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 유혹의 기술 - 그들은 어떻게 우리를 유혹했을까
오정호 지음, EBS MEDIA 기획 / 메디치미디어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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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케팅 영역에서 20년 가까이 활동하고 있는 지인이 소위 강추한다며 보내준 책이 있습니다. ‘PR의 아버지라 불리는 에드워드 버네이스가 쓴 <프로파간다>라는 책으로 대중에 대한 선전 전략이 담겨 있습니다. 이 책을 다 마무리하지 못한 시점에서 더욱 흥미를 끄는 다큐멘터리와 책이 나왔는데요, 각각 EBS 다큐프라임 <한국인의 집단심리 - 우리 We><대중 유혹의 기술>이라는 책입니다. <대중유혹의 기술>은 다큐멘터리 중 1, 2부에 해당하는 내용을 엮은 책으로 <프로파간다>와도 일맥상통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저자인 오정호 EBS PD는 머리말에서 흔히 서점에서 보게 되는 설득의 심리학도 아니요, 홍보 전문가들의 생생한 노하우가 들어 있는 실용서도 아니다. 다만 이 책은 어떤 기술에 대한 개론서에 가깝다.”고 말합니다. 저자가 말하는 기술은 대중을 설득하는 기술이기도 하고, 대중을 기만하는 기술이기도 한데요, 저는 여기에 설득당하거나 기만당하지 않기 위한 기술도 하나 추가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대중을 유혹하는 기술은 크게 일곱 가지로 나뉘어 소개됩니다.

 

1. 볼거리가 최고다(spectacle)

2. 입소문을 퍼뜨려라(viral)

3. 그들의 귀에 드라마를 집어넣어라(drama)

4. 공포와 분노가 더 빠르다(fear and anger)

5. 대중의 아이콘을 만들어라(icon)

6. 대중은 진짜를 봐도 믿지 않을 것이다(fabrication)

7. 대중의 무의식을 발견하라(subconsciousness)

 

각각의 단어만 보면 마케터들이 사용하는 방법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바이럴마케팅은 이미 일반적이고, 의약품이나 보험, 교육 영역에서는 공포마케팅을 자주 활용합니다. 제품이나 홍보에 이야기를 입히는 것도 중요하고, 고객이 가지고 있는 잠재적인 니즈를 충족시키는 제품이나 서비스를 만들어내야 합니다. 대중을 설득하는 맥락으로 보면 왜 제 지인이 <프로파간다>를 추천했는지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명확한 자료에 근거한 설득을 위한 기술이라면 문제될 건 없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대중을 기만하는 기술로써 사용될 때입니다.

 

에드워즈 버네이즈는 히틀러로부터 PR 자문 요청을 받고 거절했으나, 나치의 선전 지휘자인 요제프 괴벨스가 버네이즈의 책을 참고해 독일 국민을 선동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나치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1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의 선전활동가들이 거짓 보고서를 만들었고, 걸프전 때도 홍보대행사가 만들어낸 유언비어가 언론에 보도된 바 있습니다.

 

심리학 서적에 방관자효과를 설명할 때 자주 등장하는 제노비스 사건(38명의 주민이 살인사건을 목격했음에도, 아무도 경찰에 신고하지 않은 사건)’<뉴욕타임즈>에서 아무런 근거 없이 보도했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이보다 더한 사건도 있습니다. 2005년 뉴올리언즈에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휘몰아쳤을 당시에는 시장과 경찰청장이 날조된 거짓말을 해 복구에 힘써야 할 시기에 오히려 흑인에 대한 혐오 감정이 격화된 사례도 있습니다.

 


이미지와 영상 기술이 발전하면서 지금 제가 보고 있는 게 사실인지 정교하게 조작된 것인지 구분하기 어렵습니다. 같은 사건 속 같은 인물에 대한 사진이라도 어느 순간에 찍느냐에 따라 멋진 사진이 되기도 하고 소위 굴욕사진이 되기도 합니다. 인터넷과 소셜 미디어의 발달로 근거 없는 소문이나 사실관계가 뒤바뀐 내용이 순식간에 확산되기도 합니다. 이러다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선동을 돕는 경우까지 생길 수 있다는 게 더 무섭습니다.

