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인 오스틴의 문장들 문장들
제인 오스틴 지음, 박명숙 옮김 / 마음산책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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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인 오스틴의 대표작이 너무 강렬해서였을까. 《오만과 편견》을 읽은 뒤 몇 년이 지나서야 제인 오스틴의 다른 작품을 읽게 되었다. 인상적인 대표작에 가려져 있었지만 그 못지 않게 즐겁게 읽었던 《이성과 감성》, 《설득》. 시간이 조금 더 흘러 제인 오스틴의 많은 작품들을 추천해주었던 소중한 제이나이트 한 분께 《제인 오스틴의 말들》에 대해 이야기를 들었고, 하루에 조금씩 읽어나갔다.


"우리는 훌륭한 문학작품이나 영화를 보면 유독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인상적인 명대사나 구절을 마음속에 담아두고 자꾸만 곱씹게 된다. 그런 말들은 대개 자생력이 강해서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글에서 글로 전해지면서 다양한 의미와 가치가 덧붙여지곤 한다."라며 제인 오스틴의 소설 속 문장들을 엮고 옮긴이는 말했다. 《제인 오스틴의 말들》을 읽으며 인상적인 명대사들을 기록해두었고, 좋은 기회로 의미와 가치를 덧붙일 시간을 갖게 되었다.


《제인 오스틴의 말들》을 읽으며 변하지 않는 인간의 고유한 감정에 대해 생각하며 신기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사람들은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울고, 웃고, 아프고, 즐거워하는구나. 그래서 200년 전 많은 팬들의 가슴을 설레게 만들었던 제인 오스틴의 문장들은 시간이 흐른 지금도 여전히 제이나이트들을 즐겁게 만든다. 그 아름다운 문장들을 이렇게 기록할 수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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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녀 사이의 끌림에는 대부분 감사하는 마음이나 허영심이 적잖이 포함돼 있기 때문에, 그대로 놔두는 건 효과적이지 않아. 언제나 시작은 자유롭게 할 수 있어. 약간의 호감은 충분히 자연스러운 거니까. 하지만 상대방으로부터 아무런 반응이 없는데도 진심으로 사랑에 빠질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어. 여자는 열에 아홉은 자신이 느끼는 것보다 더 많은 애정을 표현하는 게 좋아." 



그가 하는 말 하나하나가 더없이 적절했고, 그의 행동 하나하나마다 품위가 넘쳤다. 엘리자베스는 머릿속에 온통 그로 가득한 채 그곳을 떠났다. 



"처음에는 어떻게 시작이 된 거에요?" 그녀가 물었다. "일단 시작되고 나서는 서서히 빠져들었다는 건 알겠어요. 하지만 처음에 어떤 계기로 시작이 된거죠?"

"어떤 계기가 된 시간이나 표정이나 말을 꼭 집어서 말할 순 없어요. 너무 오래전 일이라. 하지만 사랑이 시작되었다는 걸 알기 전부터 난 이미 당신한테 푹 빠져 있었던 것 같아요." 



"정찬을 먹으러 왔을 때는 좀 더 편하게 이야기할 수도 있지 않았나요?"

"당신에 대한 사랑이 덜했다면, 그랬을 겁니다." 



"그의 마음을 알 수만 있다면, 모든 게 쉬워질 텐데." 



"다정한 마음보다 매력적인 것은 없어," 나중에 그녀는 혼잣말을 했다. "어떤 것도 그에 비할 순 없는 거야. 정감 있고 솔직한 태도에서 우러나오는 따뜻하고 다정한 마음은 세상 어떤 똑똑한 머리보다 매력적일 거야. 분명 그럴 거야." 



'이 남자는 여자들한테 지나치게 친절한 편인데 과연 한 여자와 사랑에 빠질 수 있을까?' 에마는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세상에는 사랑하는 방식이 백 가지도 더 되니까, 뭐.' 



