린 사람으로 바라보았다. 그렇게 눈물이 많으면 어떻게 세상을 사냐는 거다.

나는 매력점이라고 생각한 눈밑점을, 어머니는 눈물점이라고 빼버리셨고, 스무살이 넘어가면서부터는 눈물을 보이면, 앞으로 더 힘든 일이 많은데 이걸로 울면 어쩌냐구 다그치셨다.

왜 우리는 눈물에 그렇게 인색하게 사는 걸까. 어쩌면 자신의 마음이 아프다고 보내는 신호일지도 모르는데, 이가 썩었다고 치통이 오는 것처럼, 위가 나쁘다고 복통이 오는 것처럼.

울고 나면 속이 후련해지면서 훌훌 털어버리고 다시 일어설 때도 있는데. 웃기 힘든 상황에도 웃어야 하는 감정노동 속에서, 아픈 걸 아프다고 하지 못하고, 마음에도 진통제를 놓고 살아야하는 삶이 떠올라서 씁쓸해졌다.

'꿈'의 또 다른 뜻은 '바람'이기도 하다. 즉, '이루고 싶은 일'이다. 그런데, '바람'은 또 보이지 않게 불어왔다 보이지 않게 사라지는 '바람'이기도 하다. '바람'은 그 자체를 목격할 순 없으나, 그것에 의해 흔들리는 나뭇가지나 물결 등을 통해 늘, 어디서든 현존한다.

그러나 그것 자체를 붙잡아 둘 순 없다. 모든 '바람'은 그래서 덧없고, 덧없기에 더 간절하게 사람을 옥죈다. 언어가, 그리고 세상의 모든 철학이나 종교가 환기시켜야 할 건 바로 그 '바람'이라고 생각한다.
-p.222 <꿈을 꿈꾸다>

하지만 그렇게 울다가도, 또 꿈을 그리고, 간절한 바람을 기도하며 우리는 또 살아간다. 조각조각 단편적이어서 이어지지 않는 것 같은 이야기는 신기하게도 부분적으로 이어지고, 하나의 교훈, 혹은 생각거리를 던져준다.

에세이지만 다소 비유적인 표현이 많아서 지난한 부분들도 있지만, 에세이를 좋아하는 분들이나, 시인이 회고하는 '시'에 대한 의미가 궁금한 사람들이라면 읽어도 좋을 것 같다. 여기에는 언급하지 못했지만, 시가 작가에게 어떤 의미인지, 그런 이야기들도 수록되어 있었다.


 


 

<본 서평은 '다산 북클럽 나나흰 6'로 활동하면서 해당 도서를 무상으로 지원받아 직접 읽어본 후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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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에서 살 생각인가?
이사카 고타로 지음, 민경욱 옮김 / arte(아르테)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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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할 수 없어. 세상은 좋아졌다 나빠졌다 하니까.
그게 싫으면 화성에라도 가서 사는 수밖에 없지." -p.482

<화성에서 살 생각인가?>는 평화 경찰이라는 제도를 중심으로 공권력과 정의(正義)에 대한 정의(定義)를 생각해보는 사회파 미스터리 소설이었다.

지역의 안전과 평화를 위해 일본에는 '지역안전을 지키는 과', 이른바 '평화경찰'이 생겨났다. 하지만, 지역 치안을 유지한다는 명목으로 과수사가 진행되기 시작하고, 무고한 사람들이 연행되는 사건들이 잇따라 발생하게 된다. 심지어 이들에 의해 잡혀가면 '처형'된다. 심문끝에 집회에서 단두대에서 공개처형 당하는 것이다.

그러나 일반인들은 무고한 시민들이 연행되는 것을 보면서도 그들의 행위를 묵인한다. 반신반의하면서도 평화경찰의 언플을 믿어버리거나, 자신들도 잡혀갈까봐 외면하는 것이다. 

그러던 중, 평화경찰의 활동을 방해하는 의문의 남자가 나타난다. 온 몸을 검정색 옷으로 둘러싸고 검정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남자. 이 수수께끼의 남자가 무고하게 끌려간 시민을 구하고, 경찰은 이 의문의 남자를 잡기 위해 추격하기 시작한다.

