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없는 여자의 여덟 가지 인생
이미리내 지음, 정해영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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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없는여자의여덟가지인생 #이미리내 #위즈덤하우스 #서평단 #서평 #책추천

우리의 긴 역사의 서사를 읽은 기분이다. 한 여자의 삶이지만 이건 그냥 한 개인의 삶은 아니었다. 우리 역사가 만들어놓은 큰 굴곡이었고, 그 굴곡을 살아냈어야만 했던 한 인간의 삶이었고, 특히 여자였기에 겪을 수밖에 없었던 아픔의 시간들이었다. 긴 이야기였지만 단 한 순간도 허투루 읽어낼 수가 없었다. 읽는 내내 마음을 단단히 먹으며 읽어냈어야 했고, 다 읽은 후 한참 이 소설에 대해 생각해야 했다. 그냥 단순히 잘 읽었다, 하고 책을 덮을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묵직한 무게감이 읽은 후에도 내내 남는 소설이었다.

"노예, 탈출 전문가, 살인자, 테러리스트, 스파이, 연인, 그리고 어머니."(31쪽)

이 일곱 단어에 마지막 여덟 번째 단어를 붙인다면 무엇이 적절할까. 이 모든 삶을 다 살아낸 후 지금까지의 삶을 돌아보며 죽음의 순간을 기다리는 여자의 삶을 무엇이라고 이름 붙일 수 있을까. 그냥 그건 자기 자신이지 않을까. 온전히 누군가의 무엇이 아닌, '나'의 삶을 살 수 있던 유일한, 아주 잠시의 시간이지 않았을까. 물론, 이 시간도 숨어 살아야만 했고, 자신을 드러내지 못하고 위장했어야만 했던 삶이었지만, 그래도 삶의 마지막 순간, 지금까지의 시간들을 회고할 수 있었고, 기록으로 남길 수 있었고, 이야기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잠시는 오롯이 '나'로 살 수 있었던 시간이지 않았을까. 그래서인지, 자신의 뜻에 따라 죽음을 선택했다는 것에 한편으로는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과연, 이 여자의 삶은 끌려다닌 삶이었을까, 아니면 자신이 이끌고간 삶이었을까. 우리의 역사 안에서 끌려다닐 수밖에 없었던 시간들이 것만은 확실하다.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놓여 자신이 원하지 않는 삶을 살 수밖에 없었던 순간들의 연속이었다. 우리의 역사가 그랬다. 지금 나는 이렇게 쉽게 말할 수 있을지 몰라도, 그때의 상황은 절대 쉽게 말할 수 없는, 누구도 함부로 말할 수 없는 순간들의 연속이었다. 살기 아니면 죽기의 순간에서 할 수 있는 선택은 많지 않았으며 생존을 위한 최선의 방법을 찾을 수밖에 없었던 삶이었다. 우리의 역사가 평온했다면 이런 삶을 살 필요가 있었을까. 우리의 정치적 이념적 갈등이 첨예하지 않았다면, 이 여자의 삶이 이리도 험난할 필요가 있었을까.
하지만 늘 끌려다니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대범하고도 강인한 선택을 했으며, 그 선택을 향해 나아가는 힘 또한 갖고 있었다. 어느 순간에도 자신을 잃지 않기 위해 정신 바짝 차리고 몸을 곧추 세웠던 인물이었고, 자신이 가야할 길이 어느 길인가를 스스로 알고 나갈 줄 도 안 여자였다. 누구에게 기대지도 않았다. 누굴 쉽게 믿을 수도 도움을 받을 수도 없었다. 그저 자기 자신만을 믿고 앞만 보고 나가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러니, 뒤를 볼 겨를 없이 계속 나아가는 것이 최선을 수밖에 없었던 인생이었다.

