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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꽃들의 조용한 맹세
미야모토 테루 지음, 송태욱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8년 4월
평점 :
가장 햇빛이 잘 드는 창틀에 다육 식물을 키웠었다. 온종일 햇빛을 흠뻑 쬐게 하고 주기에 맞춰 물을 주었다. 심심하니 가끔은 말도 걸어보고. 혼잣말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결코 혼잣말처럼 느껴지지는 않았다. 과묵한 대화 상대와 이야기한다고 상상하면 그만이었으니까. 그래도 혼자 살던 방 한 칸이 쓸쓸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그냥 그 자체만으로도, 위로가 되었으니까.
꽃에도, 풀에도, 나무에도 마음이 있단다. 거짓말 같으면 진심으로 말을 걸어보렴. 식물들은 칭찬받고 싶어 한단다. 그러니 마음을 담아 칭찬해주는 거야. 그러면 반드시 응해올 거야.(p.158)
<환상의 빛>, <금수> 의 작가 미야모토 테루는 ≪풀꽃들의 조용한 맹세≫를 통해 서정적인 분위기의 미스터리를 보여준다. 꽃과 정원이라는 배경을 사용하여 굉장히 조용하고 고요한 느낌의 장면들을 연출하면서 독자들이 손을 놓지 못하도록 수수께끼 하나를 심어 놓는다.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한 선택과 운명에 관한 이야기를.
로스앤젤레스에서 홀로 살던 고모 기쿠에 올컷의 갑작스러운 죽음 소식을 접하게 된 겐야는 미국으로 향하게 된다. 기쿠에의 변호사로부터 겐야는 고모가 자신에게 400억 이상의 유산을 상속했다는 사실을 전해 듣게 된다. 그러나 유산 상속에는 27년 전, 마트에서 잃어버린 고모의 딸인 레일라를 찾아 그녀에게 유산의 70%를 전해달라는 조건이 붙어 있었다. 만약 그녀를 찾지 못한다면, 사회 아동들을 위해 기부를 해달라는 말까지.
겐야는 고모의 마지막 유언의 의미를 알아차리고 잃어버린 레일라를 찾기 시작한다. 벨로셀스키 조사 회사를 경영하는 사립 탐정 니코에게 부탁을 하여 레일라의 흔적을 찾던 겐야는 뜻밖의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고모가 살아생전, 열심히 가꿨던 중정의 의미도.
겐야는 중정을 걸어가 꽃들을 바라보며,
"예쁘구나. 정말 예뻐."
하고 말했다.
그렇게 말하지 않을 수 없는 아름다움이었다. (p.62)
기쿠에의 집 정원사인 대니를 통해서 겐야는 서른세 개의 거베라 화분에 대해서 알게 된다. 딱 잃어버린 레일라의 나이만큼 놓아져 있던 거베라 화분의 수. 그리고 거베라의 꽃말은 '수수께끼'. 그렇게 수수께끼는 시작되었다.
≪풀꽃들의 조용한 맹세≫는 굉장히 한적하고 평온한 팔로스버디스반도를 배경으로 전개된다. 처음 기쿠에 고모의 집을 방문하게 된 겐야는 그 평온함에 빠져들기 시작한다. 소설의 전반부는 그렇게 서정적인 분위기로 이루어진다. 겐야가 중정에 빠져들 때, 꽃에게 말을 걸 때, 독자들도 함께 그 고요함 속에 빠져든다. 그리고 300페이지가 지난 소설의 후반부부터 작가 미야모토 테루는 미스터리의 비밀들을 털어놓는다. 레일라의 실종과 관련된 수수께끼에 대한 이야기는 조금은 충격적으로 느껴진다.
거베라는 고모 기쿠에의 맹세를 들어주었던 것일까. 수수께끼의 끝엔 바람에도 그 자리를 꿋꿋이 지키는 풀꽃 같이 딸을 사랑했던 고모의 모성애가 남는다. 조용하고 잔잔해, 어쩌면 놓칠 뻔했던 기쿠에의 아픔과 모성애는, ≪풀꽃들의 조용한 맹세≫의 서정적인 분위기를 마지막 장까지 이끌어간다. 그저 이 책을 읽는 것만으로도 5월의 시작이 따뜻해진다.
어른이 되면 키도 크고 다들 돌아볼 만큼 예뻐질 거야, 그렇게 되도록 이 꽃밭에 부탁해보자, 꽃에게도 풀에게도 나무에게도 마음이 있어, 그것을 잊으면 안돼, 레일라의 마음과 꽃, 풀, 나무의 마음은 말을 할 수 있어. 꽃도 풀도 나무도 말을 하지는 않지만 마음으로 말해줄 거야. 레일라도 언젠가 꽃, 풀, 나무와 이야기할 수 있게 되는거야, 그러면 많은 사람들의 마음도 알게 될 거고……. (p.3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