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주정뱅이
권여선 지음 / 창비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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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과 구원을 동시에 노래한 시같은 소설'

책의 띠지에 적혀있는 문자입니다.

구원까지는 잘 이해가 안 되고 절망을 노래한 소설이란 점은 동의가 됩니다.

 

소설을 읽다보면 가끔 읽히기는 무난한데 작가가 전하고자 하는 의도가 잘 파악이 되지 않는 소설이 있습니다. '안녕 주정뱅이'가 바로 이런 소설이었습니다. 소설은 '봄밤, 삼인행, 이모, 카메라, 역광, 실내화 한켤레, 층' 등 총 7편의 단편이 수록되었습니다. 이 중 '봄밤'을 읽고나서 당혹스러웠습니다. 뭐지? 지독한 사랑을 이야기하는 것인가? 아니면 끝도 없는 절망을 이야기하는 것인가? 아니면 또다른 무엇을 의미하는가? '삼인행' 역시 다 읽고 나서는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이모'부터는 대충의 의도를 파악할 수 있어서 무사히 완독을 할 수 있었습니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완독을 못 했을 수도...

 

사실 제목부터 심상치 않습니다. 그 어떤 문장부호도 없는 제목. 쉼표도, 마침표도, 물음표도 없습니다. 주정뱅이의 안위가 궁금한 것인지, 주정뱅이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네는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이 제목은 소설 본문에서의 다양한 인물들의 다양한 삶에도 그대로 열려 있습니다.

 

'봄밤'의 영경과 수환은 불운의 끝을 보여줍니다. 신용불량자(수환)와 알콜중독자(영경)의 만남. 그러나 그가 조용히 등을 내밀어 그녀를 업었을 때 그녀는 취한 와중에도 자신에게 돌아올 행운의 몫이 아직 남아 있었다는 사실(28쪽)'에 놀라워한 것도 잠시, 수환에게 행운은 더이상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죽음을 마주해야 하는 두 사람. 수환은 알콜을 찾으러 떠나는 영경을 웃는 얼굴로 배웅하고 영경은 술에 절은 채 그의 마지막을 함께 하지 못합니다. 이것이 사랑일까요? 사랑이라면 미치도록 절망스럽고, 겪고 싶지도 보고 싶지도 않은 사랑임이 분명합니다.

 

'삼인행'의 주란과 규, 훈은 여행을 떠납니다. 주란과 규는 부부지만 이혼을 앞둔 마지막 여행을 하는 것이지요. 거기에 관찰자인 훈이 동행합니다. 무모할 정도로 계획된 여정에 따라 움직이는 그들. 그러나 주란과 규 부부는 이렇게 계획대로 살고 움직이는 부부가 아니었다는 것은 소설의 말미에 드러납니다. 어쩌면 그들에게 일상은 버티기 힘든 굴레와 억압일 지도 모릅니다. 그러기에 '우리 다시는 서울로 못 돌아가도 괜찮을 것 같지 않냐(72쪽)'고 말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인연과 원업은 결코 끊을 래야 끊을 수 없는 것임을 그들도 모르는 것은 아닐테지요. 하지만 술에 취해, 환상에 취해 바라보는(혹은 듣는) 삶에는 그 어떤 빛줄기도 보이지 않습니다. 규에게 들리는 환청은 그들 부부를 가로막는 또다른 필연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이모'의 이모는 가족을 위해 희생아닌 희생을 하다 자신의 젊은 날을 보내고 만 인물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건 무엇을 위한 희생이냐, 무엇에만 배타적으로 이타적이냐(87쪽)'가 문제입니다. 자신을 위한 삶이 아닌 가족을 위한 삶. 하지만 그것은 자의적인 이타가 아니었습니다. 그렇기에 이모는 모든 인연을 끊고 자신만의 삶을 살아보려 시도한 것이겠지요. 그러나 그 삶에서 만난 또 하나의 난관. 포기하고 싶은 삶에서 이모는 젊은 날의 기억과 마주치고 그 기억 속에서 자신의 행동에 스스로 응징을 가하며 삶을 지속해 나갑니다. 그 어떤 것이든 합당한 대가가 지불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여덟자리의 숫자를 남기고 세상을 떠납니다. '그렇게 꽉 쥐지 말아요... 놓아야 살 수 있어요(135쪽)'라고 말하는 것처럼... 어쩌면 필연적 죽음 앞에서 이모가 보인 태도는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합니다.

