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스토텔레스 경제를 말하다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42
홍기빈 지음 / 책세상 / 200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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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토텔레스... 대단하네요. 정치학, 철학, 물리학, 윤리학, 수사학, 논리학 그리고 경제학까지... 아마도 이 책에서 전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제학도 그 사상의 일면에 불과할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이 책에서 제시하고 있는 그의 사상을 제대로 이해했다고 할 수 없습니다. 경제 자체가 어려운 학문인데 시대를 거스르는 그의 학문적 체계 앞에서 이미 작아진 저는 문장의 판독에만 급급합니다. 그렇기에 이번 리뷰는 지극히 단편적이고 피상적인, 겉핥기에 불과한 잡설에 그치게 됩니다.

 

경제라는 말의 정확한 의미는 무엇일까?에서부터 논의가 시작됩니다. 단순한 돈벌이인가 물질적 부를 생산하는 활동인가에서 희소성에 바탕을 둔 합리적 선택으로 잠정적 결론이 도출됩니다. 그러나 여기서 합리성이란 '협소한 합리성이 아니라 포괄적인 이성적 존재로서 행동의 동기, 신념, 사회적 제도 등을 다 보는 것을 의미'(33쪽)합니다. 하지만 저자는 경제=희소성에서의 선택이라는 합리성은 목적 합리성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며 가치 합리성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다(33쪽)는 점을 지적합니다. 결국 합리적 선택에서의 가치 부분에 대한 고려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의미로 읽힙니다.

 

2장에서는 경제라는 말의 역사적 고찰을 다루고 있습니다. 초기 경제는 '단지 가정의 살림살이'(40쪽)를 가리키는 의미였습니다. 혈연에 바탕을 둔 인간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활동이었기에 윤리, 도덕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었고 당시 사람들도 이를 당연하게 여겼다고 합니다. 그 이후 18c까지도 경제는 '국가라는 사회적 관계의 맥락에 포섭'(43쪽)되어 있었습니다. 여전히 독립적인 영역 혹은 학문의 성격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는 것이죠. 그리고 1890년, 마셜에 의해 최초로 경제학이란 용어가 사용되기 시작합니다. 이제 경제는 비로소 정치, 사회와 독립적인 영역으로 자리매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경제 현상은 계급 관계라는 사회적 맥락에서 언급이 되었던 한계가 있었습니다. 그러다 '부를 노동가치나 물질적 부가 아닌 희소성하에서의 선택을 통한 만족의 극대화'(46쪽)로 보는 현대의 경제 관념이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3장에서는 그리스의 시장의 변천과정을 다루고 있습니다. '경제적으로 자급자족할 수 있는 생활단위로서의 가정경제'가 초기 그리스 사회가 호혜성에 기반한 선물 주고받기를 바탕으로 형성되고 발전해갔다고 합니다. 그러나 폴리스가 성장하고 가정 경제 단위의 주고받기가 불가능해지면서 기원전 6c 그리스 전역에서 화폐경제가 출현하고 자연스럽게 시장이 형성, 발전하게 됩니다. 또한 이 과정에서 폴리스로 이주한 사람들의 생활을 영위하기 위해 국가 재산의 재분배가 이루어지고 그것은 화폐를 매개로한 시장의 발전으로 귀결됩니다. 이 과정에서 키몬과 페리클레스 간의 정치적 경쟁이 사뭇 재미있게 다뤄집니다. 그러나 가정경제와 폴리스, 호혜적 선물 주고받기가 시장과 민주주의, 제국주의로 변모되면서 이제 그리스인들은 '국가를 한시적 이해를 위해 교역 관계에서 맺어지는 동업자 관계'(73쪽)로 보게 됩니다. 혈연적, 불가역적 관계가 계약적 관계로 변모됩니다. 이때 등장한 것이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입니다. 소크라테스는 누구도 제기하지 않았던 인간의 덕(arete)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플라톤은행복한 삶의 정의, 행복에 이르는 방법과 사람들을 어떻게 교육시킬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그 대답으로서의 철인(철학자) 정치를 제시합니다. 다시 폴리스는 '시민에게 잘 사는 법을 훈련하는 훈육의 장이자 좋은 생활을 펼쳐낼 실현의 장'(78쪽)으로 돌아옵니다.

