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해, 여름 손님 (반양장)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안드레 애치먼 지음, 정지현 옮김 / 잔(도서출판)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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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이 남기는 흔적은 매우 진하다. 미지의 것으로부터 오는 그 강렬한 느낌은, 우리를 좀처럼 주체할 수 없게 만든다. 몸속 깊은 곳에서부터 생겨난 욕망은 그것을 온전한 내 것으로 만들고 싶어 한다. 처음이라는 특성이 주는 경험은 너무도 강렬하다. 사랑은 그 자체로도 열정적이다.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상대방에 대한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하고, 서로에게 서로를 인식시키고자 하는 행동들을 하게 만든다. 사랑을 통해 서로 다른 두 사람이 하나가 되고자 한다. 이 모든 과정을 처음 겪게 된다면 어떨까? 첫사랑은 뜨거운 열병처럼 다가오고, 그 흔적도 깊게 남는다.
​  영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의 원작 소설인 ≪그해, 여름 손님≫은 첫사랑의 열병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첫사랑에 빠진 엘리오의 모습은 우리 모두가 한 번씩은 경험했던 첫사랑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처음 사랑에 빠진 우리가 머릿속에 오로지 그 사람으로 가득 채웠던 그 순간을 말이다.

  그의 목소리에 담긴 격정적인 숨 막힘을 간직하고 싶었다. 며칠 동안이나 여운이 남았다. 앞으로 매일 밤 꿈에서 그런 그를 만날 수 있다면 나머지는 어찌 돼도 좋으니 평생 꿈만 꾸고 싶었다. (p.137)

​  작곡가 지망생인 엘리오는 매년 여름을 별장에서 지낸다. 여름마다 엘리오의 부모님은 책 출간을 앞둔두고 원고를 손봐야 하는 학자들을 손님으로 받았는데, 그 해 여름 엘리오의 여름을 강하게 만들어 줄 손님이 머물게 된다. '나중에요!'를 외치며 택시에서 내리는 파란색 셔츠를 입은 올리버는 엘리오의 머릿속에 깊게 각인된다. 엘리오는 강렬한 햇살 아래서 일광욕을 하며 독서하고 테니스를 치는 올리버의 모습에 서서히 빠져들어간다. 누구에게나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올리버에게 엘리오는 자신을 보여주고자 한다. 그 강렬한 햇살 아래의 여름, 두 사람은 서로에게 물들어가기 시작한다.


 

네 이름으로 나를 불러 줘.
내 이름으로 너를 부를게. ​

 

 사랑을 하면, 우리는 강렬한 이끌림으로 서로를 끌어당기고 서로에게 자신의 색으로 물들인다. 동성애를 다룬 퀴어 영화 <가장 따뜻한 색, 블루>에서 두 주인공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영화를 본 사람들은 '둘 사이의 벽을 넘지 못한 사랑을 그렸지만, 그 벽이 결코 동성애는 아니다', '내 얘기일리가 없는데 내 얘기 같은 기묘한 공감이 되는 영화'라는 말을 했다. 그리고 나도 그렇게 느꼈다. 왜 우리는 사랑은 남녀가 만나 이루는 것이라고만 생각하는지에 대해 영화 <가장 따뜻한 색, 블루>와 소설 ≪그해, 여름 손님≫은 질문하고 또 질문한다. 당신은 왜 사랑을 한 가지로만 생각하느냐고.
​  올리버를 바라보는 엘리오의 눈은 여느 첫사랑에 빠진 소녀와 다를 게 없었다. 그에 대한 생각으로 하루를 채우고, 문득 떠오르는 그의 잔상으로 주체할 수 없는 마음을 보여준다. 나를 한번 더 보이기 위해 그의 눈길을 끌기 위한 질투심 유발 행동도 보여준다. 어쩌면, 엘리오의 행동이 소녀처럼 보인다는 생각조차 나는 사랑을 한 가지로만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오로지 그들의 사랑을 어떤 정해진 틀에 끼워 맞추지도, 한 면만 바라보지도 않는 유일한 인물은 엘리오의 아버지뿐이다.

