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인 심청 - 사랑으로 죽다
방민호 지음 / 다산책방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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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대한민국에 사는 사람 중 심청전에 대해 들어보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을 겁니다. 그런데 어린 시절부터 효의 상징으로 심청을 접했을 뿐이지 심청전을 제대로 알고 있다고 하기엔 어딘가 부족한 점이 많습니다. 이번 <연인 심청>을 읽으면서도 제가 알고 있던 심청전과 많이 다르다는 걸 느꼈습니다.

 

심청전에 경판본과 완판본이 따로 있다는 걸 알고 있나요?

경판본에서 심청은 오직 심학규, 즉 심봉사에게 효를 다하다가 인당수로 뛰어들고 되살아난 이후에도 오직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노력합니다. 경판본 저자는 작품 전체에 지효(至孝)의 분위기를 조성하고, 유교적 엄숙성과 숙명론적 운명관에 집중합니다.

이에 반해 완판본에는 무릉촌 장승상 부인, 뺑덕어미, 귀덕어미, 무릉촌 태수, 방아 찧는 아낙네들, 황봉사, 안씨 맹인 등의 인물들이 더 등장해 더 많은 사건을 담아 냅니다.

 

경판본과 완판본의 가장 큰 차이는 심봉사에게서 찾을 수 있습니다.

경판본의 심봉사는 유교적 이념에 충실한 인물인데 반해, 완판본의 심봉사는 훨씬 세속적이고 현실주의적인 인물로 나타난다고 합니다. 완판본에서 심봉사는 심청의 인당수 투신 이전에 지녔던 위엄은 사라지고, 태수 앞에서 허풍과 억지를 부리는 못난이며, 방아 찧는 여인네와 음담(淫談)을 즐기는 비속한 인물로 등장합니다.

 

이와 달리 심청은 경판본이나 완판본이나 성격이 크게 다르지 않게 나타납니다. 그리고 워낙 어렸을 때 읽어서 그렇겠지만 제가 지금껏 알고 있던 심청전은 심청, 심봉사, 뺑덕어멈만으로도 구성되는 이야기였는데, <연인 심청>에는 완판본에 등장하는 인물 외에도 윤상이라는 인물을 더해 아버지를 향한 심청의 사랑과 윤상을 향한 심청의 사랑을 대비시켜 현대소설의 느낌까지 가미합니다.

 

아득한 옛날 하늘에 옥황상제가 계셨고 바다에는 용왕이 계셨습니다. 그리고 선녀와 선관도 있었습니다. 심청은 옥황상제의 궁궐 자미원에서 옥황상제의 탕약을 다리던 선녀 유리였습니다. 선관 유형을 사랑하게 된 유리는 옥황상제의 탕약을 몰래 조금 빼내 유형에게 갖다 줍니다. 하지만 이를 시샘하던 다른 선녀가 이 사실을 판관에게 고하고 둘은 인간세상에서 남녀로 사랑할 수 없는, 오직 아비와 딸로 의지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판결을 받습니다. 유형은 평생 얻어먹으며 살아가야 하고, 유리는 평생을 받들어 바치며 살아가야 합니다. 추위와 굶주림이 있는 곳으로, 그곳에서 선한 일을 지극히 행해야만 중한 죄를 씻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유리와 유형으로부터 시작된 천상의 사랑과 인간세상에서 시작된 심청과 윤상의 지상의 사랑이 묘한 긴장감으로 소설을 이끕니다. 작가는 누군가의 연인이자 딸이며, 사랑과 삶과 운명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는 연인 심청을 구상하기에 이르렀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소설의 제목도 <연인 심청>입니다.

 

위에 경판본과 완판본에서 심봉사의 성격이 많이 다르게 나온다고 말씀드렸는데, <연인 심청>에서도 제 눈길을 끈 것은 심청보다는 오히려 심봉사입니다. 저자인 방민호교수와 한 언론사와의 인터뷰를 보면 사실 주인공은 심청이지만 부각시키려 한 인물은 심봉사다... 현대인의 욕망의 화신으로 심봉사를 형상화했다는 부분이 나옵니다. 제도 책을 읽는 내내 심봉사에 대한 분노와 이른바 찌질함을 가득 느꼈습니다.