 

저자는 우리들이 만나 좋은 대중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믿으며, 우리는 좋게 만들어질 수 있다(we can be made to be good)고 강조합니다. 선전이나 선동, 프로파간다, PR, 홍보, 커뮤니케이션, 설득의 기술도 사용하는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 결과는 천차만별일 겁니다. 그러하기에 더욱 대중 유혹의 기술을 알아야 할 필요성을 느낍니다.

 


다양한 사례를 기반으로 한 설명과 이해를 돕는 사진 자료가 많이 포함되어 있어 쉽게 읽을 수 있는 책입니다. 저자가 말 한대로 개론서인 만큼 더 심도 있는 내용을 알기 위해선 독자 스스로의 노력이 필요하지만, 우리나라 사례도 많이 담겨 있다는 것 또한 이 책이 주는 장점입니다. 포토샵이 만들어지기 전 이미 링컨과 스탈린 등이 사진을 조작했다는 것 등 몇 가지 흥미로운 사실도 알게 됐고, 정부나 기업, 언론에서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례를 접하며 분노와 안타까움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재미있게도 저는 <대중 유혹의 기술>이라는 책에 유혹되어 책을 펼쳐보게 되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유혹에 당한 게 제게 충분히 도움이 됐다고 생각합니다.

 

에드워즈 버네이즈를 만나러 갔던 뉴욕시립대 교수는 버네이즈의 서재를 본 후 그것은 방대한 책을 모아놓은 것이었는데 수천 권은 되어 보였다. ... 그것들은 단순히 천박한 광고업자의 책장이 아니라, 한 지식인의 무기고였다.”라는 글을 남겼습니다. 손자병법에 이르기를 知彼知己(지피지기) 百戰不殆(백전불태)‘라 했는데, 각종 선전기술에 둘러싸인 이 시대에도 필요한 교훈이 아닌가 싶습니다. 무언가를 믿기보다 우선 의심부터 해야 할 것 같은 이 시대가 참 안타깝습니다만, 기만당하거나 쉽게 유혹당하지 않기 위한 출발점으로 이 책에게는 유혹을 당해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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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인문학 - 하루가 더 행복해지는 30초 습관
플랜투비 지음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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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철살인(寸鐵殺人).

EBS 지식채널e를 볼 때마다 생각나는 말입니다. 짧은 메시지만으로도 우리에게 큰 울림을 주는 주옥같은 내용을 간직하고 싶고 되새기고자 지식e 시리즈와 역사e 시리즈까지 모두 책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번에 읽은 책은 지식e 못지않게 생각할 거리를 주는 책입니다. 네이버 20PICK에서 많은 네티즌의 찬사를 받은 글 50편을 엮은 <1인문학>이 바로 그 책입니다.


Idea: 세상을 180˚ 변화시키는 힘은 딱 1만큼의 생각 차이

Love: 심장이 1더 뜨거워지는 가슴 뭉클한 사랑 이야기

Courage: 99100의 차이, 그리고 용기와 좌절의 차이는 단 1

People: 나보다 어려운 이들을 위해 1따뜻한 손길을 내미는 사람들

Society: 어두운 사회 이곳저곳을 1더 환하게 밝히는 등불


이렇게 다섯 가지 주제별로 각 10편의 에피소드가 소개됩니다. 책의 부제인 하루가 더 행복해지는 30초 습관이란 말 그대도 에피소드 한 편을 읽는데 30초면 충분합니다. 30분 정도면 책 전체를 읽는 것도 가능하죠. 하지만 이 책은 빨리 읽는 게 능사가 아닌 책입니다. 눈으로 읽는데 30초면 충분할지 몰라도 에피소드를 마음에 새기고 스스로도 1를 높일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 보는 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글이 짧은 만큼 여백이 많은 책이지만, 그 여백을 우리가 가진 온기로 채울 때 결국 그 온기가 되돌아와 우리를 따뜻하게 해줄 수 있는 책입니다.