"우리가 타고난 능력 중에서 다른 어떤 것보다 월등히 놀라운 게 있다면 그건 기억이라고 생각해요. 기억의 힘과 한계와 불균등에는 우리의 다른 어떤 지적 능력에서 보는 것보다 놀라운 불가해한 면이 있는 것 같아요. 기억은 때로는 아주 오래가고, 아주 쓸모가 있으며, 매우 고분고분하기도 하죠. 또 때로는 매우 당혹스럽고, 힘이 전혀 없기도 하고요. 하지만 또 어떤 때에는 무서운 폭군처럼 굴면서 우리의 통제를 벗어나기도 하지요! 인간은 분명 모든 면에서 기적같은 존재예요. 그중에서도 특히 기억하고 잊어버리는 능력은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경지를 넘어서는 것 같아요." 



"누군가의 방식이 다른 사람의 방식만큼 좋을 순 없겠지만, 우린 모두 자기 방식을 가장 좋아하는 것 같아요." 



"내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고, 내가 좋게 생각하는 사람은 그보다 더 적어. 세상을 알아갈수록 불만이 더 커져가. 그리고 매일매일 인간의 성격이란 게 얼마나 모순투성이인지, 겉으로 보이는 장점이나 분별력이 얼마나 믿을 수 없는 것인지를 깨닫게 돼." 



"누군가의 마음을 상하게 할 생각은 결코 없는데, 한심할 정도로 숫기가 없다 보니 종종 무심하다는 인상을 주는 것 같아요. 난 다만 타고난 어색함 때문에 표현을 잘 못하는 것뿐인데 말이죠." 



"자꾸 만나니까 나아졌다는 것은 그의 생각이나 태도가 개선되었다는 뜻이 아니에요. 그 사람을 더 잘 알게 되니까 그의 성격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었어요." 



"나에게 유쾌한 친구 몇 명만 주세요.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하고만 있게 해주세요.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하고 내가 좋아하는 곳에서 있게만 해주세요. 다른 건 아무래도 좋으니까요. 이게 내가 가장 바라는 겁니다." 



비 오는 아침이 다른 즐거움들을 빼앗아 갈 때에도 그들은 비와 진창에도 아랑곳없이 만나 방 안에 틀어박혀 함께 소설책들을 읽곤 했다. 



"좋은 사람들끼리 어울리는 것은 정말 행복한 일이에요. 그리고 좋은 사람들은 언제나 함께 어울리기 마련이죠." 



"집에 있는 것만큼 진정으로 편안한 게 없죠." 



블라슈포드 양은 꽤 상냥한 편이야. 난 사람들이 아주 상냥하지는 않았으면 좋겠어. 그래야 사람들을 아주 많이 좋아하는 불편한 일이 없을 테니까 말이야. 



언니한테는 이보다 길게 편지를 썼어야 했는데. 하지만 마땅히 그래야 하는 만큼 사람들을 대우하지 못하는 게 나의 슬픈 운명인 것 같아. 



사랑하는 에드워드, 너에게 신의 축복이 있기를. 행여 병이 나더라도, 내가 그랬던 것처럼 따뜻한 보살핌을 받고, 불안해하지 않아도 되는 축복을 누릴 수 있기를. 함께 아파해주는 사람들을 네 곁에 둘 수 있고, 감히 바라건대 세상에서 가장 커다란 축복이 너와 함께하기를. 너 스스로 그들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충분히 있다고 느끼면서 말이지. 난 그렇게 느끼지 못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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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어를 믿나요? - 2019년 볼로냐 라가치 상 오페라프리마 부문 대상 수상작 웅진 모두의 그림책 25
제시카 러브 지음, 김지은 옮김 / 웅진주니어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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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나다웠던 적이 언제였더라. 좋아하는 것을 좋아한다고 마음껏 말할 수 있었던 적이 언제였더라. 언제부터인지 타인의 시선을 신경 쓰는 일이 잦아지더니 가장 '평범한'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제는 어떤 말로 표현하기도 어려운, 그저 그런 어른이 되었다.

