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터에서
김훈 지음 / 해냄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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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훈 선생의 글을 읽을 때는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집중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작가의 문장을 유심히 들여다 봅니다. 아는 소설가라고 해 봐야 몇 되지 않지만 문장, 그 중에서도 문체에 가장 신경을 쓰고 또 가장 탁월함을 보이는 작가가 김훈 선생이 아닐까 합니다. 그리고 단문을 가장 잘 구사하는 작가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김훈 선생의 글을 읽을 때에는 아무래도 문체에 신경을 쓰며 읽기 마련입니다. 이번에 만난 '공터에서'도 이런 선생의 문체적 특성이 잘 드러난 소설입니다.

 

소설은 아버지 마동수와 그의 아들인 마장세, 마차세의 삶의 기록입니다. 여기서 기록이란 말을 쓰는 것은 무엇보다 작가는 우리 앞에 그들의 삶을 툭~ 던져 놓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극도의 단문, 극도의 건조한 문체, 그리고 극도의 객관적인 서술이 이 소설을 관통하고 있습니다. 소설은 일제 시대부터 80년대 후반까지 부자의 삶을 보여줍니다. 거기에는 어떤 작가의 판단도 개입되지(개입하지) 않습니다. 그저 살아남기 위하여, 먹고 살기 위하여 일상을 부딪치는 그들의 스산한 삶을 풍경처럼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버지 마동수는 거점이 없는 사람입니다. 어쩌면 무색무취의 인간, 그림자처럼 존재감이 없는 인간, 바람처럼 흔적을 남기지 않으려는 인간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조선에서 중국 상해를 거쳐 다시 대한민국으로 그의 삶은 이어집니다. 그런 그에게 (다행인지 불행인지) 가족이 있지요. 그 가족을 위해 1년에 몇 번 땔깜을 가지고, 양식을 가지고, 고등어를 가지고 돌아옵니다. 올 때 아무런 기척이 없이 오듯 갈 때도 흔적 하나 남기지 않고 떠납니다. 그의 삶의 흔적이라곤 장세와 차세, 이 둘뿐입니다. '일상의 작은 것들을 모으고 쌓아서, 막막한 날들을 건너'(192쪽)가야 하지만 그에는 그 작은 것을 모을 능력도, 의지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떠날 때는 한없이 작은 몸으로, '꼬부린 자세로 죽어'(41쪽)습니다. '칠성판에 눕힐 때 등뼈에서 우드득 소리가'(41쪽) 날 정도로...

 

마장세는 그런 아버지가, 그런 아버지가 있는 이 나라가 싫습니다. 그래서 베트남 파병이 끝나고 귀향하지 않고 남태평양의 섬으로 떠납니다. 그는 한국이란 나라로 결코 오고 싶지 않습니다. 아버지와의 인연이 얽혀서 발목이 잡히는 것이 겁이 나는 것인지, 그냥 아버지라는 존재 자체가 싫은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하지만 그는 결국 '거기'라고 불리던 나라의 상황을 이용해 돈을 벌고 그 돈으로 발목이 잡혀 아버지의 나라로 강제로 돌아옵니다. 마장세에게 한국은 벗어나고 싶었지만 끝내 벗어나지 못한 굴레와도 같은 것이겠지요.

 