 

심봉사는 유형으로 지낸 전생에도 운영이라는 선녀를 지상으로 유배 보낸 전력이 있습니다. 지상에서도 하루 종일 서책을 만지작거리는 일을 할 뿐인데 식탐은 강해 심청을 고생시킵니다. 심청의 효에 감동해 뱃사람들이 공양미 삼백 석에 백 석을 보태주지만 심청이 인당수로 떠난 이후에도 정신을 못 차리고 노름에 빠집니다. 그러다 애랑이라는 기생에 빠져 절에도 약조한 쌀 삼백 석 대신 백오십 석만 바치기로 합니다. 그러다 결국 남은 재산마저 뺑덕어멈에게 다 빼앗기고 말죠.

 

어느 서책에서인가 심봉사는 이 혼돈이라는 괴물에 대해 다른 이야기를 본 적도 있다. 그에 따르면 혼돈이란 놈은 머리는 있지만 눈과 코와 입과 귀가 없었다. 또 어디에선가는 눈은 있지만 보지 못하고, 귀도 있지만 듣지 못한다고도 했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심봉사는 마치 자기 자신이 혼돈 같은 괴물이 아닌가 하는 의혹마저 생긴다.”

 

하지만 이 부분이 비단 심봉사만의 얘기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시대에도 혼돈 같은 괴물이 곳곳에 있는 게 아닌가...

 

책을 읽기 시작할 때는 이렇게 몰입해서 읽을 줄 몰랐습니다. 결론을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윤상이라는 새로운 인물의 등장, 읽는 재미를 더해주는 구어체 문장, 거기에 순우리말 단어가 담긴 아름다운 문장들로 금세 마지막 페이지를 넘겼습니다.

그리고 특히 제 마음에 콕 박히는 부분이 있었는데요, 약간 길수도 있지만 전문을 옮기며 글을 마무리 하겠습니다.

 

그리면 세상은 어떤 이들이 이끌어가나? 사랑하는 사람의 순수함을 이렇게 저렇게 이용해서 제 목적을 달성해가는 무정한 사람들인가? 속고 속고 또 속을지라도 사랑하는 그 돛대 같은 마을 하나만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향한 마음을 잃어버리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인가?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능력이 부족하다. 그래서 겉에 보이는 대로, 사랑을 희롱하고 이용하는 이들이 세상을 만들어가는 줄 안다. 이 험한 세상을 그나마 살아갈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은 실은 사랑을 이용하지 않는 사람들, 아무것도 원하지 않고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다. 이들이야말로 보이지 않는 초능력자들인 것을, 그네들의 진정한 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깨닫지 못한다.“

 

덧붙이는 글 : 다산북스에서 연인 심청독서감상문대회를 진행중입니다. 저는 엄두도 못 내지만, 필력이 좋은 분들은 도전해 보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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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례자들의 안식처, 에르미타를 찾아서 - 스페인에서 만난 순결한 고독과 위로
지은경 지음, 세바스티안 슈티제 사진 / 예담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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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빨리 읽고자 하시는 분은 아주 빠르게 읽을 수 있습니다. 책의 절반 이상이 사진이고, 글씨가 적힌 부분도 여백이 충분합니다. 하지만 아주 천천히 읽기를 권합니다. 방 전체를 밝히는 조명보다는 책만 밝힐 수 있는 작은 스탠드 아래서요.

 

이 책이 나오기 전까지 '에르미타'라는 단어는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온라인서점에서 '스페인'이라는 키워드로 검색하다 알게 된 책인데요, 에르미타는 은둔지’, ‘사람이 살지 않는 장소’, ‘세상과 뚝 떨어진 집’, ‘사막과 같이 황량함등 쓸쓸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말입니다.

 

스페인 북부 피레네 산맥 사이에 흩어져 있는 작고 소박한 건축물의 이름으로, 비단 종교 세력으로부터 자유롭고자 했던 신자들뿐 아니라 세상을 등지고자 했던 사람들, 나그네들이 바람과 추위를 피해 잠시 머물며 다음 여정을 마음에 새기던 곳이기도 하다는군요.

 

이 에르미타 사진을 찍기 위해 7년째 같은 장소로 향하는 사진작가 '세바스티안 슈티제'가 있습니다. 지금까지 총 575채의 에르미타를 찍어왔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전시기획자이자 에디터인 저자가 함께하게 되죠. 둘은 4개월의 긴 겨울동안 에르미타만을 생각하며 지냅니다.

 

세바스티안은 핀홀 카메라(바늘구멍 사진기)로 에르미타를 찍습니다. 핀홀 카메라는 사진사가 뷰파인더 안에 담기는 피사체를 미리 관찰할 수 없는 단점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핀홀 카메라를 선택한 이유는 에르미타가 가진 근원을 표현하고 고립된 세계의 건축물이 가진 느낌을 잘 표현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세바스티안은 우울한 회색빛이 감도는 겨울에만, 거무스름한 구름이 하늘을 덮고 있을 때만 에르미타를 찍습니다.