**

그리고 제목을 보고 우주에 관한 이야기가 아닐까 생각하셨던 분이 있다면 죄송합니다.
-감사의 말 中

책을 읽는 동안 몇 번 작가님께 뒷통수를 내어드렸다. 하나는 제목이었다. 경기도 화성이 아니다, 화성(Mars, 火星)이다. 심지어 표지의 붉은 배경은 영락없는 화성이었으니, SF를 생각하고 읽었다. 지구에서 살기 힘드니 차라리 화성으로 떠나버리자, 뭐 그런 이야기인줄 알았다.

하지만. 아쉽게도 SF는 아니었지만, 표지의 맹한 캐릭터와 함께 놓여진 이 수수께끼의 제목은 책을 읽는 도중, 날카로운 메시지로 되돌아왔다. 결국 화성으로 나가지 않는 이상 이 세상에 살 수밖에 없어. 이런 세상이라도 살아갈 수밖에 없어.

이렇게 하는 말 속에는 이 세계에 부당한 일들이 도사리고 있음을 인정하는 한편, 바꾸지 못하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현대인의 자화상에 조소를 보내는 기분이 들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지도자가 국민을 하나로 모아 통솔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알기 쉬운 적을 만드는 것이에요. 흔히 하는 얘기잖아요. 안 그래요?"
"거기에 처형 이벤트를 덧붙여 국민을 단속하겠다는 건가."

"누구든 상관없죠. 모두가 불만을 터뜨릴 수 있는 대상이라면. 게다가 나는 저렇게 되고 싶지 않다고 위축되면 더할 나위 없죠. 인간을 통솔하는 효과적인 방법입니다.
누군가에게 고통을 주어 다른 인간을 위축시키는 것 말입니다. 아아, 저렇게 되고 싶지 않아, 하고 두려워하게 되면 제일 효과가 빠르죠."

"취조라고는 하지만 하는 일이라고는 고문을 해서 '제가 마녀입니다'라는 자백을 받는 것뿐이죠." -p.75

국민의 안전을 지키기 위한다는 명목으로 생겨난 평화 경찰제도의 실상은 국민 통솔을 위한 하나의 이벤트, 공권력을 이용한 '마녀사냥'이었다. 초장에 나오는 구조 조정 이야기와 마녀사냥, 미국과 리비아의 이야기, 거짓말 탐지기의 비극으로 이어지는 메타포는 긴장감을 조성하고 무언의 암시를 던져주다가, 평화경찰 제도의 실상에서 극적으로 터진다.

"위험한 인물이 위험인물이 되는 게 아니라 위험인물로 지목된 사람이 위험인물이 될 뿐이라는 걸."-p.117

소름돋는 건, 무고한 희생을 이용하는 경찰들도 잔인하지만, 처형 집회를 보고 하나의 유흥, 이벤트처럼 여기는 일반 시민들이다. 처형대의 사람이 무고한 사람일지도 모르고, 실제로 무고한 이들도 있었지만 그런 것은 전혀 알 바 아니다. 

그들에게 단두대 위의 사람은 '사회를 혼란에 빠뜨린, 혹은 빠뜨릴 위험한 사람'일 뿐. 경찰이, 언론이, 국가에서 그렇게 말했으니 틀림 없을 것이다. 혹여, 괜히, 의문을 제기했다가 저 역시 그들과 같은 공범으로 몰릴 공산이 크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아이러니한 핏빛 평화가 유지되는 무섭은 정말 소름이 돋는다.

하지만, 이건 '가상의 이야기 잖아.'라고 마냥 '얼토당토 않는 이야기야.'라고만 할 수 없었던 게 더 무서웠다. 영화 <변호인>이 떠올랐고, <택시 운전사>로 다시 주목받고 있는 5.18민주화운동이 떠올랐고, 그 외에도 조금 다른 이야기일 수 있지만, 지역 통솔을 위한 명목으로 시작된 살인 게임을 배경으로 한 <헝거게임>도 떠올랐다. 또, 사회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명목으로 일어났던, 역사 속의 다양한 마녀사냥들도 떠올랐다. 

또, 윤리 의식, 민주주의와 시민 의식이 성장하면서, 국가 권력의 남용 아래 무고한 희생은 옛날 이야기같았지만, 그건 시대가 바뀌고 다른 모습을 할 뿐이지 계속 일어나는 것 같다. 
근래 일어났던 사회 정치 기사 이야기를 떠올려보면 과거와 다른 형태로 나타날 뿐이지, 여전히 특정 권력을 이용한 마녀사냥은 곳곳에서 일어나고 앞으로도 일어날 것 같다. 다만, 과거와 다른 건 기술과 의식의 발달로 조금은 더 투명해졌다는 걸까.