 

4장에서 비로소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제가 등장합니다. 플라톤이 추상적인 인간활동과 경제를 언급했다면 아리스토텔레스는 목적과 수단의 측면에서 접근합니다. '인간 활동에서 목적의 추구는 무한하지만 수단의 양은 그 목적에 의해 제한되며 행복한 삶을 위해서는 폴리스의 운영기술과 가정관리 기술을 상위로 삼고 거기에 필요한 물자를 공급하는 획득의 기술을 하위로 삼아야 한다'(97쪽)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활동을 '행위 그 자체를 목표로 하는 행위'인 프락시스(praxis)와 '무언가를 생산하는 행위'인 포이에시스(poiesis)로 구분합니다. 그리고 그는 인생은 포이에시스가 아니라 프락시스라고 단언합니다. 인간의 잠재적 능력을 풍부하게 계발하는 것이 바로 행복한 삶의 기본 전제가 되는 것입니다.

 

5장은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제관과 대비되는 '로빈슨 크루소'로 상징되는 개인 중심의 경제관이 소개됩니다. 가정경제와 폴리스 중심의 경제관이 '낱난의 개인들을 유일한 현실적 기본 단위'(131쪽)로 보고 '인간의 탐욕을 이성 실현이라는 세계사의 목적이 달성되는 원동력'(134쪽)으로 보는 근대 경제관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자원의 희소성에 기반한 근대적 경제관은 '인간세상의 부동의 진리'(139쪽)로 자리잡아 우리의 일상과 사고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6장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에 영향을 받은 경제사상가를 소개합니다. 애덤스미스, 독일의 역사학파, 칼 마르크스, 베블린, 폴라니, 케인스가 그들입니다. 그리고 맺음말에서는 경제발전, 대량 소비, 자본 축적을 신봉하는 현대 경제 패러다임의 전환이 필요함을 강조합니다. 그 전환의 바탕이 되는 것은 개인이 아닌 가정경제와 폴리스(사회) 중심의 아리스토텔레스 경제관이겠지요. 물론 그 토대는 바람직한 사회변화, 경제관에 대한 우리의 의식적 노력과 행동입니다. 숨가쁘게 정점으로 치닫는 신자유주의의 물결은 더이상의 사회(국가)의 개입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어느 것도 해서는 안되며, 설사 한다고 해도 아무런 의미나 효과가 없다는 신자유주의의 수사학에 더이상 현혹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이런 패배주의, 허무주의를 벗어날 때 진정한 인간 중심의 경제로의 전환이 가능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워낙 경제에 문외한이기 때문에 다소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리고 내용을 온전히 이해했다고 보기도 어렵고요. 다만 거대한 사상가의 등 너머에서 그가 바라보는 세계의 일면을, 그 탁월한 통찰을 흘깃 바라본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었던 책읽기가 아닌가 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와 작금의 경제 상황에 관심이 있는 분들의 일독을 권합니다. 그 과정을 거치면 경제에 대한 개념과 변천의 과정을 피상적으로나마 인식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인생은 포이에시스가 아니라 프락시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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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주정뱅이
권여선 지음 / 창비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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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과 구원을 동시에 노래한 시같은 소설'

책의 띠지에 적혀있는 문자입니다.

구원까지는 잘 이해가 안 되고 절망을 노래한 소설이란 점은 동의가 됩니다.

 

소설을 읽다보면 가끔 읽히기는 무난한데 작가가 전하고자 하는 의도가 잘 파악이 되지 않는 소설이 있습니다. '안녕 주정뱅이'가 바로 이런 소설이었습니다. 소설은 '봄밤, 삼인행, 이모, 카메라, 역광, 실내화 한켤레, 층' 등 총 7편의 단편이 수록되었습니다. 이 중 '봄밤'을 읽고나서 당혹스러웠습니다. 뭐지? 지독한 사랑을 이야기하는 것인가? 아니면 끝도 없는 절망을 이야기하는 것인가? 아니면 또다른 무엇을 의미하는가? '삼인행' 역시 다 읽고 나서는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이모'부터는 대충의 의도를 파악할 수 있어서 무사히 완독을 할 수 있었습니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완독을 못 했을 수도...

 

사실 제목부터 심상치 않습니다. 그 어떤 문장부호도 없는 제목. 쉼표도, 마침표도, 물음표도 없습니다. 주정뱅이의 안위가 궁금한 것인지, 주정뱅이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네는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이 제목은 소설 본문에서의 다양한 인물들의 다양한 삶에도 그대로 열려 있습니다.