책을 배송 받고 무심코 펼친 페이지에 나온 에피소드가 마침 고양이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저 또한 두 마리 고양이를 모시는(?) 집사다 보니 책이건 방송이건 SNS건 고양이에 대한 내용에는 더욱 눈길이 가는데요, <1인문학>에 소개되는 고양이는 두 눈이 없어 앞을 보지 못하는 고양이 허니비입니다. 허니비는 세상을 볼 수는 없지만 산책을 즐기며 흐르는 개울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따뜻하게 내리쬐는 햇볕을 발끝으로 느끼며, 향긋한 꽃향기를 한껏 들이마십니다.


두 눈은 감고 있지만 자연을 한껏 느끼고 있는 허니비의 표정이 정말 사랑스럽습니다. 역설적이게도 우리는 세상의 어두운 단면을 많이 목격해서 표정이 어두운 걸까요? 다행히 저는 <1인문학> 에피소드를 읽으며 여러 번 밝은 표정을 지을 수 있었습니다.



첫 번째 에피소드인 브라질 축구팀 EC Vitoria의 이야기도 무척 인상 깊었습니다. 유니폼 디자인을 활용해서 목표한 헌혈자 수에 도달할 때마다 흰색 줄무늬를 채워나가며 모슨 줄이 붉은 색인 원래의 유니폼을 만들어가는 캠페인. 축구가 단지 승리의 짜릿함을 위한 수단으로 그치지 않고 사회를 바꿀 수 있는 아이디어가 되는 모습은 최근 페이스북에 많이 공유되고 있는 Shoot for Love 캠페인을 생각나게 했습니다. 축구선수가 직접 참여해 소아암환아의 치료비를 적립하는 Shoot for Love 캠페인은 제 지인이 기획하고 실행했기에 더욱 응원하는 캠페인이기도 한데요, 브라질 축구팀 이상으로 세상을 따뜻하게 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EC Vitoria의 유니폼과 비슷한 디자인의 유니폼을 입는 우리나라 축구팀 포항 스틸러스도 같은 캠페인을 해보면 어떨까 싶은 생각도 들었습니다. 프로야구에 비해 상대적으로 관심이 덜한 프로축구에 대한 관심도 높일 수 있고 선수들과 팬들이 더 끈끈하게 결속할 수 있는 멋진 캠페인이 되지 않을까요?



책 뒷날개에 적힌 글이 인상적입니다.


장작불이 타는 온도는 400

밥이 익는 온도는 100

커피가 가장 맛있는 온도는 80

사람의 체온은 36.5


그리고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한 온도는 당신의 1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제가 무심코 지나쳤던 많은 것들이 이미 다른 분들의 온기를 더한 결과였습니다. 지하철 계단 옆에 있는 검은색 칠(출근길에 계단 옆을 살펴보세요)이 저시력자를 배려한 결과이고, 버스 정류장 노선안내도에서 볼 수 있는 빨간색 화살표는 지자체에서 진행한 게 아니라 한 청년의 자발적 활동의 결과입니다.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1는 무엇일까요? 우선 <1인문학>의 에피소드를 함께 나누고, 감탄만 하고 감동만 받기보다 아주 작은 행동이라도 시작하는 게 중요할 겁니다. 소설 <Pay It Forward(‘트레버라는 제목으로 출간)>와 영화 <아름다운 세상을 위하여>에서 볼 수 있듯 한 사람의 선행이 꼬리에 꼬리를 물면 처음에는 상상할 수도 없었을 아름다운 변화를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단지 소설 속 아이디어가 아닙니다. 이 책의 아이디어를 토대로 Pay It Forward Foundation이 설립되기도 했으니까요. Society파트에서 소개되는 미리내가게또한 우리나라에서 Pay It Forward를 현실로 만든 사례라 할 수 있습니다.