경찰은 치안을 유지하는 정의의 조직이 아닌가. 게다가 평화경찰에는 '평화'라는 글자까지 들어가 있다. 그런 사람들이 이렇게 자신을 가둬놓고 무시무시한 얘기를 하는 게 믿기지가 않았다.

"이럴 거면 화성에서 사는 게 낫겠다 싶네요."
"이쪽의 정의는 저쪽의 악, 그런 일은 수도 없이 많아. 아무리 정당한 벌이라도 받는 입장에서 보면 악이 되니까. 대체로 모든 전쟁의 시작은 똑같잖아."
"똑같다니요?"
"모두의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 ...... 전쟁은 바로 그 구호로 시작된다고."- p.123

책의 내용이 좋았던 것은, 현대사회에서도 권력으로 조종할 수 있고, 조종당할 수 있는 세테에 대한 경고와 비판의 메시지를 흥미롭게 풀어낸 것을 넘어서, 어려운 주제인 '정의'에 대해 생각해보게끔 하는 점에 있었다.

작품은 전지적 작가시점으로 시작해서 작중 등장하는 몇 인물의 시점으로도 이야기를 끌고간다. 그 중에는 일반인도 있었고, 평화경찰 중 한사람도 있었고, 수수께끼의 정의의 사자로 불리는 남자도 있었다.

책을 읽는 독자라면 무고한 희생을 만들면서까지 '정의'를 실현하는 평화경찰을 보면서, 그들이 악이고, 그런 그들로부터 선량한 시민을 구출해내는 '의문의 남자'를 정의의 사도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추격 중에 경찰 한 명이 폭발에 휩쓸려 죽었다. 책에는 나오지도 않았고, 개연성을 위해 나오지도 않을 그 경찰의 가족들이 이상하게 떠올랐다. 정이 들었나, 그건 모르겠다. 근데 그 경찰들 입장에서는 '의문의 남자'가 악 아닌가. 무고한 시민을 희생시킨 평화 경찰의 정의는 악인가, 자의가 아니었든 과정에서 사람을 죽게 하고 다치게 한 히어로는 절대적인 선인가?

"'전원'은 다 구할 수 없다'는 문제입니다."
"그게 무슨 소린가?"
"'히어로는 불행한 사람이 눈에 띄는 족족 다 구해야만 하는 가'의 문제입니다.'"-p.256


그리고 이런 생각의 끝에 작가님께 또 한번 뒷통수를 내어드린 이야기가 나온다. 바로 정의의 사도의 정체다. 보통 히어로물은 히어로인 주인공의 시점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는 게 다수지만, 이건 신기하게도 중후반에 가서야 히어로의 정체가 나온다. 그전까지는 계속해서 추격하는 경사들의 추리를 통해 이 히어로의 정체와 동기를 함께 추리할 수밖에 없다.


"정의의 편은 스스로 결정했을지도 모릅니다."
"뭘?"
"언제나 같은 버스를 타는 사람만 돕자. 그리고 나머지는 포기하자."-p.256

추리를 따라가며 경찰들과 함께 '정의의 남자'에 대해 추리하는 맛이 쏠쏠하다. 경찰 내부에서 방침에 의문을 두고 있던 자가 벌이는 걸까? 죽은 무고한 시민의 가족일까? 정의감 넘치는 일반인일까? 등등.
나름 반전을 염두하고 내린 추리들도 있었지만. 중후반에 가서야 밝혀지는 히어로의 시점을 보면서 나와 경찰들의 추리는 완벽하게 빗나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히어로의 정체에 맥이 풀리는 것도 잠시, 그가 들려주는 히어로가 되기까지의 이야기를 보면, 얼마나 많은 고민과 용기와 정신력이 필요했을지가 여실히 느껴진다. 그간 영웅 이야기에서는 생각해보지 않았던 고민들. 히어로는 모두를 구해야 하는가, 라던가, 아니. 애초에 모두를 구할 수 있나? 이런 질문에 대해 문득 진지하게 고민하게 된다.

