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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실의 시대 -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에 대한 최고의 질문들
로버트 루트번스타인 외 지음, 마이크임팩트 / 마이크임팩트북스 / 2016년 8월
평점 :
상실의 시대 : 그랜드 마스터 클래스
출판사_위즈덤하우스
1 책 소개
"중요한 것은 결코 질문을 멈추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깨닫지 못하는 사이 지켜야 할 소중한 것들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천민자본주의와 극단적 이기주의, 도덕적 해이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개인의 자존감은 낮아지고 사회의 정의가 무너졌으며, 서로에 대한 신뢰가 깨졌습니다.
이번 컨퍼런스의 목적은 이처럼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을 헤아리고 어떻게 하면 그것들을 되찾을 수 있는지, 혹은 이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지, 질문을 던져보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상실의 시대>는 그 삼 일간 일곱 명의 강연자와 청중이 함께한 치열한 고미노가 성찰을 고스란히 담아낸 책입니다. - 들어가며 중에서
2 리뷰
총 7장으로 구성되어 있는 이 책은 '그랜드 마스터 클래스'에서 선보인 7명의 강연을 담고 있었다.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자신의 분야에 입각해, '상실의 시대'라는 주제를 토대로 이 시대를 살아가는데 필요한 질문들을 던져보고 있는 것이다.
요사이 한창 인문학 서적에 관심이 생기기 시작하고, 지금까지 먹고 살기에 빠듯하다고 외면해 오던 사회 문제를 마냥 모른 채 살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던 차였다. 그래봤자 내가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얼마나 있을지 의문이다.
하지만,적어도 현재 어떤 생각을 가지고 이 시대를, 내 삶을 살아가야 할지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할 수 있도록 첫 걸음을 연습할 수 있도록 도와준 책이 된 것 같다.
1장 로버트 루트번스타인_창의력의 상실과 회복
첫 장은 창의성 연구의 대가인 로버트 루트번스타인'이 들려주는 창의력의 상실과 회복에 대한 질문을 받는 것으로 시작된다. 이 장에서는 현재 새로운 경제 패러다임을 맞이하고 있는 이 시대에 대한 논의와, 앞으로 필요한 창조와 지식 역량을 갖출 준비가 되었는지, 그리고 우리가 익히 오해하는 창조, 창의성의 오해와 진실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다.
현재 4차 혁명과 함께 현재 인류는 큰 전환기를 맞고 있다. 이는 종전의 생산 경제 시대를 지나서 지식경제로의 전환이다. 제조업이 경제의 중심이던 지난 경제사회에서는 반복되는 대량 생산 시스템을 어떻게하면 더 효율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지가 관건이었다.
하지만, 현재 맞이하고 있는 지식경제는 이전의 제조, 생산 수단과는 엄연히 다른 경제 체제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첨단기술의 통합을 기반으로 하는 경제, 이 경제 체제에서는 창의적인 개인과 소집단, 기업들이 서로 맞물리는 네트워크로 조직되었다가, 끊임없는 혁신 과정에서 연결과 단절을 반복하게 된다는 것이라고 강연자는 말한다.
즉, 더 이상 지금까지 해오던 완벽한 암기와 공장의 기계같은 효율적인 동작 시스템으로서는 이 경제 흐름에서 살아남기 어렵다는 것이다. 변화하는 환경과 혁신 속에서 누구보다 빨리 적응할 수 있는 적응력과 다양한 정보와 수단을 새로이 융합하고 창조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내 경우는 1장의 이야기가 가장 흥미로웠다. 창조, 창의에 대한 논의가 이 시대에 필요한 역량으로 부상하고 있기도 하고, 내가 꿈꾸는 미래를 위해서라도, 내 자신에게 있어 풀어야 할 숙제라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였는지, 강연자가 던지는 질문과 창조에 대한 오해를 풀기 위해 던져준 '창의성에 댛나 여섯가지 신화'는 매우 흥미로운 이야기였다. '모차르트 신화, 영감 신화, 천재 신화, 생산 신화, 전문가 신화, 신동 신화'가 그 예였다,
이 사례들을 통해 내가 들은 메시지는, 창의성이라는 것이, 태생적으로 주어진 것만은 아니며, 그 분야의 전문가들만의 전유물도 아니라는 점이었다. 단, 다양한 지식들을 빠르게 습득하고 응용하며 융합할 수 있는 열린 사고를 갖고, 끊임없이 노력하고 시도하는 사람들에게서 나타난 다는 점이었다.