여기서 간과할 수 없는 분명한 사실, 바로 그런 삶을 살아야만 했던 '여자'였다는 거다. 우리 역사 앞에서 여자가 겪는 삶의 험난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이 여자의 삶에서 '여자'라는 이유로 겪을 수밖에 없었던 일들이 많다. 그리고 그 대부분은 다 남자에 의해 이루어진 일들이라는 거다. 아버지로부터, 군인으로부터...... 우리에게 있어 여자의 삶은 늘 안전하지 못했고 보호받지 못했다. 함부로 하기 쉬웠고 각종 폭력에 그대로 노출되었으며, 또 어느 누구도 그에 대항할 수 없었다. 그럴 힘이 없었다. 하지만 이 여자는 그 와중에 좀 달랐다.

내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죽였냐고 물었더니 네 명이라고 대답했다.(...)
"세 명은 군인이었지. 한 명은 가족이고." 그녀가 '가족'이라는 단어에서 조금 머뭇거렸다.(343-4쪽)
"모두 전쟁 중에 일어난 일이야."(...)
"그자들은 전범이었어. 그자들은 거짓말을 했어. 여자들을 납치해서 노예로 삼았지. 너무 많은 어린 여자들이 죽었어. 난 여자들과 나 자신을 구하기 위해 단 세 명의 군인을 죽였을 뿐이야."(345쪽)

선택해야했다.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를 스스로 선택했어야했다. 물러날 곳도 없었고 또한 멈출 수도 없는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것을 찾아 스스로 자신을, 여자를 지키는 수밖에 없었다.

"내 남편과 딸이 아는 이름을 알고 싶다고? 그건 용말이야. 하지만 그것도 내 진짜 이름은 아니야. 뭘 알고 싶은 건가? 나는 여러 이름으로 살았어. 영어 이름 데버라. 일본 이름 간요. 대체 뭘 기대한 건가?"(377쪽)

최 선생으로 불리고 묵 할머니로 살았던, 이 여자의 이름은 뭘까. 하지만 진짜 이름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미 이 여자는 다른 이름으로 평생을 살았다. 그 평생의 다른 이름이 가짜라고 해서, 그 인생이 가짜가 되지 않을 거라면, 진짜 이름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다. 이미 이 여자의 인생은 다양한 많은 이름들로 채워져 있으며, 그 인생이 곧 이 여자의 진짜 삶이라면 이 모든 이름이 이 여자의 진짜 이름이기도 할 것이다. 또 다른 이름을 더 찾을 필요는 없을 듯. 이만큼으로도 충분하다.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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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이 몰려온다 웅진 우리그림책 123
김효정 지음 / 웅진주니어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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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이몰려온다 #김효정_그림책 #웅진주니어 #웅진주니어티테이블 #웅진우리그림책 #서평 #책추천


후끈후끈, 이글이글, 쨍쨍.

뜨거운 여름이다. 연일 계속되는 뜨거운 햇살에 언제 장마였나, 비가 오긴 왔었나, 기억이 가물가물이다. 내일 모레면 입추라지만 여전히 덥다. 그래서 여름인 거다. 여름은 더워야 여름이지. 더워서 여름이지. 그래서 여름엔 시원한 것을 찾기 마련. 그런 시원한 것을 찾아 불쑥 나타난 것이 있다.

둥! 둥둥! 두둥, 동동, 통, 통통.

이쯤에서 입가에 미소가 안 걸리면, 그게 이상한 거다. 더위에 지치고 힘들어 어쩌면 인상을 썼을 수도 있다. 혹은 기분 나쁜 말을 내뱉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여기서는 다 아니다. 더위에 괴로워하기는커녕, 짠! 하고 신나게 등장한 튜브 든 아이는 벌써부터 더위를 잊게 만들어 준다. 제 몸집보다도 더 큰 튜브를 들고 당당히 바다로 향하는 든든한 팔다리, 다부지게 입을 꼭 다문 얼굴 표정까지! 마치 이런 여름을 기다렸다는 듯, 아주 멋진 등장이다.

