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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강
핑루 지음, 허유영 옮김 / 현대문학 / 2017년 8월
평점 :
절판
검은 강_핑루
출판사_현대문학
- 대만을 충격에 빠뜨린 카페 살인 사건을 바탕으로 픽션과 논픽션 사이에서 절묘한 줄타기를 하는 역작
그의 아내는 속임을 당했고, 젊은 여자는 유혹을 당했다.
그의 아내는 재산으로 젊은 여자를 유혹했다.
판사는 피고를 몰아세웠고,
언론은 그녀에게 '사갈녀'라는 꼬리표를 붙였다.
멋모르는 네티즌들은 남의 말 하기를 좋아했다.
누가 가장 나쁜가…….
- 책 뒷 면 출판사 문구 中
◆◆◆
<검은 강>은 대만을 충격에 빠뜨렸던 카페 살인 사건을 바탕으로 쓰인 사회 미스터리 소설이었다. 작품의 큰 틀에 피고인 자전의 재판 과정을 놓고, 작은 액자 안으로 자전의 과거과 범행 상황이 오가면서 전개된다.
이야기는 3월 하순, 신베이 시 단수이허 기슭에서 변사체가 발견되었다는 속보로 시작된다.
"어째서 그의 아내를 죽여야했나요?"
카페 점장이었던 '자전'은 '홍보, 홍타이 부부 살인사건'의 유력 용의자로 검거되었다. 강에 떠내려갈 줄 알았던 시체가 되돌아와버린 것이다. 기획력은 탁월했지만 꼼꼼한 성격은 아니었던 자전은 강물이 처음 자리로 돌아올 수 있는 걸 간과하고 말았다.
"피고인의 가장 큰 죄는 타인의 고통 위에 자신의 행복을 세우려고 했던 것입니다."
"탐욕! 이것이 바로 피고인이 저지른 모든 죄악의 시작입니다! 유감스럽게도 피고인은 아직도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피고인은 자신의 탐욕을 직시하지 않기 때문에 자신의 잘못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있습니다."
법정에서는 검사의 힐난과 질타가 쏟아진다. 소설에 삽입되면서 재구성된 다양한 인용 문구와 언론 보도, 여론, 피해자 가족의 발언을 참조하면, 이 사건으로 얼마나 그녀가 비난의 뭇매를 받았는지 짐작할 수 있다.
책 띠지의 문구처럼, 사람은 죽었고, 살인자는 죗값을 받은 셈이다. 하지만, 소설은 거기서부터 시작된다. 살인자는 사형에 처해야한다는 불문률을 떠나, 타인의 목숨을 빼앗는 것 자체는 용인될 수 없는 행위다. 때문에 다수의 범죄물이 살인자가 잡히거나, 죗값을 치르면서 끝나고는 한다.
그런데, 이 작품은 그런 사회적 심판 아래 미처 생각하지 않았던 살인자의 뒷이야기를 조명한다. 사건이 펼쳐진 무대의 백스테이지를 들춰보면 피해자는 다른 이야기의 가해자였고, 가해자는 또 다시 다른 이야기의 피해자였다는 사실에 충격이 온다. 이 사건을 연극이라고 가정하면, 관객들에게 중요한 것은 <카페 살인사건>이라는 살인극의 가해자와 피해자가 누구냐 일 뿐. 무대 뒤의 자전과 홍 부부는 논외 대상이다.
그러다보니,
책 전체를 읽고나서 가장 강렬하게 떠올랐던 것은 표지 뒷면에 실린 '누가 가장 나쁜가'였다.
"진실을 다 말하는 게 제게 유리해요?"
처음 자전의 이 대사를 읽고, 직후 나오는 자전의 내면 이야기를 보면서 삶에 회의적인 여자라고 생각했다. 자전은 타인에게 진심을 말하는 것을 경계하고, 어떻게든 혼자 해결하려는 사람이었다. 그래도 나름 꿈꿔온 미래와 행복이 있던 사람이라, 한편으로는 생활 전선에서 획득한 강한 생활력이 무기인 강한 사람이라는 인상도 있었다.
