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게, 행복이 아니면 무엇이지 - 기쁨의 감각을 천천히 회복하는 다정한 주문
김혜령 지음 / 웨일북 / 2018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질문엔 두 형태가 있다. 별 것 아니라는 듯이 쉽게 대답할 수 있는 질문과 머뭇거리다 얼버무리게 되는 질문. 후자에 속하는 질문 중 유독 어려운 축에 놓인 하나는 너는 행복해?’. 우습게도 이 질문의 특징은 어리면 어릴수록 긍정적인 대답을 들을 수 있다는 것이다. 언제부터 이 질문이 어렵게 느껴졌을까 생각한다면, 그리 오래되지는 않았으리라 이야기할 수 있다. 나는 왜 이 질문을 어렵게 느끼기 시작했을까?

    


 

이게, 행복이 아니면 무엇이지는 특별한 행복을 기다리는 사람들을 위한 책이다. 내가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는 완벽한 삶을 살 수 있으면 좋겠다고 소망하는 사람들 말이다. 하지만 이 책을 펼치는 순간, 이 말에 속았다고 느낄 수도 있다. 저자 김혜령은 보통의 하루 속에서 벌어지는 행복들을 이야기하니 말이다. 행복은 완벽한 삶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에 녹아져 있다고 그는 말한다. 아주 평범한 일과 내면에서 일어나는 감정을 발견한다면, 그것이 비로소 행복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라고.

    


 

우리가 원하는 건 시간을 늘이는 것이라기보다 더 자주 행복감을 느끼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세상은 어차피 내 눈에 담기는 것이다. 다가오는 가을이 작년의 가을과 같지 않은 것처럼, 무엇도 하루하루 새로워지지 않는 것은 없다. 내일은 오늘과 다르다. 식상함으로 가득 차서 삶을 짧게 요약해버리기보다, 매일 새롭게 정성 들여 시간을 색칠해가는 것, 그것이 스스로에게 줄 수 있는 즐거운 선물이 아닐까.

/ p. 21

   


 

바쁜 일상 속에서 우리는 많은 것들을 놓쳐 버리기 일쑤다. 작은 것들에 귀 기울이기에는 내 자신은 바쁘다는 핑계로 스스로를 다그치고 있기도 한다. 그러다보니 어느새 내 감정에 무뎌지기 시작한다. 감정을 확인하지 못하니 내비치는 것도 어렵다. 건조하다. 딱 그 느낌 그대로 살아가고 있는 내 모습이 익숙해지다 못해 당연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이러니 우리는 행복하다고 이야기하기 어렵다.

 

저자 김혜령은 자신이 행복했던 순간들을 말하며, 우리의 행복감을 좌우하는 요소들을 심리, 철학, 문학적 배경과 엮어 설명한다. 책을 읽는 동안 차분하고 섬세한 이야기들은 행복을 찾는 것이 어려운 일이 아님을 느낄 수 있었다. 이게, 행복이 아니면 무엇이지를 통해서 읽고 싶은 책과 보고 싶은 영화가 생겼다. 호기심에 두근거렸다. 어쩌면 이것도 행복의 순간이리라.

 

왜 우리는 뭔가를 하려면 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걸까. 잘하고 싶은 것과 잘해야만 하는 것은 다르다. ‘잘해야 한다혹은 인정받아야 한다는 미션을 만들어내는 순간, 그 활동은 일이 되어버리는 것 아닐까. 내가 좋아하는 것을 로 하지 않아도 되는 자유로움, 인정이나 보상에 얽매이지 않는 그 자체로 행복한 활동이 우리에겐 필요하다.

/ p. 165








순간을 즐겁고 소중하게 보내자고 해놓고는 때로 그 사실을 잊어버린다. 당장 눈앞에 놓인 일들에 집중하다보니 많은 것들을 놓치며 살아가고는 한다. 매 순간이 늘 즐겁게 느껴질 수는 없겠지만, 그럼에도 분명 하루 속에 내가 즐겁다고 느낀 순간은 있을 텐데. 오늘 하루를, 어제를, 그리고 더 지난 시간들을 돌아본다. 머릿속엔 즐거웠던 순간들이 가득하다. 그리고 앞으로 그런 순간들로 가득 채워나가고 싶다. 그걸 발견할 수 있도록 내 자신에 집중하면서.

    


 

삶의 마지막 순간에 당신의 삶은 행복했습니까?’라는 질문을 받는 상상을 해본다. 그 답은 전적으로 내 기억에 의존할 것이다. 그렇다면 더욱 적극적인 망각을 위해, 새로운 기쁨을 만들어나가고 싶다.