냠냠, 서걱, 오독, 쪽쪽, 호록, 와삭, 우적.

당연히 빠질 수 없는 여름 제철 과일과 음식들. 여름을 생각하면 가장 먼저 뜨겁게 내리쬐는 햇빛, 그리고 시원한 물놀이, 그 다음이 달콤 시원한 음식들이다. 이 셋이 어우러진 환상적인 조합을 한 단어로 말하면, 그것이 바로 '여름'이다. 저 셋 중 어느 하나라도 빠지면 섭섭하다. 여기서 제일 중요한 것은, 뜨거운 해. 해가 뜨거워져야 여름이고, 여름을 제대로 느끼기 위해서는 뜨거워야한다. 이게 기본 중에서도 기본!

우아, 히히히, 히야호, 하하하, 아하하하, 와와.

그리고 여기에 함께 할 수 있는 친구들이 있으면 완벽하다. 뜨거워도 좋고 시원해도 좋다. 꿀렁거려도 좋고 쏴아아, 파도에 밀려나도 괜찮다. 어떤 것이라도 함께할 수 있으면 그것으로 다 된 거다. 상상해보면 안다, 혼자 덩그러니 튜브 타고 홀로 파도에 둥둥 떠다니는 장면을. 심심하고 재미없다. 여름을 제대로 즐기려면 무조건 재밌어야 한다. 노란 튜브들은 탱글탱글 햇살에 통통 튀어다닐 것만 같은 생동감이 있다. 바로 건강하게 여름을 잘 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필수품인 거다. 저 튜브를 타고 있지 않아도 저 아이들을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진다. 그리고 말하게 된다, 이게 여름이지!

여름을 보내는 방법에는 여러가지가 있을 것이다. 누군가는 시원한 에어컨 바람 아래에서 꼼짝하지 않는 것으로 여름을 보내기도 할 것이다. 헌데 그보다 제대로 여름을 즐기겠다는 마음이 있다면, 당당히 여름의 뜨거움 속으로 들어가라고 추천한다. 뜨거우면 뜨거울수록 기분 좋게 여름을 보낼 수 있는 방법이 <여름이 몰려온다>에 있다. 한번 빠지면 여름 내내 헤어나오지 못할 매력이 이 속에 있다. 여름의 뜨거움이 이제 더 이상 싫지 않은 이유가 있다.
지금 창밖으로 쏟아지는 뜨거운 햇살을 보며 즐거워지는 상상을 해본다. 와, 멋진 여름이다!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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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맹순과 오수아 작은 책마을 58
은영 지음, 최민지 그림 / 웅진주니어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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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맹순과오수아 #글_은영 #그림_최민지 #웅진주니어 #웅진주니어티테이블 #작은책마을 #서평 #책추천

표지부터가 무척 유쾌하고 재밌는 책이다. 시소의 양끝에 앉아 균형을 맞춰 타고 있는 두 친구, 맹순과 수아. 관심이 가고 재미있는 것이라면 뭐든 공유하고 함께 할 수 있는 두 친구이지만, 자기 것에 대한 확고한 소신은 분명하다. 비밀도 없고 척하지도 않는다. 솔직하게 말하고 있는 그대로 믿는다. 좋아하는 마음과 감정엔 누구보다 솔직하다. 그 솔직함에는 자기 것을 빼앗기기 싫어하는 마음까지 포함이다. 그래서 이 두 친구의 대화가 흥미롭다.