 

'봄밤'의 영경과 수환은 불운의 끝을 보여줍니다. 신용불량자(수환)와 알콜중독자(영경)의 만남. 그러나 그가 조용히 등을 내밀어 그녀를 업었을 때 그녀는 취한 와중에도 자신에게 돌아올 행운의 몫이 아직 남아 있었다는 사실(28쪽)'에 놀라워한 것도 잠시, 수환에게 행운은 더이상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죽음을 마주해야 하는 두 사람. 수환은 알콜을 찾으러 떠나는 영경을 웃는 얼굴로 배웅하고 영경은 술에 절은 채 그의 마지막을 함께 하지 못합니다. 이것이 사랑일까요? 사랑이라면 미치도록 절망스럽고, 겪고 싶지도 보고 싶지도 않은 사랑임이 분명합니다.

 

'삼인행'의 주란과 규, 훈은 여행을 떠납니다. 주란과 규는 부부지만 이혼을 앞둔 마지막 여행을 하는 것이지요. 거기에 관찰자인 훈이 동행합니다. 무모할 정도로 계획된 여정에 따라 움직이는 그들. 그러나 주란과 규 부부는 이렇게 계획대로 살고 움직이는 부부가 아니었다는 것은 소설의 말미에 드러납니다. 어쩌면 그들에게 일상은 버티기 힘든 굴레와 억압일 지도 모릅니다. 그러기에 '우리 다시는 서울로 못 돌아가도 괜찮을 것 같지 않냐(72쪽)'고 말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인연과 원업은 결코 끊을 래야 끊을 수 없는 것임을 그들도 모르는 것은 아닐테지요. 하지만 술에 취해, 환상에 취해 바라보는(혹은 듣는) 삶에는 그 어떤 빛줄기도 보이지 않습니다. 규에게 들리는 환청은 그들 부부를 가로막는 또다른 필연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이모'의 이모는 가족을 위해 희생아닌 희생을 하다 자신의 젊은 날을 보내고 만 인물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건 무엇을 위한 희생이냐, 무엇에만 배타적으로 이타적이냐(87쪽)'가 문제입니다. 자신을 위한 삶이 아닌 가족을 위한 삶. 하지만 그것은 자의적인 이타가 아니었습니다. 그렇기에 이모는 모든 인연을 끊고 자신만의 삶을 살아보려 시도한 것이겠지요. 그러나 그 삶에서 만난 또 하나의 난관. 포기하고 싶은 삶에서 이모는 젊은 날의 기억과 마주치고 그 기억 속에서 자신의 행동에 스스로 응징을 가하며 삶을 지속해 나갑니다. 그 어떤 것이든 합당한 대가가 지불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여덟자리의 숫자를 남기고 세상을 떠납니다. '그렇게 꽉 쥐지 말아요... 놓아야 살 수 있어요(135쪽)'라고 말하는 것처럼... 어쩌면 필연적 죽음 앞에서 이모가 보인 태도는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합니다.

 

'카메라'의 관희와 관주, 문정의 삶에는 지독한 우연이 있습니다. 인물 간의 관계도 그렇지만 그들의 관계를 끝내는 장면에서는 우연적 삶의 지독함에 마음이 아픕니다. '층'의 인태와 예연의 관계에서도 우연적 순간이 그들의 인연을 끝장내고 맙니다. '실내화 한켤레'의 혜련과 선미, 경안의 재회도 기가 막힌 우연의 결과입니다. 이렇게 따지만 이 소설을 관통하는 하나의 키워드는 우연성이 아닌가 합니다. 이 점에서 평론가 신형설은 해설에서 '불행과 관련해서는 신(우연)의 영역과 인간(필연)의 영역(244쪽)'이 있다고 합니다. 그렇게 우연과 필연이 어우러져는 우리 삶의 뒤덮고 삶과 죽음을 갈라놓은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이 우연과 필연이 더욱 빛을 발하는 것은 불행의 장면입니다. '어떤 불행은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만 감지되고 어떤 불행은 지독한 원시의 눈으로만 볼 수 있으며 또 어떤 불행은 어느 각도와 시점에서도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어떤 불행은 눈만 돌리면 바로 보이는 곳에 있지만 결코 보고 싶지가 않은 것'(176쪽)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지나가는 말이든 무심코 한 행동이든, 일단 튀어나온 이상 돌처럼 단단한 필연이(136쪽)' 되기도 합니다. 결국 시선의 문제, 자세의 문제일 수 있습니다. 또한 그것이 어떤 경우에는 변명이 될 수도 있을 것이며 어떤 경우에는 숙명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불행의 장면들 속에서 우리는 역설적으로 희망을, 삶을 노래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불행한 인물에 공감하고 위로의 시선을 보내는 것. 이것이 문학의 힘이며 삶의 근본적인 자세가 아닐까요?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이런 점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렇기에 '절망과 구원을 동시에 노래'한 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근거가 아닐까 합니다.