/ p. 3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8년에 걸친 신부 - 그대가 눈을 뜨면
나카하라 히사시.나카하라 마이 지음, 민경욱 옮김 / ㈜소미미디어 / 2019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몇 년이 지나도 여전히 기억에 남는 다큐멘터리 한 편이 있다. ‘MBC 휴먼다큐 사랑<너는 내 운명>. 시한부 선고를 받은 신부의 곁을 지키는 한 남자의 이야기는 많은 시청자의 마음을 울렸다. 그녀가 자리를 털고 일어나길, 그들의 사랑이 오래도록 지속되길 바랐다. 그러나 그녀는 하늘의 별이 되어 그의 곁을 떠난다. 사랑하는 이의 아픔을 지켜보며 곁을 오랫동안 지킬 수 있는 힘. 진정한 사랑은 그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일본에서도 많은 사람들에게 진정한 사랑을 보여준 한 연인이 있었다. 8년에 걸친 신부는 결혼식을 앞두고 원인불명의 병으로 쓰러진 예비 신부와 그녀의 곁을 한결같이 지킨 예비 신랑의 이야기를 담아낸다. 혼수상태에 빠진 신부가 깨어나길 기다린 2년의 시간, 그리고 어린아이의 지능으로 돌아간 신부와 함께 재활한 6년의 시간. 히사시는 마이의 곁에서 8년의 시간을 보내며, 그녀를 향한 진정한 사랑을 보여준다.

  

  

언제까지 기다리면 될까, 하는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다.

기다리는 것 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계속 잠들어 있는 마이가 눈을 떠주는 날을 저는 그저 기다렸습니다. / p. 80

  

  

8년에 걸친 신부는 주로 히사시의 시점으로 전개된다. 마이가 깨어나길 기다리는 동안 그는 어떤 심정이었는지에 대해 담담하게 고백한다. 두 사람 사이의 힘든 시간이었던 이 순간을 되돌아보며, 히사시는 그 누구보다 굳은 의지를 보여준다. 히사시도, 마이의 부모님도, 모두 그녀가 깨어날 수 있다는 의지를 가지고 그녀를 간병한다. 그들은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

  

  

히사시는 매일 30분 가까이 걸려 병원을 오간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마이의 손발에 크림을 바르고 마사지를 하는 것뿐. 그가 할 수 있는 일이 이것밖에 없었던 그 심정이 이해됐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병원에 계신 할아버지를 매일 방문하면서 나도 마찬가지로 할아버지의 팔, 다리에 크림을 발라드렸다. 건조한 병실에서 쩍쩍 갈라져버린 할아버지의 피부를 말없이 슥슥 문지르는 게 다였다. 너무 아파 말도 못하시는 당신을 보며 그 일이라도 해드릴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러기에 마이의 곁을 지킨 히사시의 사랑이 대단하다고 느꼈다. 더구나 그 상황을 받아들이는 그의 태도도. 히사시는 결코 이 과정을 부정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들의 사랑을 견고하게 만들 수 있었던 순간으로 생각한다. 마이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확인하고, 두 사람의 사랑을 지켜나가기 위한 과정의 일부라고. 그리고 그 사랑은 결국 기적을 만든다.

  

  

둘 다 늙어 둘 중 하나가 누구를 보살펴야 할 때는 매일 변화가 없거나 변화가 있더라도 좋지 않은 변화가 많을 겁니다.

하지만 이 시기는 조금씩이라도 매일 변화가 있었고 조금씩 전진해주었으니까 미소를 지을 수 있었던 날들이었습니다. 역시 즐거운 날들이었습니다. / p.117

  

 




8년에 걸친 신부를 읽으며 사랑에 대해 생각했다. 모두가 사랑이 무엇인지는 알고 있다. 시작하는 것도 어렵지 않다. 그러나 이 사랑이라는 것은 손에 잡히지도, 눈에 보이지도 않기에 우리의 생각과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기도 한다. 그래서 시작된 사랑을 지속시키기란 어렵다. 그럼에도 히사시와 마이는 그들의 방식대로 사랑을 지속시킨다. 어떤 시련이 와도, 쉽게 무너지거나 부서지지 않을 사랑을. 그들의 사랑이 아름답게 보이는 이유는 그 이유가 아닐까.

