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드키
D. M. 풀리 지음, 하현길 옮김 / 노블마인 / 2018년 12월
평점 :
절판




베아트리스는 손이 아플 때까지 열쇠고리를 움켜쥐었다. 아파트 열쇠와 지하 세탁실의 열쇠는 금세 알아봤다. 식당에서 사용하는 듯한 또 다른 열쇠가 있었다. 그런데 맨 마지막 열쇠는 좀 이상했다. 다른 열쇠들보다 크기가 훨씬 작고, 훨씬 정교했다. 더 오래되어 보이기도 하고, 열쇠를 살펴보던 베아트리스는 숫자를 발견했다. '547'이었다. 그녀는 눈물로 부어오른 눈이 저절로 닫힐 때까지 숫자를 빤히 쳐다봤다. (p. 138)

오하이오주 클리블랜드의 구조공학자로 일했던 D.M. 풀리는 자신의 직업에서 영감을 얻어 《데드키》의 원고를 써 내려간다. 버려진 건물을 조사하는 동안 그녀는 소유자가 분명하지 않은 대여금고들로 꽉 찬, 지하의 금고실을 발견한다. 풀리의 모습은 소설 속 '아이리스'라는 건축공학 기술자로 투영되어 나타난다. 그리고 풀리는 640쪽의 페이지에 걸쳐 한 금고에 대한 미스터리를 풀어내고자 한다. 1978년과 1998년을 오가며.

1978년, 16살의 소녀 베아트리스는 도리스 이모의 도움으로 클리블랜드 퍼스트뱅크의 비서로 고용된다. 어느 날, 베아트리스는 도리스 이모가 위급하다는 연락을 받게 된다. 그리고 이모의 소지품을 정리하던 중, 베아트리스는 의문의 열쇠를 발견하게 된다. '547'이라는 번호가 적힌 열쇠를 발견한 베아트리스는 열쇠가 가진 비밀을 파헤치고자 한다. 그러나 1978년 은행은 돌연 파산하게 되며, 20년이 흐르게 된다. 1998년, 건축공학 기술자 아이리스는 은행의 설계도를 담당하게 되었고 지난 20년간 은폐되었던 대여금고 속의 진실을 파헤치고자 한다. 금고의 비밀을 파헤치려는 사람들은 누구라도 예외 없이 실종되거나 혹은 사체로 발견되기 시작한다. 이 모든 진실의 중심에 있는 '데드키'는 무엇일까?

"왜 데드키라고 부르는 거죠?" 아이리스가 끝까지 물었다.

"대여금고가 여러 해 동안 열리지 않고 잠겨 있으면, 우린 '죽었다'고 말해요. 대여금고가 죽으면, 그걸 비우고 다른 대여자를 받아야 하죠. 우린 데드키로 죽어버린 대여금고를 열고 자물쇠를 바꾸곤 했어요. 지금은 드릴로 틀에 구멍을 뚫고, 틀 전체를 몽땅 갈아치우지만. 짐작하겠지만, 금전적으로는 엄청난 낭비죠."

"대여금고가 자주 죽나요?"

"깜짝 놀랄 정도로 자주요."

(p. 457-458)

《데드키》는 1978년과 1998년, 20년의 시간을 병렬적으로 나열하며 전개한다. 그 중심에는 물론 대여 금고의 모든 진실을 파헤칠 수 있는 '데드키'가 자리 잡는다. 1978년의 베아트리스와 1998년의 아이리스는 서로 다른 시간 속에서 이 데드키가 불러올 파멸의 끝을 예상하지 못한 채 그것의 진실에 다가가고자 한다. 교차로 진행되는 두 시간 속에서 풀리는 가장 절묘한 타이밍에 시공간을 이동시키며 독자들의 애를 태운다. 그러기에 600페이지가 넘는 두께에도 불과하고 굉장히 빠른 속도로 소설은 전개된다.