"미안해, 나 때문에."
"그럼 내가 좋아해도 돼? 강한별."
"그건 안 돼!"
"후유, 나는 죽을지도 몰라."
"그게 무슨 말이야?"
"의사 선생님이 그랬어. 수술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고. 뼈가 부러진 거 같대. 수술을 하다가 죽을지도 몰라."
"정말?"
"그러니까 내가 강한별 좋아해도 되지?"
"알았어, 알았다고. 내가 양보하면 되는 거지? 그럼 되는 거지?"
맹순이 코끝이 빨개졌어.(21-23쪽)

헌데 이렇게 쉽게 맹순이가 한별이 좋아하기를 수아에게 허락한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한별이에 대한 마음이 부족해서도, 자신 때문에 수아가 다쳤다는 미안함 때문도 아니다. 바로, 친구니까. 수아는 맹순이에게 제일 소중한 친구니까. 그건 수아에게도 마찬가지다. 가장 소중한 친구가 아픈 건, 우는 건 싫으니까.

수아는 맹순이의 친구야. 그것도 가장 친한 친구. 가끔 짜증나게 할 때도 있지만 그래도 수아는......(23쪽)
"네가 울려고 했잖아! 그것도 생일에 말이야. 생일날 우는 건 너무하잖아? 그러니 우리 집으로 데리고 갈 수밖에. 아무튼, 너 때문에 애들이 다 알아 버렸어. 내가 할머니랑 단둘이 사는 거 말이야!"(62쪽)

물론, 둘은 이내 다시 한별이를 사이에 두고 티격태격한다. 이 사실을 한별이는 알까. 한별이 모르는 데서 둘이 이러쿵저러쿵 시소놀이를 하고 있는 것이 웃음이 나온다.

시소는 둘 중 누구 하나라도 균형이 맞지 않으면 제대로 놀 수가 없다. 함께 있어도 안 되고, 누군가 더 가까이 와도 안 된다. 딱 양쪽 끝에 같은 무게와 힘으로 중심을 잡고 앉아 발을 굴러야만 위아래로 리듬감 있게 움직일 수 있다. 그게 시소다. 이 두 친구가 시소의 양쪽에 앉아 있는 이유가 있어 보인다. 둘은 서로에게 맞춰주고 있는 중. 친구란 이렇게 서로에게 맞춰가며, 주거니 받거니 해야하는 관계라는 걸 보여주는 듯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균형만 맞춰서는 시소에서 재밌게 놀 수 없다. 누군가는 위로 올라올 때 아래로 내려갈 사람이 있어야 하고, 또 다시 위로 올라오게 하기 위해 자신은 아래로 내려가야 한다. 시소를 탄 둘이 모두 위에 혹은 아래에 있을 수는 없다. 그럼 시소 놀이를 할 수 없다. 그러니 차례에 맞춰 서로가 힘을 적절히 주었다 빼는 연습이 필요하다. 자칫 내 욕심만 채워서는 둘 다 다칠 수 있다. 그러니 시소에서만큼은 둘의 마음이 잘 맞아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둘은 마음이 참 잘 맞는다.

둘은 푸른빛이 도는 어스름 속에서 시소를 탔어.
어느새 거칠었던 시소 소리는 점점 잦아들고 맹순이가 수아의 이야기 소리가 놀이터 곳곳에 울려 퍼졌지.(...)
시소는 두 아이를 태우고 콩닥콩닥 바닥을 간지럽히고 있었지.(71쪽)

맹순이와 수아의 쿵쿵쿵쿵 시소타기가 앞으로도 내내 이어지기를 바란다.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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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아내리기 일보 직전 문학동네청소년 ex 소설 1
달리 외 지음, 송수연 엮음 / 문학동네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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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들을 읽으면서 뭔가 가슴 한쪽에서부터 스멀스멀 간지러움이 몰려오는 느낌이었다. 내 몸은 가만히 있는데 뭔가가 몸 안에서 꿈틀대는 기분이라고나 할까. 짜릿함일 수도 있는 전율이 몸을 타고 지나가는 느낌을 받았다. 들썩여지고 가만히 있으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드는 이야기. 굉장한 영웅감에 휩싸여 세상을 구하겠다고 나선 대단한 이야기도 아니다. 헌데 뭔가 세상을 향해 주먹 한방을 먹였고, 그렇게 한방 먹은 세상을 구경하는 재미라고나 할까. 심각하지만 유쾌하고 씁쓸하지만 속시원함이 있는 이야기였다.
또 이 아이들은 도무지 진지해지지 않아서 매력적이다. 심각하게 받아들이려고 들면 한도 끝도 없는데, 이게 어른들과 참 다른 점이었다. 호기심이 생기면 알아보고 궁금하면 그냥 직접 물어본다. 그러면 또 대답을 해준다. 그렇게 서로의 오해를 쉽게 풀 수 있다. 이런 아이들이라면 어른이나 사회의 기준에 쉽게 휘둘리지 않을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 생긴다.

