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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개와 같은 말
임현 지음 / 현대문학 / 2017년 10월
평점 :
그 개와 같은 말_임현
출판사_현대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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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제목부터 놀라게 했던 『그 개와 같은 말』. 문단이 주목하는 젊은 작가 임현의 첫 소설집이라는 소개에 궁금했던 작품이었다. <가능한 세계>를 시작으로 총 10 작품이 수록되어 있었다. 주로 장르 소설을 읽는 편이라 이런 단편집은 어떻게 읽어야 하나 싶어 어려웠던 것 같다. 하지만, 약간은 충격적인 소재도 있었고, 요사이 고민해보던 문제를 자꾸 떠오르게 하는 등, 머릿속을 자꾸 두드리는 작품들로 구성되어 있어서 흥미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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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를 알 수 있어요.”-p.9 <가능한 세계>
첫 문을 열었던 <가능한 세계>에는 독특한 아이가 나온다. 미래를 알 수 있다고 말하는 아이. 하지만 어쩐지 아이를 보는 선생님과 어머니의 태도가 퍽 난처하다. 선생님은 헛소리로 상담하는 학생이 이제 귀찮은 듯하다. 어머니의 시선에서는 슬픔이 느껴진다. 아버지를 회상하는 아이의 대화에 뇌종양이 나오고, 계속해서 아이가 말하는 ‘예지 능력’과 ‘무서운 가정’을 듣는 어머니의 괴로움이 점점 크게 느껴진다.
이야기는 1일, 2일, 3일...... 그리고 5000여 일을 넘기기는 동안, 아이의 상태는 알 수 없는 이유로-아니, 어쩌면 대화를 읽는 동안 어느 정도 유추할 수 있을 법한 이유로-걷잡을 수 없이 악화된다. 또한, 아이와 어머니의 관계 역시.
그러더니 갑자기 다시 마지막 장이 1일로 돌아간다. 긴장이 최고조에 달했던 마지막 5013일의 이야기에서 갑자기 다시 1일로 돌아가는 전개에 순간 어안이 벙벙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고 나니, 처음 드는 생각은, ‘뭐가 진짜야?’였다. 정말 아이가 말하는 ‘예지력’이 사실인 것인지, 아니면 선생님과 어머니의 눈에 비치는 ‘망상’이나 ‘허언’으로 그려졌던 가정이 사실이었는지 고민을 하게 된다.
이 고민을 품은 채로 다음 작품으로 넘어간다. <고두>는 약간 충격적이었다. 물론 책에 실린 모든 단편들의 소재가 예상치 못했던 소재였지만, 여기서 학생과 제자의 스캔들을 볼 줄은 더 몰랐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더구나, -란다, 라는 식의 마지막 종결 어미를 보면 뭔가 아래 사람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상황인 것 같은데, 조금 더 읽어보니 ‘교직 생활’을 했다고 한다. 선생님이 학생에게 하는 이야기 인가보다, 하고 계속 읽고 있는데, 문제의 문장이 나왔다.
그런데 왜 그런 눈으로 나를 보는 것이냐?
뭘 묻고 싶은 거니?
그래서.
잤냐고?
그렇게 묻는다면 나도 그렇게 대답할 것이다.
어쩔 수 없었단다. -p.44
윤리 교사였던 ‘나’가 들려주는 여학생 제자와의 이야기였다. ‘나’의 수업 시간에 수업을 훼방 놓던 ‘연주’라는 아이는 온갖 소문이 무성한 아이다. 술집을 드나든다거나, 모텔에서 보았다거나 그런 류의 소문이 따라다니는 아이였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연주가 일하는 음식점에서 연주를 보게 되고, 일이 끝나는 길에 그 아이를 집에 데려다주게 된다. ‘나’는 그날 연주가 생계를 위해 식당에서 일하며 학교를 다녀야했던 학생이었을 뿐임을 알게 되고, 그간 무성한 나쁜 소문들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나’는 그날 제자에 대한 선생님의 사명감으로 그녀를 집에 데려다주며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주려고 했지만, 예기치 못한 상황으로 그들은 선을 넘고 말았다.
물론, 앞장에서는 정의나 윤리에 대해 논하던 윤리 선생님인 ‘나’가 보여주는 이 연주와의 스캔들은 아이러니하면서도 다소 충격적이었다. 심지어 마지막 열린 결말을 보면 ‘헐’ 소리가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소재로 놀라기에는 공감되는 문장들도 많았던 작품이었다. 특히 이 단편을 읽으면서 머릿속에 든 의문이 조금씩 형체를 갖추기 시작했다. 이 작품을 읽을 때마다 자꾸 머리를 자극하던 무언의 것들이 몇 질문으로 만들어졌다.
