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링턴파크 여자들의 어느 완벽한 하루
레이철 커스크 지음, 김현우 옮김 / 민음사 / 2008년 9월
평점 :
절판


자다가 추적추적 떨어지는 빗소리에 잠을 깬 적이 있다. 봄비라면 생명의 활기에 대한 기대라도 있으련만, 비가 오고 나면 한결 더 추워지는 늦가을의 비는 소리만 들어도 마음이 스산하다. 옆에는 등을 돌리고 나지막이 코를 고는 남편이 있고, 머릿속에는 끝없는 빗소리와 더불어 좀전의 꿈이 는적거린다. 그렇게 잠이 깬 날에는 이런 저런 생각들 때문에 아주 오랫동안 뒤척거리게 되고, 겨우 잠이 들었다 깨어난 아침은 머리가 묵지근하니 찜찜하다.

<알링턴파크 여자들의 어느 완벽한 하루> (2008, 레이철 커스크 지음, 민음사 펴냄)는 그런 아침의 분위기를 적나라하게 보여 주며 이야기를 시작한다. '어둠의 관객들이 집 앞으로 몰려와 창문을 두드리며 집 안에 있는 사람들을 지켜보고 있는 것 같은' 비가 밤새 내리면서, '막아 내기엔 이미 늦어 버린 무언가에 대한 두려움, 이미 일어나버린 어떤 일에 대한 두려움'을 주는 날씨.
런던 교외의 가상 지역인 알링턴파크는 그런 대로 가진 사람들이 모이는 중산층 베드타운으로 설정되었다. 화자는 삼십대의 여자들로서, 자기 자신, 아내, 엄마, 친구 등 다양한 역할의 여러 면들을 보여준다. 아침에는 아이를 데려다 준 엄마들끼리 모여 차를 마시고, 점심에는 함께 쇼핑을 하고서 식사를 함께 하고, 저녁에는 아는 이들을 초대해서 식사를 함께 하는 것. 알링턴파크의 어느 완벽한 하루는 대략 이와 같이 구성된다. 아주 사교적이고 완벽해 보이지 않은가. 그러나 그 속내를 들여다 보면 전혀 그렇지 않다.

이들은 모두 열 살 미만의 아이들이 있다. 아이들이 혼자서 등하교하는 우리나라와는 달리 아침에 데려다 주고 하교시에는 학교에서 아이들을 인계받아야 하기 때문에, 그 스케줄에 따라 생활해야 한다. 아이들은 엄마들에게 삶의 희망이 되기도 하지만, 많은 경우 엄마 자신의 이루지 못한 꿈을 되돌아보게 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고 얽매는 족쇄가 되기도 하며 자신을 고스란히 비추는 거울이 되기도 한다.
남편과도 이제는 더이상 뜨겁게 사랑하는 사이가 아니다. 꿈에서 자신을 배려하지 않는 남편을 보며 현실을 깨닫는 초반의 장면도 그렇고, 퇴근하고 온 남편과 연극을 하는 듯한 거리감이 있는 메이지의 경우를 보아도, 남편은 이제 알링턴파크 여자들의 정신적 지주가 아님을 명확하게 보여 준다.

모든 것이 지겨워진 그 나른함과 무거움을 <알링턴파크 여자들의 어느 완벽한 하루>는 사실적으로 꼼꼼하게 묘사하고 있다. 마치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 같은 반어법의 묘미가 제목에서부터 살아 있다. 그들의 하루는 겉보기로는 완벽했으나 점점 더 생기를 잃고 바닥에서부터 무너져갈 것이고, 그런 하루는 알링턴파크 뿐만은 아닐 것이다. 그 쓸쓸함과 허망함이 남 이야기 같지 않게 마음 속으로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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