2019 볼로냐 라가치 상 오페라 프리마 부문 대상, 2019 에즈라 잭 키츠 상 명예상, 2019 스톤월 북 어워드 대상을 받은 《인어를 믿나요?》는 '나다움'을 잃어가는 우리들에게 뜻깊은 메시지를 던져준다. 생김새도, 원하는 것도 조금씩 다른 우리들에게.





인어를 동경하는 줄리앙은 어느 날 책에서만 보던 인어를 만나게 된다. 각기 다른 모습으로 자신들의 아름다움을 뽐내던 인어를 본 줄리앙은 이내 자신이 인어가 되는 상상에 빠진다. 긴 머리칼을 뽐내며 자유롭게 물속을 헤엄치는 줄리앙은 그 어느 때보다 밝은 미소를 짓는다.


그리고 자신이 상상했던 것처럼 인어가 되고자 한다. 무뚝뚝한 줄리앙의 할머니는 인어가 되고 싶다고 말하는 손자에게 말없이 진주 목걸이를 내민다. 줄리앙이 상상 속에서 보았던 물고기가 자신에게 건넸던 그 목걸이처럼. 할머니는 그렇게 손자의 마음을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여준다. 오색찬란한 인어들의 행진에 할머니와 함께 걷는 줄리앙의 모습은 상상 속에서보다 훨씬 빛나며 즐거워 보인다.






모두가 다른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어른으로서 아이들에게 어떤 말을 해줄 수 있을까? 인어 할머니들의 따뜻한 환대를 받으며 자유롭게 물속을 헤엄치는 줄리앙의 모습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끔 만든다. 어린이의 개성과 가능성을 사랑으로 포용할 수 있는 세상, 그리하여 '나다움'을 잃지 않고 오히려 당당히 말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 수많은 아이들이 자유 속에서 개성과 가능성을 열어갈 수 있는 세상이 되기를 바라며. 그러니까, 당신은 인어를 믿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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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영 ZERO 零 소설, 향
김사과 지음 / 작가정신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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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누군가 각별한 타인의 불행을 바란다.

각별한 타인의 불행을 커튼 삼아

자신의 방에 짙게 드리워진 불행의 그림자를 가리고자 한다.

《0 영 ZERO 零》 중에서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이 많은 지하철역. 열차를 기다리며 나는 사람들의 모습을 유심히 살펴본다. 저마다 자신의 삶, 그 목적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 그리고 그러한 사람들이 넘치는 도시. 조금이라도 느려지거나 잠시 자리에 앉아 쉬는 순간, 이 도시에서 덩그러니 놓인 나는 묘한 감정을 느낀다. 무엇인지 모를 이 경쟁에서 나는 어떤 존재가 되어가고 있는 중인가,라는 깊은 생각에 빠져 간다. 그 누구도 정확히 알 수도 없는 묘한 경쟁 심리가 있는 이 세상의 구조가 궁금해지기도 하면서.

김사과 작가의 소설 《0 영 ZERO 零》는 이 세상의 구조를 독특한 표현으로 보여준다. "잡아먹히지 않으려면 부지런히 머리를 굴리고, 몸을 움직여야 한다."라는 자연의 약육강식의 세계를 연상케하는 생각이 소설 전반을 통과하며, 김사과 작가는 그 중심의 한 인물을 조명한다. 아주 은밀하게 자신의 주변 사람들을 조심스레 학살해가는 '나'라는 인물을.

다시 말해, 나는 선생님이 주는 것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닌, 나 스스로, 나의 삶 속에서 적극적으로 내가 원하는 것을 찾아 헤매는 인간이다.

정말이지 올바른 인간상이 아닐 수 없다.

박세영은 나의 이런 노력에 대한 최초의 보답이었다.