SNS에서 좋아요나 공감을 누르는 것도 실천이 될수는 있겠죠. 하지만 그보다는 약간 더 온기를 느낄 수 있는 1만큼의 행동을 해보는 건 어떨까요? 저도 글은 이만 줄이고, 어제보다 1만큼 따뜻한 오늘을 만들 수 있는 행동을 찾아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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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전자, 당신이 결정한다
샤론 모알렘 지음, 정경 옮김 / 김영사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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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니아 수준은 아니지만 제가 지금껏 봐 온 영화 중 많은 분들께 추천하는 영화 중 하나가 <가타카>라는 영화입니다. 애단 호크와 우마 서먼, 주드 로가 출연하는 영화로 유전자 분석·교정을 통해 맞춤형 아기를 태어나게 할 수 있는 미래 사회가 배경입니다. 그 영화 속에서 애단 호크의 운명은 심장 질환과 범죄자의 가능성을 지니고, 31살에 사망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좌절한 부모는 시험관 수정을 통해 완벽한 유전인자를 가진 그의 동생을 출산하게 되죠. 1997년에 나온 영화니 부담 없이 말씀 드리자면 에단 호크는 완벽한 유전인자를 지닌 동생은 물론이고 암울하던 자신의 운명마저 극복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번에 읽게 된 <유전자, 당신이 결정한다>를 읽는 내내 떠오른 인물이 영화 <가타카> 속 에단 호크입니다.


멘델이 그의 콩들에서 볼 수 없었던 것은 유전자가 우리에게 주는 것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우리 유전자에게 주는 것도 중요하다는 사실이다.”


질병과 인간 유전자의 묘한 관계를 다룬 <아파야 산다>의 저자이기도 한 샤론 모알렘이 이번에는 유전자는 주어진 운명이 아니다라는 흥미로운 주제를 이끌고 왔습니다. 흥미를 느꼈건 아니건 학창시절에 멘델의 유전법칙을 배웠을 겁니다. 멘델의 유전법칙에 의하면 우리가 잉태되는 순간 우리의 유전자는 결정됩니다. 저자는 우리 삶이 유전자에 의해 조형된다는 건 인정하지만, 우리의 DNA는 끊임없이 변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따라 우리의 DNA는 바뀌고 있고, 이를 통해 우리는 유전적으로 바뀔 수 있다는 거죠.



책의 첫인상은 자칫 생물학, 의학 분야의 복잡한 용어로 가득한 딱딱한 책이라 생각될 수도 있지만, 실제 사례를 기반으로 전공자가 아니더라도 충분히 이해할만한 교양서적입니다. 유전적 특성이 한 세대 내에서 변할 수 있고 심지어 다음 세대까지 전해지는가를 연구하는 후성유전학’, 우리의 행동이 유전자에 끊임없이 영향을 끼치고 있어 유전자가 발현되는 방법을 바꾸고 우리의 몸이 우리의 유전자를 이용한다는 유전적 발현’. 이렇게 두 가지 개념을 머릿속에 새겨두시면 길을 잃지 않고 유전자의 새로운 세계로 다다갈 수 있을 겁니다.


저자는 우리가 배워온 것만큼 유전자가 엄격하고 고정되어 있다면, 우리는 늘 변화하는 삶의 요구에 적응할 수 없었을 테고, 양육이 본성을 능가할 수 있으며 정말 능가하기도 한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있다고 합니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벌과 생쥐를 대상으로 한 실험결과와 스페인의 다이어트 캠프, 911테러 이후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에 시달리는 사람들, 실제 의사로 활동하며 접한 다양한 유전병 사례를 제시하며 유전자 발현을 바꾸는 후성유전학을 설명합니다. 개인적으로는 멘델이 유전법칙을 발견할 당시의 뒷이야기도 읽는 재미를 더했습니다.



완벽한 유전적 유산을 가진 사람들이라고 해도, 오랜 미사용, 노화, 건강치 못한 식습관, 호르몬 변화 등의 원인으로 우리 안에 숨겨진 구조를 형성하는 정교한 균형에 큰 혼란을 초래할 수 있다.”(101p)


저자는 우리가 하는 모든 행동은 어떤 유형으로든 유전적인 결과가 뒤따른다는 사실을 다시 떠올려보자며 음식(Chapter 5. 유전자 잘 먹이기), 약품(Chapter 6. 유전자가 하는 일과 예방의 역설), 건강보조제(Chapter 7. 편 가르기)등에서 우리 생활과 유전자와의 관계를 연결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개인별로 지니고 있는 유전자가 다른 만큼 그 유전적 구성에 맞지 않는 상황도 초래될 수 있다는 거죠. 세상에는 6천여 개가 넘는 희귀 질병들이 있고 유전병의 목록은 계속 길어지고 있다고 합니다. 유전적 발현에 따른 후성유전학도 중요하지만 우리가 물려받은 유전자 또한 무시할 수 없기에 유전학은 더욱 복잡하고 예측 불가능한 것 같습니다.



