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트라빈스키, 그 삶과 음악 우리가 사랑하는 음악가 시리즈 9
데이비드 나이스 지음, 이석호 옮김 / 포노(PHONO)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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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해서 많이 알려진 음악가에 대해서 그의 삶과 음악에 대해서 자세하고 친절하게 소게하며 CD와 함께 들으면서 읽어가면서 그 사람에 대해서 알아갈 수 있도록 해 놓은 phono시리즈 <스트라빈스키, 그 삶과 음악>이라는 책입니다.

 

1882년 6월 17일 페테르 부르크 근교에서 태어났으며, 부모는 법률가가 되기를 희망했으나, 음악에의 동경과 그 재능에 따라 19세에 림스키 코르사코프에게 인정받고 사사하며 생애의 방향이 정해졌습니다. 스트라빈스키의 아버지는 페테스부르크 궁정 오페라단의 베이스 가수였으며, 9살붙 피아노를 배웠다고 합니다.

 

스트라빈스키의 가장 큰 특징은 강렬한 리듬과 원시적인 음을 중요시하며, 민족 무용에서 보듯 활력있고 기계적인 리듬을 특징으로 하는 ‘원시주의’라는 새로운 음악형식을 확립시켰으며 이 무렵 스트라빈스키의 음악들은 유럽의 현대 음악사에 커라단 자극을 주게 됩니다.

 

가장 큰 논란과 그를 대표하는 작품은 초연 당시 연주 중 온갖 야유를 받으면서 격론이 오갔던 발레음악. <봄의 제전>입니다.

 

1913년 <봄의 제전>이 공연되자 객석에서는 대소동이 일어났고, 청중들은 풍요를 비는 이교도의 의식에 대한 ‘원시적인’충동과 계속적인 불협화음, 타악기의 공격적인 리듬 등에 거세게 항의 했고, 이들은 흥분하여 야유하고 소리를 질렀으며, 심지어는 서로 치고 받는 육박전을 벌이기도 하였답니다. 첫 초연 당시 이정도의 관객들의 거부감으로 인해 연주 도중 유례없는 야유와 항의를 받았던 발레곡이죠.

어떤 초연을 지켜본 한 청중은 “나의 뒷자리에 앉은 사람이 음악의 리듬에 맞추어 내 머리를 주먹으로 세게 때리고 있었는데, 나도 그 상황에서는 그 주먹이 내리치는 통증을 느낄 수 없었다.”라고 말했답니다.

생상스는 자리를 박차고 나갔고, 드뷔시는 성난 관객들에게 자제할 것을 요구했고, 라벨은 스트라빈스키를 천재라고 외쳤다고 합니다.

<불새>를 극찬했던 드뷔시 역시 이제 스트라빈스키를 “젊은 야만인”이라고 표현하게 됐죠.

연주되는 동안 온갖 논쟁과 난투극이 벌어졌던 역사상 유례없었던 공연장의 모습이었죠.

 

그런데 이토록 관개를 동요시켰던 이 작품의 진가는 곧 인정받게 됩니다. 1년 후 <봄의 제전>은 몽토의 지휘로 음악회용으로 연주되어 열광적인 환영을 받았고, 새로운 음악의 걸작품으로 자리잡게 되었으며, 그리고 전 세계의 작곡가들에게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스트라빈스키는 “나를 혁명가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습관을 깨뜨리는 사람에게 모두 혁명가라는 딱지가 붙여 준다면, 무엇이낙 자기 할 말을 하기 위해 인정된 관례의 울타리 밖으로 나가는 예술가는 누구나 혁명가로 볼 수 있단 말인가?”

 

이제 초연 100주년을 맞은 <봄의 제전>은 스트라빈스키의 작품 중 가장 음악사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는 곡이 되며, 러시아 발레반과 함께 불멸의 금자탑으로 추앙받게 됩니다.

 

전쟁통 속에서 러시아 조국에서 떠난 후 몇 십년 만에 돌아간 스트라빈스키는 누구보다 러시아적이며 어머니 러시아를 누구보다 사랑하며 가장 잘 이해하며 그 러시아를 음악속에 넣은 몇 안되는 음악가이죠.

러시아어를 쓰고 러시아로 생각하는 자신은 러시아적일 수 밖에 없다는 그의 말이 마음에 뜨겁게 다가옵니다.

그는 고국의 혁명에도 무관심하였고, 그가 미국에 머문 것도 전쟁으로 작곡활동에 방해받지 않으려 했을 정도로 오로지 음악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스트라빈스키만큼 비평가나 학자의 혹독한 비판을 받은 작곡가도 드물고 그에 대한 긍정과 부정의 진폭도 매우 넓은데 그것은 그의 작품마다의 “변모”가 한 몫 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에는 그가 20세기 음악의 참된 혁신적 존재의 아이콘이며, 중요한 시점에서 항상 새로운 문제를 제기하고 결정적인 방향을 제시해 온 예언자임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으며 인정을 인정할 수 밖에 없으며, 현대 예술의 한 획을 긋는 인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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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군대의 장군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81
이스마일 카다레 지음, 이창실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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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책을 읽으며 아직도 현재진행형인 우리나라의 6.25전사자 유해발굴에 대해서 쓴 <죽은 자들의 증언>이 생각나서 옆에서 같이 찍어봤습니다. 여러모로 많이 비슷하죠.

