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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에서 살 생각인가?
이사카 고타로 지음, 민경욱 옮김 / arte(아르테) / 2017년 8월
평점 :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세상은 좋아졌다 나빠졌다 하니까.
그게 싫으면 화성에라도 가서 사는 수밖에 없지." -p.482
<화성에서 살 생각인가?>는 평화 경찰이라는 제도를 중심으로 공권력과 정의(正義)에 대한 정의(定義)를 생각해보는 사회파 미스터리 소설이었다.
지역의 안전과 평화를 위해 일본에는 '지역안전을 지키는 과', 이른바 '평화경찰'이 생겨났다. 하지만, 지역 치안을 유지한다는 명목으로 과수사가 진행되기 시작하고, 무고한 사람들이 연행되는 사건들이 잇따라 발생하게 된다. 심지어 이들에 의해 잡혀가면 '처형'된다. 심문끝에 집회에서 단두대에서 공개처형 당하는 것이다.
그러나 일반인들은 무고한 시민들이 연행되는 것을 보면서도 그들의 행위를 묵인한다. 반신반의하면서도 평화경찰의 언플을 믿어버리거나, 자신들도 잡혀갈까봐 외면하는 것이다.
그러던 중, 평화경찰의 활동을 방해하는 의문의 남자가 나타난다. 온 몸을 검정색 옷으로 둘러싸고 검정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남자. 이 수수께끼의 남자가 무고하게 끌려간 시민을 구하고, 경찰은 이 의문의 남자를 잡기 위해 추격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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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제목을 보고 우주에 관한 이야기가 아닐까 생각하셨던 분이 있다면 죄송합니다.
-감사의 말 中
책을 읽는 동안 몇 번 작가님께 뒷통수를 내어드렸다. 하나는 제목이었다. 경기도 화성이 아니다, 화성(Mars, 火星)이다. 심지어 표지의 붉은 배경은 영락없는 화성이었으니, SF를 생각하고 읽었다. 지구에서 살기 힘드니 차라리 화성으로 떠나버리자, 뭐 그런 이야기인줄 알았다.
하지만. 아쉽게도 SF는 아니었지만, 표지의 맹한 캐릭터와 함께 놓여진 이 수수께끼의 제목은 책을 읽는 도중, 날카로운 메시지로 되돌아왔다. 결국 화성으로 나가지 않는 이상 이 세상에 살 수밖에 없어. 이런 세상이라도 살아갈 수밖에 없어.
이렇게 하는 말 속에는 이 세계에 부당한 일들이 도사리고 있음을 인정하는 한편, 바꾸지 못하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현대인의 자화상에 조소를 보내는 기분이 들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지도자가 국민을 하나로 모아 통솔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알기 쉬운 적을 만드는 것이에요. 흔히 하는 얘기잖아요. 안 그래요?"
"거기에 처형 이벤트를 덧붙여 국민을 단속하겠다는 건가."
"누구든 상관없죠. 모두가 불만을 터뜨릴 수 있는 대상이라면. 게다가 나는 저렇게 되고 싶지 않다고 위축되면 더할 나위 없죠. 인간을 통솔하는 효과적인 방법입니다.
누군가에게 고통을 주어 다른 인간을 위축시키는 것 말입니다. 아아, 저렇게 되고 싶지 않아, 하고 두려워하게 되면 제일 효과가 빠르죠."
"취조라고는 하지만 하는 일이라고는 고문을 해서 '제가 마녀입니다'라는 자백을 받는 것뿐이죠." -p.75
국민의 안전을 지키기 위한다는 명목으로 생겨난 평화 경찰제도의 실상은 국민 통솔을 위한 하나의 이벤트, 공권력을 이용한 '마녀사냥'이었다. 초장에 나오는 구조 조정 이야기와 마녀사냥, 미국과 리비아의 이야기, 거짓말 탐지기의 비극으로 이어지는 메타포는 긴장감을 조성하고 무언의 암시를 던져주다가, 평화경찰 제도의 실상에서 극적으로 터진다.
"위험한 인물이 위험인물이 되는 게 아니라 위험인물로 지목된 사람이 위험인물이 될 뿐이라는 걸."-p.117
소름돋는 건, 무고한 희생을 이용하는 경찰들도 잔인하지만, 처형 집회를 보고 하나의 유흥, 이벤트처럼 여기는 일반 시민들이다. 처형대의 사람이 무고한 사람일지도 모르고, 실제로 무고한 이들도 있었지만 그런 것은 전혀 알 바 아니다.
그들에게 단두대 위의 사람은 '사회를 혼란에 빠뜨린, 혹은 빠뜨릴 위험한 사람'일 뿐. 경찰이, 언론이, 국가에서 그렇게 말했으니 틀림 없을 것이다. 혹여, 괜히, 의문을 제기했다가 저 역시 그들과 같은 공범으로 몰릴 공산이 크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아이러니한 핏빛 평화가 유지되는 무섭은 정말 소름이 돋는다.