  두 남자가 아니라 그저 두 인간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순간에 평등함이 느껴진다는 사실이 좋았다. 그저 나이가 더 적고  더 많은 두 사람이 인간 대 인간, 남자 대 남자, 유대인 대 유대인으로 존재한다는 느낌이 좋았다. (p.165)

  강렬한 햇빛 아래 반짝이던 엘리오의 첫사랑은 여름의 끝과 함께 한다. 길다면 길다고 할 수도, 짧다면 짧을 수도 있던 첫사랑의 열병은 그렇게 서서히 멎어 들어간다. 그 열병 속에서 엘리오는 조금씩 성장해간다. 열병의 흔적으로 깊이 남아버린 흉터는 그의 마음속에 고스란히 자리 잡는다. 모든 사랑이 그렇듯이, 사랑이 끝난 후에 우리는 이전보다 조금 더 강해지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사랑으로 인해 받았던 상처들에 익숙해지고 무뎌지다 보면, 결국 우리의 마음이 조금은 단단해져 있음을 알게 된다. 사랑의 열병은 많은 것을 남기고 간다. 열병이 남긴 흉터로, 우리는 조금 더 성숙해진다는 것을 엘리오를 통해 느낄 수 있다.

  당신이 전부 다 기억한다면, 정말로 나와 같다면 내일 떠나기 전에, 택시 문을 닫기 전에, 이미 모두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이 삶에 더 이상 할 말이 남아 있지 않을 때, 장난으로도 좋고 나중에 불현듯 생각나서라도 좋아요, 나에게는 큰 의미가 있을 테니까, 나를 돌아보고 얼굴을 보고 나를 당신의 이름으로 불러 줘요. (p.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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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한 캘리포니아의 하루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리차드 브라우티건 지음, 김성곤 옮김 / 비채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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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일 아침 꽉 막힌 고속도로 위 버스 안에서, 문이 열리자마자 발 디딜 틈 없이 사람들로 꽉 찬 지하철에 발을 들이면서, 나는 생각했다. 무엇을 위해 우리는 이렇게 바쁘게 하루를 시작해야 하는지. 바쁘게 돌아가는 도심에서 하루를 시작하기도 전에 지쳐버린 나는 때로는 조용하고 평온한 곳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알람 소리에 강제로 일어나는 것이 아닌 창문으로 햇살이 비치면 서서히 눈이 떠지는 아침을 맞이하는 삶. 아침을 거르거나 인스턴트로 대충 끼니를 때우는 것이 아닌 건강한 아침 밥상을 차려 여유롭게 꼭꼭 씹어 먹는 삶. 그리고 다급하게 모니터 앞에 앉아 꽉 찬 하루의 스케줄을 확인하는 것이 아닌 오전 대부분을 햇빛의 따뜻함을 느끼며 한적한 길을 거니는 삶. 그러나 우리는 무엇 때문에 이 모든 것을 포기해야 되는지 알지 못한 채 바쁘게 살아가고 있다.
  ≪완벽한 캘리포니아의 하루≫는 제목부터 자유로운 느낌을 자아낸다. 햇빛이 쨍쨍 내리쬐는 캘리포니아에서 한적한 일상을 보낼 것만 같은 느낌이다. 1962~1970년 동안 작가 리처드 브라우티건이 쓴 62편의 단편들을 모아둔 ≪완벽한 캘리포니아의 하루≫는 단순하면서도 평화롭고, 자유로운 모습의 화자들이 등장한다. 당시 시대상 아메리칸 드림으로 인해 미국의 많은 젊은이들은 허무함을 느끼며 히피문화 확산에 참여했는데, 리처드 브라우티건은 그 사이에서 과거로의 회귀를 그려낸다. 62편의 단편 중에서 잔디밭, 자연의 소재가 많이 등장하는데 이들은 목가적(농촌처럼 소박하고 평화로우며 서정적인)인 생활에 대한 그리움, 동경심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이 책의 원제는 '잔디밭의 복수(Revenge of the Lawn)'인 것을 생각한다면, 결국 그는 혼란스러웠던 사회 분위기 속에서 이전의 자유로운 삶을 그리워하는 듯한 느낌이 든다.