그 애는 바보같이도 나를 믿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꽤 오랜 시간 그 애는 나를 믿을 것이다. 이십 대 초반 가장 창창한 시기를 그녀는 이상한 미로 속에서 돌고, 돌고, 또 돌다가……. 《0 영 ZERO 零》 p. 66

소설은 주인공인 '나'가 4년 남짓 사귄 남자친구 성연우와 헤어지는 것으로 시작된다. 드문드문 자리가 채워진 카페에서 헤어짐을 이야기하는 남자친구 앞에서 '나'는 사람들의 행동들을 상상한다. 핸드폰과 노트북에 고개를 숙이고 있지만 자신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을 것이라고. 특히 방금 자신들을 관찰하기 위해 적합한 자리에 앉은 롱코트를 입은 남자가. 모든 이야기가 끝난 남자친구가 자리를 떠나고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가게를 빠져나오며 자신이 완벽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자신의 주변에 있던 사람들을 회상한다. 그들이 모르던 사이, 조금씩 그들의 삶을 갉아냈던 자신의 행동에 심취하며.

롱코트 남자는 몸을 살짝 숙인 채 핸드폰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그것은 물론 우리를 관찰하는 티를 내지 않기 위한 위장이다. 다시 말해, 그는 자신이 나와 성연우를 멀리서 안전하게 관망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즉, 자신이 우리들에 비해 상대적인 우위를 점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왜? 굳이 아침부터 스타벅스에 와서 생판 모르는 여자와 남자의 찌질한 이별 상황을 훔쳐보는 것일까? 《0 영 ZERO 零》 p. 15

김사과 작가는 위트가 섞여있는 냉소적인 문체를 보여주며 독자들을 소설 속으로 빠르게 끌어당긴다. 무엇보다도 독자들이 소설을 읽는 순간에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든 간에, 자신의 일상 어느 부분에서는 충분히 일어나고 있을 것 같은 느낌을 자아내는 배경 묘사는 《0 영 ZERO 零》에 더욱 빠져들게 만든다. 아니, 어쩌면 정말 일어나고 있을 지도 모르고.

《0 영 ZERO 零》은 '나'라는 인물이 어떤 생각을 가지며 살아왔는지 주변 사람들과의 일화를 하나씩 꺼내 보여준다. 그러나 한 명의 인물이 그녀의 곁을 스쳐 지나가는 순간, 그녀가 가진 그에 대한 생각, 그리고 그를 향한 행동 하나하나는 왠지 모를 서늘함에 휩싸이게 된다. 곁에 놓인 타인들의 삶을 조금씩 잠식시켜버리며 그것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당연한 이치라고 생각하는 '나'를 보며 두려워지기도 했다.

인상적으로 아름다웠던 그 계절 나는 인간과 삶에 대한 나만의 이론을 정립했다. 거창하게 말했지만 별거 아니다. 그건 내 안에 떠다니던 공기를 선명하게 한 것에 불과함.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간단하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식인하는 종족이다. 일단 그것을 인정해야 한다. 윤리와 감정에 앞서서 현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무슨 말인고 하니, 세상은 먹고 먹히는 게임이라는 것이다. 내가 너를 잡아먹지 않으면, 네가 나를 통째로 집어 삼킨다. 조심하고, 또 경계하라. 《0 영 ZERO 零》 p. 46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다', '도태되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 등 수많은 채찍질이 난무하는 이 세상에서 우리가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은 내 옆의 누군가를 밟고 올라서야 한다는 사실. 그들을 먼저 밟고 올라서지 않으면 오히려 내가 그들의 밑에 놓이게 된다는, 아주 오래전부터 이 도시의 사람들에게 자비 없는 이 무시한 구조를 김사과 작가는 이렇게 한 사람으로 하여금 보여준다. 소설의 끝에 남은 씁쓸함이 마음 한편을 불편하게 만들면서도, 아이러니하게도 '나'를 부정적인 시선으로만 바라볼 수는 없었다. 우리 모두는, 때로 자신만을 생각하며 누군가에게 한없이 잔인하게 구는 경향이 있으니까.



하여, 세간의 소문과 달리 인생에 교훈 따위 없다는 것. 인생은 교훈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다는 것을 안다.

그렇다면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가?

0. 제로.

없다.

아무것도 없다.

지금 내가 응시하는 이 텅 빈 허공처럼 완벽하게 깨끗하게 텅 비어 있다.