 

이 책은 알바니아 출신의 세계적인 작가 이스마일 카다레가 1963년에 발표한 첫 장편소설. 문학을 통해 조국 알바니아의 역사와 정서를 표출해온 카다레의 문학세계에서 출발점이 되는 작품이자, 이후 발표한 그의 다른 걸작들의 탄생을 암시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20여 년 후, 알바니아에 묻힌 자국 군인들의 유해를 찾아 나선 어느 외국인 장군의 시선을 통해 전쟁의 추악함과 부조리성을 폭로하는 이 소설은 알바니아에서 발표된 직후 불가리아, 프랑스, 이탈리아 등 여러 나라에서 번역 출간되며 카다레에게 세계적 명성을 안겨주었고, 1999년 프랑스의 르몽드 지가 뽑은 '20세기 100대 소설'에 선정되기도 했다죠.

 

“지금 나는 죽은 자들로 이루어진 한 군대를 지휘하고 있다. 비닐 가방이 군복을 대신하고 있긴 하지만 말이다. 테두리는 검고 흰 줄이 두 개 쳐진, 올림피아 사에서 특수 제작한 푸른 가방. 처음에는 관 몇 개가 전부였지만 차츰 중대와 대대가 형성되었고, 이제는 연대와 사단이 완성되어가고 있다. 비닐 가방에 든 일단의 군다가..." (P. 157)

 

책은 이국의 한 장군이 알바니아란 낮선 땅에 묻힌 전사자들의 유해를 발굴하는 이야기를 통해 전쟁의 추악함과 부조리함을 폭로하고 있습니다. 성스러운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온 장군의 시선이 변화해 가는 과정을 통하여 전쟁의 참모습을 느껴볼 수 있는데, 군대를 다녀온 분들은 과거의 자신의 군대의 관한 인식의 변화를 추억하게 되는 듯한 느낌을 받을 것 같습니다.

 

“수많은 어머니들이 아들의 유해를 기다렸다. 이 유해를 봉환해 그들에게 돌려주어야 할 사람이 바로 자신이었다. 그는 이 성스러운 과업을 의연하게 완수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었다. 동족 중 단 한 명도 잊히거나 이 이국땅에 버려져서는 안 되었다. 아! 이 얼마나 숭고한 임무인가!"(P.13)

 

소설 초기, 장군은 이 영광스러운 임무를 맏은 것을 자랑스러워하며 작업에 착수한다. 알바니아로 오기 전, 많은 이들이 과거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시신을 찾을 것을 부탁했는데, 그중 명문가의 자제로, 주변 평판이 좋고 미모의 미망인을 둔 Z대령의 이야기가 마음에 남죠. 하지만 장군은 힘겨운 작업 속에 점점 지쳐가고, 과거 침략자를 바라보는 알바니아인들의 따가운 시간은 힘들기만 합니다.

 

장군은 이 낯선 땅에서 많은 이야기를 듣고 대면하게 됩니다. 강제로 끌려와 어이없게 죽은 매춘부, 탈영하여 농장의 머슴으로 살아갔던 이름 모를 병사, 알바니아 곳곳에서 학살을 자행하는 청색부대 등은 그에게 차츰 전쟁의 본모습을 일깨워주고, 한 결혼식장에서 만난 노파의 울부짖음으로 Z대령의 본모습과 함께 전쟁의 추악함에 눈을 뜨게 됩니다. 결국 과거의 영광을 잃은 체 모든 것이 무의미해지고 질려버린 장군은 마지막까지 시비를 걸고 추태를 부리게 되고 지친 마음으로 알바니아를 떠납니다.

 

매체나 포장된 정보들로 전쟁이란 ‘멋지고 정의로운 것’으로 잘못 알려지게 되는 경향이 많은 것 같습니다. 영광스러운 영웅들의 서사시, 전장 한 가운데서 생겨나는 동료애, 자신의 조국을 위해 장렬하게 전사하는 병사 등 이러한 것들은 우리에게 전쟁에 관한 그릇된 환상을 품게 하기에 충분하죠. 허나 땅 속 깊은 곳 파묻힌 해공이야 말로 전쟁의 본 모습입니다. 전쟁이란 결국 추잡하고 부조리한 폭력에 지나지 않으며 이 책 <죽은 군대의 장군>이 보여주는 진짜 얼굴에 주목해야 할 것입니다.

