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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 수를 죽이고 - 환몽 컬렉션 ㅣ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80
오쓰이치 외 지음, 김선영 옮김, 아다치 히로타카 / 비채 / 2018년 11월
평점 :
다른 외국 문학에 비해 일본 문학이 가진 독특한 문화와 분위기를 좋아해 자주 일본 문학을 읽는 편이다. 현실에서 많이 벗어나지 않으며 꿈을 꾸는 느낌을 자아내는 분위기의 문학을 좋아하는지라 그런 특유 분위기를 많이 지니고 있는 일본 문학들을 찾아 읽곤 한다.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기묘한 이야기를 가진 일본 문학이라면 너무도 기분이 좋다. 그래서 《메리 수를 죽이고》를 처음으로 집어 들었을 때, 그 매력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메리 수를 죽이고》는 마성의 천재 작가라고 불리는 오쓰이치 외에 나카타 에이이치, 야마시로 아사코, 에치젠 마타로의 작품들을 엮어 만든 단편 소설집이다. 오쓰이치는 호러, 미스터리, 판타지, 라이트 노벨 등 다양한 장르 소설을 창작하면서 경계가 무색한 작품들을 독자들에게 선보인다. 그래서 ‘오쓰이치 외 환몽 컬렉션’이라는 이름으로 엮인 《메리 수를 죽이고》는 다양한 장르인 7편의 소설을 보여준다. 때로는 공포스러우며 미스터리한 분위기를 자아내기도 하며, 때로는 라이트 노벨과 같이 가볍지만 깊은 상상력을 보여주며 독자들의 시선을 붙잡는다.
우리가 펜과 잉크병으로 낳아온 것들은 서로 연결되어 이윽고 걸작이 완성될 것이다. 이 일기를 누가 읽을지 나는 모른다. 원숭이가 쓴 일기를 누가 읽을지 나는 모른다. 계속될 미래에 이 일기가 영원히 존재할지, 그렇지 않을지도 알지 못한다. 그래도 쓰지 않을 수 없다. 원숭이가 매머드 그림을 그린 것처럼. 다 빈치가 모나리자를 그린 것처럼. 모차르트가 레퀴엠을 작곡한 것처럼. (p. 25)
사실 단순히 《메리 수를 죽이고》라는 제목만을 보고 선택했기에 이 책이 추리 소설에 그칠 뿐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누군가에 의해 죽는 인물은 ‘메리 수’일테고. 그러나 ‘메리 수’는 2차창작 관련 용어 중 하나로, 작가의 소망이 불쾌할 정도로 투영된 오리지널 캐릭터를 가리킨다. 사랑하는 캐릭터가 있던 화자 ‘나’는 캐릭터를 중심으로 소설을 써 내려간다. 모든 이야기는 자신의 ‘메리 수’를 중심으로 전개되었고, 이야기 해결에 있어서 메리 수의 초능력적인 능력은 필수였다. 그러나 ‘나’는 자신의 메리 수를 죽이기로 다짐한다.
“어디서 만났던가요?”
나는 물었다. 그리고 알아차렸다. 소녀의 눈은 양쪽의 색이 달랐다. 오른쪽 눈동자는 검은색이지만 왼쪽 눈동자는 붉은색. 오드아이.
“벌써 잊었어? 네가 나를 죽였잖아.” (p. 202)
글을 쓰지 않기로 다짐한 ‘나’는 꿈 속에서 자신의 메리 수를 다시 만나게 된다. 어린 시절 처절하게 죽일 수밖에 없었던 메리 수를 다시 만난 나는 그녀에게 “너 말고도 네 글을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는 뜻이야. 그건 행복한 일이야. 게다가 사실은 너도 그러길 바라고 있어. 다만 두려울 뿐이지. 아니야?” 라는 질문을 듣게 된다.
누군가의 세계를 빌려 소설을 썼을 때는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만큼은 그녀에게 도움을 청하지 않으면 첫걸음을 뗄 수가 없었다. 자부심이 필요했다. 글을 쓴다는 두려움도 모르고, 무아지경으로 전진했던 옛날의 열정이. (p. 206)
이렇게 고백하기는 부끄럽지만 한 아이돌의 팬으로서, 그들을 주인공으로 소설을 창작했던 적이 있었다. 소설 속에서 그들은 내 곁에서 모든 것을 만능적으로 다 할 수 있었던 메리 수였다. 그러나 고등학교 진학을 앞둔 나는 나의 메리 수를 죽여야 할 수밖에 없었다. 공부가 중요하다는 어른들의 말에, 나는 메리 수를 놓아주기로 했었다. 혹은 두려웠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메리 수를 붙잡고 있는 것이 타인의 눈에는 유치하기 짝이 없어보일지도 모른다는 마음에.
그리고 어른이 되어버린 나는 때때로 지난 날 메리 수를 놓아버렸던 나의 모습을 후회하기도 한다. 메리 수에 대한 상상과 환상만으로 모든 이야기들을 만들어내고 스스로 즐거워했던 모습을 너무도 그리워하기에. 그래서 7가지의 단편 이야기 중에 《메리 수를 죽이고》는 그 어떤 이야기보다 내게 다가왔다. 사람들은 종종 자신의 이야기라고 생각되는 것에 함몰되어 향수에 빠지기도 하지 않나.
나는 앞으로 자아낼 나의 세계, 아직 보지 못한 이야기가 풍요로운 결실을 맺도록 기도했다. 도중에 포기하는 일이 없이 주인공들의 모험이 계속되기를. 그리고 이 집필이, 즐거운 작업이 되기를.
천천히 심호흡을 하고, 마음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나는 타이핑을 시작했다. (p. 206)
이 밖에도 학교에서 일어난 청소년들의 문제를 그린 <염소자리 친구>와 <소년 무나카타와 만년필 사건>, 드라마 <시그널>을 연상하게 만드는 <트랜스시버>, 과학의 진보와 생명 윤리의 이야기를 담은 <어느 인쇄물의 행방> 등 다양한 매력적인 이야기들은 나의 호기심을 자극하기도 했다. 일본 드라마 중 <기묘한 이야기>를 좋아한다면, 《메리 수를 죽이고》는 매우 흥미롭게 다가올 것이다.
무엇보다도 《메리 수를 죽이고》의 가장 큰 마지막 반전은, 각각 개인이라고 여겨졌던 모든 작가가 사실은 동일인물이라는 것일지도. 다른 필명을 가지고 각각의 소설 세계를 펼치는 재능을 가진 오쓰이치의 다른 작품을 더욱 기대하며 마지막 장을 덮을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