물론 다른 독자들은 또 어떻게 메시지를 받았을지 모르겠다. 이 장을 두 번재 읽으면서 전해받은 메시지는 저 내용이었다. 또한, 인상 깊었던 '생산 신화'. 이는, 창의성이 문제 해결 능력이며, 결과 지표라고 생각하는 오해가 있다는 내용이었다.
바로 앞의 사례들과 함께 느낀 것은, 저런 생각 때문에, 소위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통해 어떤 결과를 내야 한다는 압박감이 제대로 된 문제를 볼 수 없도록 만들었던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단기 성과를 내도록 유인하거나, 본질을 흐리게하고 미봉책을 내는데 일소한 것은 아닌지. 목적과 수단을 주객전도하는 길로 이끈 것은 아닌지. 그런 반성을 하는 시간도 갖게 되었다.
끝으로 '혁신교육'에 대해 이야기하며 마무리하고 있는데, 혁신 시대를 살아가는 시기에 앞으로 필요할 교육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이 부분은 두 페이지에 걸쳐 정리가 되어있었는데. 이 부분을 읽는데 많은 생각이 지나갔다.
개중 하나가 코딩을 배우는 유치원, 초등학생들에 대한 기사였다. 아직은 아주 좁은 식견이지만, 개인적으로 내가 보고 있는, 최근 우리나라 교육과 기술 부분에서 변화 양상 기점은 '알파고와 이세돌 대국' 전후로 또 한번 기점을 맞이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전까지 100만원을 상회하는 고가의 청담동 '영어 유치원'을 보내던 엄마들의 모습이 나오더니, 이제 유치원생들에게 '코딩'을 가르친다고 한다. 물론 그 전에 알파고 이후 우리나라도 소프트웨어 교육을 시켜야 한다며 초등학교에 컴퓨터나 패드 같은 기기들을 보급하고 교육을 늘린다는 기사를 많이 접하기는 했다. 그런데 하다하다 유치원 코딩이라니.
물론 아이들의 가능성을 사전에 발견하고 교육하는 과정 자체를 나쁘다고 보지는 않는다. 다만, 이게 진짜 '창조 경제, 혁신 시대'에서 요하는 '창의성'을 기르기 위한 방법이 맞는 걸까. 그런 방법이 들었다.
문과생인 내가 '코딩'에 대해서 아는 바란, 공대 친구로부터 들은 JAVA나 C++의 나열, 우스갯 소리로 '알파고'랑 대화하는 문자라고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한게 다긴하다. 하지만, 그 코딩 교육의 본질은 프로그램을 구성하는 논리와 사고력에 있다고 분명히 들었다. 하지만, 지금 하고 있는 건 결국, 알려주는 대로 그 언어들을 '나열'하는 방법만 이어지는 것은 아닌지 우려된다.
한국의 교육 시스템 자체가 아주 잘못되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단시간의 압축 경제를 일궈낸 그 기반에는 한국의 교육도 일정 부분은 일조했다고도 생각하기 때문이다. 다만, 그때 '생산 경제 시스템'에 맞췄던 것처럼, 이번에도 '지식 경제 시스템'에 맞는 한국만의 교육 시스템을 구축할 수는 없는 걸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마찬가지로, 암기가 필요한 부분은 지금까지 교육 방식에서 쌓인 노하우를 활용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다만, 여기에 더 필요한 것은 어쩌면 사회, 문화적인 부분일지도 모르겠다.
그 부분에 대한 생각으로는 우리가 압축 경제에서 놓쳐버린 이해와 존중, 관용이라고 생각한다. 그건 지난 날 빨리 빨리 성과가 나지 않으면 지치고 포기해버리고 단념해버린 채, 가능성을 닫아버린 나 자신에 대한 자기 성찰이기도 하다.
이처럼 '창의성, 지식경제, 창조경제'는 경제, 사회, 문화 등 다양한 환경에서 패러다임을 요구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2장 정여울_나다움을 잃어버렸을 때
2장에서는 상실의 시대에 '나'를 잃어버린 채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사람들에게 던지는 질문을 받게 된다.
나 다움은 무엇인가.