 

“뜻밖의 악운이 닥치기 전에 여기서 떠나게 해주십시오, 장군은 이따금 마음속으로 기도를 올렸다. 자신은 일단의 군대가 오롯이 빠져 있는 깊은 잠을 흔들어 놓기 위해 먼 곳에서 온 사람이었다. 지도와 명단을 손에 든 그는 이들을 덮고 있는 흙에 쇠붙이 연장을 내리치고 있다. 이런 방해를 정작 그들이 원하는지 아닌지도 모르는 채."(P.224)

 

늘 전쟁과 같은 시련 속에 시달려 올 수 밖에 없던 알바니아의 모습, 그리고 전쟁은 아니지만 여전히 평화를 찾지못한 알바니아 인들의 모습이 생생히 그려지고 있는 <죽은 군대의 장군> 바람잘 날 없는 시련의 역사를 가진 알바니아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그려낸 소설이 이 책 <죽은 군대의 장군>이고 그래서 이스마엘 카다fp를 발칸의 호메로스라고 불리게 된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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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수업 - 잘 물든 단풍은 봄꽃보다 아름답다
법륜 지음, 유근택 그림 / 휴(休)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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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귀비꽃이 연상되는 빨간 꽃들이 가득 메우고 있는 독특한 분위기의 책 표지가 인상적이며, 부제목에서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듯이, 이 책은 주로 인생의 중반과 후반부를 살고 있는 이들이 가진 고민거리에 대해 스니밍 해답을 주는 방식의 책입니다. 스님은 어떤 해답을 주고 있을까요?

 

내 인생의 주인은 바로 나에요. 그래서 내가 내 인생을 행복하게 할 책임도 있고 권리도 있습니다. 그런데 자꾸 이런저런 이유를 붙여서 자신을 괴롭히면 행복해야 할 내 인생을 내팽개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까 ‘왜 사느냐’는 질문으로 삶에 시비를 거는 대신 ‘어떻게 하면 오늘도 행복하게 살까’를 생각하는 것이 삶의 에너지를 발전적으로 쓰는 길입니다. 그것이 내 인생에 대한 책임과 권리를 지닌 주인으로 사는 것이기도 합니다. (P. 17)

 

정말 그렇습니다. 내 인생의 주인은 바로 저입니다. 정말 중요한 진리인데도 머리로만 알고 있어서 그럴까요. 항상 잊어버리곤 합니다. 생각해보면 어느 순간 내 인생의 주인은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되어 있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다른 사람의 시선과 평가를 의식해서 내가 바라고 하고 싶은 것 보다는 다른 사람이 바라고 기대하는 것을 먼저 했던 적이 더 많았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해서 내가 진정 행복하다면 상관이 없지만, 내가 진정 행복하지 않다면 문제가 아닐까?

 

완전한 행복에 이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베푸는 마음만 내고 기대하는 마음이 없어야 합니다. (P. 142)

 

스님은 단지 행복이라고 말하지 않고 왜 완전한 행복이라고 하는 걸까? 완전하지 못한 행복도 있다는 말일까? 그렇다면 완전하지 못한 행복은 무엇이고, 완전한 행복은 무엇일까? 누군가에게 내 시간을, 내 마음을, 내 정성을, 내 물질을 베풀 때 기대하는 마음이 있다면 완전하지 못한 행복이고, 기대하는 마음이 없다면 완전한 행복이 아닐까?

베풀면서 기대하지 않는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죠. 내 마음 속에서 인정이나 칭찬 또한 보상을 기대하는 마음이 자꾸만 고개를 쳐들기 때문이죠. 인정이나 칭찬 또는 보상이 기대하는 마음에 부응하지 못할 때 때로는 원망하고, 때로는 실망하고, 대로는 미워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스님의 글을 마음에 담아두고 노력해야 할 일인 것 같습니다. 완전한 행복에 이르기 위해서도 말이죠.

 

우리의 삶이란 인생에 어떤 일이 일어나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태도를 지니느냐에 따라 결정됩니다. 흔히 운명론을 말하지만 그 운명도 내 자신이 만듭니다. 어떤 일이 내 생에 주어지는가가 운명이 아니라 그것에 어떻게 대처하고, 해결하느냐가 운명입니다. (P. 253)

 

스님은 ‘어떤 태도를 지니느냐’에 따라 삶이 결정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무슨 일을 하든 누구를 만나든, 그 일을 하는 태도와 그 사람을 대하는 태도, 그것이 더 중요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물을 길어 오다가 넘어져서 쏟았을 때, 쏟아진 물을 아까워할 게 아니라 빨리 다시 물을 길으러 가야 합니다. 그것이 지나간 일을 두고 후회하거나 자책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는 길입니다. 그래서 과거로 돌아가지 말고 앞으로 나아가는 걸 자꾸 연습해야 합니다. (P. 256)

 

스님은 말하고 있습니다. 쏟아진 물을 그저 아까워만 하고 있을게 아니라 이미 쏟아진 물은 다시 담을 수 가 없으니, 후회해도 자책해도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빨리 다시 물을 길으러 가야만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이 다반사죠.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과거에 얽매여 있었던 것입니다. 나의 실수와 부족함을 알아차리고, ‘앞으로는 그러지 않고 잘하면 된다.’고 다시 나 자신을 몇 번이고 다독이고 힘내면 되는 것입니다.