    

 

마이의 의식이 없었던 때나, 겨우 눈을 뜨고 갓난아이 같았을 때부터 재활치료를 시작했을 때까지 어쨌든 평범한 생활을 하고 싶다는 꿈을 꾸며 살았어.

지옥 같이 괴롭고 힘든 시련이었지만 지금은 소중한 추억으로 변한 것 같아.

그 시간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전보다 더 가족이 될 수 있었다고 생각하니까. / p.17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는 정신병에 걸린 뇌과학자입니다
바버라 립스카.일레인 맥아들 지음, 정지인 옮김 / 심심 / 2019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우울증, 조현병 등의 정신질환을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지고 있다. 오롯한 개인의 문제로 여겨지던 정신질환은 어느덧 사회의 문제로 인식되기 시작했고, 사람들의 관심도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정신질환은 우리에게 낯선 단어로 느껴지며, 어떻게 받아들여야하는지 체감하기란 다소 어려운 부분이었다. 전문가의 설명이 포함되어 있는 다큐멘터리를 봐도 쉽게 와닿지 않는 부분을 해소하기란 어렵다. 그나마 다행히도 직접 정신질환을 겪었거나 혹은 그 가족의 솔직한 이야기가 담긴 책들을 서점에서 쉽게 만날 수 있게 되었다.



내 뇌는 모두 부서졌고, 빛은 그 틈으로 들어온다.



《나는 정신병에 걸린 뇌 과학자입니다》 역시 그런 책이다. 저자 바버라 립스카는 정신질환에 걸렸던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30년간 신경과학자로 조현병의 원인을 찾는 데 주목했던 그녀는 자신의 연구를 위해 희생한 쥐들이 복수를 하는 것이라며, 어느 날 자신의 일상을 망가뜨린 뇌 질환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한다. 정확하게 기억할 수는 없지만, 자신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투병 생활들을 순차적으로 기록하며 사람들에게 이 병을 어떻게 해석할 수 있는지 방향을 제시한다.


내 뇌에서 정확히 무슨 일이 벌어졌으며 그 일이 구체적으로 어디에서 일어났는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나의 여정은 내게 뇌의 풍경을 여행할 값진 기회를 주었다. 그 결과 나는 말도 못하게 복잡한 뇌라는 구조무로가 그 뇌의 산물로서 대단히 놀라운 회복력을 지닌 인간 정신에 관해 더욱 깊이 이해하게 되었다. / p. 22


갑자기 아래를 볼 수 없게 된 오른쪽 눈, 움직이기 힘들어진 팔 등 바버라는 자신이 겪었던 신체적 불편들을 하나씩 언급한다. 뇌종양이 진행될수록 바버라는 점차 가까워오는 죽음의 그림자에 침식되어 간다. 그러나 6년 전 유방암을 극복했던 기억으로 다시금 삶의 의지를 다잡는다. 그녀의 바람대로 금세 자리를 털고 일어나면 좋으련만, 생각보다 호전은 더디며 그 과정에서 그녀는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자신을 마주하게 된다.


오랫동안 조현병을 연구하며 보냈으므로, 나는 뇌에 문제가 생기면 판단력이 흐려지고 자신의 정신적 결함을 인지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뇌에 관한 전문 지식을 쌓으며 보낸 그 모든 세월도 이 순간만큼은 내가 상황을 있는 그대로 판단하는 데 도움을 주지 못한다. 그러니까 나는 정신을 잃어가는 중이고, 인생도 잃어가는 중이라는 것을. / p.235


《나는 정신병에 걸린 뇌 과학자입니다》는 마치 소설을 읽는 듯 세세한 묘사력이 돋보인다. 무엇보다도 자신의 생각을 과감하게 써 내려간다. “암트랙, 이 망할 것들!”이나 “나더러 고약하다고? 진심으로 하는 소리야?”와 같은 표현들은 그녀가 당시에 얼마나 불안하면서 감정적인 하루들을 보냈는지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감정을 주체할 수 없고, 거친 표현을 일삼는 것 역시 정신질환의 증상들이라는 사실도 알게 된다.