 

"하늘은 내 사진 속에서 에르미타의 감정을 실어줄 수 있는 유일한 존재야.

세상과 뚝 떨어져 살고자 했던 당시 에르미타 사람들의 감정이 푸른 하늘처럼 화려했을 거라고 생각해?

작고 초라한 에르미타 안에서 느꼈을 그들의 외로움은 밝고 파란 하늘에서는 묻어나지 않아."

 

이게 바로 7년째 에르미타 사진을 찍는 이유입니다. 자연이 허락하는 순간까지 기다리고 또 기다려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기다림은 몽롱하고 몽환적인 느낌의 사진으로 보답을 받습니다. 구글이미지에서 'ermita'를 검색해 나오는 파란 하늘 아래 선명한 에르메타 사진을 보면 왜 기다림이 필요한지 이해가 가실 겁니다.

 

세바스티안은 에르미타 사진을 찍는 것을 "에르미타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하고 "소비와 물질주의에 굶주린 현대 노예의 운명에 저항하는 조용한 혁명의 길"이라 말합니다.

 

사진으로나마 에르미타를 보고 느끼는 감정은 다양하겠지만 이 책이 여느 여행에세이와는 사뭇 다른 느낌임은 분명합니다. 아주 천천히 다가오지만 가슴 속으로 스며들어 긴 여운을 남깁니다. 책 한 장 한 장의 여백만큼요.

 

인생은 기다림의 연속이다. 기다림의 끝이 어디로 닿게 될지 우리는 절대 알 수가 없다. 그러나 그 시간 동안 수많은 꿈을 꿀 수는 있다.(60p)

 

어쩌면 그들(수도자)은 세상 사람들이 짊어지고 가는 삶의 무게로부터 자유로울지도 모르고, 우리가 모르는 차원 높은 쾌락과 즐거움을 만끽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일반 사람들이 내는 욕심이나 과시욕, 허영이 그들에게는 그저 차원 낮은 아둔함으로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83p)

 

그러나 길고 긴 길을 어떻게 지날지 한꺼번에 생각할 필요는 없다. 길을 지나치며 이루어지는 수많은 만남들을 순간순간 느끼면 그뿐. (103p)

 

이렇게도 많은 것이 존재하는 이 지구와 자연, 그 속에서 우리 삶이 가지는 의미는 무엇일까? 그것은 어쩌면 순간을 누리고 자신의 시간에 기쁨을 더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아가는 과정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 (116p)

 

이 세상에 하찮은 만남이란 없는 것이다. 이 넓고 넓은 우주 한가운데, 지구라는 작은 행성, 거기에서 살아가는 무수한 생명들 그리고 같은 시간대를 지나는 우리를 위해 거대한 인연의 끈으로 묶인 소중한 이들. (168p)

 

이 세상 그 누구이건, 어느 곳에 있건, 모든 살아있는 생명들은 자신을 행복하게 지켜갈 수 있기를, 외로움과 괴로움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기를. (172p)

 

사진작가 세바스티안 슈티제의 홈페이지( www.sebastianschutyser.com )에 가시면 더 많은 에르미타 사진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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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자를 위한 우리말 공부 - 한국어를 잘 이해하고 제대로 표현하는 법
이강룡 지음 / 유유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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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종합 베스트셀러 순위를 살펴보면 상위 10종 중 교보문고는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을 비롯해 5권이 번역서이고, 예스244권이 번역서입니다. 저는 외국어실력이 뛰어나지 않아 원서를 읽을 수 있는 수준이 못됩니다. 그만큼 해외의 저작을 번역해주는 번역자는 제게 참 고마운 존재입니다.

 

저는 책을 고르기 전에 다른 분들의 서평을 많이 살펴보는데요, 그러다보면 번역이 좋지 않다는 평도 꽤 많이 접하게 됩니다. 다른 언어로 쓰인 글을 우리말로 옮기는 건 단지 능숙한 언어 실력만이 아닌 배경지식이나 문화에 대한 이해도 필요한 만큼 쉽지 않은 문제죠.

