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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백과
마르탱 모네스티에 지음, 한명희.이시진 옮김 / 새움 / 2008년 3월
평점 :
품절
처음 이 책을 접했던 과거에 나는 마르탱 모네스티에의 자살에 대한 방대한 자료조사와 객관적인 자살이야기들에 푹 빠져 지냈던 것 같다. 다시 책을 펼쳐보니 색색깔의 플래그를 붙여가며 열심히 읽은 흔적들이 보인다. 2003년에는 제법 자살이라는 죽음의 형태를 공부하는 것이 재미있던 터라 즐기며 볼 수 있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지금은 시간이 얼마나 지났다고 나이 먹고 겁만 늘었나보다. 관객이 나 하나 뿐인 심야극장 상영에서 한 가운데 앉아 공포영화를 보기도 할 때이니 그때 내 간이 한 30kg정도 되지 않았었나 싶다. 죽음을 구체적으로 두려워하고 있는 내가 다시 자살이라는 단어와 마주하기가 껄끄러웠던 것일까. 게다가 인터넷을 끼고 사는 나같은 사람에게 모니터를 통해서 읽는 자살의 기술과 역사 속의 자살자들을 마주하고 있자니 여간 힘든 것이 아니다. 영화 <링>에서 브라운관을 통해 나오는 그 머리긴 우물귀신이 두렵게 느껴졌던 것과 비슷한 느낌이다. 하루에 비디오 두어개는 기본으로 보던 나에게 영화 <링>의 브라운관에서 기어나오는 귀신은 꺼진 모니터에 비친 내 모습만 봐도 소스라치게 했다. 후덜덜~ 글 사이사이에 수집된 자살한 시체들의 전시도 만만하지 않았다. 목을 매달고 불에 그을리고 투신한 여러 시체들의 사진들을 연출된 장면이 아닌 실제시체사진을 보고 있다니... 왜 이전에 이 책에 그렇게 반했었는지, 어떻게 읽어냈던 것인지 내 자신이 의심스러워진다..
과거에 이 책을 읽으며 사유의 즐거움을 만끽하던 때를 생각하며 다시 책 속으로 고고씽~이 책에서는 과거에 존재했던 다양한 자살의 동기와 방법들을 만날 수 있다. 심정 복잡했을 죽은 자들의 자살동기를 일목요연하게 기술한 걸 보고 있자면 한 죽음의 형태로 인정되기도 하고 제법 자살이라는 행위를 객관적으로 보게 된다. 자살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이 이 책을 읽는다면 보다 죽음을 멀리 보게 되어서 구체적으로 자신을 해할 생각에서도 조금은 벗어날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반대로 참고해서 시도할 가능성이 있다는 생각도 들지만 티브이에서 보는 범죄극에서처럼 살인으로 위장한 자살과 같은 낯선 방법은 찾기 힘든 책이니 차라리 책보다 범죄드라마들이 자살에 부정적인 영향을 조금 더 줄것이라는 위안을 해본다. 오히려 쓴 저자가 죽음에 대한 욕구를 이렇게 객관화시키면서 풀어내지 않았을까라는 생각도 든다. 아... 오늘 삼천포로 자주 간다.
각설하고 마르탱은 여러 가지 자살의 동기와 방법을 이래저래 묶으며 미미하나마 수적 통계도 시도하고 있지만 자살하는 자의 특성, 자살의 전형성에 대해서는 정리가 불가능하다고 말하고 있다. 사실 이 책이 가진 매력은 그런 객관적 정리 말고도 그 사실들이 이끌어내는 브레인 스토밍에 있다고 생각한다.
