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영 ZERO 零 소설, 향
김사과 지음 / 작가정신 / 2019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사람들은 누군가 각별한 타인의 불행을 바란다.

각별한 타인의 불행을 커튼 삼아

자신의 방에 짙게 드리워진 불행의 그림자를 가리고자 한다.

《0 영 ZERO 零》 중에서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이 많은 지하철역. 열차를 기다리며 나는 사람들의 모습을 유심히 살펴본다. 저마다 자신의 삶, 그 목적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 그리고 그러한 사람들이 넘치는 도시. 조금이라도 느려지거나 잠시 자리에 앉아 쉬는 순간, 이 도시에서 덩그러니 놓인 나는 묘한 감정을 느낀다. 무엇인지 모를 이 경쟁에서 나는 어떤 존재가 되어가고 있는 중인가,라는 깊은 생각에 빠져 간다. 그 누구도 정확히 알 수도 없는 묘한 경쟁 심리가 있는 이 세상의 구조가 궁금해지기도 하면서.

김사과 작가의 소설 《0 영 ZERO 零》는 이 세상의 구조를 독특한 표현으로 보여준다. "잡아먹히지 않으려면 부지런히 머리를 굴리고, 몸을 움직여야 한다."라는 자연의 약육강식의 세계를 연상케하는 생각이 소설 전반을 통과하며, 김사과 작가는 그 중심의 한 인물을 조명한다. 아주 은밀하게 자신의 주변 사람들을 조심스레 학살해가는 '나'라는 인물을.

다시 말해, 나는 선생님이 주는 것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닌, 나 스스로, 나의 삶 속에서 적극적으로 내가 원하는 것을 찾아 헤매는 인간이다.

정말이지 올바른 인간상이 아닐 수 없다.

박세영은 나의 이런 노력에 대한 최초의 보답이었다.

그 애는 바보같이도 나를 믿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꽤 오랜 시간 그 애는 나를 믿을 것이다. 이십 대 초반 가장 창창한 시기를 그녀는 이상한 미로 속에서 돌고, 돌고, 또 돌다가……. 《0 영 ZERO 零》 p. 66

소설은 주인공인 '나'가 4년 남짓 사귄 남자친구 성연우와 헤어지는 것으로 시작된다. 드문드문 자리가 채워진 카페에서 헤어짐을 이야기하는 남자친구 앞에서 '나'는 사람들의 행동들을 상상한다. 핸드폰과 노트북에 고개를 숙이고 있지만 자신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을 것이라고. 특히 방금 자신들을 관찰하기 위해 적합한 자리에 앉은 롱코트를 입은 남자가. 모든 이야기가 끝난 남자친구가 자리를 떠나고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가게를 빠져나오며 자신이 완벽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자신의 주변에 있던 사람들을 회상한다. 그들이 모르던 사이, 조금씩 그들의 삶을 갉아냈던 자신의 행동에 심취하며.

롱코트 남자는 몸을 살짝 숙인 채 핸드폰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그것은 물론 우리를 관찰하는 티를 내지 않기 위한 위장이다. 다시 말해, 그는 자신이 나와 성연우를 멀리서 안전하게 관망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즉, 자신이 우리들에 비해 상대적인 우위를 점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왜? 굳이 아침부터 스타벅스에 와서 생판 모르는 여자와 남자의 찌질한 이별 상황을 훔쳐보는 것일까? 《0 영 ZERO 零》 p. 15

김사과 작가는 위트가 섞여있는 냉소적인 문체를 보여주며 독자들을 소설 속으로 빠르게 끌어당긴다. 무엇보다도 독자들이 소설을 읽는 순간에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든 간에, 자신의 일상 어느 부분에서는 충분히 일어나고 있을 것 같은 느낌을 자아내는 배경 묘사는 《0 영 ZERO 零》에 더욱 빠져들게 만든다. 아니, 어쩌면 정말 일어나고 있을 지도 모르고.

《0 영 ZERO 零》은 '나'라는 인물이 어떤 생각을 가지며 살아왔는지 주변 사람들과의 일화를 하나씩 꺼내 보여준다. 그러나 한 명의 인물이 그녀의 곁을 스쳐 지나가는 순간, 그녀가 가진 그에 대한 생각, 그리고 그를 향한 행동 하나하나는 왠지 모를 서늘함에 휩싸이게 된다. 곁에 놓인 타인들의 삶을 조금씩 잠식시켜버리며 그것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당연한 이치라고 생각하는 '나'를 보며 두려워지기도 했다.

인상적으로 아름다웠던 그 계절 나는 인간과 삶에 대한 나만의 이론을 정립했다. 거창하게 말했지만 별거 아니다. 그건 내 안에 떠다니던 공기를 선명하게 한 것에 불과함.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간단하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식인하는 종족이다. 일단 그것을 인정해야 한다. 윤리와 감정에 앞서서 현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무슨 말인고 하니, 세상은 먹고 먹히는 게임이라는 것이다. 내가 너를 잡아먹지 않으면, 네가 나를 통째로 집어 삼킨다. 조심하고, 또 경계하라. 《0 영 ZERO 零》 p. 46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다', '도태되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 등 수많은 채찍질이 난무하는 이 세상에서 우리가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은 내 옆의 누군가를 밟고 올라서야 한다는 사실. 그들을 먼저 밟고 올라서지 않으면 오히려 내가 그들의 밑에 놓이게 된다는, 아주 오래전부터 이 도시의 사람들에게 자비 없는 이 무시한 구조를 김사과 작가는 이렇게 한 사람으로 하여금 보여준다. 소설의 끝에 남은 씁쓸함이 마음 한편을 불편하게 만들면서도, 아이러니하게도 '나'를 부정적인 시선으로만 바라볼 수는 없었다. 우리 모두는, 때로 자신만을 생각하며 누군가에게 한없이 잔인하게 구는 경향이 있으니까.



하여, 세간의 소문과 달리 인생에 교훈 따위 없다는 것. 인생은 교훈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다는 것을 안다.

그렇다면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가?

0. 제로.

없다.

아무것도 없다.

지금 내가 응시하는 이 텅 빈 허공처럼 완벽하게 깨끗하게 텅 비어 있다.

《0 영 ZERO 零》 중에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