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슬프고 무섭고 아련한
아사다 지로 지음, 양윤옥 옮김 / 북하우스 / 2008년 8월
평점 :
품절
아사다 지로를 처음 만난 것은 책이 아니라 영화였다. <철도원>에서 만난 그 조용함과 단정함. 그것은 아사다 지로의 책에서 항상 만날 수 있는 조금은 낮은 모습이라고 각인되었다. 나이를 먹을수록 끝없이 통통 튀는 가벼운 이야기들보다는, 그야말로 '슬프고 무섭고 아련한' 이야기들이 마음에 들어오고 오래 남기 때문에 <슬프고 무섭고 아련한> (2008, 아사다 지로 지음, 북하우스 펴냄)은 내 마음에 들어오기 전부터 자리를 잡고 있었다.
아주 검은 배경에 희푸른 연기가 솟아오르고 있다. 바람이 불지 않는지 곧바로 올라오던 연기는 주변으로 흩어지면서 아련하게 사라져 간다. 마치 신사의 신전에 피워놓은 향불처럼, 해충을 구제하기 위해 피워놓은 벌레잡이 화톳불처럼, 사랑하는 이의 시신이 화장되는 화장터의 연기처럼, 마중불의 연기처럼, 죽은 이들을 초대하는 길맞이 역할을 한다. 아사다 지로는 이처럼 향을 피워 놓고 죽은 자를 불러들여 산 자와 조우하게 만들어서 일곱 개의 기담을 엮어낸다.
첫번째 이야기와 일곱번째 이야기는 신사에 모인 아이들이 이모님에게서 잠들기 전에 이야기를 듣는 것으로 설정된다. 도쿠가와 이에야스 시절부터 이어져 내려온 오래된 신사에서, 마지막으로 영험한 힘을 가졌던 할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자란 이모님에게는 삶과 죽음, 원혼과 짐승의 화신 등이 전혀 낯설지 않다. 이모님이 열 살 즈음해서 일어났던 신사에서의 정사情死는 그 목숨을 구할 수 없었다는 것 때문에 오랜 기억을 남겼고(인연의 붉은 끈), 여우신에 씌인 가나 아가씨의 이야기에서는 구신狗神과 여우의 대결이라는 지극히 일본스러운 신도神道 덕분에 아주 아련하면서 여우에게 먹혀버린 어린 아가씨의 삶이 참 슬프게 느껴졌다(여우님).
또한 일곱 편 중에서 세 편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상황을 언급하고 있다. 남방에 파견되어 굶고 다쳐 거의 죽어가는 상태에서 자신과 똑같은 사람을 만나 영혼을 바꾸었다는 할아버지 (벌레잡이 화톳불), 지구보다 무거운 한 생명이라도 구하고자 군의관으로 자원하여 뉴기니로 송출되다가, 어뢰정에 맞아 배가 가라앉고 바다에서 숨진 군의관 (옛날 남자), 임신한 아내를 두고 징집되어 레이테 섬에서 몰살당한 야노 일등병 (원별리)은, 신념이나 조국이 아니라 일본에 살고 있는 가족들을 지키기 위해서 죽었다는 이야기를 담담하게 하고 있다. 사실 전쟁의 시작과 전개를 계획한 이들이 아니라 군의관과 이등병에게 무슨 죄가 있으랴마는, 자신들 뿐만 아니라 수많은 피해자를 만들어낸 것에 대한 반성은 전혀 없다. 단지 이들의 입장에서는 그들의 배에 어뢰정을 쏜, 총탄이 떨어져서 칼로 돌격할 때 앞에서 전차로 밀고 들어오는 적들만이 있을 뿐이다. 당시의 어렵고 비관적인 상황을 객관적으로 묘사하고 있으나, 그 아래에 군국주의가 들어있을까 하는 걱정은 요즘 우경화, 제국주의화되고 있는 일본을 보면서 느끼는 두려움 때문에 너무 성급하게 넘겨짚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아사다 지로의 이야기들 중에서 '벌레잡이 화톳불'이라는 이야기를 가장 슬프고 무섭고 아련하게 읽었다. 거액의 부도를 내고 야반도주하여 보일러공으로 근근이 살아가는 쓰야마 가족. 빚을 진 이들에게 미안하고 그럼에도 잘 참아주는 가족들에게 미안한 그 마음이 생생하게 느껴진다. '처음부터 새로 시작하기에는 결코 젊은 나이일 리 없고, 그렇다고 모든 것을 포기할 만한 나이도 아닌' 마흔 살이라는 나이. 낼모레면 마흔이 될 내 입장과 너무도 닮아서인지도 모르겠다. 도플 갱어에게 가족을 잃었으나, 잘 부탁한다고, 고맙고 미안하다고 고개를 숙이는 그 슬픈 모습은 오래오래 기억될 것이다.
컴컴한 여름 밤, 모깃불의 싸한 향기 아래에서 옛날 이야기를 듣는 느낌. 다른 아이들은 모두 자고 나만 남아서 그 조용한 이야기를 듣는 소슬함이 느껴지는 시간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