《0 영 ZERO 零》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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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할 땐, 책 - 떠나기 전, 언제나처럼 그곳의 책을 읽는다
김남희 지음 / 수오서재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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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여행과 일상의 중간 지대로 나를 데려간다. 온통 낯선 것들 사이에서 익숙한 언어를 따라가는 그 시간, 조금씩 긴장이 풀리고 편안해진다. 어디로든 여행을 떠날 수 있는 것처럼 어디에서든 책을 읽을 수 있다. 그렇게 나는 책과 함께 여행을 시작하고 책과 함께 여행을 마친다. 멀리 갈 수 없을 때도 나는 책을 읽고, 멀리 떠나가서도 나는 책을 읽는다. 여행을 할 때면 외로움조차 벗이 되듯이 책을 읽는 한 나는 혼자가 아니다.



여행을 떠나기 앞서 짐을 챙긴다. 어떤 옷을 입을까, 선크림은 제대로 챙겼나, 이것 저것 넣다보면 가방은 어느새 두둑해져 있다. 확인을 거듭하고나서야 지루한 이동시간을 채워 줄 책을 골라본다. 여행에 앞서 책을 고르는 기준은 단 두 가지, 즐거운 여행에 밀려 짐이 되지 않도록 재밌을 것, 그리고 혹여나 짐이 된다면 힘들지 않도록 가벼울 것.


여행과 책, 둘 다 좋아하는 나는 《여행할 땐, 책》의 제목만으로도 설렜다. 좋아하는 것들을 한번의 기회로 만끽할 수 있다니. 책도, 여행도 자신에게 더 넓은 세상을 열어준다는 공통점으로 김남희 작가는 그동안 자신이 읽었던 책, 그리고 그 세계가 맞닿아 있는 여행지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낸다. 담담하고 차분히, 그 이야기를 읽다보니 버킷리스트를 하나씩 추가하는 내 모습을 발견했다. 나는 왜 그동안 책은 책대로, 여행지는 여행지대로 즐겼을까. 좋아하는 것들을 한번에 즐길 수는 없었던 걸까.



때로는 한 권의 책이 나를 여행으로 이끌기도 한다. 소설 한 구절에 마음이 빼앗겨 충동적으로 여행 가방을 꾸리는 나는 그 누구보다 사치스러운 사람이 된다. 어떤 소설의 중요한 공간이었던 거리를 내 발로 걸어다닐 때, 소설의 주인공이 팔던 음료를 마시겠다고 쇠락한 도시의 오래된 카페를 찾아갈 때, 매혹적인 남자 주인공이 32년간 갇혀 있던 호텔에 하룻밤을 머물게 될 때, 나는 세상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에 휩싸이곤 한다.



김남희 작가가 머문 한 곳의 여행지는 자연스럽게 그녀가 읽은 책으로 이어진다. 그녀에게 그곳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그녀의 경험과 책에 담긴 이야기로 조화롭게 써 내려간다. 그리고 그것을 독자들은 또 다시 이 책을 세상을 여는 매개체로 받아들인다. 이 흥미롭고도 즐거운 순환 속에서 나는 내가 놓쳤던 것들을 하나씩 되새기고, 또 새로운 것들을 적어 내려갔다.


마쓰이에 마사시의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를 워낙 인상깊게 읽은 터라 가루이자와 여행기에 유독 오래 머물렀다. 정처없이 걷다가 마음에 드는 장소를 발견하게 되면 그저 발을 멈춰 유심히 주변을 살펴보는 것처럼. 여름의 새벽이 가지는 청량함과 동시에 안개의 묵직함을 느낄 수 있는 곳이 소설 밖에 있었다니! 아침이 되면 창문을 열어 숲의 고요를 고스란히 느꼈던 주인공의 기분을 만끽할 수 있다는 사실이 이렇게나 반가울 수가 없었다.(그래서 조용히 버킷리스트에 작성했다, 이 곳에 한번 가보자고.)