 

이 책은 기본적으로는 번역가를 위한 책입니다. 제목에도 '번역자를 위한'이라는 말이 들어가 있죠. 하지만 번역자가 아니어도 우리가 일상에서 흔히 쓰는 언어의 오류를 바로 잡는데 많은 도움이 되는 책입니다. 책의 부제 그대로 '한국어를 잘 이해하고 제대로 표현하는 법'을 익힐 수 있는만큼 한국어를 사용하는 모든 분에게 필요한 책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예상과 달리 재미있게 읽을 수 있습니다.

 

책은 총 6장으로 구성되어 있고 각각 좋은 글 고르기, 용어 다루기, 맥락 살피기, 문장 다듬기, 문법 지식 갖추기, 배경지식 활용하기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각 장의 제목만 보면 마치 글쓰기 책인가 싶은 향기가 솔솔 풍기지만 전혀 그렇지 않으니 안심하시기 바랍니다.

 

저자의 경험담, 신문기사,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문학작품 등에서 발견할 수 있는 우리말 사용 오류를 기반으로 설명이 이어져 여느 책 못지않게 쉽게 다음페이지로 넘어 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문법 시험을 보고자 책을 읽는 건 아니니까 각자 가지고 있는 언어 습관 중에서 가장 자주 틀렸던 부분을 고치기 위한 도우미로 소장하기에 적당합니다.

 

아울러 책 내용 중에 특히 공감된 부분이 있습니다.

저자와 번역자의 깜냥과 한계를 지적해 주는 건전한 비판 덕에 학문이 발전한다. 번역서를 읽다 오역을 발견하면 대단한 업적이라도 이룬 양 사방에 떠벌리기보다 번역자나 출판사에 이메일을 보내자. 그러면 다음 쇄에 수정 사항이 반영되며 다른 독자는 더 좋은 번역을 접한다. 아무도 마음의 상처를 입지 않으며 공동체 구성원에게 두루 유익하다.”

 

위에서 말씀드린대로 번역이 이상하다싶은 책이 있으면 서평에 번역이 어색해서 집중하기가 어려웠다등의 내용을 남기기보다 구체적인 내용을 출판사나 번역자에게 건의해서 보다 좋은 책을 만드는 데 기여하는 게 어떨까요? 그런 역량이 되는 분이라면 번역하신 분과 좋은 인연을 만들 수도 있을 것 같구요.

 