"대체 당신을 만든 목적이 뭔데요?"/"순혈인류 학생들을 보호하는 것이다."(...) "당신이 순혈인류 노래를 해서 나도 검색을 해 봤어요. 그랬더니 연관 검색어로 나치가 가장 먼저 뜨던데요? 어쩐지 무조건 잡아들이고 보려는 게 옛날 나치랑 비슷하더라니."(53쪽_'지퍼 내려갔어' 중)
무슨 일인지 물을 용기가 나지 않았다. 물어봐도 말 안 해 주면? 아무 일도 아니라고 거짓말하면?/왜 결정권은 항상 다른 사람에게 있을까?(106쪽_'알 카이 로한' 중)
"넌 미끼가 필요한 게 아니었어. 저 외계인을 잡는 것에도 관심이 없었어. 그냥 여자애들이 죽는 걸 구경하고 싶었던 거야."(...) "그게...... 더...... 재미있으니까......"(151쪽_'자코메티' 중)
"우리 같이 사진 찍을래? 나한테 카메라 좋은 거 있어."/그 말에 민하 부모님과 수우 할아버지가 거의 동시에 움찔했지만 수우는 눈치채지 못했다.(...) "수우야, 만나자마자 사진을 찍기는 아무래도 좀 어색하지. 사진은 다음에 찍으렴."(206쪽_'기억의 기적' 중)

사회에는 보이지 않는 선이 무척 많다. 누가 언제 어떤 기준으로 그어놓았는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이 선은 누구나 아는 선이다. 보이지 않지만 선명하게 그어져서 어느 누구도 쉽게 그 선을 넘지 못하도록 철저히 막고 있다. 무엇으로? 바로 사람들의 시선으로. 사람들은 사회적 잣대로 고정된 시선을 갖고 있고, 그 시선이 편협한 고정관념으로 만들어낸다. 그리고 그 고정관념 안에서 제멋대로 사람들을 휘두르고 구분짓는다. 왜 그러는지도 모른 채 남들이 시키는대로만 할 뿐이다. 그리고 그 시선을 우리 아이들에게도 강요한다. 그렇게 강요받은 아이들 중 말 잘 듣는 착실한 아이는 또 그런 시선을 배우며 비슷한 어른으로 성장한다. 그러니 그런 시선에 당당히 한방 먹이고 아무렇지 않게 또 자기대로의 길을 가는 이 아이들을 지켜보는 마음이, 간질간질하고 이토록 뿌듯할 수가 없다.

영화와 세진이는 번갈아 가며 날 북돋아 주었다. 카페를 나와서도 날 가운데에 두고 팔짱을 껴 주었다./학교에 다니기 시작한 이래 이렇게 기분 좋게 집으로 향한 적이 있나 싶었다./(...) 미안해, 미리 말 못 해서. 할머니가 그러는데 사람은 비밀이 하나쯤은 있어야 한대.(113쪽_'알 카이 로한' 중)
민정은 미쳐 버릴 것 같았다. 내가 지금 저 BBC 드라마에 빠진 미치광이랑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거지? 어떻게 머리가 돌아야 저런 생각이 가능한 거지?(...) 노인정 할머니들이 목사님 딸이 걱정되니 찾아봐 달라고 했을 때 그냥 무시했어야 했는데.(155쪽_'자코메티' 중)
"그래, 그럼 우리 1년에 딱 한 번만 찍자. 둘이서만."/"좋아!"/수우가 활짝 웃으며 민하의 어깨에 한쪽 팔을 둘렀다.(207쪽_'기억의 기적' 중)