 

어떤 일이 닥치든 거기에 구애받지 않고 자기 공부를 해나갈 때 우리는 자유로워집니다. 그래야 오늘보다 내일이 더 자유롭고, 오늘보다 내일이 더 행복해져요. 지금까지 어떻게 살았든, 남편이 어떻게 했든, 아내가 어떻게 했든, 자식이 어떻게 했든, 부모가 어떻게 했든 그것은 그들의 인생이고 나는 그 가운데서 나부터 행복해야 합니다. (P.273)

 

공감이 가는 부분입니다. 내가 행복해야 내 가족도 내 이웃도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다고 믿는다. 내가 아닌 남을 먼저 행복하게 해주면 나도 행복해진다고 생각하지만 내가 행복하지 않은데 남을 어떻게 행복하게 할 수 있단 말인가. 행복을 위해서도 나 자신을 끊임없이 바라보고 내 마음 상태를 바라보고 확인을 해야 할 것 같다.

 

중간 중간에 삽입된 그림들은 마치 만만치 않은 삶에 대한 여러 가지 걱정과 고민을 안고 사는 우리 마음을 나타내는 것 같다. 바라보면 편치 않은 그림도 있기 때문이다. 나만 그런가? 하지만 책을 읽고 덮는 순간 보이는 마지막 그림은 편안하게 느껴진다. 말 그대로 스님의 인생수업을 통해서 작은 깨달음을 얻었기 때문일까.

 

책을 통해서 만나는 스님의 글들은 화려한 수식어나 미사여구 보다는 담담하고 소박한 느낌입니다. 우리가 삶을 살아가면서 만나게 되는 갖가지 고민들에 대해 시원하고 명쾌하게 해결해 줍니다. 그 해결책은 거창하거나 실천하기 어렵다기 보다는 오히려 단순하고 어렵지 않다는 사실에 정말 감탄이 나옵니다. 진리는 복잡하지 않고 평범하고 단순하다는 사실에 다시 한번 공감합니다. 좀 더 인생의 후반부에 진입할 때 쯤 다시 이 책을 펼쳐보면 그때는 또 다른 방식과 느낌으로 와 닿을 것 같아서 다시 읽어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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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고 푸른 사다리
공지영 지음 / 한겨레출판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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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에 좋아하는 공지영 작가의 신작 소설을 읽었습니다. 그 가운데 일부를 이곳에 갈무리해봅니다.

 

책의 전체적인 내용은 서품을 앞둔 한 젊은 수사의 달고도 쓴, 뜨겁고도 차가운 인생 순례기를 엮은 소설입니다.

 

공지영 작가는 “젊은 시절 하게 되는 고뇌, 취직이나 이런 거 말고 인간 본성에 더 깊숙이 다가가는 고뇌에 대한 질문들을 하고 싶었다”며 “이 소설은 그런 질문들에서 시작된 한 청년의 순례기, 방황기 또는 어른이 되기 전 겪는 마지막 통과의례 같은 것”이라고 소개했었죠.

 

‘높고 푸른 사다리’라는 제목은 기독교와 밀접하다고 합니다. 사다리는 기독교 문화권에는 익숙한 개념이죠. 성서에 등장하는 야곱의 사다리는 지상에서 하늘에 이르는 통로이며, 사다리 앞에 놓은 ‘높고 푸른’이라는 수식어는 ‘쉽게 도달할 수 없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제목에서부터 기독교 영향이 강하게 베인 작품이나, 이 소설은 신자가 아닌 사람도 읽을 수 있다고 합니다. 실제로 최근 그녀는 한 스님으로부터 “이 소설을 읽고 한 번 더 하늘을 보게 되었다”는 호평을 받았다고 털어놓았습니다.

 

실제로 공지영작가는 대학교 1학년 때까지 열렬히 신앙 활동을 하다 18년을 방황하고 다시 종교로 돌아갔다고 합니다. 특히 사춘기에 신의 존재, 고통의 의미 등 종교적인 고민을 하며 ‘대체 왜?’라는 질문을 끝없이 던졌다고 합니다. <높고 푸른 사다리>를 쓰면서 그녀는 더는 ‘대체 왜?’라는 물음으로 고민하지는 않을 듯 하다고 말합니다. 소설을 쓰며 작가는 스스로 치유하는 느낌을 받았다고도 하죠.

 

다양한 관계 안에서 드러나는 사랑 이야기를 통해 ‘하느님께서는 대체 왜?’라고 던진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며 그러면서 성장해 나가는 그런 성장소설 같습니다.

 

특히, 이 책에서 감명깊게 읽은 부분은 주인공 남자가 주인공 여자에게 마음을 내뱉는 사랑고백부분인데, 원래 직설적이고 섣부른 사랑 고백 따위에 별다른 감흥이 없는 지라 이상하게 이 거칠고 투박한 고백에 마음이 흔들립니다.