어찌보면 가장 평범하고도 흔히 볼 수 있는 인물이 마차세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는 사랑을 하고 어느 정도 정상적인 가정을 꾸리고 실직의 아픔을 겪긴 하지만 사회생활도 어느 정도의 성공을 거둡니다. 무엇보다 마차세를 아버지와 형을 구분짓게 하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이 곁에 있다는 것입니다. 아버지 마동수가 어머니 이도순을 만나 아이를 낳지만 그들 사이에는 사랑이 자리하기 보다는 시대의 억압과 흐름에 억눌린 결과라고 생각됩니다. 마장세는 아내의 존재와 비슷한 린다가 있었지만 그들의 사이는 결국 파국을 맞게 됩니다. 반면에 마차세 곁에는 아내 박상희와 눈이 오는 날 태어난 딸, 누니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이가 곁에 있었기에 실직의 아픔을 견디고 가족의 뒷일을 감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림 시작할 때 빈 종이처럼, 좀 더 견뎌'(192쪽)라는 박상희의 말, '생활을 구성하는 온갖 작고 하찮은 것들이 쌓여서, 그것들이 서로 인연을 이루고 질감을 빚어내서 마차세의 시간을 메워주기를 바'(199쪽)라는 박상희의 생각이 마차세를 지탱하는 힘이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구성의 긴밀도에 있어서는 좋은 점수를 주기 어려운 소설입니다. 앞서 언급했듯 소설은 마씨 성을 가진 부자의 삶을 시간의 흐름대로 서술할 뿐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삶에는 질곡의 역사가 그늘을 드리우고 있습니다. 그들은 그 역사의 그늘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으며 그늘에서 벗어난 삶도 살지 못합니다. 작가는 그들의 삶을 그저 보여주기만 할 뿐입니다. 그래서 특별한 갈등도, 긴장감도 없는 소설입니다. 때문에 소설적 재미는 다소 약한 편입니다. 다만 '막막한 세상에서 몸 비빌 수 있는 작은 거점'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던 그들의 삶을 우리는 바라볼 뿐입니다. 물론 마씨 부자의 주변에 오장춘이나 시누크, 김오팔 등의 주변인물들이 등장하지만 이들의 역할은 그닥 두드러지지 않습니다. 서로 인연이 얽히고 관계를 맺기는 하지만 뚜렷한 갈등구조도 보이지 않고 그들 역시 자신의 삶을 살아가려 노력합니다. 언제나 당면한 삶보다 중요한 가치는 없기 때문이지요. 결국 소설은 인물들 간의 갈등이나 시대와의 부조화보다는 신산한 삶의 흔적을 카메라와 같은 시선을로 따라가고 비춰주는 데 초점을 맞춘 것으로 느껴집니다.

 

'문득 태어난 자리에 묶여서 살아간다는 것이 가볍고 하찮게 느껴졌다. 그 가벼움이 어째서 그토록 무거웠는지'(284쪽) 느끼는 것은 비단 마차세만이 아닐 것입니다. 지나고 나면 무겁고 질곡과도 같았던 일상은 지극히 사소한 것으로 탈바꿈합니다. 단지 그 순간순간의 무게가 우리의 삶을 짓누를 뿐입니다. 그러나 그 삶의 무게를 견뎌내야만 지난 시간이 가볍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마동수와 마장세처럼 바람처럼 흘러가고 삶의 거점 마련을 도외시하고 도피하려 한다면 그들에게 삶은 여전히 버티기 어려운 굴레일 것입니다. 아버지의 삶은 장남에게 이어지고 장남의 삶은 끈태 파국으로 흐릅니다. 삶이 끝났을 지라도 그것이 끝이 아닐 수도 있는 이유입니다.

 

어쩌면 마동수는 마장세이고 이도순은 마차세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 피가 내 피냐 니 피냐. 그 핏덩이가 너다. 그 핏덩이가 나야. 그게 너고, 그게 나다'(129쪽)라는 이도순의 외침은 자신의 남편과 장남을 향한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입니다. 서로가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지 못하고 떠도는 삶이든, 남아서 주어지는 삶의 무게를 견디는 삶이든 무섭게도 닮은 외모처럼 삶의 풍경 역시 비슷하게 다가옵니다. 시대가 변하고 세대가 끝나더라도 변하지 않고 이어지는 혈연의 이어짐, 삶의 끈질김을 이 소설은 말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꽤 오랜 시간을 들여 읽었습니다. (맞는 표현일 지 모르지만) 서늘한 문체를 읽고 느끼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소설이었습니다. 절제된 단문은 대가가 아니면 쉽게 쓸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미숙할수록 문장은 길어지고 꾸밈이 많아집니다. 끊임없이 일렁이는 파도의 모습을, 그 광활한 바다를 직선 하나로 갈무리할 수 있는 대가의 손길이 느껴진 작품이었습니다. 일독을 권합니다.

 

‘그 피가 내 피냐 니 피냐. 그 핏덩이가 너다. 그 핏덩이가 나야. 그게 너고, 그게 나다‘(12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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