  캘리포니아는 우리를 필요로 했고 다른 곳에서 살고 있던 우리를 불러 모았다. 너, 너, 그리고 너를 데려갈 거야 하는 식으로. 나는 대자연이 사람들과 미뉴에트 춤을 추고, 예전에 좋았던 시절에는 나하고도 춤추었던, 유령이 나오는 곳, 태평양 연안 북서쪽에서 살다가 불려갔다. (p.33 _ '캘리포니아로 모여드는 사람' 중에서)

 62편의 단편들은 자유로운 듯하면서도 나름의 규율을 가지고 있고, 브라우티건의 상상으로 이루어진 것 같으면서도 현실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내용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니까 62편의 단편들은 각각의 개성들을 지니고 있어 브라우티건의 생각과 느낌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작품이 있는가 하면,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전혀 이해하지 못할 작품들도 있다. 그렇지만 이 난해함 들은 당시 혼란스러운 사회에서 우리가 상실한 무언가를 의미하는 것 같은 느낌을 자아내기 때문에, 그 자체로 브라우티건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의미한다고 볼 수도 있다.

  우리가 맹목적으로 돈과 기계(자동차, 컴퓨터, 스마트폰 등)를 추구하다가 우리가 상실한 것이 무엇인가를 다시 한 번 돌이켜보게 한다. 잃어버린 소중한 것을 되찾고 상처 입은 영혼을 치유하며 상실한 것을 회복하자는 것. 이것이 바로 이 책이 우리에게 주는 중요한 메시지이다. (p.239 _ 작품 해설 중에서)

  그러나 브라우티건의 담백한 문장들은 작품의 개성이 어떻든 간에 모든 글에 대하여 상상하는 힘을 보여준다. 때로 나는 나의 문장으로 하여금 타인의 상상력을 자극할 수 있는 방향에 대해 생각한다. 문장의 논리적인 나열로 섬세한 묘사력에 이르는 것만이 타인의 상상력을 자극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브라우티건은 더 기본적인 방향으로 문장을 쓴다. 타인이 알고 있을 법한 어휘와 표현을 사용하여 브라우티건은 자신만의 담백한 문장을 나열하고 더 나아가 글을 읽는 누군가가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 있도록 한다. 그래서 ≪완벽한 캘리포니아의 하루≫는 굉장히 담백하면서도, 상상하는 재미로 읽을 수 있는 작품이다. 나의 설명으로는 그의 문장들을 모두 설명하기는 어려워, 책을 읽으며 좋았던 부분을 발췌하며 글을 마친다.

때로 인생은 한 잔의 커피 같다. 나는 언젠가 커피에 대한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커피가 우리 몸에 좋다는 내용이었다. 우리 장기에 자극을 주니까.
(p.44 _ '커피' 중에서)
봄이 되면 젊은 남자는 환상적인 사랑에 빠진다고 한다.
시간만 넉넉하다면, 그 남자의 환상에 커피 한 잔의 공간은 있을 것이다.
(p.49 _ '커피' 중에서)
"바이올린을 배우는 남자와 새너제이의 원룸에서 같이 사는 건 정말이지 힘들답니다."
그녀가 탄창이 빈 연발 권총을 경찰에게 건네면서 한 말이었다.
(p.66 _ '핏빛 다툼' 중에서)
오늘 저녁, 나는 말보다는 보풀로 설명할 수 있는 단어나 사건이 없다는 느낌에 사로잡혀 있다. 나는 내 어린 시절의 단편들을 조사하고 있다. 아무런 형태도 의미도 없는 머나먼 삶의 조각들. 그것들은 막 생겨난 보풀 같다.
(p.158 _ '보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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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꽃들의 조용한 맹세
미야모토 테루 지음, 송태욱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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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햇빛이 잘 드는 창틀에 다육 식물을 키웠었다. 온종일 햇빛을 흠뻑 쬐게 하고 주기에 맞춰 물을 주었다. 심심하니 가끔은 말도 걸어보고. 혼잣말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결코 혼잣말처럼 느껴지지는 않았다. 과묵한 대화 상대와 이야기한다고 상상하면 그만이었으니까. 그래도 혼자 살던 방 한 칸이 쓸쓸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그냥 그 자체만으로도, 위로가 되었으니까.
 