아무 것도 재거나 계산하지 않고, 그저 손바닥을 내밀 듯 온 마음을 다해 내뱉는 고백, 말하자면 진심이 담긴 고백 같습니다.

 

 

소희의 그 말이 내 귓가를 울렸다. “우리”라고 그녀가 말했다.

나는 그것으로 세상 모든 것을 얻은 듯했다. “괜찮아.” 머리가 내 아픈 영혼에게 말하고 있었다.

내 가슴속으로 기도가 울려 나왔다.

 

슬퍼하지 않게 해줄게, 내가 지켜줄게.

내가 너를 위해 기도하고 너를 축복하고 너의 행복을 빌어줄게.

아프지 말아. 울지 말고 힘들어 말아. 예쁜 사람이니까 예쁘게 살아.

약속해. 네가 누구든 어디에 있든 누구와 함께이든.... 사랑할 거야. 영원히. (P. 103)

 

 

그 밖에도 <높고 푸른 사다리>에는 기억에 오래 남을 구절들이 많이 있습니다.

 

나의 하느님. 나는 악만을 저질렀습니다. 나는 악에 동의치 않고 그것을 사랑할 수도 없습니다.

당신은 나에게 쓰라린 공허를 느끼게 하였고 나로 하여금 그제야 비로소 슬픔을 맛보게 하였습니다.

그 슬픔은 나를 온통 벙어리로 만들었으며 사람들이 축제와 향연을 벌일 때면 더운 끈질기게 나를 괴롭혔습니다.

내가 베푸는 파티에서도 한 순간이 지나면 오히려 깊은 침묵에 빠졌고 마침내는 모든 것이 역겨워졌습니다. (P. 34)

 

네가 오만을 가지고 선을 행하느니 차라리 겸손으로 실수를 해라. (P. 42)

 

우리의 생을 뒤바꿔버린 사건이나 시간들을 통틀어 떠올려보면 그때는 보지 못했던 징후들이 마치 영화의 티저영상처럼 삶의 거리 여기저기에 깔려 있었다는 걸 깨닫게 된다.

살갗에 닿는 바람결로 봄을 느끼기 전에 이미 여기저기서 조그만 들꽃의 싹이 피어나고 뜻밖에도 양지쪽에 보랏빛 제비꽃이 피어난 걸 보게 되듯이.

그 징후들이 가지고 온 사명의 기호가 해독되는 것은 이미 사건이 종료되고 나서이거나 더 이상 돌이킬 수 없을 때라는 것이 삶의 비극이었다. (P. 44)

 

생애 대한 모든 해답은 언제나 고독과 고통 속에 있다. (P. 70)

 

내가 전에는 무엇을 알았다 해도 나는 지금 허무가 되었나이다.

내가 알고 있다고 생각한 모든 것, 내가 획득했다고 새악ㄱ한 모든 것, 내게 존재한다고 생각한 모든 것은 사라졌나이다.

내가 알고 있다고 생각한 모든 것, 내가 획득했다고 생각한 모든 것, 내게 존재한다고 생각한 모든 것은 사라졌나이다.

자존심도 자신감도 이렇듯 모래성처럼 허약함을 가르쳐 주시니 감사합니다.

이리하여 저를 다시 가난하게 무일푼으로 비참하게 만드신 하느님, 영광 받으소서. (P. 87)

 

이번에 5년이라는 시간이 흐르고 돌아온 공지영 작가의 신작 <높고 푸른 사다리>라는 책은 제게는 사랑 그러니까 내 사랑을 생각해보게 했고, 그 사랑을 소중하게 생각할 수 있었고, 그 사랑을 소중하게 채우고 싶다는 생각도 해보게 되었던 의미있고 뜻 깊은 시간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번에 감동으로 다가와 준 <높고 푸른 사다리> 너무 건조해지는 감성이 안타까우신 분이라면 꼭 한번 읽어 보시길 강력히 추천합니다.

더불어 오랜만에 좋은 책 한권으로 좋았던 하루였던거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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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 카레니나 세트 - 전3권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박형규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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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가정은 모두 고만고만 하지만, 무릇 불행한 가정은 모두 나름나름 불행하다.”

 

한 가정의 불화와 불행으로 부터 이 소설은 시작되고 있다. 가정은 무관심하게 그저 아내 돌리에게 맡겨둔 채, 외도를 일삼는 스테판.

그 불화를 막기 위해 오빠의 집으로 달려온 스테판의 동생 안나.

그러나 안나 또한 그곳에서 운명의 "불륜"의 사랑 - 브론스키를 만나고 만다. 그리고 브론스키를 사랑하는 여자, 돌리의 동생 키티. 키티를 사랑하는 남자 레빈.

진부한 사랑이야기로 시작하는 듯하나, 정말 그렇다면 이 소설이 세기의 명작이 될 수는 없었을 터 였을 겁니다.