마르탱의 브리핑을 받고 있자면 내 머릿 속에서는 돌 굴러가는 소리가 난다. 문제제기를 하고 그것에 대한 양단 논란이 마치 천사와 악마처럼 토론한다. 여느 토론들처럼 말도 안되는 억지, 예를 들면 자살의 정당성, 자살할 권리에 대한 주장도 있다. 아마도 보통 이 책을 접하면 자살에 대한 양단의 입장에서 갈등하게 될 것이다. 자살이라는 선택을 존중할 것인가. 그렇다고 비난하고 하나의 생명경시나 죄악, 혹은 범죄나 위법으로 간주할 것인가. 어떤 자살은 소명에 의해서 의무에 의해서이기도 하다. 우리는 자살이라고 부르지 않지만 충성심이나 혹은 명예를 위해서 자살하는 경우를 칭송하기도 하지 않았나 생각해본다. 이건 안타까워 해야할지 옳은 일이라 칭송해야할지 정말 난감해진다. 과연 어떤 자살하는 자들의 의식과 무의식에는 자살을 합리화, 합당화하면서 당위성에 치우친 결과일 것이다. 그리고 다른 양단은 자살을 하는 것이 옳은 것인지 치료가 가능한 것인가이다. 마르탱의 말처럼 자살자의 증상이 전형적인 것이 아니므로 주변에서 어떻게 미리 감지하고 도와야 하는 것인가. 책에서는 역사와 신화 그리고 스크린 속의 유명한 자살자들도 볼 수 있지만 자살에 대한 철학적, 도덕적 문제에 관해서도 세심히 언급하고 있다. 법으로의 자살 규제에 대한 이야기도 흥미로웠지만 자살에 대해 옹호하는 이들에 관한 구체적인 저서의 내용을 살짝 엿볼 수도 있고 안락사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있어서 2003년 읽었던 <자살>이라는 제목보다는 지금의 <자살백.과>가 훨씬 어울리는 것 같다.
그리고 소설 속이나 영화나 드라마 속의 자살과 현실의 자살을 대조인식하는 데 꽤 도움이 된 듯하다. 소설 <향수>의 주인공 살인자도 의도한 타살, 결국 이것도 자살이고 생각해보니 영화 <번지점프를 하다>의 주인공들의 자살목적은 환생이었다.(마르탱은 환생도 자살의 동기 중 하나도 소개한다) 과거엔 이들을 낭만적이거나 완전한 결론으로 보았다면 <자살백과>는 권총자살을 유행시켰던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경우가 있다는 걸 상기시키게 하는 책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사족을 달자면 나는 여전히 '타나토노트'들의 소생을 전제한 자살시도에 대해서는 여전히 우러러보게 된다. 타나토노트들이 연구정신에 입각해서라기 보다는 베르베르님에 대한 애정이 짙게 깔려서 그런 듯하다ㅡㅡ;)
자살에 대한 다양한 의견들을 접하고 있다보니 자살에 대한 욕구나 동기를 이해하는 것은 비난할수만은 없는 죽음도 있다는 걸 인정하게 된다. 죽음에 대한 공포는 삶에 대해 욕구를 가지게 할 것 같지만 자살이란 삶의 포기만으로 생기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책으로 접하고 나니 더욱 와 닿는 사실이다. 사후세계에 대한 공포가 있으면 죽으려 하지 않을 것 같지만 때로 공포는 차라리 충동적인 죽음을 가져올 수도 있다는 생각과 맞물린다. 죽음, 작게는 자신에게 올지도 모를 상해에 대한 공포가 가중되면 오히려 공포심 때문에 무모한 자살시도를 하게 되기도 하는 것이다. 삶에 대한 욕구는 자신과 소통하는 외부의 모든 것들을 대상으로 한 긍정적 경험에서 나온다고 생각한다. 그 경험 중 자신을 소중하게 생각게 하는 것들이 삶과 죽음의 욕망에서 발란스를 맞춰주어야 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우리는 삶에 대한 말보다 죽음에 대한 말을 더 자주 하지 않는가. 죽겠다. 죽고싶다. 가 살고싶다. 행복하다. 기쁘다. 보다 더 많이 되뇌어 지고 있는게 현실이다는 생각 때문에 암울해 할만한 일도 아니다. 죽음이라는 단어를 피하는 것보다 인정하고 인지하고 있다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자살이라는 것이 어떤 사건과 동기에서 올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하는 독서와 공부는 그것이 특정한 누군가가 아닌 나 자신에게 그리고 주변의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언젠가가 분명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을 이제는 알기 때문이다.
ps : 지금 내눈에 띄인 책장 속의 책 중에 사회윤리의 제문제(제임스 레이첼스 엮음) 라는 제목이 보인다. 오래된 책인데 사회윤리에 관한 문제에 관한 여러 저자의 글을 엮은 책으로 기억된다. 자살과 안락사, 임신중절 등 지금도 여전히 문제시되는 여러 논란에 관한 저자들의 입장을 들을 수 있다. 죽음의 문제에 대해서 보다 깊게 생각하게 된 계기가 되어준 책으로 기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