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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그림자의 약속
코데마리 루이 지음, 고정아 옮김 / 행간 / 2008년 2월
평점 :
절판
신주쿠 역 남쪽 출구에 서 있는 아파 보일 정도로 새하얀 호텔의 20층에 있는 카페. 오전 10시에 문이 열린다. 카페는 호텔 로비와 이어져 있고, 천장이 높고 벽이 없다. 부드러운 소파의 착석감은 편안하고, 유리창 너머로는 지평선 저편으로 겹겹이 이어져 있는 마을 풍경이 보인다.
코데마리 루이의 <빛과 그림자의 약속> (2008. 행간)에는 그 카페를 스쳐 지나가는 여섯 명의 여자들이 여섯 가지의 사랑 이야기를 펼쳐낸다. 이제 그 카페에 앉아 장미꽃잎 띄운 차를 마시며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자.
"아름다운 것을 봤을 때는 손에 넣기를 망설여서는 안 돼. 인생에서 단 한 번뿐인 만남. 물건도 사랑도 마찬가지야." (79쪽)
여섯 가지 이야기들은 모두 여성 화자들에 의해 서술된다. 부부간의 사랑이 아니라 아내가 있는 남자, 가르치던 어린 제자, 심지어 여자와 사랑하는 이야기들이다. 불륜이라고 손가락질받기 쉬운 내용들이다. 그러나 이들의 내면에는 치열하게 생각이 진행되고 있다. 이들은 그 마음에, 한순간의 눈빛에, 주고받은 메일의 글귀 때문에 사랑에 빠지고, 쉽게 빠지는 만큼 쉽게 끝나기도 한다.
책 제목을 차지한 단편인 '빛과 그림자의 약속'을 보면, 한 유부남을 육체적인 관계로 사랑하는 '나'는 또다른 유부남을 사랑하게 된다. 그러나 두번째 남자는 판이하게 달라서 나를 이런 늪에서 구원해낼 수 있다고 확신한다. 소식도 없는 첫사랑을 6년이나 기다리고 그 첫사랑을 가슴에 두었기 때문에 아내와 헤어지는 순정파 남자의 모습이 참 희귀해서일까. 첫번째 남자에게 이별을 고하고, 두번째 남자가 기다리는 빛과 그림자가 부드럽게 얽히는 카페로 가는 내 발걸음은 가볍다.
좀더 젊어서 읽었더라면 이거 순 불륜 소설이구나 생각했을 것이다. 위에 인용한 것처럼 아름다운 것을 망설이지 않고 손에 넣는 모습들. 그것은 성적인 욕망일 수도 있고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고자 하는 몸부림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카페에 흐르는 음악 만큼이나 쓸쓸하고 절박한 분위기가 있다. 사랑이 인생의 전부일지 생각하게 되는 이야기들 때문에 새삼스레 사랑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을 가진다.
한 카페를 배경으로 마주치는 사람들의 이야기인 덕분에, 영화에서 카메오를 찾아내는 듯하다.
일본 작가인 하야시 마리코의 <첫날밤>이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는데, 나이가 좀 들고 사랑의 정점에서 벗어난 여자들을 주인공으로 세워 이야기를 이끌어나가는 방식과 글의 분위기가 이 책과 많이 비슷했다. 하야시 마리코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코데마리 루이를 읽어봐도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