 

특히, 첼리스트 장한나가 어릴 때 처음 톨스토이를 접한 이후 지금까지 많은 다른 작가들을 읽었지만, 톨스토이에 대한 자신의 사랑은 변함없이 점점 깊어지는 것 같아서 읽으면 읽을수록 톨스토이가 얼마나 사람의 심리를 깊이 꿰뚫어 보는지 느끼고, 그의 너무나도 인간적인 등장인물들에게서 많은 감동을 받는다고 합니다. 몇 년에 한번씩 꼭 정기적으로 다시 읽는 톨스토이는 그때마다 그녀에게 새로운 감동을 주고 자신이 얼마나 성장했는지 마음의 키를 재는 기분이라고 한다죠.

 

각각의 주인공들은 근대화의 시기의 러시아의 상류 지도계층의 모습들을 대변하며 보여 주고 있다. 급변하는 세계정세와 근대화 사이에서, 귀족과 관료로서의 그들의 가치관과 문화, 정치, 경제, 그리고 결혼생활의 모든 것들을 묘사하며 그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인간의 내면 깊숙한 곳의 여러가지 미묘한 갈등과 그에 대한 통찰이 탁월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읽으면서 내내 이렇게 섬세하게 인물들의 내면을 들추어내어, 그들이 판단하고 결정하는 삶의 모습들을 독자에게 여실히 보여주는 톨스토이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대문호라 칭함이 헛된말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19세기 러시아 문학을 좋아한다고 자처하면서도, 유독 톨스토이의 작품에는 근접할 수 없었죠. 도스토예프스키를 가장 좋아하는 연유도 있었고, 아직 그의 전집을 완독하지 못한 터라 그 이후에 톨스토이의 작품을 읽으려는 나름의 다짐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안나 카레니나>에 관한 찬사를 무시하기 힘들었고, 문학동네 세계문학 시리즈로 먼저 만나게 되었습니다. 결코 짧지 않은 책을 마주하는 것이 살짝 겁이 날 정도로, 톨스토이에 관해서는 무지했습니다. 19세기 러시아 문학에 어느 정도 익숙하더라도, 작품이 익숙하지 않은 작가를 만난다는 것에 저자의 유명세는 오히려 독이 될 뿐이죠. 톨스토이가 대표적인 예라고 할 정도로 짧은 단편집을 읽었을 뿐, 그의 작품을 온전히 만나는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이 소설을 읽었다는 후련함보다, 내가 가졌던 느낌이 무엇이었는지 또렷해져 혼란스러웠습니다.

 

<안나 카레니나>에 관한 평가 중, 저의 호기심을 떨어뜨렸던 것은 이 소설이 '상류사회 소설'이라는 데 오는 거부감이었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나 고골의 작품에서 만난 하층민들의 삶을 많이 보아서인지, 같은 시대의 소설임에도 대상이 다르다는 이유로 쉽게 접근하지 못한 이유도 있었습니다. 그 이유가 지극히 개인적인 취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역시나 소설을 읽는 내내 주관에 따른 내면의 벽을 깨뜨리지 못한 것을 통감했습니다. 각각의 인물에 대한 내면의 묘사, 시대의 흐름을 반영하고 있는 배경, 촘촘히 짜인 구성에 더할 나위 없는 만족을 느꼈으나 도무지 인물과 책 속의 배경으로 빨려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내가 알고 있는 러시아 사람들은 소설속의 인물이 전부임에도, <안나 카레니나>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낯설었죠. 게다가 여러 사람의 심중 속으로 파고드는 내면 묘사 때문인지, 오히려 그들을 어느 선상에 올려놓고 평가절하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 선에서 더 이상 깊숙이 들어가지 않을 거라는 단정 속에서 각각의 인물들이 마음껏 활개 치지 못하고, 흐름을 읽히는 데에 중점을 두고 읽어내려 간 것이 내내 마음에 걸렸습니다.

 

톨스토이가 이 소설을 발표했을 당시, 많은 비평가들은 탐탁지 않은 의견을 내놓았다고 합니다. 그와 달리 도스토예프스키는 '예술작품으로서 완전무결하다.'라는 의견과 함께 '이 작품이 상류사회적인 것이 아니라 바로 동시대 현실에 충실한 소설' 이라고 했죠. 예술작품으로서의 가치는 한 번 더 정독한 이후에 또렷해질 것 같고(무기력감으로 만족할만한 집중력을 가지고 읽지 못하였기에), '동시대 현실에 충실한 소설'이라는 데는 공감하는 바입니다. 책의 배경이 된 시대를 완벽하게 그려내고 있어(사회적으로나 인물들 간의 갈등이나), 당시의 러시아 모습을 상상하는데 문제가 없었으나 다만 여러 작품에서 만난 19세기 러시아 사람의 특징이, 톨스토이의 작품과 여전히 결부되고 있지 않아 다양한 삶의 군락을 넓히는 데 개인적인 어려움이 뒤따랐죠.

