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할 땐, 책 - 떠나기 전, 언제나처럼 그곳의 책을 읽는다
김남희 지음 / 수오서재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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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여행과 일상의 중간 지대로 나를 데려간다. 온통 낯선 것들 사이에서 익숙한 언어를 따라가는 그 시간, 조금씩 긴장이 풀리고 편안해진다. 어디로든 여행을 떠날 수 있는 것처럼 어디에서든 책을 읽을 수 있다. 그렇게 나는 책과 함께 여행을 시작하고 책과 함께 여행을 마친다. 멀리 갈 수 없을 때도 나는 책을 읽고, 멀리 떠나가서도 나는 책을 읽는다. 여행을 할 때면 외로움조차 벗이 되듯이 책을 읽는 한 나는 혼자가 아니다.



여행을 떠나기 앞서 짐을 챙긴다. 어떤 옷을 입을까, 선크림은 제대로 챙겼나, 이것 저것 넣다보면 가방은 어느새 두둑해져 있다. 확인을 거듭하고나서야 지루한 이동시간을 채워 줄 책을 골라본다. 여행에 앞서 책을 고르는 기준은 단 두 가지, 즐거운 여행에 밀려 짐이 되지 않도록 재밌을 것, 그리고 혹여나 짐이 된다면 힘들지 않도록 가벼울 것.


여행과 책, 둘 다 좋아하는 나는 《여행할 땐, 책》의 제목만으로도 설렜다. 좋아하는 것들을 한번의 기회로 만끽할 수 있다니. 책도, 여행도 자신에게 더 넓은 세상을 열어준다는 공통점으로 김남희 작가는 그동안 자신이 읽었던 책, 그리고 그 세계가 맞닿아 있는 여행지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낸다. 담담하고 차분히, 그 이야기를 읽다보니 버킷리스트를 하나씩 추가하는 내 모습을 발견했다. 나는 왜 그동안 책은 책대로, 여행지는 여행지대로 즐겼을까. 좋아하는 것들을 한번에 즐길 수는 없었던 걸까.



때로는 한 권의 책이 나를 여행으로 이끌기도 한다. 소설 한 구절에 마음이 빼앗겨 충동적으로 여행 가방을 꾸리는 나는 그 누구보다 사치스러운 사람이 된다. 어떤 소설의 중요한 공간이었던 거리를 내 발로 걸어다닐 때, 소설의 주인공이 팔던 음료를 마시겠다고 쇠락한 도시의 오래된 카페를 찾아갈 때, 매혹적인 남자 주인공이 32년간 갇혀 있던 호텔에 하룻밤을 머물게 될 때, 나는 세상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에 휩싸이곤 한다.



김남희 작가가 머문 한 곳의 여행지는 자연스럽게 그녀가 읽은 책으로 이어진다. 그녀에게 그곳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그녀의 경험과 책에 담긴 이야기로 조화롭게 써 내려간다. 그리고 그것을 독자들은 또 다시 이 책을 세상을 여는 매개체로 받아들인다. 이 흥미롭고도 즐거운 순환 속에서 나는 내가 놓쳤던 것들을 하나씩 되새기고, 또 새로운 것들을 적어 내려갔다.


마쓰이에 마사시의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를 워낙 인상깊게 읽은 터라 가루이자와 여행기에 유독 오래 머물렀다. 정처없이 걷다가 마음에 드는 장소를 발견하게 되면 그저 발을 멈춰 유심히 주변을 살펴보는 것처럼. 여름의 새벽이 가지는 청량함과 동시에 안개의 묵직함을 느낄 수 있는 곳이 소설 밖에 있었다니! 아침이 되면 창문을 열어 숲의 고요를 고스란히 느꼈던 주인공의 기분을 만끽할 수 있다는 사실이 이렇게나 반가울 수가 없었다.(그래서 조용히 버킷리스트에 작성했다, 이 곳에 한번 가보자고.)



10월의 가루이자와는 고즈넉했다. 고도 천 미터가 넘는 고원의 바람은 서늘했고, 공기는 까슬까슬했다. 나는 얇은 카디건의 단추를 채우고 어둑해진 거리를 걸었다. 해가 진 지 한 시간 남짓인데 거리는 텅 비어 있었다. 여름이 오래전에 지나간 10월의 중순이니 그럴 만도 했다.



이밖에도 그리스의 이드라 섬에서 "원래도 고요한 섬이 마법에라도 걸린 듯 더 고요해지는 시간이었다. 그 시간이 되면 고양이도 사람도 최선을 다해 잔다." 는 풍경을 조용하고 나른하게, 그래서 조금은 나태한 기분으로 바라보고 싶었고 "요구르트와 푸딩의 중간 식감에 살짝 텁텁한 첫맛과 달콤한 끝 맛, 계피와 설탕이 뒤섞인 보자"의 맛이 궁금해 터키의 이스탄불을 가보고 싶어졌다. "신분도 국적도 직업도 다른 이들이 제각각의 사연으로 이곳을 찾아오지만 이곳에서는 단 하나의 이름으로 불릴 뿐이었다. 순례자." 그 모든 걸 훌훌 털고 '나'를 찾는 여정을 해보고 싶어 산티아고에 대한 열망이 솟았다.


《여행할 땐, 책》을 읽으며 앞으로 내가 하고 싶은 여행의 길을 새롭게 정리하는 시간을 가졌다. 가슴에 와닿는 책을 만나고, 그 즐거움을 만끽했다면, 그리고 책 속의 그 사람이 보고 느꼈던 것들을 직접 느껴보고 싶다면 한번쯤은 반드시 실행해 볼 것. 새로운 세상으로의 발을 스스로 내딛어 볼 것. 이 모든 것을 정리하고 나니 그 어느 때보다 여행에 대한 간절함이 찾아왔다. 이 간절함을 해소할 방법이 없어 그저 조용히 또 다른 책을 집어든다.



이제 여행은 어디로 가느냐는 장소의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하느냐의 문제가 아닐까. 여행이 매혹적인 이유는 여행이 우리를 어디로 데려갈지 아무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마치 인생이 그러하듯. 낯선 곳에서 어떤 만남을 통해 얼마나 변화하게 될지 전혀 모르는 채로 우리는 여행을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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