책을 읽었음에도 이 글에도 매끈하지 않은 문장이 많이 포함되어 있을 겁니다. 그만큼 이미 굳어진 언어습관을 고치기가 쉽지 않은데요, 자주 펼쳐보며 하나 하나씩 고쳐가는 수 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매년 한글날 즈음해서만 한글 사용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기사가 나오는데요, 사회에서 그토록 강조하는 영어 만큼 한글 사용 또한 중요하게 여겨지는 풍토가 생겼으면 합니다. 아울러 좋은 번역서를 읽었다면 번역자에 대한 칭찬도 곁들이는 풍토도 함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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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서울을 걷다
권기봉 지음 / 알마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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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인들과 만나 커피를 마시거나 식사를 하다보면 어렸을 적 이야기를 자주 하게 됩니다. 삶이라는 게 어디 즐거운 일만 있겠습니까마는 그런 자리에서 나오는 옛이야기는 늘 즐겁습니다. 기자와 라디오진행가로 유명한 권기봉님의 책 <다시, 서울을 걷다>는 일상, 장소, 의미, 문화라는 키워드로 서울의 옛모습, 옛이야기를 풀어내고 거기에 담긴 의미를 성찰해보는 책입니다. 지인들과의 옛이야기처럼 즐겁게 추억을 되새길 수만 있다면 좋겠지만 애석하게도 서울의 옛이야기는 씁쓸함과 반성을 주는 경우가 더 많았습니다. 우리나라는 이른바 '한강의 기적'을 이루었고, 아시안게임, 올림픽에 월드컵까지 유치한데다 2013년 명목 국내총생산(GDP) 규모는 1조3천45억달러로 전 세계에서 14위를 차지했다고 하니 외향적인 발전으로만 보자면 자랑할만 게 많죠. 하지만 그런 발전 속에서 우리가 진정 지녀야 할 가치나 의미를 잊고 사는 건 아닌가 싶습니다. "지난 2008년 베이징올림픽을 앞두고 중국 당국은 성화 봉송로 주변의 빈민가를 철거하거나 담장을 높게 쳐서 그 모습이 카메라에 담기는 것을 막았다. 서구는 물론 한국 언론들도 중국의 그러한 행태를 두고 비아냥댔다. 하지만 그런 조치는 20년 전 한국의 모습과 하나도 다를 것이 없었다. 그보다도 20여 년 앞선 1960년대부터 이미 도시빈민들의 주거지를 강제로 철거해온 원조국가가 바로 대한민국이기 때문이다."(88p) "집현전의 후신이라 할 수 있는 홍문관은 남산으로 팔려가 화월별장이라는 요정으로, 비현각은 장충동으로 옮겨져 남산장이라는 요정으로 그 용도가 바뀌었다. 청암동이나 회현동, 갈월동 등 남산 일대에 있던 다른 요정들도 경복궁의 전각들을 사다가 키워나갔다. 한 나라의 궁궐 건물들의 말로치고는 참으로 기험한 풍경이다."(147p)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비롯해 역사 문제, 특히 '민주 시민'을 길러내기 위한 텍스트인 교과서만 봐도 한국 정부의 의심스러운 태도가 엿보인다. 교육과학기술부는 2013년부터 사용할 고등학교 교과서의 지침 구실을 하는 '2009 개정 교육과정'의 고등학교 새 역사교과서 집필기준안에서 일본군 '위안부'를 비롯해 '일제에 의한 강제 동원'이나 '일본에 빼앗긴 문화재' 부분을 삭제하려 했다. ㆍㆍㆍ정치적인 이유로 국가주의나 애국주의는 강조한 반면 인권이나 평화는 내던져버린 결과였다. 역사교과서의 퇴행과 왜곡은 비단 일본만의 문제가 아니었다."(215p) 이렇게 어처구니 없는 과거와 현재의 우리 모습들은 몇가지만 골라 인용하기가 벅찰 정도입니다. 이 외에도 책은 아래와 같이 크게 네 개의 파트 25개의 이야기로 우리가 무심코 지나치는 서울의 모습에서 많은 의미를 발견해 냅니다. ㆍ일상을 걷다 : 일상 속에 녹아 있는 서울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바라본다 ㆍ장소를 걷다 : 익숙하면서도 낯선 장소에 숨어 있는 지난 이야기를 들어본다 ㆍ의미를 걷다 : 잘못 알았던, 제대로 알지 못했던 근현대사의 의미를 재발견한다. ㆍ문화를 걷다 : 이제는 역사 속으로 사라진 지난 시절의 이야기와 문화를 추억한다. 저는 서울에서 태어나 줄곧 서울에서 자랐고, 저자와 동시대를 살아왔음에도 제가 미처 모르고 있거나 기억에서 사라진 여러가지 이야기를 접할 수 있었습니다. 책을 읽으면서 든 또다른 생각은 다음 세대에겐 조금 더 밝은 이야기를 남겨줘야 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우리 사회를 보면 그러기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앞서긴 합니다만 이런 책을 통해 저 자신부터 조금 더 깨어난다면 일단 그것만으로도 이 책을 일독한 충분한 의미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저자의 여는 글과 마무리하는 글이 깊이 와닿는 책입니다.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의 삶과 보다 밀접한 관련이 있는 근현대사의 현장을 찾아 다시 서울로 나섰다. 권력자의 시각이 아닌 이 사회를 구성하는 수많은 '우리들'의 입장에서 다시 서울을 걸었다." "이제 필요한 것은 검은 그림자들을 배제하고 단절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역사적이며 문화적인 맥락을 짚어내 씨줄과 날줄로 엮어가는 일이다. 모든 역사는 흘러간 과거사가 아니라 '현재의 가늠자'이자 '미래의 지표'로써 그 가치가 영원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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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서의 괴로움
오카자키 다케시 지음, 정수윤 옮김 / 정은문고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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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좋아하는 분들은 대부분 책으로 둘러싸인 서재를 꿈꿉니다. 책꽂이에 꽂힌 책만으로도 멋진 인테리어가 되기도 하고, 그 책들을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뭔가 뿌듯한 기분이 들기도 하죠.

 

하지만 책이 많은 게 항상 즐거운 일만은 아닙니다. 특히 이사라도 가게 되면 책은 그 어떤 짐보다 까다로운 짐으로 변하게 되니까요.

 

일본 장서가들의 이야기를 담은 이 책의 저자 또한 약 3만권이나 되는 책을 보유한 말 그대로 장서가입니다. 3만권이면 일주일에 한권씩 읽는다 해도 576년 이상 걸리는 양입니다. 하루에 한권씩 읽어도 82년이 넘게 걸리죠. 책을 정리하고자 한번은 책 2천권을 팔기도 했고, 하루는 단골 헌책방 주인을 불러 원하는 책은 다 가져가라고 하기도 했답니다. 문제는 다음날 바로 서점에 가서 책 17권을 사왔다는 건데요, 책을 보낸 아픔을 책으로 치유한 셈입니다.