하지만, 이건 '가상의 이야기 잖아.'라고 마냥 '얼토당토 않는 이야기야.'라고만 할 수 없었던 게 더 무서웠다. 영화 <변호인>이 떠올랐고, <택시 운전사>로 다시 주목받고 있는 5.18민주화운동이 떠올랐고, 그 외에도 조금 다른 이야기일 수 있지만, 지역 통솔을 위한 명목으로 시작된 살인 게임을 배경으로 한 <헝거게임>도 떠올랐다. 또, 사회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명목으로 일어났던, 역사 속의 다양한 마녀사냥들도 떠올랐다.
또, 윤리 의식, 민주주의와 시민 의식이 성장하면서, 국가 권력의 남용 아래 무고한 희생은 옛날 이야기같았지만, 그건 시대가 바뀌고 다른 모습을 할 뿐이지 계속 일어나는 것 같다.
근래 일어났던 사회 정치 기사 이야기를 떠올려보면 과거와 다른 형태로 나타날 뿐이지, 여전히 특정 권력을 이용한 마녀사냥은 곳곳에서 일어나고 앞으로도 일어날 것 같다. 다만, 과거와 다른 건 기술과 의식의 발달로 조금은 더 투명해졌다는 걸까.
경찰은 치안을 유지하는 정의의 조직이 아닌가. 게다가 평화경찰에는 '평화'라는 글자까지 들어가 있다. 그런 사람들이 이렇게 자신을 가둬놓고 무시무시한 얘기를 하는 게 믿기지가 않았다.
"이럴 거면 화성에서 사는 게 낫겠다 싶네요."
"이쪽의 정의는 저쪽의 악, 그런 일은 수도 없이 많아. 아무리 정당한 벌이라도 받는 입장에서 보면 악이 되니까. 대체로 모든 전쟁의 시작은 똑같잖아."
"똑같다니요?"
"모두의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 ...... 전쟁은 바로 그 구호로 시작된다고."- p.123
책의 내용이 좋았던 것은, 현대사회에서도 권력으로 조종할 수 있고, 조종당할 수 있는 세테에 대한 경고와 비판의 메시지를 흥미롭게 풀어낸 것을 넘어서, 어려운 주제인 '정의'에 대해 생각해보게끔 하는 점에 있었다.
작품은 전지적 작가시점으로 시작해서 작중 등장하는 몇 인물의 시점으로도 이야기를 끌고간다. 그 중에는 일반인도 있었고, 평화경찰 중 한사람도 있었고, 수수께끼의 정의의 사자로 불리는 남자도 있었다.
책을 읽는 독자라면 무고한 희생을 만들면서까지 '정의'를 실현하는 평화경찰을 보면서, 그들이 악이고, 그런 그들로부터 선량한 시민을 구출해내는 '의문의 남자'를 정의의 사도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추격 중에 경찰 한 명이 폭발에 휩쓸려 죽었다. 책에는 나오지도 않았고, 개연성을 위해 나오지도 않을 그 경찰의 가족들이 이상하게 떠올랐다. 정이 들었나, 그건 모르겠다. 근데 그 경찰들 입장에서는 '의문의 남자'가 악 아닌가. 무고한 시민을 희생시킨 평화 경찰의 정의는 악인가, 자의가 아니었든 과정에서 사람을 죽게 하고 다치게 한 히어로는 절대적인 선인가?
"'전원'은 다 구할 수 없다'는 문제입니다."
"그게 무슨 소린가?"
"'히어로는 불행한 사람이 눈에 띄는 족족 다 구해야만 하는 가'의 문제입니다.'"-p.256
그리고 이런 생각의 끝에 작가님께 또 한번 뒷통수를 내어드린 이야기가 나온다. 바로 정의의 사도의 정체다. 보통 히어로물은 히어로인 주인공의 시점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는 게 다수지만, 이건 신기하게도 중후반에 가서야 히어로의 정체가 나온다. 그전까지는 계속해서 추격하는 경사들의 추리를 통해 이 히어로의 정체와 동기를 함께 추리할 수밖에 없다.
"정의의 편은 스스로 결정했을지도 모릅니다."
"뭘?"
"언제나 같은 버스를 타는 사람만 돕자. 그리고 나머지는 포기하자."-p.256
추리를 따라가며 경찰들과 함께 '정의의 남자'에 대해 추리하는 맛이 쏠쏠하다. 경찰 내부에서 방침에 의문을 두고 있던 자가 벌이는 걸까? 죽은 무고한 시민의 가족일까? 정의감 넘치는 일반인일까? 등등.
나름 반전을 염두하고 내린 추리들도 있었지만. 중후반에 가서야 밝혀지는 히어로의 시점을 보면서 나와 경찰들의 추리는 완벽하게 빗나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히어로의 정체에 맥이 풀리는 것도 잠시, 그가 들려주는 히어로가 되기까지의 이야기를 보면, 얼마나 많은 고민과 용기와 정신력이 필요했을지가 여실히 느껴진다. 그간 영웅 이야기에서는 생각해보지 않았던 고민들. 히어로는 모두를 구해야 하는가, 라던가, 아니. 애초에 모두를 구할 수 있나? 이런 질문에 대해 문득 진지하게 고민하게 된다.