옷이 보수적인 디자인인 것을 보면, 베아트리스는 조용한 성품이었을 것이다. 그녀는 나처럼 혼자 살았을까? 아이리스는 궁금해졌다. 누군가 그녀를 찾았을까? 여행가방은 베아트리스, 혹은 누군가가 버려둔 뒤로 손이 닿은 흔적이 없었다. (p. 308)

이러한 전개 속도 속에서 풀리는 베아트리스와 아이리스, 두 인물의 심리를 집중적으로 파고든다. 그들이 '데드키'에 접근할 수밖에 없는 호기심과 더 나아가 마주하는 진실로 인한 두려움 등 두 인물이 가진 심리를 섬세하고 자세하게 묘사한다. 그렇기에 독자들이 그들의 이야기를 더욱 궁금하게 만든다.

그러나 심리 스릴러 소설의 대가들의 첫 데뷔작이 완벽하지 않았던 것처럼 《데드키》 역시 결말은 살짝 아쉬운 편이었다. 개인적으로 닫힌 결말을 선호하는 입장으로서는 대여 금고의 비밀을 밝혀진 이후의 마무리가 조금은 어색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어두운 공간에서 미스터리의 진실을 밝혀내는 소설을 좋아한다면, 《데드키》를 추천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용은 잠들다
미야베 미유키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8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정말로 초능력은 있는 것일까? 만약 초능력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그에게 축복일까 재앙일까? 영화나 소설, 드라마 등에서 우리는 다양한 초능력을 가진 인물들을 만나게 된다. 초능력을 가진 주인공이 세상을 위협하는 악당을 물리치고 지구를 지키기도 하고, 혹은 자신이 가진 능력을 통해 원하는 사랑을 쟁취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영화 <엑스맨>에서는 초능력을 가진 인물들을 돌연변이로 여기며 멸시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며, 로맨스 영화 <어바웃 타임>에서는 시간을 조절하며 자신이 꿈꾸던 사랑을 이룬다. 그리고 또 다른 초능력을 가진 인물들의 이야기가 그려진다.

《화차》, 《모방범》으로 잘 알려진 미야베 미유키의 1992년 제45회 일본 추리작가협회상을 수상한 《용은 잠들다》가 새로운 옷을 입고 다시 출간되었다. 어느 마을에서 일어난 실종 사건을 시작으로 인간의 욕망을 읽어낼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소년들의 이야기를 더불어 전개한다. 일명 '사이코 메트리'라는 능력을 가진 소년들은 사물을 통해 이전의 생각과 일들을 모두 파악할 수 있으며, 사람들의 의식을 읽는 능력을 보여준다.

끊임없이 밀려오는 속마음, 속마음, 속마음의 홍수. 거기서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는 능력을 컨트롤해야 할 뿐 아니라 자기감정까지 자제해야 한다. 속된 말로 듣고도 못 들은 척, 보고도 못 본 척해야 한다. 보통 사람들은 다른 이가 말이나 태도로 표현하지 않는 한 주위 사람들의 속마음을 알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다소 문제가 있어도 살아갈 수 있다. (p. 144)

폭풍우 치던 밤, 도로를 달리던 젊은 기자 고사카는 도로 위에 서 있던 한 소년을 차에 태우게 된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인근 마을에서 아이 하나가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는 소식을 접하게 된다. 고사카는 이 실종 사건에 흥미를 가지게 되고, 밤새 부모를 도와 아이를 찾기 시작한다. 다음 날, 자신의 자전거를 가지러 가야겠다는 소년을 다시 만나게 된 고사카는 소년으로부터 충격적인 이야기를 듣게 된다. 누군가 열어놓은 맨홀 뚜껑으로 인하여 아이는 그 속에 빠졌을 것이고, 자신은 그 범인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고사카는 스스로 '사이킥'이라고 부르는 소년 신지의 말을 믿어야 할지 고민하던 차에, 신지와 함께 맨홀 뚜껑을 연 범인들이 있는 곳을 찾아가고자 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신지가 말한 신상을 가진 두 청년들을 만나게 된다. 고사카가 신지의 능력을 어느 정도 신뢰하게 될 즈음, 자신을 찾아온 오다 나오야라는 청년과의 대화를 통해 다시 신지의 능력을 의심하게 된다. 과연, 이 두 소년들은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이나무라 신지를 구해줘. 끌어내야 해. 푹 빠져 있는 꿈속에서 말이야. 쉽지는 않을 테지만 해야 해. 옷자락만 스쳐도 인연이라고 했어. 너는 부탁을 받은 거야. 부탁을 받은 이상 응해야만 해. 아니 내버려 둬도 상관 없겠지. 신경 쓰이지 않는다면. 하지만 그렇게 되진 않을 거야. 너도 마음이 아프겠지? (p. 212)