 

삶이든 인간 사이의 관계이든 '갑자기 뭔가 중단되었을 때에야 그것의 지속을 얼마나 갈망해왔는지 알게'(53쪽) 됩니다. 소설집의 주인공들은 대개 죽음을 맞이하거나 이별을 맞이합니다. 혹은 예기치 못한 질병이 암시되기도 합니다. 이렇게 (그것이 우연이든 필연이든) 무언가가 중단되거나 상실되었을 때, 일상의 비범함 혹은 중요함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때는 너무 늦은 경우가 허다합니다. 결국 빛 하나 없는 어둠 속에 머물게 됩니다. 하지만 마냥 받아들이기엔 그 순간이 너무 가혹하며 지켜보기에도 마음이 좋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에 '내 탓은 아니'라고 변명을 하거나 '내가 무슨 도움이 되겠'냐고 회피를 합니다. 하지만 그 불행의 순간은 언제나 예고없이 닥쳐옵니다. 그 누구도 예외가 될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작가는 이런 비극적 환경과 그 속의 인물을 우리 앞에 던져 놓습니다. 그리고 그 비극과 불행에 따뜻한 위로의 시선 한 번 던져줄 것을 조용히 요구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지속되는 어둠이 없듯 지속되는 불행은 없습니다. 그리고 그 불행을 다소 완화시킬 수 있는 것은 여전히 인간에 대한 이해와 사랑이 될 것입니다.

 

완벽한 인간은 애초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모두 결여 혹은 결핍의 존재입니다. 그리고 그 결여를 그대로 바라보거나 결여를 수용할 수 있을 때 인간 관계는 비로소 시작합니다. 사랑의 시작입니다. 수환과 영경이 바로 그런 존재들입니다.(262쪽을 참고해서...) 결국 작가는 비극의 극단 속에서의 사랑을 보여주며,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사랑이라고 역설합니다. 그런 면에서 '안녕 주정뱅이'란 제목은 예기치 못한 불행 속의 한 개인에게 보내는 위로의 인사, 사랑의 시선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단순한 질문이 아닌 위로를 보내는 애잔한 시선. 이것이 이 소설집을 관통하는 작가의 시선입니다.

 

‘어떤 불행은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만 감지되고 어떤 불행은 지독한 원시의 눈으로만 볼 수 있으며 또 어떤 불행은 어느 각도와 시점에서도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어떤 불행은 눈만 돌리면 바로 보이는 곳에 있지만 결코 보고 싶지가 않은 것‘(17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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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터에서
김훈 지음 / 해냄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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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훈 선생의 글을 읽을 때는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집중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작가의 문장을 유심히 들여다 봅니다. 아는 소설가라고 해 봐야 몇 되지 않지만 문장, 그 중에서도 문체에 가장 신경을 쓰고 또 가장 탁월함을 보이는 작가가 김훈 선생이 아닐까 합니다. 그리고 단문을 가장 잘 구사하는 작가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김훈 선생의 글을 읽을 때에는 아무래도 문체에 신경을 쓰며 읽기 마련입니다. 이번에 만난 '공터에서'도 이런 선생의 문체적 특성이 잘 드러난 소설입니다.

 

소설은 아버지 마동수와 그의 아들인 마장세, 마차세의 삶의 기록입니다. 여기서 기록이란 말을 쓰는 것은 무엇보다 작가는 우리 앞에 그들의 삶을 툭~ 던져 놓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극도의 단문, 극도의 건조한 문체, 그리고 극도의 객관적인 서술이 이 소설을 관통하고 있습니다. 소설은 일제 시대부터 80년대 후반까지 부자의 삶을 보여줍니다. 거기에는 어떤 작가의 판단도 개입되지(개입하지) 않습니다. 그저 살아남기 위하여, 먹고 살기 위하여 일상을 부딪치는 그들의 스산한 삶을 풍경처럼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버지 마동수는 거점이 없는 사람입니다. 어쩌면 무색무취의 인간, 그림자처럼 존재감이 없는 인간, 바람처럼 흔적을 남기지 않으려는 인간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조선에서 중국 상해를 거쳐 다시 대한민국으로 그의 삶은 이어집니다. 그런 그에게 (다행인지 불행인지) 가족이 있지요. 그 가족을 위해 1년에 몇 번 땔깜을 가지고, 양식을 가지고, 고등어를 가지고 돌아옵니다. 올 때 아무런 기척이 없이 오듯 갈 때도 흔적 하나 남기지 않고 떠납니다. 그의 삶의 흔적이라곤 장세와 차세, 이 둘뿐입니다. '일상의 작은 것들을 모으고 쌓아서, 막막한 날들을 건너'(192쪽)가야 하지만 그에는 그 작은 것을 모을 능력도, 의지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떠날 때는 한없이 작은 몸으로, '꼬부린 자세로 죽어'(41쪽)습니다. '칠성판에 눕힐 때 등뼈에서 우드득 소리가'(41쪽) 날 정도로...

