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 울 수 있을 때 울고 싶을 뿐이다
강정 지음 / 다산책방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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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내자는 제안을 받은 건 5년여 전이다. 처음 기획은 '자전적 글쓰기'였다. 시를 쓰면서 살게 된 계기, 그러면서 깨닫게 된 것들, 그리하여 시를 쓰고자 하는 독자들에게 전해줄 만한 이야기들을 책으로 엮어보자는 제안이었다." - p.7 프롤로그

저자가 자전적 글쓰기를 기획하면서 세상에 나온 <그_저 울 수 있을 때 울고 싶을 뿐이다>. 프롤로그 이야기처럼, 저자가 지난 인생을 회고하며 집필한 글들로, 약간은 중구난방에 의식의 흐름대로였지만, 솔직함이 담긴 잔잔한 에세이였다.

사실은 제목만 보고서는 작가가 살아오며 느꼈을, '울고 싶은 순간들에 대한 감상'이 모인 글인 줄 알았다. 예상을 완전히 깬 에세이에는 저자의 출생부터 성장 과정, 그리고 취미부터 살아오면서 포착한 삶의 순간순간에 대한 자잘한 감상들이 곳곳에 포진해 있었다.

에세이니까. 달리 글 하나하나에 대한 주제같은 건 생각하지 않고 읽으려고 했는데, 이상하게 읽으면서도 내가 무얼 읽고 있지?..... 라는 생각이 들도록 정말 '의식의 흐름'에 따라 쓰여진 글을 읽는 기분이었다. 내 일기를 읽는 사람들이 이런 기분일까 그런 생각도 들었다.

이상하게 그런 부분에서 또, 친근해져서 글을 읽기도했고, 공감가는 문장들이 많아서 집중이 끊기다가도 읽고, 또 끊기다 읽고, 그랬던 것 같다.

아픈 줄 모르는 것도 아픔의 원인이지만, 아픔을 아는 것 역시 아픔의 시발(始彂)이다.
-p.21 <한의원 방문>


그런데 작가님이 시를 쓰셨다고 해서인지, 비유적 표현들이 종종 나왔는데, 어떤 부분은 감탄하면서 읽은 반면, 어떤 부분은 난해하기도 했다. 가령,

이 글은 매우 개인적이고 불합리하고 편협하기 그지없다. 내게 만약 시와 음악의 트랜스라는 설정이 가능하다면 그것은 어떤 내재적 접합이나 교통이 아닌 항시적 분열과 잠재적 합일의 양상으로 흐를 것이기 때문이다.
- p.87 <나는 왜 모조 라이진 씨에게 다시 열광하는가>


서울 삶이 인생의 가장 중요한 터닝 포인트이고, 학창 시절에는 록음악에 열광하고, 스물 둘의 나이에 예상하지 못했던 시인이 되어 이제 마흔을 바라보던 작가. 서울의 모습에 놀라는 모습이라든가, 사춘기에 빠져든 음악에 열정을 느끼며 보여준 순수와 허세의 줄타기라든가, 그런 이야기들은 꼭 우리들 성장 이야기 같아서 공감가기도 했지만,

아. 역시 시인의 글은 어려웠다. 저번에 읽은 <은유의 힘>에서 느낀 그때의 감탄과 탄식의 사이를 오가는 글이었다.

그리고 역시나, 시인이 산문을 쓰면 이런 느낌일까, 라고 생각하게 만든 부분은 작가가 프랑스에 여행가게 된 일화였다.

좌석 모니터로 살핀 하늘은 구름의 끝없는 행렬, 고도 삼만 팔천 피트라는 게 사람을 얼마나 작가도 첨예한 미물로 만드는지 새삼 실감했다.

천공의 잠은 지상에서의 오랜 나날들을 꿈으로 되돌리고 있었다. 깨기 싫었고, 일체의 속도감도 느껴지지 않는 비행기 안이 수백 명을 집단으로 배태한 우주의 자궁 같았다. 깨고 나면 마주칠 세상이 두렵고 아스라했다. 곧 도달할 그곳이 다른 나여서가 아니었다. 고백건대, 내가 내가 아닐 것 같아서였다.
-p.108-109 <내 어둠이 당신에게 빛의 소리로 울릴 수 있다면>

최근 외국에 다녀와서 였을까, 이 부분을 읽는데 미묘하게 공감이 가면서도 엄청난 거리감이 느껴졌다. 내 일기 속 기내 속 나의 감상은 '두려움' 뿐이었는데. 물론 이륙하면서 본 미니어처 같은 지상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서, 난류에 덜덜 떨면서, 정말 우리는 한낱 미물이구나도 싶고, 꿈같기도 했지만.

베토벤의 음악을 들으며 공기의 파동같은 건 느껴보지도 못했다. 옥상 달빛 노래를 들으며 심호흡하고 있었고, 비행기를 타며 삶의 강렬한 의지를 느낀 경험은 더더욱 생각치도 못한 것이었다. 무엇보다 죽기 싫어서 떨고 있던 자신만 마주했을 뿐.