모두를 도울 수는 없다. 한 사람을 구하더라도 나머지까지 모두 구하지 못하면 불공평하다고, 위선이라고 트집잡히고 비난을 받는다.-p.370

도움을 위선으로 매도하기도 하는 사회. 그간 무조건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생각하며 행동하려 했던 모습을 되돌아보았다. 그런 의미에서 수수께끼의 남자가 검은 옷을 입기까지 고뇌가 너무나도 현실적이어서 씁쓸했다.

우연히 얻게된 비밀 무기가 아니었으면, 그저 정의감 넘치는 집안 내력 외에 힘없는 동네 아저씨가 사람을 구하기까지 과정이 정말 지나치게 현실적이어서 현실감까지 느껴졌다. 동시에 그런 사회 일면을 끄집어 냈다는 것에서는 놀라움에 탄식이 흘렀던 것 같다.


 '마녀 사냥'이라는 메타포와 잔인한 평화경찰의 모습들을 통해 공권력 남용을 통해 벌어질 수 있는 통제 사회에 대한 경고를 보여주고, 그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끌어다 자연스럽게 사회 비판을 하고 있던 <화성에서 살 생각인가?>.

몇 독자분들이 왜 그렇게 작가님을 칭송했는지 순식간에 공감이 갔던 작품이었다.
화성에서 살 생각이야? 그렇지 않는 한 우린 이런 세상이라도 적당히 맞춰 살아갈 수밖에 없어......라며 자조하면서, 동시에 '이런 세상'에 대해 비판하는 작가님이라니. 제목부터 내용까지 정말 유쾌하신 분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이사카 고타로 작가님을 좋아하는 분들 말고도 사회 비판 소설을 읽고 싶은 분들도 흥미롭게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 여담

실은 처음에는 '정의'에 대해 고민할 수 있는 '사회파 미스터리' 소설이라는 생각에 신청했다. 권선징악이 주제인 작품들을 읽다보면, 누가봐도 응당 벌을 받아야 하는 사람들을 악인으로 배치하지만, 가끔가다보면 사연있는 악인들도 나오지 않나. 참 이상한 생각을 하고 있나 싶었지만, 언젠가 글을 쓰고 싶은 사람이라 그런가. 그런 캐릭터들이 나오면 이상하게 가슴 한구석이 시큰해질 때가 있었다.

"영화 같은 데서 보면 주인공은 적을 쓰러뜨리잖아. 쓰러뜨릴뿐만 아니라 목숨까지 빼앗지."
"그렇죠."
"그리고 마지막에는 목숨을 걸고 싸웠던 주인공이 살아남고 축하를 받는 걸로 끝이 나. 하지만 우리 입장에서는 주인공도 여러 사람을 죽였으니 그렇게 태평하게 끝나는 건 말이 안 되지."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죽은 적은 악인이잖아요."
"적이라고 해도 보스는 물론 수하까지, 이렇게 말하면 뭐하지만, 그저 열심히 일한 것뿐이잖아. 그쪽에서는 그들 나름대로 생각도 있고 사명감도 있으니까." -p.289

그러다 계속해서 의문이 들었다. '완전한 정의'란 존재하는 걸까. 결국 정의는 '상대적'이라는 생각이라는 결론밖에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처음 이 책을 읽고 싶은 이유도 있었다. 이 작가님은 '정의'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을까. 그런 마음으로 서평을 신청했던 것 같기도 했다.

"어떻게 할 수 없는 노릇이지. 추의 흔들림을 가운데서 멈출 수는 없으니까. 중요한 것은 오가는 균형이라고. 너무 비뚤어지면 다른 방향으로 오질 못하니까. 정의란 어디에도 없어. 속도가 너무 빨라지면 브레이크를 밟아 조금 천천히 가는 정도지."-p.481


애초에 이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 사건들에 대해 공평한 정의란 있을 수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선택'의 순간에 온다. '모두의 정의'에서 모두도 결국 전체, 절대 다수를 지칭하는 '모두'가 아니다. 그 시점에서 내가 속한 집단이 된다. 그것도 다양한 정의(正義) 속에 당장의 나의 이해관계가 얽힌 사람들이 정의다.