 

책 제목이 말해주듯이 주인공은 '안나 카레니나'이며, 그녀의 등장이 있기 전까지 주변배경은 그다지 큰 영향을 미칠 거라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8부로 구성된 <안나 카레니나>는 생각보다 복잡하고, 인물의 성정이 뚜렷하게 묘사되어 있고, 사회적 흐름이 반영되어 있어 방대한 소설속의 '안나 카레니나'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안나가 소설의 전반부에 있다고는 하지만, 그와 얽히는 여러 인물들의 등장도 세세했기에 '안나 카레니나'가 주인공이라고 단정 짓기는 무리였습니다. 게다가 안나가 오빠인 오블론스키의 외도로 인해 충격에 빠져 있는 올케 돌리를 위로 차 등장했을 때, 여덟 살 난 아들이 있다는 말을 듣고 그녀의 과거에 대한 회상이 이어지는 줄로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분명 그녀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면 사랑 이야기가 빠지지 않을 터인데, 여덟 살의 아들의 존재는 그녀의 안정적인 결혼생활을 증거하고 있었으므로, 무엇이 그녀를 사건의 중심으로 이끌어갈지 무척 궁금했습니다.

 

그녀가 등장하기 전, 돌리의 동생인 키티와 그녀를 사랑하는 레빈, 키티에게 구혼하기 직전인 브론스키의 모습이 그려졌는데 키티는 두 남자를 모두 사랑하지만, 브론스키가 자기에게 적절한 상대라는 것을 알고 레빈의 청혼을 거절하죠. 그런데 돌리를 위로하러 온 안나를 보고 브론스키는 그녀와 사랑에 빠지게 되고 그로 인해 키티는 깊은 상처를 받고, 레빈은 키티의 거절로 인해 시골로 내려가 버렸고, 브론스키는 키티에게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은 채 카레니나 부인을 따라 모스크바를 떠납니다. 전혀 예측할 수 없던 방향으로 이야기가 흘러갔고, 카레니나와 브론스키, 카레니나의 남편인 카레닌과의 갈등이 소설의 전면에 등장합니다. 그러나 그런 갈등 이외에도 키티와 레빈, 오블론스키와 돌리 등 많은 등장인물이 얽혀있기에 어느 한 곳에만 중점을 두고 읽어나갈 수 없었습니다. 크게 안나와 브론스키, 키티와 레빈, 카레닌으로 나뉘어 이야기가 전개되었기에 그들 모두의 행보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죠.

 

소설의 구성에서 방대함 때문에 굵직한 사건이 드러나고, 반전이 일어날 때마다 감정에 휩쓸리지 않고 읽어 나갈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인물의 세세한 내면 묘사로 인해 독자에게 침착함을 부여해서인지 소설의 흐름에 온 몸을 맡길 수 있었으며, 안나가 카레닌에게 브론스키와의 불륜을 고백하고 그와 함께 외국으로 떠나버릴 때도, 상처를 극복한 키티가 레빈의 청혼을 받아들이고 시골을 내려갈 때도, 돌리로 인해 안나를 용서하겠다는 의지를 보인 카레닌의 다짐 앞에서도 모두 덤덤할 수 있었으며, 잠잠한 호수에 파문이 일었다가도 다시 고요해 지듯이, 소설의 흐름에 짐짓 놀라면서도 다시 평정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각각의 길을 가고 있는 것처럼 보였던 그들은 불편한 재회를 하기도 하고, 서로의 소식을 들으며 주어진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레빈은 키티와의 결혼으로 행복과 신앙, 자신의 일에 대한 갈망을 충족하고 있는 반면, 안나와 브론스키, 카레닌의 문제는 쉽게 일단락 지어지지 않았죠. 카레닌과 이혼하고 브론스키와 결혼하는 것이 정당한 순서임에도(그들의 관계 정리나 그들 사이의 아이의 문제만 보아도), 카네닌 사이에 태어난 아이 문제와 안나의 복잡 미묘한 내면 갈등으로 인해 이혼은 쉽지 않았고, 그런 상태를 견뎌내는 것은 모두에게 힘이 부치게 됩니다. 안나의 삶은 브론스키와의 재회로 다시 사랑이라는 충족을 이끌어낸 듯 했지만, 정리되지 않은 결혼생활로 인해 행복과 지지부진함 사이를 수없이 반복할 뿐이었으며 그런 안나를 보고 있다 도리어 보는 이가 지치기도 하고, 사랑이라는 것이 손바닥 뒤집듯 쉽게 변하는 것에 실망하게 되기도 합니다. 타인과 사랑을 하고 온전한 관계로 오랜 세월을 함께 한다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일상에서의 행복을 찾는 것도 잃는 것도 어려운 게 아니라는 것을 깨달아 갈 뿐이었습니다.