어떻게 보면 세상 간단해 보이는 이 질문을 던지기 위해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렸을 것 같다고 말한다. 진정한 자기 자신은 어떤 것인가에 대해서 알아가는 것은 그만큼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때로는 마주하고 싶지 않았던 모습이 내 모습이기도 하고, 나라고 생각했던 모습들이 진짜 '내 모습'이라고 하기 어려울 때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저자는 '나'를 알아가는 여정에 '용기'가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다.
한 예로, 나 다움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파울로 우첼로의 <용과 싸우는 성 게오르기우스>의 작품을 소개한다. 나를 만나는 과정은, 용사가 공주를 구하러 가는 길목처럼 무섭기도 하지만, 용을 물리치고 마침내 공주를 만나 느끼는 감동처럼 다가오기도 한다는 것이다.
더 놀라운 것은, 나를 만나는 과정이 다사다난한 것이 험난한 여정 탓도 아니고, 목숨을 걸어야 하는 용과의 사투 때문만은 아니라는 점이다. 공주를 구하기 위해 떠나는 왕자도, 내가 싸워야 할 용도, 그리고 비로소 만나는 공주도. 내가 모르는 내 자신들이라는 점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가 자신을 마주하는 것은 항상 어렵다고 한다. 나약하고 어두운 일면, 즉 나의 외부 모습인 페르소나와 대치되는 '그림자'를 받아들이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나 역시 그러했던 것 같다. 아주 조금씩이지만 사회생활도 해보고, 대외 활동을 하며 여러 사람들을 만나고 부딪히면서, 조금은 발전된 내 모습을 보고 싶어했다. 하지만 번번히 인간관계에서 상처받는 내 자신을 보면서, 한심하고 답답해 내 모습을 부정하고, 저 심연에 묻어버리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타인들은 잘 살아가는데 왜 나만 이렇게 상처받고 한심하게 우울하나 싶은 생각에.
하지만, 계속해서 사람들을 만나고, 상처들에 딱지도 붙고, 생각도 달라지고, 최근에는 책을 읽고 내 생각을 정리하는 시간들을 가지면서, 그런 모습들도 다른 사람들과 다를 바 없이 같은 '인간적인 모습'일 뿐이라는 점을 깨닫게 되었던 것 같다.
그랬더니 자연스럽게 나를 옭아맸던 내 그림자도 당연하게 수용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처음 서평 신청을 할 때, 강하게 들었던 생각이 있었다. 이건 앞 장과도 살짝 이어지는데, 개인의 개성과 창의성이 요구되는 시대에 우리는, 나는, 되려 획일화된 모습으로 살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하는 그런 질문과도 같은 생각이었다. 그렇다고 모두가 그렇다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주체적인 생각을 갖지 않고, 마냥 '취업'만을 위해 사회를 '취업'이라는 프레임에 넣고 사고를 맞추려던 내 안일하고 수동적이었던 태도에 대해 부끄러움을 느끼면서, 최근 갖게 된 생각이었다. 그래서 저자의 말마따마, 독서도하고, 여행도 다니고, 글도 쓰면서 정말 '나'에 대해 탐구하고 알아가는 행동들이 정말 유의미한 활동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3장-7장
신념 과잉, 소통 부재의 시대_정관용 / 사라진 정의_표창원 / 도시의 정의를 말하다_김정후 / 기생충이 사라진 세상_서민 / 상실의 시대를 위한 제언_이진우
1-2장이 가장 인상적었던 장이어서 많이 길어진 것 같다. 이후 3~7장은 '토론'과 '정의', 그리고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도시'의 의미, 기생충을 통해 보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데 필요한 정신, 그리고 마지막 이 시대를 살아가는 데 필요한 '가치관'에 대해 정리하고 있었다.
3장, 토론에 관련된 장을 보면서는, 지금까지 오해하고 있던 '토론'에 대한 무거운 짐을 많이 내려놓은 기분이었다. 가끔 토론과 관련된 TV 프로그램, 학생들 중심의 토론 경연을 보면서 항상드는 생각은 '나 같은 문외한이 어떻게 저런걸 해.'라는 생각이었고, 동아리 활동 때에도 토론 수업을 하거나 혹은 친구들이 토론 대회에 나가보자 하면 발부터 빼는 게 먼저였다.
하지만, 그건 그간 내가 봐왔던, 책으로 말하면 '잘못된 토론(자기 세력의 입맛에 맞추고, 그들만의 의견을 대변하기 위한 토론)'들을 봐왔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편히 생각하면, 오늘 먹을 밥을 정하는 것부터 정책적인 토론까지 그 토론의 범주가 실로 다양한 데 말이다.