《용은 잠들다》는 젊은 기자 고사카의 시선으로 두 소년을 바라본다. 자신에게 주어진 엄청난 능력을 어떻게 활용해야 할지 모르던 두 소년은 각기 다른 환경으로 인해 다른 결과를 불러온다. 이미 '사이코 메트리'라는 능력을 알아차린 할머니로 인해서 신지는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고 부모의 울타리에서 보호받게 된다. 부모는 신지가 그 능력으로 하여금 받을 상처에서 최대한 그를 지켜주고자 노력한다. 하지만 그에 비해 오다 나오야는 불우한 가정환경으로 자신의 능력을 스스로 컨트롤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 그러나 혼자서 버틸 힘이 부족했던 나오야는 신지와는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게 된다.

미야베 미유키는 그들의 초능력을 마치 '용'에 비유하면서 그것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지 《용은 잠들다》를 통해서 전달한다. 자신을 지지해줄 사람들이 있어 신지의 경우에는 잠에서 깨어난 용을 더 가능성 있는 존재로 활용하고자 하지만, 나오야의 경우에는 잠에서 깨어난 용에 의해 오히려 고통받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그러기에 우리가 초능력이라는 것을 믿지 않기로 작정한 순간부터, 혹은 초능력이라는 것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부인하면서부터 우리들의 엄청난 능력을 잠재우고 있지는 않은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어쩌면 우리는 정말로 자기 자신 안에 용을 한 마리 키우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고요. 상상도 할 수 없는 능력을 갖춘, 신비한 모습의 용을 말이죠. 그 용은 잠들어 있거나, 깨어 있거나, 함부로 움직이고 있거나 병들어 있거나 하죠. (p. 469)

사람들이 흔히 가질 수 있는 일 편 적인 생각에 대해 물음을 남기긴 하지만 《용은 잠들다》을 읽으면서 이 소년들의 고뇌가 더 드러났더라면 그 물음이 더욱 강하게 다가오지 않았을까 싶다. 《용은 잠들다》은 한 어린아이의 실종 사건을 시작으로 이후에 또 다른 실종 사건이 일련적으로 발생하는 것을 기점으로 소설의 화자인 고사카의 이야기를 중심적으로 그려낸다. 그러나 그의 사랑 이야기에 너무 치우친 감이 있어 한편으로는 추리 소설만이 보여줄 수 있는 짜릿한 느낌은 크게 다가오지 않았다.

그저 《용은 잠들다》의 마지막 장을 덮는 순간, 스스로에게 남긴 하나의 질문을 끊임없이 곱씹을 뿐이다. 과연 내게는 어떤 용이 잠들어 있을지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조승연 이우일의 단어 인문학 1 - 만화로 보는 조승연 이우일의 단어 인문학 1
조승연 지음, 이우일 그림 / 김영사 / 2018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퐅랜, 무엇을 하든 어디로 가든 우린》으로 2년간의 포틀랜드 생활기를 그려낸 이우일 작가와 《언어천재 조승연의 이야기 인문학》으로 언어를 언어학, 역사학, 사회학으로 접근한 조승연 작가의 콜라보라니! 《만화로 보는 조승연 이우일의 단어 인문학》을 보자마자 좋아했던 두 작가의 컬래버레이션을 기대하며 집어 들 수밖에 없었다. 《퐅랜, 무엇을 하든 어디로 가든 우린》에서 보았던 이우일 작가의 디테일한 묘사가 담긴 그림체는 귀여운 만화로 변하고, 언어를 배우는 과정에서 우리가 알면 쉬울 어원을 찾아갔던 조승연 작가의 방법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책이었다.