  꽃에도, 풀에도, 나무에도 마음이 있단다. 거짓말 같으면 진심으로 말을 걸어보렴. 식물들은 칭찬받고 싶어 한단다. 그러니 마음을 담아 칭찬해주는 거야. 그러면 반드시 응해올 거야.(p.158)

  <환상의 빛>, <금수> 의 작가 미야모토 테루는 ≪풀꽃들의 조용한 맹세≫를 통해 서정적인 분위기의 미스터리를 보여준다. 꽃과 정원이라는 배경을 사용하여 굉장히 조용하고 고요한 느낌의 장면들을 연출하면서 독자들이 손을 놓지 못하도록 수수께끼 하나를 심어 놓는다.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한 선택과 운명에 관한 이야기를.

  로스앤젤레스에서 홀로 살던 고모 기쿠에 올컷의 갑작스러운 죽음 소식을 접하게 된 겐야는 미국으로 향하게 된다. 기쿠에의 변호사로부터 겐야는 고모가 자신에게 400억 이상의 유산을 상속했다는 사실을 전해 듣게 된다. 그러나 유산 상속에는 27년 전, 마트에서 잃어버린 고모의 딸인 레일라를 찾아 그녀에게 유산의 70%를 전해달라는 조건이 붙어 있었다. 만약 그녀를 찾지 못한다면, 사회 아동들을 위해 기부를 해달라는 말까지.
  겐야는 고모의 마지막 유언의 의미를 알아차리고 잃어버린 레일라를 찾기 시작한다. 벨로셀스키 조사 회사를 경영하는 사립 탐정 니코에게 부탁을 하여 레일라의 흔적을 찾던 겐야는 뜻밖의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고모가 살아생전, 열심히 가꿨던 중정의 의미도.

 겐야는 중정을 걸어가 꽃들을 바라보며,
 "예쁘구나. 정말 예뻐."
  하고 말했다.
  그렇게 말하지 않을 수 없는 아름다움이었다. (p.62)

 

 

 

 

기쿠에의 집 정원사인 대니를 통해서 겐야는 서른세 개의 거베라 화분에 대해서 알게 된다. 딱 잃어버린 레일라의 나이만큼 놓아져 있던 거베라 화분의 수. 그리고 거베라의 꽃말은 '수수께끼'. 그렇게 수수께끼는 시작되었다. 
  ≪풀꽃들의 조용한 맹세≫는 굉장히 한적하고 평온한 팔로스버디스반도를 배경으로 전개된다. 처음 기쿠에 고모의 집을 방문하게 된 겐야는 그 평온함에 빠져들기 시작한다. 소설의 전반부는 그렇게 서정적인 분위기로 이루어진다. 겐야가 중정에 빠져들 때, 꽃에게 말을 걸 때, 독자들도 함께 그 고요함 속에 빠져든다. 그리고 300페이지가 지난 소설의 후반부부터 작가 미야모토 테루는 미스터리의 비밀들을 털어놓는다. 레일라의 실종과 관련된 수수께끼에 대한 이야기는 조금은 충격적으로 느껴진다. 
  거베라는 고모 기쿠에의 맹세를 들어주었던 것일까. 수수께끼의 끝엔 바람에도 그 자리를 꿋꿋이 지키는 풀꽃 같이 딸을 사랑했던 고모의 모성애가 남는다. 조용하고 잔잔해, 어쩌면 놓칠 뻔했던 기쿠에의 아픔과 모성애는, ≪풀꽃들의 조용한 맹세≫의 서정적인 분위기를 마지막 장까지 이끌어간다. 그저 이 책을 읽는 것만으로도 5월의 시작이 따뜻해진다.

