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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리케의 여정
소냐 나자리오 지음, 하정임 옮김, 돈 바트레티 사진 / 다른 / 2007년 1월
평점 :
품절
어떤 일에 대해 알고 싶을 때에 취할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그 일을 먼저 겪은 사람에게 물어보는 것과 그 일을 직접 하는 것. <엔리케의 여정>의 저자인 소냐 나자리오는 후자를 택했다. 온두라스의 테구시갈파에서 과테말라를 지나고 멕시코를 종단하여 미국 국경과 인접한 누에보라레도까지의 2574킬로미터의 여정을 함께 하면서 실상을 정확하게 나타냈다.
매년 4만 8천명의 아이들이 혼자서 불법으로 중앙아메리카와 멕시코에서 미국으로 밀입국한다. 이들보다 먼저 떠나서 미국에서 일하는 부모를 만나기 위해서이다. 잠깐의 이별이 길어지는 경우, 다른 아이에 비한 물질적 풍요보다도 정신적인 충족을 위해 이들은 참으로 힘들고 위험한 여정에 오르게 된다. 그 길에는 강도와 강간, 폭력, 부상과 방치, 밀입국 조직이 지천에 깔려 있고 부모를 반드시 만나리라는 보장도 확실치 않다. 그리고 마약이나 본드에 중독될 위험, 부상을 입어서 그 여정에서 낙오될 위험도 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많은 아이와 어른들은, 7살밖에 안 된 아이들까지도 사력을 다해 미국으로 가는 열차의 지붕에 올라탄다.
악명높은 치아파스를 지나고 이민귀화국을 거치는 어려움을 보며 나는 갑자기 인터넷 사이트 다음에서 연재되었던 ‘에스탄시아’라는 만화를 떠올렸다. 이 만화에서도 단일 철로를 타고 가는 열차에서 각 검문소마다 특정 임무 또는 질병의 관문이 주어지고, 이 관문을 통과하는 사람만이 최후로 살아남는 이야기를 그린다. 그 만화의 내용만큼이나 현실의 엔리케의 여정은 참으로 고단하다. 그러나 이 모든 어려움을 겪어내고 엔리케는 엄마를 만났다. 여기에서 이야기가 끝났다면 어느 정도는 해피 엔드라고 볼 수 있겠다.
그러나 어렵게 엄마를 만났어도 엔리케의 여정은 끝나지 않았다. 책에서 설명하는 것처럼 아이와 엄마가 만나면 또다른 국면이 시작된다. 자랄 때의 외로움과 여정의 어려움을 보상받고자 하는 아이와, 경제적인 도움을 주기 위해 개인적인 삶을 희생한 것을 몰라주는 아이의 무정함에 서운한 엄마는 사사건건 충돌한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엔리케는 다시 자신의 아이에게서 엄마를 뺏음으로써 제2의 엔리케를 만들게 된다.
개발이 뒤떨어진 나라들의 경우 아무리 일을 해도 가족의 생계를 유지하기 어렵고 특히 가족이 해체되었을 경우 더하다. 따라서 엔리케처럼 어렸을 때부터 노동 착취를 당하는 경우가 많다. 아이를 키우는 엄마의 입장에서 나는 엔리케의 시선으로, 엄마인 라우데스의 시선으로 엔리케의 여정을 지켜보았다. 이 쪽도 저 쪽도 다 공감이 되는 입장이면서, 결코 쉽게 끝나지 않을 그들의 갈등과 어려움에 마음이 답답하다. 이 책으로 인해 엔리케와 같은 불법이주민들이 더 쉽게 부모를 만날 수 있게 될까?
밀려드는 이민자들과 그들이 낳는 아이들 덕분에 평균 연령이 낮아지고 고령화 사회로의 전환이 늦어지는 혜택을 입고 있는 미국이지만, 이들처럼 가진 것 없는 극빈자들은 사실 환영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현실은 자체를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에 따른 행동이 필요하다고 본다. 그런 의미에서 어린 엔리케들의 생활이 달라지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