책을 읽는 동안 여러 가지 생각이 머리를 스쳤습니다. 마치 관상을 보듯 사람들의 얼굴을 보며 유전적 상태를 찾는 저자의 병적(?)인 일상은 역설적으로 측은하게 느껴지기도 했고, 최소한 생활의 불편은 느끼거나 병원에서 정기적으로 치료를 받아야 할 유전적 결함이 없이 태어나고 살아가고 있다는 점에 감사하는 마음이 강하게 들었습니다.


후성유전학에서 가장 급성장하고 있으며 가장 흥미진진한 분야는 유전력(유전 가능성)으로 어떻게 삶의 조건에서 비롯된 유전자 발현의 변화들이 다름 세대나 그 이후 모든 세대에 영향을 줄 수 있는지 연구하는 것이라고 하는데요, 후성유전학 뿐만 아니라 유전자에 대한 연구가 유토피아를 위한 방향으로 갈지 결국 디스토피아를 불러올지 모르지만 분명 이 분야의 연구와 산업 규모가 점점 증가할 거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유전자 해킹하기(Chapter 9)’의 내용을 유념해서 읽으면 도움이 될 겁니다.


하지만 역시 가장 중요한 점은 우리의 행동에 따라 유전자는 분명 변할 수 있다는 겁니다. 개인적으로는 저자의 메시지를 잘 반영해 원제목인 Inheritance를 번역했다고 생각합니다. 조사 하나가 차이날 뿐이지만 <유전자, 당신을 결정한다><유전자, 당신이 결정한다>가 주는 메시지는 아주 큰 차이가 있습니다. 아마 유전적으로 아무런 결함이 없는 사람은 없겠죠. 그리고 설령 다른 사람보다 물려받은 유전자가 약간 뛰어나다고 해서 인생 전체도 우수하리라는 법은 없습니다. 제가 영화 <가타카>를 보며 받은 느낌 그대로 유전자가 우리의 출발선을 정할 수는 있지만, 결승선을 정하는 건 결국 우리 자신이니까요.


결국 슈퍼히어로가 된다는 것은 우리가 물려받은 유전자에 달렸다기보다, 하루하루 스스로 슈퍼히어로가 되기로 선택하는 데 달린 것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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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삭임의 바다
팀 보울러 지음, 서민아 옮김 / 놀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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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버 보이>의 작가 팀 보울러의 신작입니다. 청소년소설, 성장소설 분야에서는 워낙 유명한 작가다보니 청소년이 아니더라도 소설에 관심 있는 분이라면 한 번쯤을 들어보셨을 것 같습니다. 이번 책도 역시 헤티라는 소녀를 주인공으로 한 성장소설입니다.


어느 시대인지 어느 지역인지 구체적으로 소개되지는 않지만 주인공 헤티가 살고 있는 곳은 모라라 불리는 섬입니다. 주변의 다른 섬으로 가기 위해서는 과거 모라 섬의 사람들이 힘을 합쳐 만든, 모라 섬의 자랑이라 불리는 배가 필요할 정도로 외진 섬이기도 합니다. 주위에 다른 섬은 하나도 없고 사방이 거친 바다로 둘러싸인 작고 작은 섬이죠. 그 섬에 사는 헤티는 늘 바다유리(유리병이나 깨진 유리 조각이 바다에서 오랜 세월 동안 파도와 모래에 깎여 매끈하고 영롱한 보석 같은 형태가 된 것)를 가지고 다니며 그 안에서 어떤 형상을 찾으려고 하는데요, 덕분에 사람들은 헤티를 몽상가라고 부르곤 합니다. 과거에 헤티의 부모님은 배가 침몰해 바다에 빠진 사람을 구하려다 죽음을 당하고, 헤티는 그랜디 할머니와 함께 살고 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모라 섬에 폭풍우가 몰아치면서 모라 섬의 자랑이라 불이던 배가 부서지고, 한 할머니가 섬에 도착하면서 본격적인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저는 이 책의 가장 큰 주제가 용기라고 생각합니다. 어찌된 영문인지 모르지만 헤티는 섬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퍼 노인, 그레고르 노인과는 사이가 좋지 않습니다. 여기에 섬에 도착한 할머니를 대하는 시각 차이로 그 갈등은 깊어지죠. 물론 책 속에서 일부 노인층과 헤티가 벌이는 갈등은 더 극적인 대비를 위한 장치라 생각합니다. 모라 섬에는 헤티를 지지하는 노인층도 있으니까요.