중요한 것은 내 신념이 과연 옳은 것인지를 꾸준히 의심하고 다양한 의견에 귀 기울이며 문제에 깊이 토론하는 자세라는 걸 배웠다.
4장, 사라진 정의에서는 솔직히, 중요하지만 외면하고 있던 '정의'에 대해 처음으로 생각하는 계기가 된 것 같다. 나는 과연 얼마나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이 '정의롭다.'고 생각해본 적이 있는지. 과연 무엇이 정의인지. 선과 악을 나누는 기준은 무엇인지. 그런 점들에 대해 고민하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내게 심판권은 없다. 다만 '선과 악'이 극명하게 보인다고 생각했던 문학 작품이나, 사회 문제들이 새롭게 다가오게 만들었던 강연이었다.
5장, 도시의 정의를 말하다에서는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는 과연 '건강한가?'라는 질문이 의미심장하게 다가왔다. 도시의 본질, 그것은 그 곳에 살고 있는 시민들의 삶의 질을 고려한 공간이라는 것이다. 퐁피두 센터, 구겐하임 미술관, 테이트 모던이 공통적으로 보여준 바는 그것이었다.
최근 '혁신 도시'가 줄기차게 조성되고, 발전해가는 과도기에서 과연 그 도시들은 제 역할을 잘 하고 있는 것일까? 그런 생각을 갖게 해준 책이었다.
6장, 기생충이 사라진 세상에서는 마냥 우리가 '해악'이라고만 생각했던 기생충들의 삶의 모습들을 보면서, 인간이 배워야할 점들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진다. 마냥 징그럽고, 때론 더럽게 느껴지던 그 생물체들도 자신들만의 질서와 삶의 방식이 있다는 점들이 신선하게 다가왔다.
7장, 상실의 시대를 위한 제언에서는 기승전결에서 '결'에 해당하는 부분으로 이 상실의 시대를 살아가는 과정에서 필요한 가치관과 태도를 정리해주고 있었다. 세계적인 메가트렌드가 개인화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를 옭아매는 집단주의 속에서 어떠한 생각과 태도로 살아가야 하는지, 그런 점을 주안점으로 두고 있었던 것 같다.
먼저, '개인주의'가 '이기주의'와 혼동되어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앞에서도 살짝 나온 것처럼, '개인주의'를 단체에서 자신만을 생각하는 '이기주의'가 아닌, 나다움을 찾고, 사회에서는 한 개성으로서 존중받을 수 있는 사상으로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무리 / 주저리
책을 읽는 동안 생각없이 사는 나에 대해 반성하게 되었다. 나는 철저히 집단주의에 갇혀서, 변화하는 현실을 마주하려고 하지 않았고, 나를 돌아볼 여유는 없다고 못 박아놓으면서 내 생각을 무시해놓고, 존중받지 못한 내 자아에 대해서는 상처받았다고만 생각했다.
막상 나를 상처준 것은 나 자신이었고, 잘못한 것은 환경이 아니라, 움직이지 않은 내 자신의 탓도 일정부분 있었는데, 내가 상처 받지 않으려고, 모든 문제를 외부의 탓으로 돌렸다. 타인이 나를 이해해주지 못한다면서, 나는 정작 어떤 '나'를 이해받고 싶었는지 몰랐다.
모든 사고를 '취업/생계'라는 패러다임에 가둔 채 바라보았다. 사고는 굳어지고, 시야는 좁아졌다. 하지만, 되려 여러 번의 무수한 실패를 겪으면서,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내 방식대로 책도 읽고, 사람도 만나고, 여행도 다니면서, 어떤 현상, 문제에 대해 적어도 '좋다/싫다'로 시작하며 조금씩 내 생각을 정리하기 시작한 것 같다.
또, 마냥 옳다고 믿었던 부분을 의심하기도하고, '절대'라는 단어를 함부로 쓰지 않기로 했다. 모든 문제에 '절대 선/악', 완벽한 정의는 없다는 생각으로 현상을 보는 연습을 하기로 했다.
그래서 계속해서 질문을 던지는 연습을 해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되었다. 끊임없이 질문하고 되물으며 내 생각의 지평을 넓히는 일, 그렇게 나를 알아가는 여정을 또 떠나기로 했다.
<본 서평은 위즈덤하우스(출판사)가 진행한 서평 이벤트에 당첨되어 자유롭게 작성한 글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