뇌는 그 복잡성과 신비로움으로 우리를 매혹한다. 우리가 꿈꾸고 생각하고 느끼고 행하는 모든 것, 그러니까 우리를 우리로 만드는 모든 것은 뇌에서 온다. 우리는 우리의 뇌다. 병이나 노화 때문에 뇌가 망가져 자신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소중한 것, 바로 우리의 페르소나를 잃게 되는 것은 끔찍한 일이다. 우리는 정신에 관해, 그리고 언젠가는 설명되고 치료되기를 모두가 소망하는 정신질환에 관해 더 많이 알기를 갈망한다. / p. 333


바버라는 뇌는 우리를 인간답게 만드는 존재라고 여긴다. 그러니 뇌가 망가지는 것은 우리를 잃어버리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한 정신질환을 겪은 바버라가 투병을 모두 끝마치고 본래의 생활로 돌아올 수 있었던 이유는 가족들의 관심과 사랑 덕분이었다. 가족들이 바버라의 문제로만 여기고, 그녀의 곁에 있으려고 하지 않았다면 그녀는 어떻게 되었을까? 자신을 찾아가고, 일상을 회복할 수 있었을까? 정신질환에 대한 더 많은 관심이 필요한 이유는 그들도 충분히 잃어버린 자신의 일상으로 다시 돌아올 힘이 어딘가에 잠들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관심이 그들의 힘을 깨우는 열쇠가 될지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일 년에 하루, 밤에 피는 꽃 웅진 지식그림책 53
라라 호손 지음, 홍연미 옮김 / 웅진주니어 / 2019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미국 남서부에서부터 멕시코 북서부까지 약 26만 제곱킬로미터의 넓디넓은 소노란 사막. 이 소노란 사막에는 사와로라는 아주 특별한 식물이 자란다. 일 년에 딱 하루만 꽃을 피우는 거대한 선인장인 사와로는 꽃이 피어 있는 시간동안 화려한 꽃잎을 펼치고 달콤한 향기를 내뿜는다.


영국의 그림책 작가 라라 호손은 이 사와로 선인장과 사막의 동물들을 소재로 신비로운 자연을 논픽션으로 그려낸다. 일 년에 하루, 밤에 피는 꽃은 특별한 스토리는 없지만 화려하고 따뜻한 매력적인 일러스트가 돋보이는 그림책이다.


 

드넓은 사막에 아침 해가 떠올라요.

봄을 맞아 사막은 온통 생기로 가득하지요.

키다리 선인장 사와로들이 보이나요?

사와로는 크고 작은 야생동물의 아늑한 쉼터랍니다.


  

일 년에 하루, 밤에 피는 꽃은 쉽게 알 수 없었던 사막의 생태계를 그려낸다. 알록달록한 색을 가진 무지개메뚜기, 사와로의 꽃꿀을 먹으며 사는 작은긴코박쥐, 영리한 호랑이꼬리고양이, 선인장 열매로 수분을 섭취하는 갬벨메추라기 등 익숙하지 않은 사막의 동물들을 소개한다. 그리고 이 생태계의 중심에는 항상 사와로 선인장이 존재한다.






벨벳처럼 보드라운 꽃잎이 둥그렇게 펼쳐지면

진하고 달콤한 향이 밤하늘에 차올라요.

 

 

선인장하면 바로 떠오르는 형태를 가진 사와로 선인장은 200년 동안 평균 12미터까지 자란다. 어린 선인장일 때는 그늘에서 자라면서 뿌리 내린 곳 주변의 물과 영양을 흡수해야 하기 때문에 커다란 그늘에서 주로 발견된다고 한다. 라라 호손은 이 사와로 선인장의 성장 과정 중 가장 돋보이는 순간을 그림으로 표현한다.

 

 

곧 주위가 잠잠해지고 사막은 다시 조용해질 거예요.

하지만 사와로에게는 아직 할 일이 있답니다.

꽃이 지고 빨간 열매가 자라나면

머지않아 새로운 사와로가 태어날 테니까요.

 

 

아이, 어른 모두가 읽기 좋은 일 년에 하루, 밤에 피는 꽃. 사막의 뜨거운 해가 뉘엿뉘엿 질 무렵, 아주 특별한 축제를 위해 동물들이 모여들기 시작한다. 그리고 당신도. 움트기 시작한 작은 초록빛 눈이 완전히 만개하기 전에 서둘러 오시길!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십우도
백금남 지음 / 무한 / 2019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한 때 현대 단편소설만 읽었다. 수업을 들으려면 어쩔 수 없었다. 국어 시험지 위에 일부만 발췌된 글이 아닌 완전한 글을 읽고 나니 그제야 이해가 됐다. 주인공들의 행동, 생각이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한국문학은 재밌었다. 한국문학이 가진 고유의 맛을 그때 처음으로 알았다. 백금남의 십우도역시 그런 맛을 가진 소설이었다.