대신 저는 작가의 핵심 메시지를 헤티와 그랜디 할머니의 대화에서 찾았습니다.


그래서 모라 섬 사람들은 용감할 수밖에 없단다. 그렇게 고립된 상태가 용감하게 만든거지.”

그럼 아까 모라 섬 사람들이 겁이 많다고 하신 말씀은 무슨 뜻이에요?”

그건 다른 종류의 두려움이란다.”

그 두려움은 왜 생기는 건가요?”

같은 이유지. 고립된 상태 말이다.”


모라 섬 사람들은 고립된 상태를 극복하고 살아가기 위해 용감해 졌지만, 반대로 그로 인해 환경의 변화에 대한 두려움이 생겼다고 생각합니다. 폭풍우로 인한 모라 섬의 자랑()의 파괴, 책의 후반부를 이끌어가는 헤티의 도전은 각각 두려움과 용기에 대한 은유라는 생각이 듭니다.


약간 스포일러 역할을 하자면 이야기의 결론은 희망적으로 마무리 됩니다. 그리고 헤티의 내면에 있던 아픔도 치유됩니다. 스케일은 작지만 주인공이 작은 배에 의지해 바다에서 사투를 벌이는 부분은 <파이 이야기>가 연상되기도 하는데요, 어른들이 읽기엔 이야기의 흐름이 작위적이고 등장인물들의 성격이 평면적으로 느껴지겠지만, 주된 독자인 청소년들은 충분히 재미를 느끼는 동시에 작가가 전하는 용기와 도전의 메시지를 배울 수 있는 소설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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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정말 좋아하는 농담
김하나 지음 / 김영사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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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특한 손글씨로 적힌 제목, 여기에 우스꽝스러운 일러스트와 아이디어가 필요한 순간, 우선 농담부터 시작할까요?”라는 문장이 적힌 표지가 호기심을 무척 자극합니다. 저자 김하나는 아이디어라는 단어가 무척 필요한 카피라이터라는 직업을 본업으로 삼고 있습니다. <인문학으로 광고하다> <여덟 단어>로 잘 알려진 박웅현의 TBWA KOREA에서 활동하기도 했죠.


<내가 정말 좋아하는 농담>은 책의 첫 파트 제목이자 다섯 번째 꼭지의 제목이기도 합니다. 사실 농담의 사전적 정의는 실없이 놀리거나 장난으로 하는 말이지만, 저자가 말하는 농담은 사전에 적힌 의미보다는 진지하지 않고 가볍게, 즐겁게, 그리고 신나게 발상을 전개하자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위에서 말씀드린 표지 일러스트는 영화 <파이 이야기>의 한 장면을 그린 겁니다. 책을 읽었거나 영화를 보신 분들은 잘 아시겠지만, 파이 이야기에는 두 가지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한 가지는 벵갈 호랑이, 얼룩말, 하이에나, 오랑우탄이 나오는 이야기, 다른 하나는 사람들 사이에 벌어진 사건이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주인공 파이가 마지막에 기자에게 던지는 질문이 아주 인상적입니다.


어느 이야기가 사실인지 증명할 수도 없지요. 그래서 묻는데요, 어느 이야기가 더 마음에 드나요?”


물론 <파이 이야기>는 픽션이고 극적인 이야기지만, 우리 일상 속 많은 것들 또한 보는 시각에 따라 다르게 다가옵니다. 그리고 이 책은 저자의 직간접적인 경험을 통해 독자의 시각을 넓혀주고 아이디어를 발견하는 길로 이끕니다.