그런데 책을 다 읽고나서 다시 돌아온 저 대사에서, 그렇게 공허함이 느껴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건 자전의 초등학교 시절부터 만들어진 구렁이었다. 빚 때문에 자살한 아버지, 어린 나이에 자신을 몰아세우던 어머니. 아버지의 죽음으로 어머니는 쉴새없이 일을 해야했고, 그 와중에 초등학생 자전은 사랑이라는 감정이 결핍된 채로 자라난다. 그리고 끊임없이 자문한다. 사랑이 뭘까.
충족되지 못한 정서는 자전에게 '잘못된 사랑'을 알려준다. 초등학교 2학년의 어린 자전은 모르는 아저씨의 다리 위에서, 시간이 흘러, 이제 홍보라는 ..... 노인에 가까운 늙은 아저씨와의 관계에서 아버지의 사랑과 그리움을 보상 받아왔다. (이 부분은 다시 떠올리는 것조차 너무 암울하고, 울컥하고..... 힘들어서 쓰는 와중에도 자꾸 한숨이 나온다.)
하지만 자전에게 유년기란 단순한 유년기가 아니었고, 과거도 그저 단순한 과거가 아니었다. 메스로 그녀의 유년기를 가르고 칼끝으로 그녀가 잊은 줄 알았던 과거를 후벼 내면 제일 깊숙한 곳의 피와 살점 속에 차마 말할 수 없는 상처가 감추어져 있었다.
그럼에도 벗어나지 못하는 가난과 결핍된 애정은 결국 자전을 구속하고 만다. 셴밍을 만나 새로운 삶을 꿈꾸고 행복을 찾으려 했던 그 중요한 시기에, 자신의 과거가 발목을 붙잡은 것이다.
순결한 신부가 되고 싶지만 늙은 남자와 관계를 끊을 수 없었고 남자 친구가 생각하는 자신의 완벽한 이미지가 무너질까봐 두려웠다. 이것이 피고인을 가장 괴롭게 한 심리적 갈등이었음이 점점 분명해지고 있다.
하지만 어쩌면 나는 아직도 피고인이 겪었을 갈등의 복잡성을 과소평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내가 본 것은 빙산의 일각이다. 그 아래 또 무엇이 감추어져 있을까.
-피고인 측 변호인/일기
"나는 사랑이란 게 뭔지 몰라요. 수건으로 내 몸을 닦아주는 게 사랑인가요? 내 겨드랑이를 간지럽히고 아랫배를 쓰다듬고 아무도 만진 적 없는 곳을 만지는 것이 사랑인가요? 세상에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요. 엄마도 날 사랑하지 않았고, 아빠도 일찍 날 떠났어요. ....(중략).... 내 과거를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면 내게도 사랑할 기회가 있지 않았을까요?"
자전이 홍 부부를 죽인 살인자라는 것은 명확한 사실이다. 이것은 물론 용인 받을 수 없다. 하지만 그녀도 어쩌면 다른 이야기의 피해자였고, 순수하게 남들과 같은 욕망을 가진 한 사람이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작중 그녀의 이야기를 알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첨부된 기록물을 통해 추측할 수 있는 사건의 단면 속 그녀는 그저 사갈녀였다. 어떤 취급을 받았을지 눈에 선했다. *사갈녀(뱀과 전갈처럼 남에게 해를 가하는 여자를 비유한 말)
법정에서 원하는 것은 단순한 대답이었다. '인성을 저버린 잔인한 범죄', '용서받지 못할 반인륜적 악행', '천인공노할 악랄한 범죄',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흉악 행위' 등등 검사는 호통조의 비난을 연달아 쏟아냈고 피고인이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들으려 하지 않았다.
진실을 말하는 게 유리하냐는 자전의 질문. 그것은 가난과 멸시 속에서 자라온 자전에게 뿌리내려진 불신과 경계, 그리고 진실을 말해도 수용되지 않았을 사회에 대한 작가의 비판이 담긴 메시지가 아니었을까 가만히 생각해보았다.
'더 버텨야 해. 아직 할 일이 많이 남아 있어.'
그리고 자전의 이야기 못지 않게 주목할 사람이 한 명 더 있었다. 재판과 자전의 과거가 오가는 가운데, 살인 사건 당일, 단수이허 기슭에서 조용히 침전하는 불쌍한 여인이 있었다.