 

마장세는 그런 아버지가, 그런 아버지가 있는 이 나라가 싫습니다. 그래서 베트남 파병이 끝나고 귀향하지 않고 남태평양의 섬으로 떠납니다. 그는 한국이란 나라로 결코 오고 싶지 않습니다. 아버지와의 인연이 얽혀서 발목이 잡히는 것이 겁이 나는 것인지, 그냥 아버지라는 존재 자체가 싫은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하지만 그는 결국 '거기'라고 불리던 나라의 상황을 이용해 돈을 벌고 그 돈으로 발목이 잡혀 아버지의 나라로 강제로 돌아옵니다. 마장세에게 한국은 벗어나고 싶었지만 끝내 벗어나지 못한 굴레와도 같은 것이겠지요.

 

어찌보면 가장 평범하고도 흔히 볼 수 있는 인물이 마차세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는 사랑을 하고 어느 정도 정상적인 가정을 꾸리고 실직의 아픔을 겪긴 하지만 사회생활도 어느 정도의 성공을 거둡니다. 무엇보다 마차세를 아버지와 형을 구분짓게 하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이 곁에 있다는 것입니다. 아버지 마동수가 어머니 이도순을 만나 아이를 낳지만 그들 사이에는 사랑이 자리하기 보다는 시대의 억압과 흐름에 억눌린 결과라고 생각됩니다. 마장세는 아내의 존재와 비슷한 린다가 있었지만 그들의 사이는 결국 파국을 맞게 됩니다. 반면에 마차세 곁에는 아내 박상희와 눈이 오는 날 태어난 딸, 누니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이가 곁에 있었기에 실직의 아픔을 견디고 가족의 뒷일을 감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림 시작할 때 빈 종이처럼, 좀 더 견뎌'(192쪽)라는 박상희의 말, '생활을 구성하는 온갖 작고 하찮은 것들이 쌓여서, 그것들이 서로 인연을 이루고 질감을 빚어내서 마차세의 시간을 메워주기를 바'(199쪽)라는 박상희의 생각이 마차세를 지탱하는 힘이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구성의 긴밀도에 있어서는 좋은 점수를 주기 어려운 소설입니다. 앞서 언급했듯 소설은 마씨 성을 가진 부자의 삶을 시간의 흐름대로 서술할 뿐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삶에는 질곡의 역사가 그늘을 드리우고 있습니다. 그들은 그 역사의 그늘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으며 그늘에서 벗어난 삶도 살지 못합니다. 작가는 그들의 삶을 그저 보여주기만 할 뿐입니다. 그래서 특별한 갈등도, 긴장감도 없는 소설입니다. 때문에 소설적 재미는 다소 약한 편입니다. 다만 '막막한 세상에서 몸 비빌 수 있는 작은 거점'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던 그들의 삶을 우리는 바라볼 뿐입니다. 물론 마씨 부자의 주변에 오장춘이나 시누크, 김오팔 등의 주변인물들이 등장하지만 이들의 역할은 그닥 두드러지지 않습니다. 서로 인연이 얽히고 관계를 맺기는 하지만 뚜렷한 갈등구조도 보이지 않고 그들 역시 자신의 삶을 살아가려 노력합니다. 언제나 당면한 삶보다 중요한 가치는 없기 때문이지요. 결국 소설은 인물들 간의 갈등이나 시대와의 부조화보다는 신산한 삶의 흔적을 카메라와 같은 시선을로 따라가고 비춰주는 데 초점을 맞춘 것으로 느껴집니다.

 

'문득 태어난 자리에 묶여서 살아간다는 것이 가볍고 하찮게 느껴졌다. 그 가벼움이 어째서 그토록 무거웠는지'(284쪽) 느끼는 것은 비단 마차세만이 아닐 것입니다. 지나고 나면 무겁고 질곡과도 같았던 일상은 지극히 사소한 것으로 탈바꿈합니다. 단지 그 순간순간의 무게가 우리의 삶을 짓누를 뿐입니다. 그러나 그 삶의 무게를 견뎌내야만 지난 시간이 가볍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마동수와 마장세처럼 바람처럼 흘러가고 삶의 거점 마련을 도외시하고 도피하려 한다면 그들에게 삶은 여전히 버티기 어려운 굴레일 것입니다. 아버지의 삶은 장남에게 이어지고 장남의 삶은 끈태 파국으로 흐릅니다. 삶이 끝났을 지라도 그것이 끝이 아닐 수도 있는 이유입니다.

