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신의 그릇 1
신한균 지음 / 아우라 / 2008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흙은 생명의 원천이다. 목숨이 있는 것은 모두 흙으로 돌아간다. 그 흙을 다루는 것은 장인의 손이다. 흙은 그냥 두면 흙이지만, 흙에 감성을 불어 넣으면 보석이 된다."
한국 전통도예의 거장인 신정희 선생님의 도예(陶藝)의 진가는 약 오백년만에 고려도기(高麗陶器)를 재현했다는 것이다. 1962년 한 일본인이 가지고 있던 <고려다완>에 충격을 받고, 이를 재현하기 위해 숱한 고난과 고비를 겪은 끝에 1968년 드디어 이도다완을 재현해 내셨다. 우리 정부에 의해 한국 도예계를 대표하는 도예가로 인정받았고, 일본에서 한국의 문화재 격인 <일본명사명류록>에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등재되었다고 한다. 전통 도예가이자 조선의 막사발이었던 분청사기를 재현해 낸 신정희 선생님은 2007년 6월 77세를 일기로 별세하셨다.
이런 신정희 선생님의 장남이자 신정희 요를 이어받은 신한균 님이, 임진왜란 때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 사기장 신석의 시선으로 그들의 삶을 그려낸 것이 <신의 그릇 1~2>(2008, 신한균 지음, 아우라 펴냄)이다.
임진왜란은 일본의 통치자들이 이도다완이라는 최상급 도자기를 구하기 위해 일으킨 전쟁이고, 명품 도자기 한 점으로 성을 구했다는 일화처럼 일본의 다도와 도자기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다.
임진왜란 중에 일본인 지배자의 눈에 들어 전속 도공으로 임명된 신석은, 어느날 가족과 떨어져 일본으로 강제 납치되고 사무라이 도공으로 임명되어 고려촌을 일구어낸다. 조선에 있을 때에도 일본에 가져갈 도기에 대한 답례로 받은 쌀과 자금을 의병 활동에 썼던 그는, 일본에 정착한 후 노예로 팔리는 조선인들을 데려다 고려촌을 만든다.
조선에서 온 사기장은 신석 외에도 이삼풍, 한배달, 종전, 존해, 팔산 등이 있다. 신석처럼 끌려온 경우도 있고, 조선 건국과 맞물려 정치적으로 망명한 백두산족이 있으며, 왜국으로 가면 대우를 잘 받는다고 하여 자발적으로 건너온 사람도 있었다. 이들은 경쟁하고 갈등했으나 조선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서로를 보듬는 모습이 뭉클하다.
신석은 어려서부터 배운 기술과 감성으로 사무라이가 되었으나, 이는 수천 명 중 대여섯명에 불과하다며 그 허상을 지적한다. 그러나 조선쇄환사를 만났을 때도, 꿈에 그리던 조선에 돌아와서도 사기장이라는 낮은 신분으로만 그를 대하는 조선의 경직된 계급사회에 대해서는 강하게 반발하고, 작품을 알아보는 일본인들의 안목에 대비하여 조선의 부족한 점을 아쉬워한다.
백자, 다완, 황도, 청자 등 그가 만들어내는 작품들에는 그의 땀과 노력과 혼이 들어간다. 전문가만이 할 수 있는 생생하고 자세한 서술 덕분에 불기운 후끈한 가마 앞에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게다가 호흡이 짧고 접속사가 거의 사용되지 않은 글들은 투박하지만 군더더기 없는 그릇을 대하는 듯하다.
국립중앙박물관 관장을 지내셨고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라는 책을 쓰신 고 최순우 선생님의 옛집 마당에는 백자로 빚은 달항아리가 남아 있다. 배가 풍만하게 부른 달항아리는 아무 무늬가 없지만 그 곡선만으로도 풍요롭다.
도자기는 이처럼 생활에 가까이 두고 아름다움을 누리거나 실제로 사용해야 자신의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고, 그 가치를 알아보고 만들어내는 사람이 있어야 작품으로 다시 태어난다. 조선의 가난한 사람들이 예사로 사용하던 조잡한 밥공기를, 천하제일의 다완으로 일컬어지는 키자에몽 이도로 일본의 차인들이 만들어낸 것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