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우도
백금남 지음 / 무한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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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때 현대 단편소설만 읽었다. 수업을 들으려면 어쩔 수 없었다. 국어 시험지 위에 일부만 발췌된 글이 아닌 완전한 글을 읽고 나니 그제야 이해가 됐다. 주인공들의 행동, 생각이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한국문학은 재밌었다. 한국문학이 가진 고유의 맛을 그때 처음으로 알았다. 백금남의 십우도역시 그런 맛을 가진 소설이었다.


영화 <관상>, <명당>, <궁합> 역학 3부작의 원작을 쓴 백금남은 사찰에서 자주 볼 수 있는 탱자 중 하나인 십우도를 통해 자신만의 독창적인 세계관을 그려낸다. 백정인 산우가 소를 찾으러 다니는 여정을 통해 불교관을 담아내며, 역사적 배경과 맞물린 운명론적인 전개는 한국 문학의 맛을 고스란히 느끼도록 한다. 읽는 동안 김동인의 감자, 김동리의 역마와 비슷한 토속적인 분위기가 느껴지며 한껏 한국 문학의 맛을 즐길 수 있는 작품이다.


 

우리는 누구나 자신의 마음속에 노닐고 있어야 할 소 한 마리를 잃어버리고 산다. 말하자면 이 험난한 세파에서 무구한 노를 저으며 자신도 모르게 또 하나의 나, 그 참다운 나를 잃어버리고 산다는 말이다. (p. 5)

 

 

5대째 백정 집안의 아들인 산우는 어느 날 한 마리의 소를 잡다가 놓쳐버린다. 산우는 자신이 놓쳐버린 소를 찾기 위해 산을 오르게 되고, 그 과정에서 오래 전 자신을 아껴주었던 할아버지 골피를 떠올리게 된다. 소를 찾으며 알 수 없는 꿈을 꾸던 산우는 자신이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 고민한다. 그리고 자신이 누구인지를 끊임없이 되묻는다.



 

 



백정에게서 소는 필연적인 존재이다. 조선 후기에 가장 천한 직업으로 여겨졌던 백정에게 소는 자신들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수단이었다. 소가 있기에 백정이 있었고, 백정이 있었기에 소가 있었던 셈이다. 백금남은 그런 상징적인 존재를 찾아가는 산우의 과정에 빗대어 우리가 스스로의 본모습을 찾는 과정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소를 찾는 산우의 모습은 결코 평안하지 않다. 우리가 잊고 지냈던 자아를 찾아가는 과정도 쉽지는 않다는 것을 백금남은 불교의 교리를 통해 설명하는 셈이다.


 

생존 경쟁의 틈바구니 속에서 오직 소만이 아니라 우리들 인간마저도 부당하고 억울하게 인간적인 자기 모양대로 살아남지 못한다는 사실을 그제야 알아갔던 것이다. 이미 규정지어진 결정적인 평등 앞에서 소와 인간과의 차이, 아니 나아가 양반과 상놈과의 차이, 아니 더 나아가 평민과 백정과의 차이, 먼 옛날부터의 조상들의 괄시와 핍박을 생각해 보지 않더라도 그들의 발길질에, 그들의 독사 같은 혀 끝에 좀처럼 살아남지 못했던 역사를 골피는 그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p. 73)


 

십우도는 높은 곳이 아닌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그려내며 향토적인 분위기를 그려낸다. 백금남은 토속적인 사투리나 은어 등을 사용하여 한국 문학만이 가질 수 있는 표현을 보여준다. 이는 마치 현대 한국 소설의 묘미로 불리는 메밀 꽃 필 무렵의 이효석 문체를 떠올리게끔 만든다. 박꽃이 하얗게 핀 달개집 너머로 밤의 혈관 같은 별무리가 곱다. (p. 13)", "더욱이 그 피 번진 얼굴을 가까스로 들어 목젖이 터져 버린 실없는 음성이 검붉은 피와 함께 입술 사이로 흘러 나왔을 때 은회색 달빛은 너무도 대조적인 배경이었다.p. 233)"와 같이 자연친화적인 표현과 선명한 색채의 대조가 눈에 띄는 작품이다.


때로 십우도와 같은 작품을 읽다 보면, 한국 문학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느껴진다. 젊은 작가들이 많이 등단하면서 한국문학의 형태도 조금씩 바뀌고 있다. 담담하고 솔직한 문체들이 많이 엿보이며, 감정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것이 대다수였다. 때로는 담백한 작품이 좋기도 하지만 무미건조하여 읽을 맛이 느껴지지 않아 한국 문학을 기피하기도 했다.

 

그래서 십우도를 읽는 동안 한국문학만이 가질 수 있는 고유의 맛을 잔뜩 음미했다. 외국어로는 표현할 수 없는, 오로지 한국문학의 토속적인 표현만이 표현할 수 있는 복잡하게 얽힌 그 감정들을. 이 묘미를 알고 나니 또 다른 한국문학이 읽고 싶어졌다. 읽을 맛 나는 한국문학, 앞으로 그런 작품들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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