저자는 혁명적 아이디어는 결국 일상에 흩어져 있는 작은 발견에서 시작된다고 합니다. 강한 의지도 도전도 필요 없고, 단지 흩어져 있던 얕은 지식을 연결하는 것만으로 지금 그대로의 일상에 약간의 영감이, 지금 그대로의 생각의 은근한 교양이 더해질 것이라고 말합니다.



최근 <지대넓얕(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시리즈가 유행인데, 저자는 이 팟캐스트와 책이 인기를 얻기 전부터 이미 지인들과 얕은 지식모임을 했다고 합니다. 2013년 여름부터 동네 친구들끼리 일주일에 한 번씩 각자의 관심분야나 전문 분야에 대한 지식을 나누는 일종의 세미나인데요, 책 끝부분에 그동안 진행했던 주제가 나열되어 있는데 가구를 만드는 목재와 가공의 종류’, ‘프로파간다와 대중심리’, ‘클래식 재미있게 듣기’, ‘내게 어울리는 색깔 찾기’, ‘맨손으로 하는 근력운동등 결코 얕은 지식이라고 보기 힘든 것들이지만, 내용이 얕건 두껍건 사람들과의 교류와 나눔이 영감을 주는 것만은 확실합니다.


사실 아이디어, 창의력에 대한 책은 많이 출간되어 있지만 이 책은 일반적인 자기계발서와는 달리 흥미로운 에세이를 읽는 느낌입니다. 저자의 지식과 교양이 어우러진 여러 가지 에피소드를 읽다보면 일상에 흩어져 있는 작은 발견을 위한 힌트를 얻을 수 있습니다.


저자는 단골 팥빙수집이 팥빙수를 만드는 방법에서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다. 하지만 그 순서는 절대 불변의 진리가 아닐 수도 있다. 익숙한 순서를 뒤바꾸어보는 것은 때로 아주 강력한 효과를 가져온다는 통찰을 얻기도 하고, 아주 날쌘 동물이지만 대부분의 시간을 가만히 앉아 있는 고양이의 모습에서 속도는 당연하지 않다는 것. 우리는 속도를 선택할 수도 있다는 통찰을 얻습니다.


바질 페스토와 우리나라의 탑 건축 양식의 역사를 통해 우리 주위에 있는 많은 당연한 것들이 꼭 당연하지만은 않으며 재료의 변화만으로도 아이디어의 유연성을 얻을 수 있다는 점을, 저자가 살고 있는 북촌의 일상과 배구의 시간차 공격에서 상식이라고 여겨지는 것을 뒤집음으로써 얻을 수 있는 발상을 이야기합니다. 장구를 세로로 세워 드럼처럼 연주하는 구장구장이라는 악기와 전통 한옥의 들장지문 사례에서는 단순한 시도로 얻을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이야기합니다.



아이디어와 창의성. 어쩌면 우리가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는 건 아닐까요? 저자는 우리가 이미 가진 것에서 창의성이 시작된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막연히 창의성이라고 하면 세상에 없던 무언가를 짠 하고 내놓는 것을 떠올린다. 하지만 창의성은 그렇게 좁은 개념이 아니다. 훨씬 보편적이고 넓은 개념이다. 이미 가진 것을 활용하는 것. 이것이 창의성의 출발점이다. (67p)


운동 부족으로 스트레스를 받던 저자의 친구는 어느 날 퇴근시간에 충동적으로 두 정거장 일찍 내려 걸어 본 후 이를 생활화 해 스트레스도 풀리고 생각도 차분해지고, 가까운 거리는 걸어 다니는 습관이 생기며 생활도 달라졌다고 합니다. 아마 생각이 차분해지면 또 다른 발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창의성과도 연결될 겁니다.


그리고 저자는 자신의 경험도 전달합니다. 실연의 상처로 힘들던 시절, 출퇴근 시간에 염불 외듯 들었던 비틀즈의 시적인 가사가 자연스럽게 카피라이팅 공부로 연결되었다고 합니다. 누구에게나 공통적으로 주어지는 하루 24시간. 각자의 일상을 어떤 식으로 활용하느냐에 따라 창의적인 삶이 될 수도 있고 찌든 삶이 될 수도 있겠죠.



