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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닌이 있는 풍경
이상엽 사진.글 / 산책자 / 2007년 11월
평점 :
절판
조정래 선생님의 <인간연습>에는 사상을 인생의 지상 과제로 생각하고 북한에서 간첩으로 남파되었다가 체포되어 장기간 옥살이를 하고 전향한 이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사회주의 사상이 붕괴되어 소련이 몰락한 것은, 주인공에게는 가족과 목숨보다 소중하게 생각했던 사상이 무너지는 크나큰 충격으로 다가온다. 그런 주인공이 결국 삶의 의미를 찾게 된 것은 아이들과 나누는 인간적인 사랑과 행복이었다. 이 주인공 만큼은 아닐지라도 한때 운동권이었던 사람들에게 사회주의의 몰락은 어느 정도 아픔으로 남아있지 않을까.
소련이 사회주의를 포기하고 개방되면서 냉전의 위기는 사라졌고, 급속히 자본주의 사회로 변화하고 있다. [그 변화의 풍경에서 '혁명의 추억, 추억의 혁명을 느끼다]라는 설명을 단 <레닌이 있는 풍경>은 다큐멘터리 사진가이자 작가로 활동 중인 이상엽 님이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9,938킬로미터를 달리며 들른 9개 도시의 풍경들과 생각들을 담고 있다.
이 이야기는 표지와 제목에서 드러나듯 소비에트의 상징인 레닌의 동상에서 시작된다. 소련에서 사회주의가 무너지면서 레닌의 이상은 인민을 배반했으나 인민은 그를 배신하지 않았다고 작가는 적고 있다. 그 상징으로 레닌의 동상은 여전히 굳건하게 여기저기에 우뚝 서 있고 그의 미라는 공개되어 여전히 추모객들의 참배을 받고 있다. 레닌의 뒤를 이은 스탈린의 흔적은 이미 거의 파괴되어 찾을 수 없는 것에 비교하면, 레닌은 순수하고 열정적인 혁명가의 모습으로 기억되고 있는 듯했다.
시베리아 횡단열차의 여행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핀란드역'에서 시작된다. 이 역은 1917년 4월 16일, 오랜 망명 생활을 마친 레닌이 헬싱키로부터 기차를 타고 도착한 곳임을 기념하여 여전히 남아 있다. 레닌은 그해 10월 혁명을 완수했다. 이처럼 저자는 들르는 도시마다 그 도시의 역사를 이야기한다. 사연 없는 노래가 어디 있으랴. 특히 격동의 시기를 겪은 도시들에는 저 멀리 콘스탄티노플에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많은 이야기들이 얹혀 있다. 거기에다 종교와 사람이라는 많은 이야기들이 맞물려 러시아의 도시들은 저마다의 특색을 지닌다.
러시아 연방 자치공화국과 자치주 들 중에서 부랴티야 공화국의 우리와 꼭 닮은 사람들, 연해주의 고려인들은 러시아가 얼마나 우리와 가까운 곳인가를 새삼 깨닫게 한다.
사진들도 풍부하다. 모스크바의 붉은 광장 오른편에는 레닌의 묘, 중앙에는 바실리 성당, 왼편에는 명품 브랜드로 가득찬 굼 백화점이 있다. 그 사진 한 장에서 우리는 과거와 현재의 러시아를 생생하게 만날 수 있다. 레닌 동상 뒤로 보이는 일본의 SANYO 간판은 사회주의와 자본주의라는 상대적 개념을 무색하게 만든다. 밝고 화사하기보다는 어둡고 채도가 한 단계 낮은 사진들은, 낮도 아니고 밤도 아닌 백야와 맞물려 사라져 버린 혁명을 잘 나타낸다.
지금 공사중인 경의선이 완공되면 부산에서 신의주까지 갈 수 있고, 신의주에서 단둥까지 가서, 단둥에서 몽골 횡단열차로 센양, 베이징, 울란바토르, 울란우데까지 가면, 울란우데에서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탈 수 있다. 또다른 루트는 경원선으로, 지금은 서울에서 철원까지이지만 언젠가 원산까지 이어진다면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와 연결되어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탈 수 있단다.
언젠가 우리가 대륙으로 이어지게 되면 그때는 그가 추천해준 책을 한권쯤 챙기고 이 열차를 타서 끝없는 대륙으로의 확장을 느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