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의 사나이
김성종 지음 / 뿔(웅진) / 2008년 1월
평점 :
품절


자욱한 안개 속에서는 모든 것이 형체를 잃고 아득하게만 느껴진다. 안개가 짙게 끼면 당장 몇 미터 앞도 보이지 않을 정도인데, 밤에 어두워서 주변이 잘 보이지 않을 때와는 다르게 하얀 물체에 갇힌 듯한 갑갑함을 느끼게 된다. 주변이 환한데 어느 것도 확실히 보이지 않고, 빛마저도 소용없는 상황은 생각보다 무서운 경험이다. 

안개가 짙게 낀 어느 새벽, '나'는 청부를 받고 떠오르는 정치인인 유달희를 칼로 찔러 살해한다. 그리고서 회장으로 있는 아시아자유평화연대의 행사로 원래 예정되어 있던 중국 난징대학살 추모집회에 참석하고자 한다. 그러나 짙은 안개로 비행기가 늦게 출항하는 바람에 예정 비행기편을 놓치고 따로 선양을 거쳐 난징에 도착하게 되는데, 회원들이 타고 오던 비행기가 안개로 야산에 추락하여 모든 이들이 사망하는 사고가 벌어진다.
유달희 피살 사건과 비행기 추락 사고는 전혀 관계가 없어 보이지만, 그림자 반장이 이끄는 유달희 피살 사건 수사팀에 의해 용의자가 점점 좁혀지고 '나'를 향해 다가오는 발걸음은 점점 더 가까워진다.

'나'는 추리소설 작가로 활동하고 있으나 전직 KGB 요원으로서 KGB가 해체되면서 Q25라는 단체에서 살인청부를 받고 있다. 태어나자마자 화장실의 쓰레기통에 버려졌고 고아원에서 자라다가 해외로 입양되었다. 영국 에딘버러 대학에서 러시아 문학을 전공하고 미국 예일 대학 대학원에서 러시아 혁명사를 공부하다가 KGB의 그물에 걸려 모스크바 유학을 하게 되고, 2년 후 살인 기계가 되어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스파이 활동을 하였던 경력이 있다.
살인청부를 하지 않을 때의 '나'는 매우 조용하고 품위있다. '아주 평범하고 사람 좋은 면서기처럼 생긴 좀 촌스러운 얼굴'로 성형한 그는 사람을 정중하게 대하고 좋은 인상을 풍긴다. 내연의 여인인 오미주가 비행기 사고로 죽은 이후에도 몇 번이나 전화를 걸어서 확인할 정도로 마음이 약하고, 비를 맞아 떨고 있는 강아지에게 먹을 것을 주고 씻겨 주고 키우려고 데리고 들어올 정도로 다정다감하다. 태어나서부터 버려졌기 때문에 사랑에 굶주렸다는 것은 좀 식상한 설명일지도 모르겠으나, 그의 마음 속에는 살인 기계로서의 교육과 비례하여 사랑에 대한 갈구가 있었나 보다. 지금까지 세계를 돌며 아홉 차례의 청부살인에 성공했고 스위스의 계좌에 충분한 돈을 예치해둔 그가 국내에서 미적거리고 있었던 것은, 사랑하는 이가 세상을 떠난 것과 관련하여 삶에 대한 의지를 잃어버렸기 때문이 아닐까. 

모든 것을 포기하고 놓아두고 싶은 것은 짙은 안개와 부슬거리며 내리는 비의 탓도 컸을 것이다. '문득 내 목에 밧줄이 걸린다면 나는 유서 하나 없이 담담한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았다', '잠깐 동안의 자유가 주어진다면 나는 비바람 속에 벌거벗은 채 맨발로 어둠을 걸어보고 싶었다'는 그의 생각은 참으로 쓸쓸하면서도 모든 것을 놓아버린 듯 허허롭고 그런 덕분에 편하고 자유롭다.
책을 다 읽고 마지막 장을 덮었을 때는, 추리소설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긴박감이 없이 뻔하게 흘러가는 것이 아쉬웠다. 범행이 벌어지는 날의 짙은 안개부터 체포되어 부산으로 호송되는 날의 태풍까지 지켜보는 나까지 축축해지는 느낌도 막막했다.
그러나 신산하게 살아온 한 남자의 삶이 너무나 허허로워서 마음 한 구석이 먹먹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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