영화 <관상>, <명당>, <궁합> 역학 3부작의 원작을 쓴 백금남은 사찰에서 자주 볼 수 있는 탱자 중 하나인 십우도를 통해 자신만의 독창적인 세계관을 그려낸다. 백정인 산우가 소를 찾으러 다니는 여정을 통해 불교관을 담아내며, 역사적 배경과 맞물린 운명론적인 전개는 한국 문학의 맛을 고스란히 느끼도록 한다. 읽는 동안 김동인의 감자, 김동리의 역마와 비슷한 토속적인 분위기가 느껴지며 한껏 한국 문학의 맛을 즐길 수 있는 작품이다.


 

우리는 누구나 자신의 마음속에 노닐고 있어야 할 소 한 마리를 잃어버리고 산다. 말하자면 이 험난한 세파에서 무구한 노를 저으며 자신도 모르게 또 하나의 나, 그 참다운 나를 잃어버리고 산다는 말이다. (p. 5)

 

 

5대째 백정 집안의 아들인 산우는 어느 날 한 마리의 소를 잡다가 놓쳐버린다. 산우는 자신이 놓쳐버린 소를 찾기 위해 산을 오르게 되고, 그 과정에서 오래 전 자신을 아껴주었던 할아버지 골피를 떠올리게 된다. 소를 찾으며 알 수 없는 꿈을 꾸던 산우는 자신이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 고민한다. 그리고 자신이 누구인지를 끊임없이 되묻는다.



 

 



백정에게서 소는 필연적인 존재이다. 조선 후기에 가장 천한 직업으로 여겨졌던 백정에게 소는 자신들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수단이었다. 소가 있기에 백정이 있었고, 백정이 있었기에 소가 있었던 셈이다. 백금남은 그런 상징적인 존재를 찾아가는 산우의 과정에 빗대어 우리가 스스로의 본모습을 찾는 과정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소를 찾는 산우의 모습은 결코 평안하지 않다. 우리가 잊고 지냈던 자아를 찾아가는 과정도 쉽지는 않다는 것을 백금남은 불교의 교리를 통해 설명하는 셈이다.


 

생존 경쟁의 틈바구니 속에서 오직 소만이 아니라 우리들 인간마저도 부당하고 억울하게 인간적인 자기 모양대로 살아남지 못한다는 사실을 그제야 알아갔던 것이다. 이미 규정지어진 결정적인 평등 앞에서 소와 인간과의 차이, 아니 나아가 양반과 상놈과의 차이, 아니 더 나아가 평민과 백정과의 차이, 먼 옛날부터의 조상들의 괄시와 핍박을 생각해 보지 않더라도 그들의 발길질에, 그들의 독사 같은 혀 끝에 좀처럼 살아남지 못했던 역사를 골피는 그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p. 73)


 

십우도는 높은 곳이 아닌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그려내며 향토적인 분위기를 그려낸다. 백금남은 토속적인 사투리나 은어 등을 사용하여 한국 문학만이 가질 수 있는 표현을 보여준다. 이는 마치 현대 한국 소설의 묘미로 불리는 메밀 꽃 필 무렵의 이효석 문체를 떠올리게끔 만든다. 박꽃이 하얗게 핀 달개집 너머로 밤의 혈관 같은 별무리가 곱다. (p. 13)", "더욱이 그 피 번진 얼굴을 가까스로 들어 목젖이 터져 버린 실없는 음성이 검붉은 피와 함께 입술 사이로 흘러 나왔을 때 은회색 달빛은 너무도 대조적인 배경이었다.p. 233)"와 같이 자연친화적인 표현과 선명한 색채의 대조가 눈에 띄는 작품이다.


때로 십우도와 같은 작품을 읽다 보면, 한국 문학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느껴진다. 젊은 작가들이 많이 등단하면서 한국문학의 형태도 조금씩 바뀌고 있다. 담담하고 솔직한 문체들이 많이 엿보이며, 감정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것이 대다수였다. 때로는 담백한 작품이 좋기도 하지만 무미건조하여 읽을 맛이 느껴지지 않아 한국 문학을 기피하기도 했다.

 

그래서 십우도를 읽는 동안 한국문학만이 가질 수 있는 고유의 맛을 잔뜩 음미했다. 외국어로는 표현할 수 없는, 오로지 한국문학의 토속적인 표현만이 표현할 수 있는 복잡하게 얽힌 그 감정들을. 이 묘미를 알고 나니 또 다른 한국문학이 읽고 싶어졌다. 읽을 맛 나는 한국문학, 앞으로 그런 작품들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