사회적인 문제를 거론하는 부분에서는 저자의 분노(읽는 입장에서도 충분히 공감)가 느껴지지만, 저자의 유머감각도 곳곳에 묻어납니다. 미국의 화가 잭슨 폴록을 다룬 부분에서는 말 그대로 빵 터졌는데요. 저만 재미있었는지 모르지만 글을 옮겨보겠습니다.


그런데 서 있던 캔버스를 바닥에 눕히자 폴록은 이제 캔버스 주위를 폴록폴록 뛰어다니면서 물감을 흩뿌릴 수 있게 되었다.”


폴록폴록이 국어사전에 나오는 말도 아니고 제가 지금껏 잭슨 폴록에게 받은 느낌은 결코 폴록폴록이 아니지만, 이 책을 읽으니 잭슨 폴록이 정말 새로운 발상을 얻은 후 그 기쁨으로 뛰어다니는 모습이 눈에 그려집니다. ‘폴짝폭짝보다는 폴록폴록이 훨씬 더 잘 어울리지 않나요?



스쳐 지나가는 것에서 의미를 발견하는 점에서 역시 작가는 작가고 카피라이터는 카피라이터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래처럼 되새김할 문장도 많이 발견할 수 있구요.


영어에 에어헤드(airhead)라는 말이 있다. 두뇌가 있어야 할 자리에 공기만 들어찬 머리, 멍청이라는 뜻이다. 우리 속어에도 머리가 비었다는 표현이 있다. 머리가 빈 것은 부정적인 뜻으로 많이 쓰인다. 하지만 분명 머리를 비워야 할 때도 있다... 신중하고 생각이 많은 것이 항상 미덕인 것은 아니다. 머리를 비우는 것도 못지않게 중요하다. (198p)


지금은 모두가 익숙하게 받아들이는 것들도 처음부터 그런 모습으로 탄생한 것은 아니다. 많은 이들의 발상과 시도가 더해지고 더해져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문득 이런 사실을 깨달을 때 타성으로 굳어 있던 우리의 내부는 좀 더 유연해진다. (56p)


창의성은 경직됨과는 친하지 않다. 유연함을 유지하는 것이야말로 새로운 아이디어를 받아들이고 끌어내는 데 가장 중요한 일이다. (131p)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이디어라고 하면 무언가를 새로 더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당연히 있어야 한다고 여기던 것들을 없앰으로써 기존과는 다르게 신선하고 새로운 것을 탄생시킬 수 있다. (188p~190p)



저자는 저와 비슷한 연배인데다 저처럼 고양이를 두 마리 키우고 있고, 비틀즈를 좋아하는 점에서 훨씬 더 호감을 느꼈고, 또 그만큼 더 즐겁게 책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예전에 읽었던 <생각의 탄생- 다빈치에서 파인먼까지 창조성을 빛낸 사람들의 13가지 생각도구>라는 책이 발상법에 대한 쉽지 않은 접근(제 입장에서는)이었다면, 이 책은 어쩌면 제가 저자의 얕은 지식모임에 번외로 참여해 대화 속에서 발상법을 자연스럽게 접한다는 느낌입니다.


출근준비를 하며 머리를 감을 때, 아무 생각 없이 걷거나 음악을 들을 때 아이디어가 떠오른 경험이 있다면, 진지하게 회의할 땐 떠오르지 않던 아이디어가 오히려 점심식사 후 직장동료들과 가벼운 대화 도중에 떠오른 경험이 있다면, 이미 <내가 정말 좋아하는 농담>을 함께 하고 있는 셈입니다.


책을 읽으며 책에서 소개된 많은 사례 외에 한 가지 더 떠오른 게 있습니다. 나이키의 공동 설립자 빌 보어먼이 개발한 와플레이서라는 운동화는 그의 아내가 와플을 굽는 걸 지켜보다가 운동화 밑창에 와플처럼 격자무늬를 집어넣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와플 기계에 고무를 부어넣어 밑창을 만들고 이를 잘라내서 아교로 신발 바닥에 붙였는데 그게 나이키 와플레이서의 원조가 되었죠.


날마다 반복되는 생활이 지겹다고 느껴진다면, 저자의 방법대로 조금은 다른 시각에서 작은 발견을 더해보는 건 어떨까요? 아이디어도 떠올릴 수 있고, 일상도 훨씬 즐거워질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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