 

그런 안나만 지켜보는 것이 소설의 전반이었다면 진작 지쳐서 나가떨어졌을 것입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다른 인물들에게도 변화를 주었고, 당시의 사회적 이슈와 그들이 가지고 있는 견해를 여지없이 드러냈기에 안나로부터 잠시 탈출할 수 있었으며, 또한 인물들의 관심에 따라 달리 보이는 사회적 현상과 시대적 배경은 종종 지루함을 던져주기도 했지만, 당시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그 이해라는 것이 사회적 관념을 꿰뚫어보고, 그들의 의견에 동조하는 것이 아닌 두루뭉술한 흐름 읽기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런 배경이 있었기에 인물들과 얽혀 들어가는 관계가 더 촘촘해졌다고 생각합니다. 가장 두드러진 인물은 레빈이었는데 그가 농장에서 농사를 지어서인지, 농노에 관해서, 경제관념에 관해서, 후에는 신앙에 이르기까지 점진적인 성장을 보이는 것이 무척 흥미를 유발하기에 충분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안나의 생활과 내면세계가 막바지에 달할 때쯤, 소설의 끝이 보이기 시작했고 안나는 이상한 증세를 보이기 시작합니다. 정신착란을 일으켰다고 생각될 정도로 자신을 다스리지 못하더니, 결국은 자살로 생을 마치고 맙니다. 안나가 돌리를 만나기 위해 역에 도착했을 때, 열차에 치인 사람을 목격한 것이 복선을 깔듯, 운명의 장난처럼 똑같은 죽음을 맞이하고 맙니다. 그녀의 죽음의 순간보다 죽음을 향해가는 순간의 묘사가 더 많았듯이, 그녀의 죽음으로 인한 브론스키와 카네린, 돌리와 키티 등 다른 인물의 생각은 깊게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브론스키는 전쟁터에 나가고, 그들의 아이는 카레닌에게 전해집니다. 안나의 죽음이 소설의 끝을 말하고 있다고 해도, 그녀의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레빈의 삶에 대한 모색'으로 소설은 마무리 지어집니다.

 

<안나 카레니나>가 담고 있는 메시지는 '백과사전급'이라는 의미로 통용될 만큼, 방대하고 다양한 의미를 찾을 수 있습니다. 가족의 행복을 밑바탕에 두고 있는 소설이지만, 그 내용이 평화적이거나 긍정적인 의미가 많이 부여되어 있지 않습니다. 전체적인 맥락으로 보자면 불행에 더 가까운 소설이고, 희망보다는 주어진 삶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라고 느껴집니다. 그 가운데에 안나가 있고, 그녀의 삶이 부서지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 안타까울 정도이죠. 안타까움으로 이 소설을 마무리 지어버렸다면, 급격히 우울해졌을 기분을 스스로도 감당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시간은 흐를 것이고, 남겨진 사람들의 삶은 앞으로 향할 것이며, 이 순간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현재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현재보다 앞서 치열한 삶을 살아갔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당시를 재조명해보며, 현실에 대입할 때에 이 소설의 가치는 더 빛나는 것 같습니다. 톨스토이의 다른 작품을 탐닉하면서 '삶'에 대한 궁극적인 대답을 찾는 것이 읽는 이에게 주어진 숙제인 것 같아 마음이 한껏 고조될 정도이죠.

 

그들의 고뇌와 갈등은 인종과 시대가 다른 이들에게도 동일하게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것이 마냥 신기해 정말 즐겁게 그렇게 두꺼운 책 3권을 읽어치운 것 같습니다.

진실한 사랑을 찾아 모든 것을 버리는 안나. 그리고 진정한 삶을 살기위해 몸부림치는 레빈. 하지만 그 어느 것 하나 우리가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음을 우리의 냉철한 이성 혹은 뜨거운 감정, 그리고 그 이성과 감성에 근거한 판단들은 너무나 터무니없다는 듯 비웃는 그것이 바로 우리의 인생이라는 것. 그래서 때로는 절망하며 두려움으로 떨기도 하고, 혹은 서로 다투기도 라고 곧이어 화해하며, 사랑으로 보듬기도 하고 때로는 그 사랑이 넘쳐 증오하기도 하는 것이 그들과 나와 우리의 삶이라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아직도 끊임없는 갈등과 고뇌 가운데 오늘을 살아내야 한다. 쉼 없이 나의 내면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 기울이며, 이성과 감정 사이에서 그리고 현실과 부딪히면서 말이죠.

 

소설의 마지막 장에서처럼 - 엄청난 폭풍속이든지 고요한 별빛의 밤이든지 다 이해 할 수 없는 이 모든 삶의 소용돌이 속에서, 다만 우리는, 우리의 영혼이 더욱 깊어지길 바랄 뿐이며 자신이 만드는 삶의 조각들이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그리고 나에게 행복의 조각들이 되길 바랄 뿐 입니다.

 

“하지만 나에게 일어날 수 있는 그 모든 일에 상관없이, 이제 나의 삶은, 나의 모든 삶은, 삶의 매 순간은 이전처럼 무의미하지 않을 뿐 아니라 선의 명백한 의미를 지니고 있어.

나에게는 그것을 삶의 매 순간 속에 불어넣을 힘이 있어!”

- <안나 카레니나>에서 레빈의 마지막 독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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