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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서울을 걷다
권기봉 지음 / 알마 / 2012년 10월
평점 :
지인들과 만나 커피를 마시거나 식사를 하다보면 어렸을 적 이야기를 자주 하게 됩니다. 삶이라는 게 어디 즐거운 일만 있겠습니까마는 그런 자리에서 나오는 옛이야기는 늘 즐겁습니다.
기자와 라디오진행가로 유명한 권기봉님의 책 <다시, 서울을 걷다>는 일상, 장소, 의미, 문화라는 키워드로 서울의 옛모습, 옛이야기를 풀어내고 거기에 담긴 의미를 성찰해보는 책입니다.
지인들과의 옛이야기처럼 즐겁게 추억을 되새길 수만 있다면 좋겠지만 애석하게도 서울의 옛이야기는 씁쓸함과 반성을 주는 경우가 더 많았습니다.
우리나라는 이른바 '한강의 기적'을 이루었고, 아시안게임, 올림픽에 월드컵까지 유치한데다 2013년 명목 국내총생산(GDP) 규모는 1조3천45억달러로 전 세계에서 14위를 차지했다고 하니 외향적인 발전으로만 보자면 자랑할만 게 많죠. 하지만 그런 발전 속에서 우리가 진정 지녀야 할 가치나 의미를 잊고 사는 건 아닌가 싶습니다.
"지난 2008년 베이징올림픽을 앞두고 중국 당국은 성화 봉송로 주변의 빈민가를 철거하거나 담장을 높게 쳐서 그 모습이 카메라에 담기는 것을 막았다. 서구는 물론 한국 언론들도 중국의 그러한 행태를 두고 비아냥댔다. 하지만 그런 조치는 20년 전 한국의 모습과 하나도 다를 것이 없었다. 그보다도 20여 년 앞선 1960년대부터 이미 도시빈민들의 주거지를 강제로 철거해온 원조국가가 바로 대한민국이기 때문이다."(88p)
"집현전의 후신이라 할 수 있는 홍문관은 남산으로 팔려가 화월별장이라는 요정으로, 비현각은 장충동으로 옮겨져 남산장이라는 요정으로 그 용도가 바뀌었다. 청암동이나 회현동, 갈월동 등 남산 일대에 있던 다른 요정들도 경복궁의 전각들을 사다가 키워나갔다. 한 나라의 궁궐 건물들의 말로치고는 참으로 기험한 풍경이다."(147p)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비롯해 역사 문제, 특히 '민주 시민'을 길러내기 위한 텍스트인 교과서만 봐도 한국 정부의 의심스러운 태도가 엿보인다. 교육과학기술부는 2013년부터 사용할 고등학교 교과서의 지침 구실을 하는 '2009 개정 교육과정'의 고등학교 새 역사교과서 집필기준안에서 일본군 '위안부'를 비롯해 '일제에 의한 강제 동원'이나 '일본에 빼앗긴 문화재' 부분을 삭제하려 했다. ㆍㆍㆍ정치적인 이유로 국가주의나 애국주의는 강조한 반면 인권이나 평화는 내던져버린 결과였다. 역사교과서의 퇴행과 왜곡은 비단 일본만의 문제가 아니었다."(215p)
이렇게 어처구니 없는 과거와 현재의 우리 모습들은 몇가지만 골라 인용하기가 벅찰 정도입니다. 이 외에도 책은 아래와 같이 크게 네 개의 파트 25개의 이야기로 우리가 무심코 지나치는 서울의 모습에서 많은 의미를 발견해 냅니다.
ㆍ일상을 걷다 : 일상 속에 녹아 있는 서울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바라본다
ㆍ장소를 걷다 : 익숙하면서도 낯선 장소에 숨어 있는 지난 이야기를 들어본다
ㆍ의미를 걷다 : 잘못 알았던, 제대로 알지 못했던 근현대사의 의미를 재발견한다.
ㆍ문화를 걷다 : 이제는 역사 속으로 사라진 지난 시절의 이야기와 문화를 추억한다.
저는 서울에서 태어나 줄곧 서울에서 자랐고, 저자와 동시대를 살아왔음에도 제가 미처 모르고 있거나 기억에서 사라진 여러가지 이야기를 접할 수 있었습니다. 책을 읽으면서 든 또다른 생각은 다음 세대에겐 조금 더 밝은 이야기를 남겨줘야 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우리 사회를 보면 그러기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앞서긴 합니다만 이런 책을 통해 저 자신부터 조금 더 깨어난다면 일단 그것만으로도 이 책을 일독한 충분한 의미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저자의 여는 글과 마무리하는 글이 깊이 와닿는 책입니다.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의 삶과 보다 밀접한 관련이 있는 근현대사의 현장을 찾아 다시 서울로 나섰다. 권력자의 시각이 아닌 이 사회를 구성하는 수많은 '우리들'의 입장에서 다시 서울을 걸었다."
"이제 필요한 것은 검은 그림자들을 배제하고 단절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역사적이며 문화적인 맥락을 짚어내 씨줄과 날줄로 엮어가는 일이다. 모든 역사는 흘러간 과거사가 아니라 '현재의 가늠자'이자 '미래의 지표'로써 그 가치가 영원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