  어른이 되면 키도 크고 다들 돌아볼 만큼 예뻐질 거야, 그렇게 되도록 이 꽃밭에 부탁해보자, 꽃에게도 풀에게도 나무에게도 마음이 있어, 그것을 잊으면 안돼, 레일라의 마음과 꽃, 풀, 나무의 마음은 말을 할 수 있어. 꽃도 풀도 나무도 말을 하지는 않지만 마음으로 말해줄 거야. 레일라도 언젠가 꽃, 풀, 나무와 이야기할 수 있게 되는거야, 그러면 많은 사람들의 마음도 알게 될 거고……. (p.3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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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마터면 열심히 살 뻔했다
하완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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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살의 나는 어른이 되면 드라마 속 주인공처럼 살아갈 거라고 믿었다. 소위 말하는 상위권 대학을 다니며 좋은 성적으로 졸업하고 내가 꿈꾸던 드라마 작가가 되어 이 나라를 떠들썩하게 만들 것이라고. 모두가 내 드라마를 보고 열광하고 나는 선망의 대상인 '스타 작가'가 될 것이라고. 인생 대역전을 꿈꿨던 여중생은 어느새 자라 소위 말하는 상위권 대학에는 가지 못했고 구멍 난 성적을 메꾸기 위해 4년을 허덕였다. '드라마 작가'라는 꿈은 접은 지 오래이고, 졸업 후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온전한 직장을 갖는 것만을 바라게 되었다. 남들이 말하는 인생 대역전은 상상 속에서 꼬깃꼬깃 접혀 버렸다. 
  누구나 꿈꾸는 대로 살면 얼마나 좋을까. 어렸을 적 우리 모두에겐 '꿈'이 있었다. 그리고 꿈이 이루어지길 간절히 빌었다. 하지만 모두가 그 꿈을 이루지는 못 한다. 그래, 적어도 포기한 나만큼은.(드라마 작가가 되기는 일찌감치 포기했고 그 이후로 다시 꿈꾸지 않을 것 같다.) 꿈을 위해 열심히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그 시간들이 허무하게 느껴졌다. 어째서 남들만큼 이뤄내지 못하는 걸까. 그 질문 속에서 24살의 나는 허우적거리고 있었고 우연히 이 책을 읽게 되었다.
 
  인생의 모든 것을 통제하려 해서는 안 된다. 어차피 통제가 안 된다. 자칫 허무주의로 흐를 수 있는 이 사실 앞에 나는 묘하게 위로를 받는다. 아, 모든 게 내 탓은 아니구나. 그걸 미리 알았더라면 나를 덜 힘들게 했을까? (p.70)

  '야매 득도 에세이'라는 재치 있는 부제를 가진 ≪하마터면 열심히 살 뻔했다≫는 일러스트레이터 하완 작가가 자신의 이야기를 진솔하게 털어놓은 에세이다. 회사 생활과 일러스트 작업으로 바쁘게 살아왔던 그는 어느 날, 회사를 그만두게 된다. 그리고 그 이후 그의 생활과 그것으로부터 오는 생각들을 엮어 놨다. 여느 에세이들처럼 무작정 '힘내세요, 모두 지나갈 것입니다'라는 말을 건네며 마음을 툭- 건드려 '우울모드'로 전환하도록 하지 않는다. 그저 저자가 생각하고 느낀 그대로를 담담하게 말할 뿐이다. 그 담담함 속에 녹아 있는 작가 하완만의 일러스트들은 나를 심각하고 우울한 마음의 구덩이로 끌고 가는 것을 막아준다. 일러스트들을 보며 피식 웃게 되고, 고민은 가벼워진다.