홍타이. 그녀는 홍보의 아내로 자전에게 자상을 입은 뒤 강에 떠내려가고 있었다. 의식이 흐려져가는 가운데, 죽음과의 경계에서 자신의 결혼 생활을 회상한다. 그녀는 유학도 다녀오고, 대학 강사로 부임하면서, 창업에 대한 꿈도 있는, 자부심과 열정이 대단한 엘리트계 여성이었다.
하지만 실패한 결혼 생활에 미련을 버리지 못한 가엽고 평범한 여자이기도 했다. 늙어가는 남편은 여성으로써 치욕을 주고, 소중한 사랑의 결실을 품을 기회를 박탈시키며, 젊은 여자와 밀회를 즐기며 그녀를 능욕했다.
그럼에도 쉽사리 이혼하지 못하는 모습에 너무 답답해서 기억에 남았었는데.
우리 윗세대 엘리트 여성들은 아예 결혼을 거부하거나 결혼이라는 불구덩이에서 낭패를 맛보거나 둘 중 하나였어요. - 여대생
남편의 모욕을 받으면서도 꾸역꾸역 함께 살아가는 여자를 통해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를 생각하다보니. 여러 감정이 교차한다. 분노, 슬픔, 애잔함 등이다.
여성을 상품처럼 바라보는 시선, 여성의 한계를 가늠하듯 놓이는 유리 천장 등. 커리어 우먼이라는 말이 나오고, 골드미스라는 말도 나오면서 혼자서도 당차게 살아가는 여성들이 많이 나오지만, 아직도 여자 혼자 살아가기 녹록지 않은 사회 모습이 떠오른다.
물론, 홍보와의 결혼 후 그를 보며 ,남자를 '화폐'라고 비유하는 것을 보면, 여성에 대한 상품화만 아주 비판하려는 건 아닌 것 같지만서도. 여성의 시선을 통해서인지 아직도 사회에 만연한 여혐에 대한 이야기가 스멀스멀 떠오르는 대목이었다.
<검은 강>은 짧지만 강렬한 인상을 준 작품이었다. 살인자의 이면을 조명하면서, 사회의 부패한 단면을 끌어내는 작품이었기 때문이었다. 물질과 감정의 결여로 폭력에 노출되는 사람들, 성별을 상품화 시키는 혐오 사회, 자극적인 일면만 보고 쉽사리 선동되는 여론의 모습들이 은연중에 녹아있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그 선정적인 사건을 재구성하는 작가의 목소리가 덤덤해서 되려 읽는 도중 자신이 더 분노한 것 같다. 게다가, 자전의 말들에 공감가는 말들이 많아서 슬펐다.
'어째서 어떤 사람들은 별로 노력하지 않고도 이렇게 많은 걸 가지는 걸까?'
자전에게는 오랫동안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었다. 다 똑같은 사람인데 어째서 어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행복한 삶을 사는 걸까? 그들에게는 아빠도 있고 엄마도 있고 집에서 어른이 기다려주고 식탁에는 밥이 차려져 있다. 힘들고 배가 고프면 불이 켜진 집 안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된다.
이런 자전의 독백이 자주 등장하지만, 몇 부분을 제외하고는 그저 덤덤하게, 아니면 자포자기한 듯한 맥없는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서... 되려 그 감정을 오롯이 내가 감당한 것도 같다. 먹먹해진 마음에 혼자 울컥하고 한숨 쉬며 읽은 기억이 난다. 자전이 모르는 아저씨에게 안겼던 이야기에서는. 후. <도가니>를 읽었을 때(영화 봤을 때도) 느꼈던 분노와 슬픔이 차올라서, 잠깐 책을 놓고 다시 읽기도 했다.
마지막 장면은, 범행 당일, 모든 일의 시작 직전을 회상하는 것으로 끝이 난다. 마치 모든 일이 신기루같다는 생각을 했다. 셴밍과 함께 미래를 꿈꾸며 "꼭 행복해질 거야!"라고 외쳤던 자전의 모습이 오버랩되는 순간, 지금껏 꿈꾸던 자전의 행복이 모래성처럼 무너지고, 그녀의 인생이 악몽같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 모든 이야기가 실화를 재구성했다는 것이 더 씁쓸하게 다가왔다.
<본 서평은 현대문학(출판사)의 문학독후로 활동하며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자유롭게 작성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