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굼벵이 주부
크리스티네 뇌스틀링거 지음, 김해생 옮김 / 샘터사 / 2006년 7월
평점 :
절판
오스트리아의 작가인 크리스티네 뇌스틀링거의 손에서 태어난 <굼벵이 주부>는 딱 내 모습이다.
커피 잔 세트 전체를 손으로 거뜬히 씻고 또 물기 없이 닦아낼 수 있었을 시간에, '찻잔 한 개의 손잡이를 돌리고 유리컵 하나를 1센티미터 옆으로 밀고 찻잔 세 개의 위치를 바꾸고 작은 그릇 두 개와 주전자를 옮겨서 찻잔 하나를 놓을 수 있는 자리를 만드는 놀이'를 즐기는 것, 그러면서도 레고 블록을 옮기는 것보다 찻잔 옮기기가 백 배는 더 진지해 보이지 않는가 하는 자기 위안은 참 유머러스하다.
제철이라는 이유로 욕심껏 사서 냉동고에 열심히 넣어두는 것, 창조적인 폐품 활용을 기대하며 무엇이든 버리지 못하고 싸 안고 있는 것까지 내 모습이니, 나는 굼벵이 주부에 속하는 것이 확실하다!
<굼벵이 주부>는 일곱 가지 카테고리로 나누어져 있다. '우리 꼴이 이게 뭐람!'에서는 집안일과 관련된 주부의 모습이, ''성숙한 여인'의 몇 분'에서는 가정 밖의 소소한 일상과 과대포장되고 왜곡된 유행들, '즐거운 취미생활?'에서는 가정 안에서 남자와 여자의 차이들, '되돌아 본 크리스마스 선물'에서는 크리스마스에 대한 이야기 등 장소, 또는 시기에 따라 여러 이야기들을 실었다.
길어야 서너 쪽인 짧은 이야기들에는 잡지에 비친 수동적인 여인들을 바라보며 느끼는 여성 해방의 내용도, 가정 내에서 벌어지는 주부의 다양한 일상사도, 엄마로 아내로 느끼는 다양한 현상 파악도, 독립적인 인간으로 존재하며 생각하는 이야기들이 들어 있다.
가족들에게 최상의 맛을 제공하고자 이리저리 시중을 들면서 정작 자신은 서서 때우는 모습은, 가족들에게 생선 살을 다 발라주고 남은 생선 대가리를 알뜰히 발라 먹으면서 '어두일미'라고 스스로를 위안하는 우리네 엄마들 모습과 정말 닮았다. 그 희생이 결국은 아주 당연하게 되는 것까지도 말이다. 아이가 나쁜 친구를 사귀는 것을 경계하고 아이들에게 이용당하고 싶어 하는 모습은 오스트리아인지 한국인지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비슷하다.
작가는 자조적이거나 체념하는 방식이 아니라 모든 상황을 유머러스하거나 담담하게 이야기한다. 그 안에서 씁쓸함을 느끼는 것은 그런 상황을 겪어본 적이 있는 독자들이나 가능할 테고, 그렇지 않은 독자들에게는 그냥 우스운 이야기로 받아들여지겠지.
살림의 여왕 마사 스튜어트처럼 살림이면 살림, 사업이면 사업을 아주 완벽하게 하는 수퍼우먼보다는, 끊임없이 열심히 일을 하고는 있는데 한 것이 아무 것도 없는 굼벵이 주부들을 나는 옹호한다. 그들이야말로 슬로우 운동의 대표 주자이다. 굼벵이 주부들의 평화와 자유가 영원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