궤변같고 약은 생각이겠지만, 책을 읽으며, 그리고 그간 생각해온 나의 답은 결국 이것밖에 되지 않았다. 한 쪽의 히어로가 다른 쪽에서는 빌런이 되어버리는 것. 정의란 정말 가변적이고 복잡한 철학이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무튼 원하던 것에 대한 고민도 실컷하고 완전하지는 않지만 답을 찾기 위한 열쇠를 얻은 기분이다. 작가님 다른 작품도 읽어보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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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강
핑루 지음, 허유영 옮김 / 현대문학 / 2017년 8월
평점 :
절판


 

검은 강_핑루
출판사_현대문학

 

 

- 대만을 충격에 빠뜨린 카페 살인 사건을 바탕으로 픽션과 논픽션 사이에서 절묘한 줄타기를 하는 역작


 

그의 아내는 속임을 당했고, 젊은 여자는 유혹을 당했다.
그의 아내는 재산으로 젊은 여자를 유혹했다.
판사는 피고를 몰아세웠고,
언론은 그녀에게 '사갈녀'라는 꼬리표를 붙였다.
멋모르는 네티즌들은 남의 말 하기를 좋아했다.

누가 가장 나쁜가.

- 책 뒷 면 출판사 문구 中



<검은 강>은 대만을 충격에 빠뜨렸던 카페 살인 사건을 바탕으로 쓰인 사회 미스터리 소설이었다. 작품의 큰 틀에 피고인 자전의 재판 과정을 놓고, 작은 액자 안으로 자전의 과거과 범행 상황이 오가면서 전개된다.

이야기는 3월 하순, 신베이 시 단수이허 기슭에서 변사체가 발견되었다는 속보로 시작된다.

"어째서 그의 아내를 죽여야했나요?"

카페 점장이었던 '자전'은 '홍보, 홍타이 부부 살인사건'의 유력 용의자로 검거되었다. 강에 떠내려갈 줄 알았던 시체가 되돌아와버린 것이다. 기획력은 탁월했지만 꼼꼼한 성격은 아니었던 자전은 강물이 처음 자리로 돌아올 수 있는 걸 간과하고 말았다.

"피고인의 가장 큰 죄는 타인의 고통 위에 자신의 행복을 세우려고 했던 것입니다."

"탐욕! 이것이 바로 피고인이 저지른 모든 죄악의 시작입니다! 유감스럽게도 피고인은 아직도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피고인은 자신의 탐욕을 직시하지 않기 때문에 자신의 잘못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있습니다."

법정에서는 검사의 힐난과 질타가 쏟아진다. 소설에 삽입되면서 재구성된 다양한 인용 문구와 언론 보도, 여론, 피해자 가족의 발언을 참조하면, 이 사건으로 얼마나 그녀가 비난의 뭇매를 받았는지 짐작할 수 있다. 

책 띠지의 문구처럼, 사람은 죽었고, 살인자는 죗값을 받은 셈이다. 하지만, 소설은 거기서부터 시작된다. 살인자는 사형에 처해야한다는 불문률을 떠나, 타인의 목숨을 빼앗는 것 자체는 용인될 수 없는 행위다.  때문에 다수의 범죄물이 살인자가 잡히거나, 죗값을 치르면서 끝나고는 한다. 

그런데, 이 작품은 그런 사회적 심판 아래 미처 생각하지 않았던 살인자의 뒷이야기를 조명한다. 사건이 펼쳐진 무대의 백스테이지를 들춰보면 피해자는 다른 이야기의 가해자였고, 가해자는 또 다시 다른 이야기의 피해자였다는 사실에 충격이 온다. 이 사건을 연극이라고 가정하면, 관객들에게 중요한 것은 <카페 살인사건>이라는 살인극의 가해자와 피해자가 누구냐 일 뿐. 무대 뒤의 자전과 홍 부부는 논외 대상이다.

그러다보니,
책 전체를 읽고나서 가장 강렬하게 떠올랐던 것은 표지 뒷면에 실린 '누가 가장 나쁜가'였다.

"진실을 다 말하는 게 제게 유리해요?"

처음 자전의 이 대사를 읽고, 직후 나오는 자전의 내면 이야기를 보면서 삶에 회의적인 여자라고 생각했다. 자전은 타인에게 진심을 말하는 것을 경계하고, 어떻게든 혼자 해결하려는 사람이었다. 그래도 나름 꿈꿔온 미래와 행복이 있던 사람이라, 한편으로는 생활 전선에서 획득한 강한 생활력이  무기인 강한 사람이라는 인상도 있었다.