 

이 외에도 갖가지 장서가들의 일화가 등장합니다. 목조건물 2층에 살던 한 남자는 방에 잡지를 많이 쌓아놓다보니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바닥을 뚫고 1층으로 떨어졌다고 합니다. 더 재미있는 건 뉴스에 보도된 그 사건을 본 후 저자와 지인이 뉴스에서 보고 처음에는 자네가 아닌가 싶었어”, “그건 내가 할 소린데라는 대화를 나눴다고 하네요. 일본 목조건물 특유의 사건일 수도 있지만 아무리 그래도 바닥을 뚫을 정도면 얼마나 많은 책이 있었던건지 상상하기 쉽지 않습니다.

 

또 다른 장서가는 책을 위한 집을 지었습니다. 집이 책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끼익끼익 소리를 내자 3층 주택을 새로 지은 후 2층과 3층 벽은 온통 책장으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우선적으로 책을 위한 공간배치 후 나머지 공간에 사람들이 세 들어 살고 있는 셈이죠.

 

그리고 책이 하도 많아서 그 책을 찾을 수 없다보니 집에 그 책이 있는 걸 알면서도 새로 사거나 도서관에서 빌려오는 경우가 많다는 이야기, 책을 꽂아두기엔 너무 많아 박스에 넣어 보관하다가 많은 양을 처분한 후 책등(제목 보이는 부분)이 보이게 했을 때의 기쁨을 느낀 장서가의 이야기, 책을 책장에 꽂아두지 않고 방에 쌓아두는 이유가 책장을 살 돈이 있으면 책을 사는 게 낫기 때문이라는 장서가의 이야기는 한편으론 웃음이 나오고 한편으론 공감이 되기도 했습니다.

 

이와 함께 각 장마다 저자가 요약한 교훈이 정리되어 있는데 이 중 몇 가지는 일본에 특화된 내용이기도 해서 제 입장에서 공감되는 교훈만 정리를 해보겠습니다.

 

그 순간 자신에게 신선도가 떨어지는 책은 일단 손에서 놓을 것.

책장은 서재를 타락시킨다. 필요한 책은 곧바로 손에 닿는 곳에 있는 게 이상적.

책은 상자 속에 넣어두면 죽는다. 책등은 늘 눈에 보이도록.

진정한 독서가는 서너 번 다시 읽는 책을 한 권이라도 많이 가진 사람이다.

종이책을 사랑하는 사람은 전자서적이 어울리지 않는다. 그러므로 장서의 괴로움을 해결하기 어렵다.

 

여러분도 공감 되시나요? 사람마다 독서량도 다르고 보관할 수 있는 공간이 다르긴 하지만 책 내용 중 적당한 장서량은 5백 권이라는 부분이 있습니다. 저 또한 전자책뷰어를 가지고 있음에도 종이책이 가진 질감이나 책장을 넘기는 느낌이 좋아 5백 권을 훌쩍 넘기는 책을 가지고 있습니다. 장서가들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요. 그런데 그 중에 더 이상 펼쳐보지 않는 책도 많고 생각보다 별로라 굳이 보관하지 않아도 되는 책도 있는데 아직 처분을 못하고 있죠. 소박한 장서의 괴로움이랄까요.

 

요즘엔 도서정가제의 영향으로 책값도 부담이라 도서관을 자주 이용하고 있습니다. 제 지인 중에 책을 일단 읽고 나서 소장가치가 느껴지면 산다는 분이 계신데 저도 그 방법으로 전환중이죠. 집에 책이 많아서 제목이 모두 보이게 책장에 꽂아두지 못하고 쌓아두신 분, 가지고 있는 책을 야심차게 분야별로 정리하고 싶은데 엄두가 안나는 분, 책을 찾아야 하는데 어디에 꽂혀있는지 한참 찾아야 했던 분들이라면 공감하며 읽을 수 있는 책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하루에 세 권쯤 책을 읽으며 독서가라고 말하는 듯하나, 실은 세 번, 네 번 반복해 읽을 수 있는 책을 한 권이라도 더 가진 사람이야 말로 올바른 독서가다.(150페이지)’라는 말을 다시 한번 되새기며 장서가보다는 독서가가 되고자 노력해 보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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