10월의 가루이자와는 고즈넉했다. 고도 천 미터가 넘는 고원의 바람은 서늘했고, 공기는 까슬까슬했다. 나는 얇은 카디건의 단추를 채우고 어둑해진 거리를 걸었다. 해가 진 지 한 시간 남짓인데 거리는 텅 비어 있었다. 여름이 오래전에 지나간 10월의 중순이니 그럴 만도 했다.



이밖에도 그리스의 이드라 섬에서 "원래도 고요한 섬이 마법에라도 걸린 듯 더 고요해지는 시간이었다. 그 시간이 되면 고양이도 사람도 최선을 다해 잔다." 는 풍경을 조용하고 나른하게, 그래서 조금은 나태한 기분으로 바라보고 싶었고 "요구르트와 푸딩의 중간 식감에 살짝 텁텁한 첫맛과 달콤한 끝 맛, 계피와 설탕이 뒤섞인 보자"의 맛이 궁금해 터키의 이스탄불을 가보고 싶어졌다. "신분도 국적도 직업도 다른 이들이 제각각의 사연으로 이곳을 찾아오지만 이곳에서는 단 하나의 이름으로 불릴 뿐이었다. 순례자." 그 모든 걸 훌훌 털고 '나'를 찾는 여정을 해보고 싶어 산티아고에 대한 열망이 솟았다.


《여행할 땐, 책》을 읽으며 앞으로 내가 하고 싶은 여행의 길을 새롭게 정리하는 시간을 가졌다. 가슴에 와닿는 책을 만나고, 그 즐거움을 만끽했다면, 그리고 책 속의 그 사람이 보고 느꼈던 것들을 직접 느껴보고 싶다면 한번쯤은 반드시 실행해 볼 것. 새로운 세상으로의 발을 스스로 내딛어 볼 것. 이 모든 것을 정리하고 나니 그 어느 때보다 여행에 대한 간절함이 찾아왔다. 이 간절함을 해소할 방법이 없어 그저 조용히 또 다른 책을 집어든다.



이제 여행은 어디로 가느냐는 장소의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하느냐의 문제가 아닐까. 여행이 매혹적인 이유는 여행이 우리를 어디로 데려갈지 아무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마치 인생이 그러하듯. 낯선 곳에서 어떤 만남을 통해 얼마나 변화하게 될지 전혀 모르는 채로 우리는 여행을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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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급생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민경욱 옮김 / ㈜소미미디어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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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급생》은 두 번째로 만난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이었다. 오랜만에 책을 다시 읽기 시작했을 때, 그러니까 책의 매력을 또 한번 느끼기 시작하면서 나는 오래 전 내가 히가시노 게이고 작품에 빠졌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빠른 사건 전개로 인한 높은 흡입력으로 그의 작품에 매혹되어 《방과 후》, 《동급생》을 눈여겨 보고 있었던 차에 후자를 택했다.처음 읽었던 그의 작품이 너무 강렬했던 터라 그보다 감흥은 덜했지만 그럼에도 흥미로운 전개 방식이 인상에 남았다. 그 사이에 많은 책들을 읽은 터라 내용이 헷갈릴 즈음 이전과는 다른 산뜻한 새 표지의 《동급생》을 다시 만나게 되었다.


앞머리를 내린 두 명의 소년, 소녀가 인상 깊었던 기존의 표지와는 달리 리커버된 《동급생》은 소설의 내용을 더 반영하여 담아낸다. 소설 속 사건이 해결되면서 독자들은 자연스레 표지 속 붕대 감긴 손목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충분히 느낄 수 있다. 이 모든 것이 이 사건을 이끌어 나가는 주인공 니시하라의 마음을 위한 것이니까. 히가시노 게이고는 냉철하면서도 여동생에게는 한없이 다정한 남고생을 매력적으로 그려내며 독자들을 사건 속으로 끌어 당긴다.



하루미의 불행은 단순한 우연의 산물이 아니었다. 그녀는 욕심 많은 인간들의, 추악한 싸움의 희생양에 불과헸다. 그것을 알았을 때 나는 결심했다. 그 녀석들을 절대로 용서하지 않겠다고, 그러고 언젠가 꼭 복수하겠다. 하루미의 앞에 무릎을 꿇게 만들겠다―.