그런데 책을 다 읽고나서 다시 돌아온 저 대사에서, 그렇게 공허함이 느껴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건 자전의 초등학교 시절부터 만들어진 구렁이었다. 빚 때문에 자살한 아버지, 어린 나이에 자신을 몰아세우던 어머니. 아버지의 죽음으로 어머니는 쉴새없이 일을 해야했고, 그 와중에 초등학생 자전은 사랑이라는 감정이 결핍된 채로 자라난다. 그리고 끊임없이 자문한다. 사랑이 뭘까.

충족되지 못한 정서는 자전에게 '잘못된 사랑'을 알려준다. 초등학교 2학년의 어린 자전은 모르는 아저씨의 다리 위에서, 시간이 흘러, 이제 홍보라는 ..... 노인에 가까운 늙은 아저씨와의 관계에서 아버지의 사랑과 그리움을 보상 받아왔다. (이 부분은 다시 떠올리는 것조차 너무 암울하고, 울컥하고..... 힘들어서 쓰는 와중에도 자꾸 한숨이 나온다.)

하지만 자전에게 유년기란 단순한 유년기가 아니었고, 과거도 그저 단순한 과거가 아니었다. 메스로 그녀의 유년기를 가르고 칼끝으로 그녀가 잊은 줄 알았던 과거를 후벼 내면 제일 깊숙한 곳의 피와 살점 속에 차마 말할 수 없는 상처가 감추어져 있었다.

그럼에도 벗어나지 못하는 가난과 결핍된 애정은 결국 자전을 구속하고 만다. 셴밍을 만나 새로운 삶을 꿈꾸고 행복을 찾으려 했던 그 중요한 시기에, 자신의 과거가 발목을 붙잡은 것이다.

순결한 신부가 되고 싶지만 늙은 남자와 관계를 끊을 수 없었고 남자 친구가 생각하는 자신의 완벽한 이미지가 무너질까봐 두려웠다. 이것이 피고인을 가장 괴롭게 한 심리적 갈등이었음이 점점 분명해지고 있다.
하지만 어쩌면 나는 아직도 피고인이 겪었을 갈등의 복잡성을 과소평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내가 본 것은 빙산의 일각이다. 그 아래 또 무엇이 감추어져 있을까.
-피고인 측 변호인/일기

"나는 사랑이란 게 뭔지 몰라요. 수건으로 내 몸을 닦아주는 게 사랑인가요? 내 겨드랑이를 간지럽히고 아랫배를 쓰다듬고 아무도 만진 적 없는 곳을 만지는 것이 사랑인가요? 세상에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요. 엄마도 날 사랑하지 않았고, 아빠도 일찍 날 떠났어요. ....(중략).... 내 과거를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면 내게도 사랑할 기회가 있지 않았을까요?"

자전이 홍 부부를 죽인 살인자라는 것은 명확한 사실이다. 이것은 물론 용인 받을 수 없다. 하지만 그녀도 어쩌면 다른 이야기의 피해자였고, 순수하게 남들과 같은 욕망을 가진 한 사람이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작중 그녀의 이야기를 알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첨부된 기록물을 통해 추측할 수 있는 사건의 단면 속 그녀는 그저 사갈녀였다. 어떤 취급을 받았을지 눈에 선했다. *사갈녀(뱀과 전갈처럼 남에게 해를 가하는 여자를 비유한 말)

법정에서 원하는 것은 단순한 대답이었다. '인성을 저버린 잔인한 범죄', '용서받지 못할 반인륜적 악행', '천인공노할 악랄한 범죄',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흉악 행위' 등등 검사는 호통조의 비난을 연달아 쏟아냈고 피고인이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들으려 하지 않았다.

진실을 말하는 게 유리하냐는 자전의 질문. 그것은 가난과 멸시 속에서 자라온 자전에게 뿌리내려진 불신과 경계, 그리고 진실을 말해도 수용되지 않았을 사회에 대한 작가의 비판이 담긴 메시지가 아니었을까 가만히 생각해보았다.


'더 버텨야 해. 아직 할 일이 많이 남아 있어.'

그리고 자전의 이야기 못지 않게 주목할 사람이 한 명 더 있었다. 재판과 자전의 과거가 오가는 가운데, 살인 사건 당일, 단수이허 기슭에서 조용히 침전하는 불쌍한 여인이 있었다.