 

'카메라'의 관희와 관주, 문정의 삶에는 지독한 우연이 있습니다. 인물 간의 관계도 그렇지만 그들의 관계를 끝내는 장면에서는 우연적 삶의 지독함에 마음이 아픕니다. '층'의 인태와 예연의 관계에서도 우연적 순간이 그들의 인연을 끝장내고 맙니다. '실내화 한켤레'의 혜련과 선미, 경안의 재회도 기가 막힌 우연의 결과입니다. 이렇게 따지만 이 소설을 관통하는 하나의 키워드는 우연성이 아닌가 합니다. 이 점에서 평론가 신형설은 해설에서 '불행과 관련해서는 신(우연)의 영역과 인간(필연)의 영역(244쪽)'이 있다고 합니다. 그렇게 우연과 필연이 어우러져는 우리 삶의 뒤덮고 삶과 죽음을 갈라놓은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이 우연과 필연이 더욱 빛을 발하는 것은 불행의 장면입니다. '어떤 불행은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만 감지되고 어떤 불행은 지독한 원시의 눈으로만 볼 수 있으며 또 어떤 불행은 어느 각도와 시점에서도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어떤 불행은 눈만 돌리면 바로 보이는 곳에 있지만 결코 보고 싶지가 않은 것'(176쪽)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지나가는 말이든 무심코 한 행동이든, 일단 튀어나온 이상 돌처럼 단단한 필연이(136쪽)' 되기도 합니다. 결국 시선의 문제, 자세의 문제일 수 있습니다. 또한 그것이 어떤 경우에는 변명이 될 수도 있을 것이며 어떤 경우에는 숙명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불행의 장면들 속에서 우리는 역설적으로 희망을, 삶을 노래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불행한 인물에 공감하고 위로의 시선을 보내는 것. 이것이 문학의 힘이며 삶의 근본적인 자세가 아닐까요?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이런 점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렇기에 '절망과 구원을 동시에 노래'한 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근거가 아닐까 합니다.

 

삶이든 인간 사이의 관계이든 '갑자기 뭔가 중단되었을 때에야 그것의 지속을 얼마나 갈망해왔는지 알게'(53쪽) 됩니다. 소설집의 주인공들은 대개 죽음을 맞이하거나 이별을 맞이합니다. 혹은 예기치 못한 질병이 암시되기도 합니다. 이렇게 (그것이 우연이든 필연이든) 무언가가 중단되거나 상실되었을 때, 일상의 비범함 혹은 중요함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때는 너무 늦은 경우가 허다합니다. 결국 빛 하나 없는 어둠 속에 머물게 됩니다. 하지만 마냥 받아들이기엔 그 순간이 너무 가혹하며 지켜보기에도 마음이 좋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에 '내 탓은 아니'라고 변명을 하거나 '내가 무슨 도움이 되겠'냐고 회피를 합니다. 하지만 그 불행의 순간은 언제나 예고없이 닥쳐옵니다. 그 누구도 예외가 될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작가는 이런 비극적 환경과 그 속의 인물을 우리 앞에 던져 놓습니다. 그리고 그 비극과 불행에 따뜻한 위로의 시선 한 번 던져줄 것을 조용히 요구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지속되는 어둠이 없듯 지속되는 불행은 없습니다. 그리고 그 불행을 다소 완화시킬 수 있는 것은 여전히 인간에 대한 이해와 사랑이 될 것입니다.

 

완벽한 인간은 애초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모두 결여 혹은 결핍의 존재입니다. 그리고 그 결여를 그대로 바라보거나 결여를 수용할 수 있을 때 인간 관계는 비로소 시작합니다. 사랑의 시작입니다. 수환과 영경이 바로 그런 존재들입니다.(262쪽을 참고해서...) 결국 작가는 비극의 극단 속에서의 사랑을 보여주며,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사랑이라고 역설합니다. 그런 면에서 '안녕 주정뱅이'란 제목은 예기치 못한 불행 속의 한 개인에게 보내는 위로의 인사, 사랑의 시선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단순한 질문이 아닌 위로를 보내는 애잔한 시선. 이것이 이 소설집을 관통하는 작가의 시선입니다.

 

‘어떤 불행은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만 감지되고 어떤 불행은 지독한 원시의 눈으로만 볼 수 있으며 또 어떤 불행은 어느 각도와 시점에서도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어떤 불행은 눈만 돌리면 바로 보이는 곳에 있지만 결코 보고 싶지가 않은 것‘(17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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