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벚꽃, 다시 벚꽃 ㅣ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62
미야베 미유키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15년 5월
평점 :
만개했던 벚꽃들이 하나둘씩 져버리고 이제는 그 자리를 파릇파릇한 초록 잎들이 채우고 있다. 곧 있으면 가만히 있어도 더운 여름의 계절이 시작할 텐데. 벚꽃이 만연하게 핀 계절이 아닌, 여름을 앞둔 이 계절에 이 책을 꺼내 든 것이 너무 아쉬웠다. <화차>, <모방범>으로 잘 알려진 추리소설 작가 미야베 미유키의 ≪벚꽃, 다시 벚꽃≫은 제목에서부터 벚꽃 피는 계절이 절로 떠오른다. 그리고 그 계절의 따뜻함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소설의 원제인 '사쿠라 호사라(桜ほうさら, 벚꽃박죽)은 "이런 일 저런 일 온갖 일이 벌어져서 큰일 났다, 난리 났다"라는 고슈 지방 표현인 '사사라호사라(ささらほうさら, 뒤죽박죽)'을 응용하여 지었다고 한다. 주인공 쇼노스케에 집중해 읽다 보면 한국어로 번역된 제목보다 오히려 소설 원제가 더욱 내용에 와닿는 소설이다. 오래 산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의 삶은 뒤죽박죽이었으니까.
"뒤죽박죽이라."
그 말에 마음이 편해진 것은 아니었지만 약간은 위안을 얻었다. (p.49)
무사 집안이었던 후루하시 家는 아버지 소자에몬이 뇌물을 받았다는 혐의를 받아 할복하는 바람에 온 가족이 뿔뿔이 흩어지게 된다. 차남 쇼노스케는 스승인 사에키 밑에서 생활하다 어느 날 자신을 찾아온 어머니의 말에 에도로 떠나게 된다. 도미칸 나가야에서 살게 된 쇼노스케는 정 많고 살가운 이웃들과 함께 지내게 된다. 에도로 온 쇼노스케는 어머니의 첫 번째 남편의 숙부인 사카자키 시게히데를 만나 아버지에게 누명을 씌운 배후가 있다는 사실을 듣게 된다. 그리고 그의 도움을 받아 그 배후를 밝히기로 한다.
한편, 쇼노스케는 무라타야 서점의 지헤에의 도움으로 서적 필사를 도맡아 하며 생계를 꾸려나가게 된다. 그리고 벚꽃이 피어나는 계절, 벚꽃 나무 옆에 선 단발머리의 한 여인을 보게 된다. 다른 여인들과는 다르게 일정하게 자른 단발머리가 그의 뇌리 속에 박히게 되고, 쇼노스케는 아름다운 그녀를 찾아 나선다.
사람에게는 호언장담하지 않고 오로지 한결같은 마음으로 살아가는 길이 있는 법. 목청 높여 이야기하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권세를 손에 넣는 것만이 인간의 명예가 아니야. (p.590)
당치 않습니다. 그건 쇼 씨의 눈이 좋은 눈이라는 증거입니다. '미'를 보는 사람의 눈이에요. 거죽이 아니라 사물의 참된 아름다움을 말이죠. (p.181)
쇼노스케는 사실 무사로서는 적합한 인물이 아니다. 아버지 소자에몬이 젊었을 때, 굶주린 개가 그를 향해 짖자 칼을 빼 들었음에도 소자에몬은 개를 그냥 보내주었다. 사람들은 그 뒤로 개도 베지 못하는 무사 가문이라며 놀려대었지만, 아버지의 온화함을 그대로 물려받은 쇼노스케는 결코 그것이 놀림을 당할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아버지는 정이 많은 사람일 뿐이라고. 그래서 쇼노스케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모든 것을 따스한 눈길로 바라본다. 그의 곁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기분이 좋아질 정도로.
쇼노스케는 단발머리 여인의 뒤를 쫓던 중 그녀가 누군지 알아낸다. 그리고 그녀가 단발머리를 하고 있었을 수밖에 없던 이유까지도. 사실 그녀에게는 왼쪽 몸에 붉은 점들이 피부를 덮고 있었고(계절마다 상태가 변하는 것으로 보아 지금으로 따지자면, 아토피와 비슷한 것이 아닌가 싶다.) 그녀 스스로 그것을 수치스러운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집 밖으로 잘 나오지 않고 나온다고 하더라도 두건을 쓰고 다니는 그녀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봐주는 쇼노스케는 누구보다 빠르게 그녀의 마음을 연다.
부베 선생님이 언제나 말씀하시는걸요. 글자를 쓸 때는 마음을 담아 쓰라고. 마음을 담아서 쓰면 못 써도 예쁘게 보인다고. 이걸 쓴 사람은 분명 마음을 아주 많이 담아서 썼을 거예요. (p.260)
≪벚꽃, 다시 벚꽃≫을 읽다 보면, 일본 특유의 따스한 감성이 몽글몽글 피어난다. 타인의 외적인 것이 아닌 내면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신의 진심을 솔직하게 전하는 등장인물들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630페이지라는 두꺼운 분량도 금세 읽게 된다. 특히나 작가 미야베 미유키만의 문장이 가지는 묘사력 때문인지, 읽는 내내 드라마의 한 장면들을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사쿠라호사라' 라는 제목으로 일본 TV 드라마로 방영되었다고 한다.)
비록 벚꽃이 만개했을 때 읽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2018년 봄 끝자락을 이 책과 함께해서 좋았다. 그래서 또다시 봄이 오는 날, 이 책을 살며시 꺼내 들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