수능 영어를 공부하면서 암기보다는 이해를 하고 싶었던 마음에 다양한 공부 방법을 찾아본 적이 있었다. 그중에서 꽤나 도움이 되었던 영어 공부 방법 중 하나가 바로 《만화로 보는 조승연 이우일의 단어 인문학》이 가진 방식이었다.




한국어 공부를 하면서도 볼 수 있었던 것이 단어를 이루고 있는 가장 작은 덩어리의 형태소끼리의 결합을 통해 다양한 어휘가 만들어지는 과정이었는데, 영어에서도 그 방식이 고스란히 사용되고 있었다. '개'라는 접두사를 이용해 다양한 표현법을 만들 수 있는 한국어처럼 영어에서도 같은 어원에서 출발한 어휘들이 상당히 많았는데, 《만화로 보는 조승연 이우일의 단어 인문학》는 그 어원의 역사를 친절한 설명을 통해 독자들에게 전달한다.

《언어천재 조승연의 이야기 인문학》에서 조승연 작가는 한 카테고리 속에 연관되는 단어들의 어원들을 파헤쳐 갔지만, 《만화로 보는 조승연 이우일의 단어 인문학》은 영단어에 집중하여 그 방식을 풀어간다. 특히 유럽 지역을 오가며 서로 같은 뜻의 단어들이 각기 어떤 방식으로 드러나게 되었고, 시간이 흘러 결국 어떤 단어를 만들게 되었는지의 과정을 중심으로 설명하며 하나의 단어를 비롯하여 비슷한 뿌리를 가진 단어들을 동시에 알 수 있도록 한다. 예를 들어, 유럽 지역에서는 h와 c가 비슷한 위치에서 사용되었다 어느 한 쪽으로 굳어지기도 하며, 북유럽의 W와 남유럽의 G 역시 비슷한 위치에서 사용되었다는 것을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단어를 위주로 설명한다.

사실 언어를 배우는 과정에서 그 언어를 어떻게 사용하게 되었는지 문화적인 배경을 알고 이해하는 과정은 언어 공부에 있어 쉽게 흥미를 가질 수 있고, 또 오래 지속시킬 수 있는 방법 중 하나라고 생각된다. 대입을 위한 수능 시스템을 위한 암기 형식이 아닌 이러한 접근 방식이었다면 영어에 대한 흥미가 더 오래 지속되지 않았을까 생각이 든다. 다시 영어 공부를 앞둔 성인이나 혹은 영어 단어 암기에 지친 중·고등학생들이 이 《만화로 보는 조승연 이우일의 단어 인문학》를 읽는다면, 다시 영어 공부에 대한 의지가 활활 타오를지도 모른다. 영어도 이렇게 재밌는 언어였구나,

하고.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겨드랑이와 건자두
박요셉 지음 / 김영사 / 2018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에세이를 좋아하지는 않지만, 어느 순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는 에세이들이 몇몇 있다. 작가의 개인적인 이야기가 마치 내 이야기처럼 느껴질 때부터 손에서 쉽게 놓지 못하게 된다. 《겨드랑이와 건자두》도 그런 에세이 중에 하나였다. 일러스트레이터로 일하고 있는 작가 박요셉은 좋아하는 것들로만 이루어진 인생을 기대하면서,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람이 되고자 한다. 그래서 《겨드랑이와 건자두》를 통해 그는 자신의 이야기를 누구보다 솔직하게 털어놓는다.

 

서른 살이 되던 해, 계획에도 없던 늦잠을 자고 일어나 평소보다 더 비참한 기분으로 한 해를 맞이했습니다. 누가 늦잠을 계획하고 자겠냐마는 새해 첫날만큼은 왠지 일찍 일어나야 할 것 같단 말이죠. 게다가 30대의 문을 열어젖히는 순간이었으니까요. 한참을 자책했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어째서 나는 쓸모 있는 사람이 되려는 걸까? 여러 가지 이유가 대번에 떠올랐지만 곧 잊고 말았습니다. (p. 5)

 

가벼운 마음으로 집어 든 《겨드랑이와 건자두》를 읽다 보니 어느새 피식 웃는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박요셉 작가만의 위트 있는 문체와 개그 코드가 맞아서 그런지 페이지를 넘길수록 그의 이야기들이 궁금해졌다. 읽으면서 공감이 되는 부분들을 기록하다 보니 꽤나 많은 부분들이 내 이야기처럼 느껴져서 더욱 좋았다.