결국 모든 것에서 아이들이 함께 해나갈 수 있는 힘을 얻는 것은 친구가 최고구나 싶었다. 의심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여줄 수 있는 것 또한 친구이며, 예기치 못한 어떤 상황에서도 기꺼이 자신 쪽으로 끌어당길 수 있는 것 또한 친구이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할 수 있는 이 친구들이 있어 이것 또한 얼마나 다행인지. 투덜거리고 신경질은 좀 낼 수 있어도 손을 내밀어 잡아끌고 어깨에 팔을 두르도록 내버려둔다. 그리고 슬며시 웃는다. 이게 이 아이들의 방식. 마음에 든다.

민정은 '그것' 곁으로 걸어가는 찬미를 말리지 않았다. 더 이상 '그것'에게는 폭력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았다. 민정은 엉거주춤한 자세로 우두커니 서서 찬미와 '그것'이 말없이 서로를 응시하는 모습을 바라보았다.(152쪽_'자코메티' 중)

그리고 세상의 시선과 다른, 아이들의 시선을 가만히 바라볼 필요가 있다. 아이들의 눈은 정확하다. 맞고 틀리고의 정확함이 아니라, 자신이 무엇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에 대한, 자기 스스로에 대한 정확함이다. 그 안에서 무엇이 옳고 그런가에 대한 판단 또한 아이들의 몫이므로, 세상이 이래라 저래라 할 필요가 없다. 그저, 이 아이들의 저 시선을 있는 그대로 지켜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정말, 이 세상에서 다 녹아내리기 전에!

"도챈스부터! 얘 지금 녹아내리기 일보 직전이야."(50쪽_'지퍼 내려갔어' 중)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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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전자는 혼자 진화하지 않는다 - 인류의 삶을 뒤바꾼 공진화의 힘
피터 J. 리처슨.로버트 보이드 지음, 김준홍 옮김 / 을유문화사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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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책인 줄 알았다. 읽으면서 계속 인문사회책이라는 생각으로 읽었다. 다 읽고 나서는 이게 융합인가 싶었다. 예전이나 이과와 문과를 구분하고, 명확하게 선을 그어 학문 분야를 선택했지 지금은 그런 시대가 아니니까. 옛날사람의 기질이 아직도 남아 있어 이건 과학, 이건 사회의 구분을 해놓고 이 책을 읽으려 했던 것 같다. 시대착오적인 구분이었다. 그리고 제목에 현혹되면 안 되는 거였다. 유전자라니, 이건 너무 과학인데 싶어 내가 읽어도 되나 싶었다. 헌데 부제가 너무 궁금했다. '공진화의 힘'이란 말.

공진화라는 용어는 생물학자들이 두 개의 종이 서로 환경의 일부분이 되면서 한 종에서 진화적인 변화가 발생하게 되면 다른 종에도 진화적으로 변화가 발생하는 체계를 가리키기 위해서 만든 용어이다.(...) 인간 집단이 보유하고 있는 문화적 그리고 유전적 정보의 진화하는 풀에서 이 두 가지는 서로 비슷한 소용돌이의 왈츠를 추는 파트너이다.(316쪽)

지금껏 진화라는 말은 많이 들어왔다. 공진화라는 말도 주로 써왔겠지만 비전공자의 입장에서는 낯설었다. 과연 공진화라는 것을 우리 사회에 적용시킨다면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싶었다. 흔히 '진화'라고 하면 생물학적으로 유전자의 힘에 의해 당연히 그렇게 되어가는 성질이라는 생각이 제일 먼저 든다. 하지만 '유전자-문화 공진화'라고 했다. 유전자는 절대 혼자의 힘으로 지금의 우리를 만들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기저에는 '문화'가 '존재'했고 '적응' 혹은 '비적응'을 통해 축적되었으며, 결국 '공진화의 힘'으로 인류는 생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때 여기서 주목하게 되는 것이 '협력'이라는 것. 이기적이고 작은 친족 집단에서나 보이던 특징이 더 거대한 집단이나 국가적 차원으로 확대되는 것까지. 결국 '통섭'의 개념을 생각해보는 것으로 연결되었다.