 

어쩌면 마동수는 마장세이고 이도순은 마차세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 피가 내 피냐 니 피냐. 그 핏덩이가 너다. 그 핏덩이가 나야. 그게 너고, 그게 나다'(129쪽)라는 이도순의 외침은 자신의 남편과 장남을 향한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입니다. 서로가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지 못하고 떠도는 삶이든, 남아서 주어지는 삶의 무게를 견디는 삶이든 무섭게도 닮은 외모처럼 삶의 풍경 역시 비슷하게 다가옵니다. 시대가 변하고 세대가 끝나더라도 변하지 않고 이어지는 혈연의 이어짐, 삶의 끈질김을 이 소설은 말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꽤 오랜 시간을 들여 읽었습니다. (맞는 표현일 지 모르지만) 서늘한 문체를 읽고 느끼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소설이었습니다. 절제된 단문은 대가가 아니면 쉽게 쓸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미숙할수록 문장은 길어지고 꾸밈이 많아집니다. 끊임없이 일렁이는 파도의 모습을, 그 광활한 바다를 직선 하나로 갈무리할 수 있는 대가의 손길이 느껴진 작품이었습니다. 일독을 권합니다.

 

‘그 피가 내 피냐 니 피냐. 그 핏덩이가 너다. 그 핏덩이가 나야. 그게 너고, 그게 나다‘(12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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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는 어떻게 지배하는가 - 세상을 조종해온 세 가지 논리
앨버트 O. 허시먼 지음, 이근영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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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Rhetoric of Reaction. 원제입니다. 굳이 우리말로 바꾸면 '반동의 수사학' 정도 되겠습니다. 저자인 허시먼이 분석한 보수의 3가지 논리입니다. 역사적 흐름 속에서 보수의 수사학이 어떻게 교묘하게 작용하고 현실의 논리가 되었는가를 무수한 인용과 분석을 통해 제시됩니다. 아... 어렵습니다. 정말 어렵게 읽었습니다. 그들이 내세우는 논리는 뻔하지만 그 논리가 어떤 과정을 거쳐 우리의 삶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가를 이렇게 철저하게 규명하다니요. 저자의 박학다식함과 그 철저함에 경의를 표하게 됩니다.

 

정치·사회·경제 질서의 일부를 향상시키려는 어떤 의도적인 행동도 행위자가 개선하려는 상황을 악화시킬 뿐이라는 역효과 명제, 사회변화를 추구하는 모든 노력은 효과가 없으며 그 노력들은 어떤 '변화도 만들어내지' 못한다는 무용 명제, 변화나 개혁에 드는 비용이 너무 많기 때문에 그 변화나 개혁은 이전의 소중한 성취를 위험에 빠뜨린다는 위험 명제.(28쪽) 이 세 명제가 보수의 수사학입니다. 시대와 상황에 따라 그 표현 방식이 다르기야 하겠지만 어디서 많이 들어본, 실로 익숙한 수사학입니다. 그리고 이 명제들은 알게 모르게 우리 사회 전반에 널리 퍼져 있지만 그 실체는 명확하지가 않습니다. 안개와 같이 우리 사회를 감싸고 있지만 그 목표물을 조준하기가 쉽지 않은, 정말 교묘한 논리입니다.

 

