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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가게
장 퇼레 지음, 성귀수 옮김 / 열림원 / 2007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흑백으로 그려진 표정없는 가족들 뒤로 엄청나게 커다랗고 금발 머리를 반짝이는 막내 알랑이 새빨간 사과를 들고 서 있다. 유일하게 채색되어 있어서 주변에 비해 존재감이 두드러진다. 그 옆으로는 튀바슈 가족이 운영하는 자살가게의 카운터에 즐비하게 늘어선 약병과 가루, 주사기 등이 보이고, 쇼핑백에는 단도와 면도날, 밧줄, 독약 등이 들어 있다. 뒷표지에는 자살가게의 건물 모습이 간단하게 그려져 있다.
10대째 대대손손 자살 용품을 팔아온 튀바슈 가문. 스포츠 경기에서 자신들이 응원하는 팀이 지면 그날 밤은 비가 오는 것처럼 사람들이 줄줄이 허공으로 몸을 날려 생을 마감하는 '잊혀진 종교' 단지 옆 베레고부아 대로변에 자리잡고 있으면서, 삶의 의미를 잃어서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잘 죽을 수 있는 도움을 제공한다.
스스로는 그렇게 의미있는 일을 하기 때문에 죽을 수 없다는 못 말리는 사명감을 투철하게 가지고 있는 이 가족들. 뼛속까지 자살용품 가게 주인인 미시마와 그의 아내 뤼크레스, 머리가 터질까봐 항상 붕대를 감고 있는 식욕부진 큰아들 뱅상, 못생겼다고 생각해서 온통 주눅들어 있는 딸 마릴린. 미시마와 뱅상, 마릴린은 자살한 사람들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을 정도로 이들은 철저하게 자살 신봉자들이다. 언제나 변함없을 듯한 이 가족의 음울한 생활은 유모차에서 웃음으로써 스스로를 드러낸 막내 알랑 때문에 조금씩 변화한다.
변화의 과정에는 필연적으로 반동이 뒤따른다. 가장 마지막까지 저항한 사람은 아버지였으나, 결국은 아이에 대한 사랑 때문에 스스로의 신념을 바꾸게 된다. 자신과 가족의 삶을 중요시하게 되면 더이상 다른 사람에게도 죽음을 권유할 수 없게 되겠지.
독을 주사했다고 믿은 마릴린이 손님들에게 죽음을 선사하는 방법으로 키스와 악수를 택한 것도 의미심장하다. 키스와 악수는 상대와 친해지기 위해 사용하는 첫번째 수단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작가는 세세한 것까지 배려하고 있다.
홀로그램 TV를 보면, 그리고 중간에 잠깐 나온 것을 보면 21세기를 훌쩍 넘어선 먼 미래가 시간적 배경이다. 삶의 의미를 잃은 사람들은 지금도 충분히 많지만, 프랑스 작가인 장 퇼레가 쓴 이 책에서는 그것이 극단적으로 나타나 있다. 세상이 발전하고 서로 소외되면서 자살율이 증가한다는 경향이 앞으로도 계속 이어진다면, 소설 속이 아니더라도 자살가게가 실제로 등장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얼핏 한다. 아니, 벌써 인터넷 안에는 다양한 자살가게들이 영업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자신의 얼굴이 비춰진 거울을 보고 바보 같다고 포복절도하다가 죽어버린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잘 아끼고 꾸미고 이야기를 나누라며 거울 달린 가면을 소중하게 사 간 사람도 있다. 자살하기 위해 사간 독거미와 친해져서 삶의 의미를 찾은 사람도 있었다. 알랑이 뱅상에게 보낸 엽서의 "형은 이 도시를 대표하는 예술가야", 마릴린에게 보낸 "누나는 가장 아름다운 여자야", 부모님께 보낸 "사랑하는 엄마 아빠 보세요"라는 문구는 가족 모두의 가슴에 한 줄기 빛을 선사한다.
이처럼 아주 작은 것만으로도 우린 행복할 수 있다. 사람들 사이의 사랑과 교류가 있다면 자살가게는 '살자'가게가 되어 희망을 만들어내는 곳이 된 것처럼 바뀔 수 있을 것이다.
"작은 것만으로도 우린 행복할 수 있다네. 정말이지 작은 것만으로도 우린 행복할 수 있어!" (<정글북>에 나오는 곰 발루가 부르는 노래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