대부분의 시간을 집에서 보낸다. 마치 한 마리 강아지처럼 집에서 나름대로 치열하게 살고 있다. "한국에는 사계절이 있다는데 과연 그렇습니까?" 하고 물어봐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시간이다. 이대로라면 생의 마지막을 집에서 맞는다 해도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할 수 있을 것 같다. (p. 142)

 

집에 있는 시간을 좋아하는 나로선 나와 같은 집순이, 집돌이들의 이야기에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밖으로 나가는 것을 꺼리거나 사람들을 만나는 것을 싫어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누군가 불러주면 기분이 좋다. (물론 당일에 만나자는 약속은 조금 꺼려진다.) '# 집에는 아무것도 없는데'에서 박요셉 작가는 바로 그런 이야기를 담아낸다. 집은 자신이 좋아하는 공간이고 그곳에서 하는 일은 자신이 좋아하는 일임을 이야기하며, 집에 대한 애정을 풀어낸다.

때로 밖을 좋아하는 지인들은 나에게 집에서 대체 무엇을 하기에 나오지 않냐고 묻는 경우가 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집에서 얼마나 할 수 있는 일들이 많은지 일일이 나열하지만, 그게 그리 설득력 있게 들리지는 않나 보다. 그때마다 이 글을 보여줄 수도 없고.




길고 길었던 프로젝트가 마무리되었다. 밤새워 일하면서 '이 일만 끝나면'으로 시작하는 수많은 것을 떠올리며 견뎌왔는데, 막상 모든 것이 끝나고 나니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는다. 급작스럽게 브레이크를 밟은 후 찾아오는 약간의 어색한 정적. 늘 겪는 일이지만 매번 낯설다. 그래도 이 시간에 느긋하게 그리고 싶은 것을 그리는 것만큼은 너무 소중하다. 새삼 깨닫는다. (p. 200)

 

4년간의 대학 시간을 마무리 짓는 막학기가 끝났다. 나에겐 길고 긴 프로젝트와도 같았다. 앞으로 어떤 길로 나아갈지 구체적으로 정하지는 못했지만, 막상 모든 것이 끝나고 나니 이전에 세워두었던 즐거운 계획 등은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는다. 그저 이 시간에 내가 좋아하는 일을 최대한 찾으려고 할 뿐.

박요셉 작가는 그것을 '연극'이라고 표현하며, 커튼콜이 내려진 그 시간의 정적을 이렇게 글로 표현한다. 그리고 그 고요한 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 새삼 깨닫는다. 누구에게나 그런 순간은 찾아올 것이다. 바쁜 일이 마무리되고 그 이후에 찾아오는 정적이 주는 소중함. 그의 모든 글들이 다 재밌고 즐거웠지만, 유독 이 글이 가장 좋았다.

 

이 외에도 글을 쓰는 과정을 요리 과정에 빗대어 표현하거나 강아지와의 일화 등등 너무도 닮은 구석이 느껴지는 글들이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저 일상에서 오는 소소함을 위트 있게 느끼고 싶다면, 《겨드랑이와 건자두》를 추천한다. 어쩌면, 당신의 일상과 닮아있을 지도 모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도쿄의 디테일 - 고객의 감각을 깨우는 아주 작은 차이에 대하여
생각노트 지음 / 북바이퍼블리 / 2018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아이디어는 어디서 나오는 걸까. 창의력과 상상력이 중요한 요즘 사회에서 '아이디어'라는 단어는 굉장히 큰 부담감으로 다가온다. 사람들이 기존에 전혀 하지 못하고, 누구든지 새롭고 신기함을 느낄 수 있을 만한 생각을 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에 스스로 갇혀 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도쿄의 디테일》의 경우에는 '아이디어'가 주는 부담감에서 벗어날 수 있는 시각을 보여준다.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데에는 생각보다 사소한 한 끗이 효과적이라고.