이 개념은 다윈이 좋아했던 것이기도 한데, 세상에서 아무런 관련이 없어 보이는 현상도 실제로는 관련되어 있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핵물리학은 사회과학과 과학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지만, 태양의 핵융합 반응은 지구상에서 가장 중요한 에너지의 원천이다. 또한 지구 내부에서 핵이 서서히 붕괴하면서 해저가 팽창하며, 이 팽창은 다시 지상의 생태에 영향을 준다. 그리고 핵무기는 국제 정치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다.(...) 원칙적으로 인간 종을 공부하는 데 관련이 없는 학문은 없는 셈이다.(383-4쪽)

결국 어느 것도 한 가지 분야로만 해석하고 설명할 수는 없다는 거다. 인간이란 종이 그렇게 복잡하고 다채로우면서도 예상 밖의 특징들을 골고루 갖고 있어 다른 종들과 다른 진화적 특징을 살피고 연구할 필요가 있다는 거다. 그리고 이때 생각해야 하는 주요한 개념이 바로 '문화'.
책의 논리에 수긍이 간다. 내가 살고 있는 나라의 환경과 문화적 특징, 세습되어 내려오는 전통이나 혹은 가깝게는 부모의 영향, 그리고 그 외에 종교나 교육, 기타 다양한 경험을 통해 축적되어온 습성이 지금 나의 생각과 행동을 결정하게 된다. 나의 유전자는 생물학적으로 부모로부터 그리고 그 부모의 부모의 부모로부터 왔지만, 이 유전자라는 것도 결국은 그 시대를 살았던 그 부모들이 문화적 적응 혹은 비적응의 과정을 겪으며 만들어 쌓아왔을 것이다. 결국 유전자는 꾸준히 문화와 상호 영향관계 속에서 진화해 현재까지 왔을 것이고 지금 현재 나도 그런 과정을 겪으며 다음 세대에 또 그 다음 세대에 영향을 미치는 중이다. 그렇게 공진화를 통해 이 사회와 인류는 형성 유지될 것이다. 그리고 그런 유지를 위한 방법들을 사람들은 또 만들어 나가곤 한다.
학창 시절 이런 질문에 답을 찾던 기억이 난다. '유전이냐, 환경이냐' 이제 이런 질문은 의미없는 이분법적 사고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든다. 둘 중 한 가지만으로 인간을 설명하기에는 자꾸 다른 하나가 간섭을 하고, 그래서 생각이 이랬다 저랬다 갈피를 잡지 못해 질문에 명확한 답을 하지 못하게 된다. 어느 한쪽에 손을 들어줄 수 없던 이 질문의 답을, 이제서야 이 책에서 찾은 듯하다.

이 책은 논문 모음이었다. 대학원 논문 쓸 때 알게 된 너무나 익숙한 느낌. 내용을 따라가기 쉽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못 읽을 정도는 아니었다. 전공 분야였다면 조금 더 잘 읽었겠지만 또 전공자들만을 위한 내용은 아니었다. 물론 여러모로 신경을 써서 읽어야 했던 책인 것만은 확실하다. 공부하는 느낌으로. 그만큼 읽는 데 시간도 오래 걸렸다. 깨알같은 글씨가 더 집중해서 읽도록 만들었다. 이번 여름 휴가는 이 책 한 권이 다 했다.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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