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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없는 여자의 여덟 가지 인생
이미리내 지음, 정해영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4년 7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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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긴 역사의 서사를 읽은 기분이다. 한 여자의 삶이지만 이건 그냥 한 개인의 삶은 아니었다. 우리 역사가 만들어놓은 큰 굴곡이었고, 그 굴곡을 살아냈어야만 했던 한 인간의 삶이었고, 특히 여자였기에 겪을 수밖에 없었던 아픔의 시간들이었다. 긴 이야기였지만 단 한 순간도 허투루 읽어낼 수가 없었다. 읽는 내내 마음을 단단히 먹으며 읽어냈어야 했고, 다 읽은 후 한참 이 소설에 대해 생각해야 했다. 그냥 단순히 잘 읽었다, 하고 책을 덮을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묵직한 무게감이 읽은 후에도 내내 남는 소설이었다.
"노예, 탈출 전문가, 살인자, 테러리스트, 스파이, 연인, 그리고 어머니."(31쪽)
이 일곱 단어에 마지막 여덟 번째 단어를 붙인다면 무엇이 적절할까. 이 모든 삶을 다 살아낸 후 지금까지의 삶을 돌아보며 죽음의 순간을 기다리는 여자의 삶을 무엇이라고 이름 붙일 수 있을까. 그냥 그건 자기 자신이지 않을까. 온전히 누군가의 무엇이 아닌, '나'의 삶을 살 수 있던 유일한, 아주 잠시의 시간이지 않았을까. 물론, 이 시간도 숨어 살아야만 했고, 자신을 드러내지 못하고 위장했어야만 했던 삶이었지만, 그래도 삶의 마지막 순간, 지금까지의 시간들을 회고할 수 있었고, 기록으로 남길 수 있었고, 이야기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잠시는 오롯이 '나'로 살 수 있었던 시간이지 않았을까. 그래서인지, 자신의 뜻에 따라 죽음을 선택했다는 것에 한편으로는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과연, 이 여자의 삶은 끌려다닌 삶이었을까, 아니면 자신이 이끌고간 삶이었을까. 우리의 역사 안에서 끌려다닐 수밖에 없었던 시간들이 것만은 확실하다.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놓여 자신이 원하지 않는 삶을 살 수밖에 없었던 순간들의 연속이었다. 우리의 역사가 그랬다. 지금 나는 이렇게 쉽게 말할 수 있을지 몰라도, 그때의 상황은 절대 쉽게 말할 수 없는, 누구도 함부로 말할 수 없는 순간들의 연속이었다. 살기 아니면 죽기의 순간에서 할 수 있는 선택은 많지 않았으며 생존을 위한 최선의 방법을 찾을 수밖에 없었던 삶이었다. 우리의 역사가 평온했다면 이런 삶을 살 필요가 있었을까. 우리의 정치적 이념적 갈등이 첨예하지 않았다면, 이 여자의 삶이 이리도 험난할 필요가 있었을까.
하지만 늘 끌려다니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대범하고도 강인한 선택을 했으며, 그 선택을 향해 나아가는 힘 또한 갖고 있었다. 어느 순간에도 자신을 잃지 않기 위해 정신 바짝 차리고 몸을 곧추 세웠던 인물이었고, 자신이 가야할 길이 어느 길인가를 스스로 알고 나갈 줄 도 안 여자였다. 누구에게 기대지도 않았다. 누굴 쉽게 믿을 수도 도움을 받을 수도 없었다. 그저 자기 자신만을 믿고 앞만 보고 나가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러니, 뒤를 볼 겨를 없이 계속 나아가는 것이 최선을 수밖에 없었던 인생이었다.
여기서 간과할 수 없는 분명한 사실, 바로 그런 삶을 살아야만 했던 '여자'였다는 거다. 우리 역사 앞에서 여자가 겪는 삶의 험난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이 여자의 삶에서 '여자'라는 이유로 겪을 수밖에 없었던 일들이 많다. 그리고 그 대부분은 다 남자에 의해 이루어진 일들이라는 거다. 아버지로부터, 군인으로부터...... 우리에게 있어 여자의 삶은 늘 안전하지 못했고 보호받지 못했다. 함부로 하기 쉬웠고 각종 폭력에 그대로 노출되었으며, 또 어느 누구도 그에 대항할 수 없었다. 그럴 힘이 없었다. 하지만 이 여자는 그 와중에 좀 달랐다.
내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죽였냐고 물었더니 네 명이라고 대답했다.(...)
"세 명은 군인이었지. 한 명은 가족이고." 그녀가 '가족'이라는 단어에서 조금 머뭇거렸다.(343-4쪽)
"모두 전쟁 중에 일어난 일이야."(...)
"그자들은 전범이었어. 그자들은 거짓말을 했어. 여자들을 납치해서 노예로 삼았지. 너무 많은 어린 여자들이 죽었어. 난 여자들과 나 자신을 구하기 위해 단 세 명의 군인을 죽였을 뿐이야."(345쪽)
선택해야했다.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를 스스로 선택했어야했다. 물러날 곳도 없었고 또한 멈출 수도 없는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것을 찾아 스스로 자신을, 여자를 지키는 수밖에 없었다.
"내 남편과 딸이 아는 이름을 알고 싶다고? 그건 용말이야. 하지만 그것도 내 진짜 이름은 아니야. 뭘 알고 싶은 건가? 나는 여러 이름으로 살았어. 영어 이름 데버라. 일본 이름 간요. 대체 뭘 기대한 건가?"(377쪽)
최 선생으로 불리고 묵 할머니로 살았던, 이 여자의 이름은 뭘까. 하지만 진짜 이름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미 이 여자는 다른 이름으로 평생을 살았다. 그 평생의 다른 이름이 가짜라고 해서, 그 인생이 가짜가 되지 않을 거라면, 진짜 이름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다. 이미 이 여자의 인생은 다양한 많은 이름들로 채워져 있으며, 그 인생이 곧 이 여자의 진짜 삶이라면 이 모든 이름이 이 여자의 진짜 이름이기도 할 것이다. 또 다른 이름을 더 찾을 필요는 없을 듯. 이만큼으로도 충분하다.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작성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