모두를 도울 수는 없다. 한 사람을 구하더라도 나머지까지 모두 구하지 못하면 불공평하다고, 위선이라고 트집잡히고 비난을 받는다.-p.370
도움을 위선으로 매도하기도 하는 사회. 그간 무조건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생각하며 행동하려 했던 모습을 되돌아보았다. 그런 의미에서 수수께끼의 남자가 검은 옷을 입기까지 고뇌가 너무나도 현실적이어서 씁쓸했다.
우연히 얻게된 비밀 무기가 아니었으면, 그저 정의감 넘치는 집안 내력 외에 힘없는 동네 아저씨가 사람을 구하기까지 과정이 정말 지나치게 현실적이어서 현실감까지 느껴졌다. 동시에 그런 사회 일면을 끄집어 냈다는 것에서는 놀라움에 탄식이 흘렀던 것 같다.
'마녀 사냥'이라는 메타포와 잔인한 평화경찰의 모습들을 통해 공권력 남용을 통해 벌어질 수 있는 통제 사회에 대한 경고를 보여주고, 그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끌어다 자연스럽게 사회 비판을 하고 있던 <화성에서 살 생각인가?>.
몇 독자분들이 왜 그렇게 작가님을 칭송했는지 순식간에 공감이 갔던 작품이었다.
화성에서 살 생각이야? 그렇지 않는 한 우린 이런 세상이라도 적당히 맞춰 살아갈 수밖에 없어......라며 자조하면서, 동시에 '이런 세상'에 대해 비판하는 작가님이라니. 제목부터 내용까지 정말 유쾌하신 분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이사카 고타로 작가님을 좋아하는 분들 말고도 사회 비판 소설을 읽고 싶은 분들도 흥미롭게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 여담
실은 처음에는 '정의'에 대해 고민할 수 있는 '사회파 미스터리' 소설이라는 생각에 신청했다. 권선징악이 주제인 작품들을 읽다보면, 누가봐도 응당 벌을 받아야 하는 사람들을 악인으로 배치하지만, 가끔가다보면 사연있는 악인들도 나오지 않나. 참 이상한 생각을 하고 있나 싶었지만, 언젠가 글을 쓰고 싶은 사람이라 그런가. 그런 캐릭터들이 나오면 이상하게 가슴 한구석이 시큰해질 때가 있었다.
"영화 같은 데서 보면 주인공은 적을 쓰러뜨리잖아. 쓰러뜨릴뿐만 아니라 목숨까지 빼앗지."
"그렇죠."
"그리고 마지막에는 목숨을 걸고 싸웠던 주인공이 살아남고 축하를 받는 걸로 끝이 나. 하지만 우리 입장에서는 주인공도 여러 사람을 죽였으니 그렇게 태평하게 끝나는 건 말이 안 되지."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죽은 적은 악인이잖아요."
"적이라고 해도 보스는 물론 수하까지, 이렇게 말하면 뭐하지만, 그저 열심히 일한 것뿐이잖아. 그쪽에서는 그들 나름대로 생각도 있고 사명감도 있으니까." -p.289
그러다 계속해서 의문이 들었다. '완전한 정의'란 존재하는 걸까. 결국 정의는 '상대적'이라는 생각이라는 결론밖에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처음 이 책을 읽고 싶은 이유도 있었다. 이 작가님은 '정의'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을까. 그런 마음으로 서평을 신청했던 것 같기도 했다.
"어떻게 할 수 없는 노릇이지. 추의 흔들림을 가운데서 멈출 수는 없으니까. 중요한 것은 오가는 균형이라고. 너무 비뚤어지면 다른 방향으로 오질 못하니까. 정의란 어디에도 없어. 속도가 너무 빨라지면 브레이크를 밟아 조금 천천히 가는 정도지."-p.481
애초에 이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 사건들에 대해 공평한 정의란 있을 수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선택'의 순간에 온다. '모두의 정의'에서 모두도 결국 전체, 절대 다수를 지칭하는 '모두'가 아니다. 그 시점에서 내가 속한 집단이 된다. 그것도 다양한 정의(正義) 속에 당장의 나의 이해관계가 얽힌 사람들이 정의다.
궤변같고 약은 생각이겠지만, 책을 읽으며, 그리고 그간 생각해온 나의 답은 결국 이것밖에 되지 않았다. 한 쪽의 히어로가 다른 쪽에서는 빌런이 되어버리는 것. 정의란 정말 가변적이고 복잡한 철학이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무튼 원하던 것에 대한 고민도 실컷하고 완전하지는 않지만 답을 찾기 위한 열쇠를 얻은 기분이다. 작가님 다른 작품도 읽어보고 싶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