역시 같은 상황도 은유적으로 표현할 수 있다는 건 작가들이 지닌 재능인걸까. 내가 쓰면 허세같았을 글이 문학 작품처럼 보여서 감탄의 연속이었던 것 같다.

울음에 대한 이야기는 책의 중반에 가서야 나오지만, '울음'이라는 행위를 분석하듯 그리고있는 저자의 사색이 펼쳐져 있었다.

다시, 아기 울음 또는 고양이의 소리 파형이 떠돈다. 덩달아 따라해보지만, 여전히 엉성하다. 음역과 음색을 따져본다. 분명히 여성적이다. 그러면서 약간은 새소리 같기도 하다. 사람의 아이도 말문이 트이고 직립을 하기 전엔 남자나 여자나 비슷한 소리를 낸다.
-p. 138 <울고 싶은 여자의 못 우는 울음>

그래도 공감가는 부분들도 있었다.

어릴 땐, 울음에 관한 한 도사였다.
삼촌과 삼촌 친구들이 지어준 별명은 '짬보'였다.
아침 식탁에 계란 프라이가 없어서 울고,
혼자 화장실 가는 게 무서워 울고,
어머니가 집을 비워도 울었다.

그런데 세상의 눈치와 분별 탓일까.
어느 날 나는 울지 못하는 어른이 되어 있었다.
가슴을 가로막고 있는 게 너무 많다.
나는 '내가 생각하는 나' 속에 갇혀 있는 걸까?
그저, 울 수 있을 때 울고 싶을 뿐인데.
-p. 136 <울고 싶은 여자의 못 우는 울음>


어쩌면 이 페이지를 읽으려고 이 책을 만난 건 아닐까도 싶었다. 왜 울고 싶을 때 울지 못하는, 아니 울 수 있어도 소리 죽이고 울어야 하는 사람으로 자라게 되는 걸까.

어렸을 때는 감정에 충실했다. 행복하면 웃고, 화나면 화내고, 속상하면 울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눈물을 보이는 내게 상대방은 '뭐 이거 가지고.'라는 표정으로 일관했다. 혹자는 눈물이 많은 나를 정신력이 약하고, 여린 사람으로 바라보았다. 그렇게 눈물이 많으면 어떻게 세상을 사냐는 거다.

나는 매력점이라고 생각한 눈밑점을, 어머니는 눈물점이라고 빼버리셨고, 스무살이 넘어가면서부터는 눈물을 보이면, 앞으로 더 힘든 일이 많은데 이걸로 울면 어쩌냐구 다그치셨다.

왜 우리는 눈물에 그렇게 인색하게 사는 걸까. 어쩌면 자신의 마음이 아프다고 보내는 신호일지도 모르는데, 이가 썩었다고 치통이 오는 것처럼, 위가 나쁘다고 복통이 오는 것처럼.

울고 나면 속이 후련해지면서 훌훌 털어버리고 다시 일어설 때도 있는데. 웃기 힘든 상황에도 웃어야 하는 감정노동 속에서, 아픈 걸 아프다고 하지 못하고, 마음에도 진통제를 놓고 살아야하는 삶이 떠올라서 씁쓸해졌다.

'꿈'의 또 다른 뜻은 '바람'이기도 하다. 즉, '이루고 싶은 일'이다. 그런데, '바람'은 또 보이지 않게 불어왔다 보이지 않게 사라지는 '바람'이기도 하다. '바람'은 그 자체를 목격할 순 없으나, 그것에 의해 흔들리는 나뭇가지나 물결 등을 통해 늘, 어디서든 현존한다.

그러나 그것 자체를 붙잡아 둘 순 없다. 모든 '바람'은 그래서 덧없고, 덧없기에 더 간절하게 사람을 옥죈다. 언어가, 그리고 세상의 모든 철학이나 종교가 환기시켜야 할 건 바로 그 '바람'이라고 생각한다.
-p.222 <꿈을 꿈꾸다>

하지만 그렇게 울다가도, 또 꿈을 그리고, 간절한 바람을 기도하며 우리는 또 살아간다. 조각조각 단편적이어서 이어지지 않는 것 같은 이야기는 신기하게도 부분적으로 이어지고, 하나의 교훈, 혹은 생각거리를 던져준다.

에세이지만 다소 비유적인 표현이 많아서 지난한 부분들도 있지만, 에세이를 좋아하는 분들이나, 시인이 회고하는 '시'에 대한 의미가 궁금한 사람들이라면 읽어도 좋을 것 같다. 여기에는 언급하지 못했지만, 시가 작가에게 어떤 의미인지, 그런 이야기들도 수록되어 있었다.


 


 

<본 서평은 '다산 북클럽 나나흰 6'로 활동하면서 해당 도서를 무상으로 지원받아 직접 읽어본 후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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