그러나 저자는 '계획된 행동을 취하지 않으면 비참한 결과를 초래할 것'이고 '신-구의 개혁은 서로가 서로를 강화시켜 줄 것'이며 '계획된 행동은 이미 '굴러가고 있는' 강력한 역사의 힘에 의해 뒷받침되기에 거기에 맞서는 것은 아주 쓸데없는 짓'(226쪽)이라고 진보의 논리를 정리합니다. 역사에 대한, 인간의 의지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보여주는 결론이 아닌가 싶습니다. 결국 상대적이기는 하지만 어느 쪽에 자신의 시선을 두느냐에 따라 보수와 진보는 나뉘어질 것이고 행동에 대한 신념의 차이가 역사발전의 합법칙성을 야기하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일상을 살아가다 보면 무심코 넘어가던 많은 일들이 사실은 보수의 수사학에 속아넘어간 경우가 참 많습니다. 새로운 정부가 들어선 지금에도 고리원전 폐쇄의 문제에 관련한 전기요금 인상, 대체전력의 부족 등을 이야기하며 반대하는 사례, 특수목적고 일반고 전환에 대한 교육의 다양성, 선택권 차원의 문제 제기, 다양한 교육 기법이나 교육 사례의 사장 등도 그렇습니다. 또한 일제고사 폐지에 대한 학생들의 학력 저하도 마찬가지고요. 항상 똑같은 논리가 아니라 역효과, 무용, 위험 명제는 사례와 상황에 따라 그 모습을 달리 하면서 교묘하게 우리의 현실을 지배하려 하고 있습니다. 아무 생각없이 그들의 논리를 듣다 보면 자연스럽게 동조할 수도 있을 만큼 보수의 수사학은 역사의 발전 과정에서 세련되게 다듬어졌거나 무의식 중에 우리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한편으로 지금 우리사회를 무겁게 짓누르는 무기력증은 보수의 수사학이 더욱 강화되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전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 청년 실업, 갈수록 늘어만 가는 가계부채, 더딘 경제 성장, 대학입시로 귀결되는 끝없는 경쟁 중심의 교육 등을 생각해보면 아무 것도 변화시킬 수 없고, 변화의 시도 자체가 또다른 상황의 악화를 가져올 수도 있을 거라는 걱정을 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허무주의야말로 가진 자들이 바라는 가장 강력한 대중적 경향'(11쪽)입니다. '행동의 위험에 대해서는 행동하는 않는 것의 위험성을 들어 반대하는 일이 항상 가능'(147쪽)합니다. 빨간머리 앤에서도 비슷한 말이 나오지요.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런 실망도 하지 않으니 다행이'라는 아주머니의 말에 앤을 말합니다. '실망하는 것보다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게 더 나쁜거라고......' 또한 '세상은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도 참 멋지다'고 앤은 말합니다.' 생각지도 못한 일이 일어난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런 앤의 자세가 보수의 수사학에 대한 올바른 자세가 아닌가 하는 생각입니다. 

 

책의 세부적인 내용을 제시하고 의견을 피력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제가 그 부분까지 제대로 이해를 하지 못했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과거로부터 현재까지 자본주의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그리고 지배하려 시도하는 보수의 수사학을 이처럼 명확하게 제시하는 책도 없을 것 같습니다. 보수는 어떻게 자신의 논리를 제기하는가? 혹은 사회의 지배논리와 진보와 보수의 이념 차이 등에 관심이 있는 분이라면 상당히 유의미하게 다가올 책입니다.

 

‘허무주의야말로 가진 자들이 바라는 가장 강력한 대중적 경향‘(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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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년생 김지영 오늘의 젊은 작가 13
조남주 지음 / 민음사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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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읽었던 '쇼코의 미소'에서도 표지 인물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는데 이번에 읽은 '82년생 김지영'도 표지 그림의 얼굴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표지 인물보다 검고 큰 그림자가 더 깊게 다가옵니다. 뒷짐을 지고 서 있는 여인. 무얼 생각하는지 어디를 보고 있는지 알 수는 없지만 그 옆의 검은 그림자는 인물의 혹은 인물이 처한 상황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정의당 노회찬 의원이 청와대 방문 당시 문재인 대통령에게 선물해서 더 화제가 된 책 '82년생 김지영'.

'한국 사회에서 여자로 살아가는 일. 그 공포, 피로, 당황, 놀람, 혼란, 좌절의 연속에 대한 인생 현장 보고서'

뒷표지에 있는 문구이면서 이 책을 가장 압축적으로 표현하는 말이 아닌가 싶습니다. 한국이라는 나라에 살면서 남자로 태어난 게 다행이다라는 생각을 가져보지 못한 중년 남성은 없을 것입니다. 그만큼 이 나라는 철저하게 남성 중심의 사회로 이어져왔고 앞으로도 꽤 오랜 기간 이어질 것입니다. 이 책에는 그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한 여인이 약 35년간 겪어온 차별과 억압의 기록이 마치 르포처럼 펼쳐져 있습니다. 내용도 길지 않고 가독성도 좋아서 다 읽는데 채 3시간도 걸리지 않았습니다. 제가 책을 빨리 읽는 편이기도 하지만 책의 흐름이 예상가능한 것도 있고  무엇보다 당사자인 여성이 아닌 남성이기 때문에 심각성을 인식하자 못하고 읽어서 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책을 읽는 내내 이렇게도 다양하고 세부적인 부분까치 차별이 미치고 있구나 하는 새삼스러운 깨달음을 얻기도 한 책입니다.