홍타이. 그녀는 홍보의 아내로 자전에게 자상을 입은 뒤 강에 떠내려가고 있었다. 의식이 흐려져가는 가운데, 죽음과의 경계에서 자신의 결혼 생활을 회상한다. 그녀는 유학도 다녀오고, 대학 강사로 부임하면서, 창업에 대한 꿈도 있는, 자부심과 열정이 대단한 엘리트계 여성이었다.

하지만 실패한 결혼 생활에 미련을 버리지 못한 가엽고 평범한 여자이기도 했다. 늙어가는 남편은 여성으로써 치욕을 주고, 소중한 사랑의 결실을 품을 기회를 박탈시키며, 젊은 여자와 밀회를 즐기며 그녀를 능욕했다.

그럼에도 쉽사리 이혼하지 못하는 모습에 너무 답답해서 기억에 남았었는데.

우리 윗세대 엘리트 여성들은 아예 결혼을 거부하거나 결혼이라는 불구덩이에서 낭패를 맛보거나 둘 중 하나였어요. - 여대생

남편의 모욕을 받으면서도 꾸역꾸역 함께 살아가는 여자를 통해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를 생각하다보니. 여러 감정이 교차한다. 분노, 슬픔, 애잔함 등이다. 

여성을 상품처럼 바라보는 시선, 여성의 한계를 가늠하듯 놓이는 유리 천장 등. 커리어 우먼이라는 말이 나오고, 골드미스라는 말도 나오면서 혼자서도 당차게 살아가는 여성들이 많이 나오지만, 아직도 여자 혼자 살아가기 녹록지 않은 사회 모습이 떠오른다.

물론, 홍보와의 결혼 후 그를 보며 ,남자를 '화폐'라고 비유하는 것을 보면, 여성에 대한 상품화만 아주 비판하려는 건 아닌 것 같지만서도. 여성의 시선을 통해서인지 아직도 사회에 만연한 여혐에 대한 이야기가 스멀스멀 떠오르는 대목이었다. 


<검은 강>은 짧지만 강렬한 인상을 준 작품이었다.  살인자의 이면을 조명하면서, 사회의 부패한 단면을 끌어내는 작품이었기 때문이었다. 물질과 감정의 결여로 폭력에 노출되는 사람들, 성별을 상품화 시키는 혐오 사회, 자극적인 일면만 보고 쉽사리 선동되는 여론의 모습들이 은연중에 녹아있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그 선정적인 사건을 재구성하는 작가의 목소리가 덤덤해서 되려 읽는 도중 자신이 더 분노한 것 같다. 게다가, 자전의 말들에 공감가는 말들이 많아서 슬펐다.

'어째서 어떤 사람들은 별로 노력하지 않고도 이렇게 많은 걸 가지는 걸까?'

자전에게는 오랫동안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었다. 다 똑같은 사람인데 어째서 어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행복한 삶을 사는 걸까? 그들에게는 아빠도 있고 엄마도 있고 집에서 어른이 기다려주고 식탁에는 밥이 차려져 있다. 힘들고 배가 고프면 불이 켜진 집 안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된다.

이런 자전의 독백이 자주 등장하지만, 몇 부분을 제외하고는 그저 덤덤하게, 아니면 자포자기한 듯한 맥없는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서... 되려 그 감정을 오롯이 내가 감당한 것도 같다. 먹먹해진 마음에 혼자 울컥하고 한숨 쉬며 읽은 기억이 난다. 자전이 모르는 아저씨에게 안겼던 이야기에서는. 후. <도가니>를 읽었을 때(영화 봤을 때도) 느꼈던 분노와 슬픔이 차올라서, 잠깐 책을 놓고 다시 읽기도 했다.

마지막 장면은, 범행 당일, 모든 일의 시작 직전을 회상하는 것으로 끝이 난다. 마치 모든 일이 신기루같다는 생각을 했다. 셴밍과 함께 미래를 꿈꾸며 "꼭 행복해질 거야!"라고 외쳤던 자전의 모습이 오버랩되는 순간, 지금껏 꿈꾸던 자전의 행복이 모래성처럼 무너지고, 그녀의 인생이 악몽같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 모든 이야기가 실화를 재구성했다는 것이 더 씁쓸하게 다가왔다.



<본 서평은 현대문학(출판사)의 문학독후로 활동하며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자유롭게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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