 

 

 

 

 

 

 

이왕이면 뜨거운 사랑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꼭 뜨겁지 않아도, 강렬하지 않아도 괜찮지 않을까? 각자의 방식대로 사랑(일) 하면 되는 거니까. (p.163)

  생각해보면 우리는 열정과 노력을 강요하고 이를 미덕이라는 여기는 사회 속에서 살아왔다. 반드시 꿈을, 그러니까 목표를 가져야 하고 그것을 성취하기 위해 노력을 해야 된다고 배워왔다. 중학교에 입학하고 고등학교를 졸업하기 전까지 '대학 입시'는 대부분 우리들의 목표였다. 그 목표를 이룬 뒤, 우리들의 마음은 어땠는지. 대학 생활을 하다 보니 주변에서 하나둘씩 '무엇을 해야 될지 모르겠다'라는 말을 내뱉었다. 열정과 노력으로 대학에 입학하고 나니 내가 무엇을 위해 그렇게 노력했었는지, 무언가를 잃어버린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작가 하완은 온전하게 그 느낌을 받아들이라고 한다. 그저 뭉근하게 원하는 일을 찾아가면 된다고 다독여 줄 뿐이다. 남들처럼 열심히 살지 않아도 나의 속도와 방향에 맞출 수만 있다면 좀 더디게 가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도록 말이다.

  그렇다. 인생의 대부분은 시시하다. 어쩌면 만족스러운 삶이란 인생의 대부분을 이루는 이런 시시한 순간들을 행복하게 보내는 데 있지 않을까? 사소한 것의 가치를 발견하고 시시함을 긍정하는 <오구실>이란 드라마처럼. 전혀 드라마틱하지 않다고 생각했던 그녀와 나의 인생도 드라마가 될 수 있음을 깨닫는다면 지금의 내 삶도 조금은 다르게 보일 것 같다.(p.244)

  내가 꾸준히 블로그에 쓴 글을 보며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 이 단편적인 모든 순간들이 내 이야기가 될 수 있겠구나,라고. 시시하다고 느꼈던 하루의 '단편'들이 모이면 나의 '장편'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순간을 즐겁고 소중하게'라는 나의 모토는 그렇게 생겨났다. 전체적으로 보면 시시할 수도 있는 인생이지만, 순간들을 행복하게 보낸다면 결국 나는 '행복한' 인생을 산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남들처럼 화려한 전체를 이룰 것이라고 확신하기는 어렵다. 그저 나는 천천히 내 속도와 방향에 맞춰 이 순간을 살아갈 뿐이다. 글을 쓰는 지금 이 순간도 나에겐 즐겁고 소중하다. Bravo, My li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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벚꽃, 다시 벚꽃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62
미야베 미유키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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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개했던 벚꽃들이 하나둘씩 져버리고 이제는 그 자리를 파릇파릇한 초록 잎들이 채우고 있다. 곧 있으면 가만히 있어도 더운 여름의 계절이 시작할 텐데. 벚꽃이 만연하게 핀 계절이 아닌, 여름을 앞둔 이 계절에 이 책을 꺼내 든 것이 너무 아쉬웠다. <화차>, <모방범>으로 잘 알려진 추리소설 작가 미야베 미유키의 ≪벚꽃, 다시 벚꽃≫은 제목에서부터 벚꽃 피는 계절이 절로 떠오른다. 그리고 그 계절의 따뜻함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소설의 원제인 '사쿠라 호사라(桜ほうさら, 벚꽃박죽)은 "이런 일 저런 일 온갖 일이 벌어져서 큰일 났다, 난리 났다"라는 고슈 지방 표현인 '사사라호사라(ささらほうさら, 뒤죽박죽)'을 응용하여 지었다고 한다. 주인공 쇼노스케에 집중해 읽다 보면 한국어로 번역된 제목보다 오히려 소설 원제가 더욱 내용에 와닿는 소설이다. 오래 산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의 삶은 뒤죽박죽이었으니까.