‘정말 그게 사실이라고 생각해?’, ‘그게 옳은 거라고 생각해?’ 류의 질문들이었다. 살다보면, 하나의 상황을 놓고 단편적으로 보고, 쉽게 판단할 때가 많다. 바쁘다는 이유로, 혹은 나를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의 의견에 묻어가는 중에, 한쪽 눈을 가리고 한쪽 귀를 닫고 대상을 볼 때가 많았던 것 같다. 가만히 다시 생각해보면 어느 것도 나쁜 것이 아닐 수도 있는데 말이다.
모든 일에 항상 의구심을 가져야 한단다. 당연한 것을 당연하게 보지 말아라. 나쁜 것은 나쁘고 우리는 올바르다, 그런 확고하고 안정된 자세, 양팔저울 같은 거. 평형을 유지하려고 애쓰는 게 아니라 어느 한쪽으로 완전히 기울어버린 상태, 더 이상 흔들리지도 않고 다른 쪽으로 다시 기울어질 가능성도 보이지 않는 바로 그 상태.
자기가 그런 지경에 있다는 걸 도무지 인정할 줄 몰라. 그러면서 맞는다고만 하는 거야. 그냥 다 안다고, 알 수 있는 거라고. 몰라? 어떻게 그걸 몰라? 오히려 상대를 부도덕한 사람으로 취급하는 것들. 그것이야말로 윤리적인 삶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적이란다. -p.43
계속해서 나오는 문장에서는 꼭 나를 향해 던지는 말 같아서 양심이 찔리기도 했다.
인간이란 본래 이기적인 존재고 그러므로 경계해야 하는데도 부도덕하고 불의한 세계가 따로 존재하는 줄로만 알아. 그런 세계에 사는 자들의 전형이 있고 그것은 자기와 다르므로 그래서 그랬을 거라고 상상하는 거야.
여전히 어려워하는구나. 너라면 다를 줄 아는 거겠지.
그러나 네가 다른 게 아니란다. 다만 그런 상황이 너에게 없었을 뿐.
-p.49~90
이어서 나오는 <엿보는 손>은 소름이 돋았다. ‘나’는 ‘유제호’라는 작가가 자신의 작품을 표절했다는 의심을 한다. 그래서 그에 대한 메일까지 보내놓은 상황이었다. 하지만 긴 시간이 흘러 온 답장에는 놀라운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유제호라는 작가가 글을 쓰는 데 영향을 주었던, 그의 아버지에 대한 일화였던 것이다.
그는 아버지를 이해하기 위해 그의 아버지가 읽던 글들을 따라 읽었는데, 그렇게 시작한 자서전 읽기로 이어졌다는 이야기다. 대문호들의 자서전을 읽고 쓰다가, 어느덧 ‘나’의 생각과 행동을 예측하게 만들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의 생각을 예상하며 글쓰기가 가능해졌더라는 이야기였다.
어떤 에세이에서 그런 말을 읽은 기억이 있다. ‘만 원으로, 책 한 권으로 한 사람의 인생과 생각을 볼 수 있으니 독서는 얼마나 값진 행위인가.’라는 식의 문장이었던 것 같다. 물론 그렇다고 그 사람의 행보까지 예측하는 것은 어려울 것 같지만. 추리 소설 같은 장르소설에서 같은 작가의 글을 연이어 읽다보면, 이 장면에서는 이렇게 쓸 것 같다라던가, 이 캐릭터는 어떤 장치일 것 같다가 보이기 시작하는 것과 같은 느낌일까.
그런 생각도 살짝 들었고, 한편으로는 어떤 방식으로든 영향을 받고 살아가는 인간의 삶이 떠오르기도 했다. 예컨대, 어떤 글이나 영상을 보면서, ‘나도 저 사람처럼 되고 싶다.’ 혹은 ‘나도 저렇게 행동해 볼까?’라는 식으로 살기도 하는 모습들 말이다. 또는 어떤 장면이나 이야기를 듣고, ‘다음에는 어찌어찌 되겠구만.’하면서 타인의 행동을 적당히 예측한다거나, 책을 읽으면서 다음 이야기를 예측할 수 있다거나 하는 행위들.