 

'82년생 김지영의 주인공은 익숙하다. 특수성이 아니라 보편성을 추구하는 것이 이 소설의 특수성이다.'(179쪽) 선뜻 동의하기는 어려운 문장이지만 소설의 핵심을 정리하는 문장이기도 합니다. 소설을 읽다보면 82년생 김지영 씨가 겪는 그 수많은 경험과 차별이 익숙합니다. 주위에서 충분히 봤고 들어봤던 내용들입니다. 물론 그렇지 못한 내용들도 많지만... 그렇기 때문에 김지영이란 인물은 익숙합니다. 하지만 소설 자체가 익숙함(일상성) 속에서의 구체적이고 특수한 인물의 형상화를 목표로 한다고 생각한다면 이 소설을 결코 잘 써진 소설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보편성을 추구하는 것이 특수성이라는 문장은 소설의 약점을 교묘하게 감추는 수사가 아닌가 하는 개인적 생각입니다. 더구나 소설+르포의 형식적 특성을 취하고 있기에 수많은 각주와 통계 자료를 적시하는 듯한 문장의 딱딱함도 소설로서의 약점을 드러내고 있는 장치가 아닌가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소설에서 제기하는 여성 차별, 한국사회의 많은 문제점들을 외면하거나 축소하려는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다만 이 소설이 소설적 형상화의 측면에서는 다소 부족하지 않나 하는 생각일 뿐...

 

'우리 주변의 많은 여성들이 김지영처럼 눈을 감아 버리고 입을 닫아 버린다. 하고 싶은 말을 하면 무슨 일이 생길지 예상할 수 있고 그 일은 피로와 무력으로 되돌아올 것이기 때문이다.'(186쪽)

대한민국 여성의 현실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문장입니다. 누가 뭐래도 대한민국은 여전히 여성에 대한 경시와 차별, 불평등이 만연한 사회입니다. 무엇을 말하고 행동해도 무시되어 버릴 것이라는, 심리적 장벽 혹은 무용론이 여성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보니 분명 차별을 받고 있고 무시당하고 있다고 생각되는 현실 속에서는 참고 넘겨버리는, 어쩔 수 없이 회피되고 회피해야만 하는 현실의 반복입니다. 책을 읽다 보면 정말 많은 장면에서 김지영 씨는 눈을 감아버리고 입을 닫아 버리고 있습니다. 남성으로서 당연히(!) 누리고 향위하는 현실에서의 지위와 영향은 결국 여성의 눈물 위에서 가능했던 것입니다.

 

엄마의 뱃속에서부터 또다른 엄마가 되어서까지 여성의 차별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아니 차별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안간힘을 씁니다. 유리천장은 조금도 균열이 가지 않고 견고한 벽을 쌓아올렸습니다. 새 정부 출범 이후 내각의 관료를 30%이상 여성으로 채우겠다고 했는데 이것이 유리천장에 가하는 묵직한 펀치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우리 사회 전체에 만연한 남성 중심의 사고가 혁신되어야 할 것입니다. 책을 읽다보니 너무나 당연하게 남성으로서의 권리 아니 권리를 누리고 있었다는 자책감이 들었습니다. 남성이기에 당연시여겼던 것들이 그 맞은편 여성의 입장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사고와 행위였습니다. 그러고 이것들은 자연스럽게 몸에 배어 쉽게 고칠 수 없는 고질병같은 것이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책의 마지막에 명쾌한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불안한 현재와 미래를 보여주는 것 역시 우리 사회의 현실을 보여주는 것이라 생각됐습니다. 여성의 주체적 사고와 행동, 남성의 내려놓기 혹은 역지사지의 자세가 결합될 때, 여성의 차별과 불평등은 점진적으로 해소될 것입니다.

 

아프게 읽었습니다. 대한민국 여성보다 남성이 먼저 읽어야 할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변화의 시작은 공감과 이해에서부터가 아닐까 싶습니다. 성으로서 인간의 역할과 지위를 나누는 것이 아니라 인간 자체가 모든 판단의 기준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 논의의 본격적인 시작을 소설 '82년생 김지영'이 던져주는 것은 아닐까요?

 

‘우리 주변의 많은 여성들이 김지영처럼 눈을 감아 버리고 입을 닫아 버린다. 하고 싶은 말을 하면 무슨 일이 생길지 예상할 수 있고 그 일은 피로와 무력으로 되돌아올 것이기 때문이다.‘(18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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