  "뒤죽박죽이라."
 그 말에 마음이 편해진 것은 아니었지만 약간은 위안을 얻었다. (p.49)

  무사 집안이었던 후루하시 家는 아버지 소자에몬이 뇌물을 받았다는 혐의를 받아 할복하는 바람에 온 가족이 뿔뿔이 흩어지게 된다. 차남 쇼노스케는 스승인 사에키 밑에서 생활하다 어느 날 자신을 찾아온 어머니의 말에 에도로 떠나게 된다. 도미칸 나가야에서 살게 된 쇼노스케는 정 많고 살가운 이웃들과 함께 지내게 된다. 에도로 온 쇼노스케는 어머니의 첫 번째 남편의 숙부인 사카자키 시게히데를 만나 아버지에게 누명을 씌운 배후가 있다는 사실을 듣게 된다. 그리고 그의 도움을 받아 그 배후를 밝히기로 한다.
  한편, 쇼노스케는 무라타야 서점의 지헤에의 도움으로 서적 필사를 도맡아 하며 생계를 꾸려나가게 된다. 그리고 벚꽃이 피어나는 계절, 벚꽃 나무 옆에 선 단발머리의 한 여인을 보게 된다. 다른 여인들과는 다르게 일정하게 자른 단발머리가 그의 뇌리 속에 박히게 되고, 쇼노스케는 아름다운 그녀를 찾아 나선다.

  사람에게는 호언장담하지 않고 오로지 한결같은 마음으로 살아가는 길이 있는 법. 목청 높여 이야기하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권세를 손에 넣는 것만이 인간의 명예가 아니야. (p.590)

 

 

당치 않습니다. 그건 쇼 씨의 눈이 좋은 눈이라는 증거입니다. '미'를 보는 사람의 눈이에요. 거죽이 아니라 사물의 참된 아름다움을 말이죠. (p.181)

  쇼노스케는 사실 무사로서는 적합한 인물이 아니다. 아버지 소자에몬이 젊었을 때, 굶주린 개가 그를 향해 짖자 칼을 빼 들었음에도 소자에몬은 개를 그냥 보내주었다. 사람들은 그 뒤로 개도 베지 못하는 무사 가문이라며 놀려대었지만, 아버지의 온화함을 그대로 물려받은 쇼노스케는 결코 그것이 놀림을 당할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아버지는 정이 많은 사람일 뿐이라고. 그래서 쇼노스케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모든 것을 따스한 눈길로 바라본다. 그의 곁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기분이 좋아질 정도로.
  쇼노스케는 단발머리 여인의 뒤를 쫓던 중 그녀가 누군지 알아낸다. 그리고 그녀가 단발머리를 하고 있었을 수밖에 없던 이유까지도. 사실 그녀에게는 왼쪽 몸에 붉은 점들이 피부를 덮고 있었고(계절마다 상태가 변하는 것으로 보아 지금으로 따지자면, 아토피와 비슷한 것이 아닌가 싶다.) 그녀 스스로 그것을 수치스러운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집 밖으로 잘 나오지 않고 나온다고 하더라도 두건을 쓰고 다니는 그녀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봐주는 쇼노스케는 누구보다 빠르게 그녀의 마음을 연다.

  부베 선생님이 언제나 말씀하시는걸요. 글자를 쓸 때는 마음을 담아 쓰라고. 마음을 담아서 쓰면 못 써도 예쁘게 보인다고. 이걸 쓴 사람은 분명 마음을 아주 많이 담아서 썼을 거예요. (p.260)

  ≪벚꽃, 다시 벚꽃≫을 읽다 보면, 일본 특유의 따스한 감성이 몽글몽글 피어난다. 타인의 외적인 것이 아닌 내면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신의 진심을 솔직하게 전하는 등장인물들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630페이지라는 두꺼운 분량도 금세 읽게 된다. 특히나 작가 미야베 미유키만의 문장이 가지는 묘사력 때문인지, 읽는 내내 드라마의 한 장면들을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사쿠라호사라' 라는 제목으로 일본 TV 드라마로 방영되었다고 한다.) 
  비록 벚꽃이 만개했을 때 읽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2018년 봄 끝자락을 이 책과 함께해서 좋았다. 그래서 또다시 봄이 오는 날, 이 책을 살며시 꺼내 들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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