결국은 내가 언젠가 읽고 듣고 본 이야기들이 차곡차곡 쌓여서, 무언가를 예측한 것인데. 꼭 내가 처음 발견한 일인 것 마냥 들뜨는 일들. 참신한 글을 쓰거나 아이디어를 냈는데, 알고 보니, 누가 이미 썼다거나 만들었던 것들이었던 것인 경우들.
마치 ‘타인’이 ‘나의 것’을 ‘베낀 것’ 같지만, 결국 모두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결국 우리 모두는 앞선 세대의 길을 같은 모양새로 걸어가고 있을 뿐일 텐데 말이다.
이어서 나오는 <좋은 사람>부터 <무언가의 끝>, <그 개와 같은 말>, <거기에 있어>, <외>, <말하는 사람>, <불가능한 세계> 모두, 읽으면서 계속해서 ‘의구심’을 만들어 낸다. 내가 불신이 너무 깊은 사람이라 그런 건지 모르겠지만.
그리고 각 장마다 어떤 상황을, 대상을, 혹은 자신을 판단하는 인물들의 시점을 따라가다 보면 더욱 그런 생각이 강해진다. 그리고 타인이나 어떤 상황에 대한 의심을 넘어, 자기기만 행위까지 얼핏 보인다.
은우는 자신의 온전한 희생으로 무영이 회복되길 바랐다. 당신은 잘해낼 거야. 내가 있잖아. 그것은 스스로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는 말이기도 했다. 이 사람에게는 내가 필요하다. ...(중략)... 무리하다 싶을 만큼 은우는 간호에 열심이었다. 의무감 같은 불순한 감정이 들 때마다 자신을 더욱 혹사시켰고 이것은 온전히 우리의 문제이며 마땅히 지켜져야 할 도리라고 마음 깊숙이 새김질했다.
그럼에도 돌본다는 행동이 주는 우월감은 어쩔 수 없었다. 은우는 되도록 무영에게 그것을 들키지 않도록 노력했다. -p.181<거기에 있어>
<거기에 있어>는 신혼여행을 떠났다가 불운한 사고로 팔을 잃은 남편 무영과 아내 은우의 이야기가 나온다. 은우는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무영을 도우려고 노력한다. 의무감에 우월함은 어쩔 수 없지만, 그가 힘들어하지 않도록, 티를 내지 않도록 열심이다. ‘우리는 잘 될 거야.’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불안하면서도 조용하던 무영 태도가 갑자기 마지막 장면에서 날카롭게 변한다.
넌 늘 그런 식이지. 그때도 그랬어.
뭐라고?
넌 늘 네 생각만 하잖아. 뭐라도 했었어야 해.
돌아보는 무영의 시선이 자신을 향하는 것인지, 아니면 더 먼 뒤편인지 은우는 확신할 수 없었다.-p.198<거기에 있어>
연이은 작품들 역시, 이런 식으로 계속해서 의심을 불러일으킨다, 누구의 시선이 맞는지 모르겠다. 작중 ‘나’는 계속해서 어떤 인물을 판단하고, 나의 행위가 ‘적당’하다고 하고, ‘나’는 그 사람을 이해하고 생각한다. 하지만, 항상 뒷부분에는 그에 대한 반론이 나온다.
‘네가 어떻게 알아?’, ‘넌 그러지 말았어야 했어.’
....라는 식의 이야기 들이다.
근래 ‘역지사지’라는 용어에 회의감을 느끼곤 한다. 내가 그 사람이 되지 않는 한 완벽한 이해란 있을 수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세상이 복잡해지면서, 답을 내리기 더더욱 어려운 상황이 되는 것 같다. 양쪽을 다 보고는 ‘정의’를 내릴 수 없는 상황이다.
사과는 오른쪽에서 봐도 사과이고, 왼쪽에서 봐도 사과인데. 오른쪽은 빨갛고, 왼쪽은 아직 덜 익어서 초록색이니, 오른쪽에서는 다 익은 사과라고하고, 왼쪽에서는 아우리 사과라고 싸우는 걸 보는 기분이다.(비유가 너무 저렴한.)
무튼, 현대 사회의 복잡하고 불안정한 모습들이 잘 드러난 작품이었다. 제목 <그 개와 같은 말>은 단편적이고 불안정한 판단을 내릴 수밖에 없는 현대인들의 ‘그 말’들을 빗댄 것은 아닐는지, 그런 생각이 들었다.
<본 서평은 현대문학(출판사)의 문학독후로 활동하며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자유롭게 작성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