여러분에게는 어떤 사소한 아이디어가 있을지 궁금해집니다. 지하철, 버스, 택시 등 매일 이용하는 대중교통에서 불편했던 점을 떠올려보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기능을 생각해보면 어떨까요? 어찌 보면 우리 스스로가 가장 순수한 사용자일 수 있으니까요. 그리고 이런 접근과 시도는 사용자를 이해하는 사고를 키워줄 수 있을 것입니다. (p. 52)

'기록 활동가'라는 직함을 꿈꾸며 일상의 모든 것을 기록하고 그 기록에서 느낀 영감과 통찰, 관점을 다른 사람과 공유하는 일을 하고 싶었던 저자 생각노트는 '생각노트'라는 이름의 블로그를 통해 기록 활동을 시작한다. 《도쿄의 디테일》은 그가 2017년 12월 2일부터 6일까지 5일간의 일본 여행을 통해 찾은 모든 발견과 영감에 대한 이야기를 담아낸다. 여행 일정을 단순하게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방문한 장소의 전경을 상세하게 묘사하고 그런 특징을 갖기 위해 독특하게 시도한 접근 방식을 풀어낸다. 그의 설명을 따라가다 보면, 기존의 알고 있던 도쿄의 이미지와는 사뭇 다른 도쿄를 만나게 된다.

여행의 시작인 나리타 공항부터 일본을 대표하는 문구 백화점 이토야, 전통과 현대가 공존하며 우체국에서 멋진 상업 시설로 거듭난 키테를 지나 일본에서 오래된 서점 츠타야와 '무지'라는 이름으로 우리에게 너무나도 친숙한 무인양품까지 저자 생각노트는 모든 장소들이 어떤 특별함을 지녔는지 설명한다. 고객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사랑을 받을 수 있는 데에는 자신들이 무엇을 가장 중요하고, 또 고객에게 어떤 기억을 선사하고 싶은지를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마음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커뮤니케이션'이 가장 중요한 요즘, 고객과의 끊임없는 커뮤니케이션을 시도하려는 그들의 자세가 어쩌면 가장 중요한 디테일이 아닐까.





오래전, '아이디어는 불편함에서 나온다.'라는 말을 어렴풋이 들었다. 사용자들이 느끼는 불편함을 개선하기 위해서 나온 대안들은 때로 우리에게 신선한 느낌을 선사한다. 저자인 생각노트는 도쿄 곳곳에 숨겨 있는 사소한 한 끗들을 잡아낸다. 그저 아무렇지 않게 지나칠 수 있는 디테일들을 눈여겨보며, 그것이 고객들에게 어떤 작용을 했는지 찾아낸다. 그래서 그런지 카페에 앉아 《도쿄의 디테일》을 읽으면서, 괜스레 주변을 자꾸 살펴보는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이 카페 어딘가에 사소한 한 끗이 필요한 부분이 있지 않을까 하면서.

주목받지 못했다는 말은 새로운 기회가 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고객 입장에서는 색다른 신선함을 느낄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죠. 기존에 있는 것에서 불편함을 개선하기 위해 디테일을 보강하는 작업도 물론 의미 있지만, 존재하지 않던 분야에서 고객의 요구 사항을 파악해 새로운 기획으로 선보이는 작업도 넓은 의미의 디테일이 아닐까 싶습니다. (p. 110)

그동안 나는 어떤 기록들을 해왔을까. 블로그를 운영하는 같은 입장으로 (더구나 '작은 순간의 기록들'이라는 이름으로 운영 중이다.) '기록'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었다. 짧은 기록들이 모이다 보면 그것이 내게는 아주 특별한 디테일이 되지 않을까, 내가 한층 더 성장할 수 있는 그런 디테일이. 그래서 나는 오늘도 이렇게 나의 작은 순간을 기록한다.

어떤 여행이 되느냐의 기로는 기록에 달려 있다고 봅니다. 자신이 포착한, 혹은 우연히 포착된 어떤 특별한 부분을 발견했을 때 그 순간을 '찰나'로 떠나보낼지 '텍스트'로 써 내려갈지는 우리 손에 달려 있습니다. (p. 32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