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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엘 수업 - 대영박물관에서 다니엘 읽기
박양규 지음 / 샘솟는기쁨 / 2025년 3월
평점 :

저자 박양규 목사의 전작 '중간사 수업'을 참 흥미롭게 읽은 기억이 새롭다. 저자가 쓴 책을 처음 접한 것은 '인문학은 성경을 어떻게 만나는가'였다. 뭔가 학문스런 접근하면서도 현학스럽지 않은 문체에 이끌렸다. 설교스럽지 않은, 그러나 읽다보면 묵직한 울림이 있는 그런 경험을 저자 박양규 목사의 책과 만나면 하게 될 것이다.
이런 저자의 내공은 그의 학창시절로 유추해 볼 수 있겠다. 학부와 대학원에서 신학을 전공했다. 이어 서양사학과로 석사과정을, 박사과정은 신구약 중간사 연구를 했다고 한다. 때문에 저자의 글을 읽다보면 성경 기록의 배경이 되는 역사와 문화 등 맥락을 이해할 수 있는 통찰과 안목이 번뜩인다.
특히 이번 신간 다니엘 수업은 수많은 사진 자료와 함께 읽는 재미가 있다. 대영박물관 소장품 사진을 본문과 대조해 가며 읽다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 아쉬운 점은 지면 한계 때문인지 사진 도판이 작아 돋보기를 들고 봐야 제대로 볼 수 있다는 것.
거기에 더해 책 서두에 두 점의 부록이 접혀 있는데 이게 성경 속 역사 여행에 큰 이정표 역할을 한다. 부록1 한눈에 보는 성경역사와 부록2 한눈에 보는 다니엘 마인드맵이 그것이다. 다른 책들과 달리 앞부분에 부록이 있어 독서 중에 펼쳐보기 좋았다.
책은 모두 3부로 구성되어 있다. 다니엘이란 인물을 먼저 등장시키지 않는다. 그가 활동하기 이전의 고대 근동의 세력 판도와 그에 따른 종교를 비롯한 제국의 흥망성쇠를 소개한다. 저자의 안내를 따라 마치 대영박물관의 거대한 미로를 찾아걷는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신흥 제국 바벨론의 수도에 서있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할 수도 있다.
역사 속 인물과 배경이 독자의 눈 앞에 펼쳐지는 듯한 흥미로운 책읽기가 가능하다. 그저 한 권의 옛날 책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 삶과 의식을 깨게 하는 힘이 성서에는 있다. 이 성서(경) 읽기를 돕는 선생님과 같은 책. 다니엘 수업 같은...
이 책 읽기의 백미는 에필로그에 있다고 본다. 저자는 세상을 변화시키자는 말은 그만 하자 말한다. 그럼 어떻게 하자는 것인가? 다니엘 수업을 들어(읽어)보라.
팬데믹 이후 한국사회는 이전에 없었던 변곡을 겪었다. 이 와중에 교회는 비대면과 대면 예배를 놓고서도 일반 사회와 갈등을 빚기도 했다. 교회 안에서만 통용되는 언어로는 이제 더 이상 세상과 소통이 어려운 시대를 살고 있다. 이런 문제의식을 갖고 있다면 무엇을 해야 할까? 이 또한 다니엘 수업을 들어야 할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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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데믹 이후 교회가 세상의 빛이 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교회를 걱정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가나안 성도들이 급증했고, 교회는 '무인도'가 되어 가고 있습니다. 역사는 언제나 그렇듯 위기는 또 다른 기회로 이어집니다. 로빈슨 크루소는 무인도에서 성경을 읽으며 기도했고, 날짜를 표기해서 주일예배를 드렸습니다. 섬에서 만난 원시인 프라이데이에 대한 교육은 청교도 교육의 상징이며, 시대를 향한 디포의 설교였습니다. 위기를 기회로 만들라고 한 겁니다.
(30쪽)
이스라엘 민족은 태생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해야 하는 나라였습니다. 그 정체성을 잃는 순간 끊임없는 침공에 시달려야 했고, 우상숭배로 이어지는 악순환을 반복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제사장 나라로 부름을 받았으므로 전쟁 문제뿐 아니라 생존 문제도 하나님의 손에 맡기고 그분을 의지하는 것이 당연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을 종교적인 차원에 국한시키고 일상의 영역은 강대국의 손에 달려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강대국을 의지한 겁니다.(84쪽)
엄습하는 위기의 순간에 하나님을 의지하기보다 눈에 보이는 것에 손을 뻗는 우리의 연약함은 자칫 더 큰 비극을 만들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이스라엘의 고통이 외부의 강력함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고 단언합니다. 내면의 연약함과 불신앙이 그들을 위축시켰고 고통과 멸망을 가져다주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과연 아시리아와 같은 절망이 밀어닥치는 상황 앞에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102쪽)
오늘도 다르지 않습니다. 이런 '유사한 다윗 언약'을 내세우며 열광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소위 '국뽕'에 심취한 나머지 고안, 과부, 빈민, 약자들을 사회 밖으로 밀어내는 역사가 반복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다윗 언약에 열광한 대가로 '가나안' 성도를 양산한 것은 아닐까요? 우리가 다니엘을 외치지만 실제로논 '하나냐'의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한 가짜 언약은 바알과 맘몬의 또다른 얼굴입니다. (12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