사건은 한 여학생이 교통사고를 당하며 시작된다. 니시하라는 자신이 주장으로 있는 야구부의 매니저인 유키코가 사고로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히로코를 통해 유키코가 임신한 상태였다는 것을 알게 된 니시하라는 자신이 아이의 아버지임을 확신한다. 니시하라는 유키코의 죽음에 대한 의문을 떨칠 수 없어 사건을 파헤치기로 한다. 유키코가 교통사고를 당하던 날, 학생부 지도 교사 미사키가 그녀를 쫓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그녀의 죽음이 학교와 관련 있다는 의심을 하게 된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미사키 선생이 학교에서 시체로 발견되고, 유력한 용의자로 니시하라가 지목된다. 과연, 학교를 둘러싼 끔찍한 두 사건의 진실을 무엇일까?



그게 트릭이야. 이대로 지금 사건이 매스컴에서 다뤄지면 아무래도 학교 측의 학생지도방침이 문제시돼. 그런데 먼저 야구부 출장 사퇴라는 방법을 쓰면 사고 책임이 야구부 측에 있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지. 즉 학생의 불순한 이성교제 쪽으로 세상의 눈을 호도하는 게 목적이야.



《동급생》을 통해 히가시노 게이고는 교육 현장에서의 문제점을 지적한다. 교사와 학생이라는 관계 속에서 애정이 결핍되어 있는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유키코의 죽음과 얽힌 사건들이 연달아 발생하자 학교 측에서는 이 사건을 최대한 조용히 넘어가고자 한다. 유키코의 죽음을 애도하는 모습은커녕 그녀의 죽음으로 인한 학교의 소란과 논란이 하루 빨리 사그라들기를 바라며 그 누구도 걱정하는 태도를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학생들을 통제하려고 억압하려는 모습이랄까.


그러다보니 니시하라와 그의 친구들이 학생부 교사들로부터 받는 제재는 굉장히 크게 그려진다. 아이들의 마음을 들여다 볼 노력조차 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에게 잘못을 강조하며 조용히 할 것을 권하는 교사들의 모습들은 교육 시스템에 대한 문제를 다시 한번 생각하도록 만든다. 그리고 그 시스템 속에서 학생과 교사, 모두가 서로를 존중하지 않는 듯한 모습은 소설을 읽는 내내 어딘가 불편하게끔 만든다. 잘못된 교육 시스템 속에서 함께 상처받은 사람들로서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할 수는 없었던 것인지. 그저 대립하는 두 관계가 조금은 마음 아프게 느껴졌다.



생각해보면 우리 학생들은 선생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인권 무시라고 할 정도로 교사들은 학생들의 사생활을 침해하지만 이쪽에서는 상대는 전혀 볼 수 없다. 그런 구조인 것이다.

그 구조를 부숴버리겠다고 나는 생각했다.



그래서 사실 소설의 결말이 그리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이 구조에 대해 어떠한 해결책도 남기지 않는다. 흥미를 위한 추리소설이기 때문에 더욱 그럴지도 모르겠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소설의 결말은 다소 엉뚱한 곳으로 흘러가게 된다. 결국 아이들을 생각하지 않은 어른들의 탐욕을, 히가시노 게이고는 니시하라를 통해 다시 한번 조명시키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뒤바꿀 것 같은 느낌을 자아내지는 않는다. 반전 있는 결말이긴 했지만 시원하게 느껴지지 않았던 것은 아마 그 이유에서가 아닐까. 


그럼에도 고등학생에게 비극적인 결말은 어울리지 않으니 어쩌면 《동급생》은 최선의 결말을 택했을 지도 모른다. 여전히 자신의 꿈을 위해 나아가는 고등학생의 희망적인 모습을.



"니시하라, 여동생에게 시합을 보여주고 싶다고 했잖아. 그게 자신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라고. 그 꿈이 무너지지 않도록 어떻게든 막는 일은 지금의 내가 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 그러면 니시하라에게도 인정을 받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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