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월 26일 온라인 토론회를 소개합니다~

[노동자연대 온라인 토론회]
진보 교육감 시대 12년, 성적표는?

- 일시: 5월 26일(목) 오후 8시
- 발제: 정원석 (교사, 전교조 조합원)

○ 참가 신청 https://bit.ly/0526-meeting
토론회 당일 오후 7시 30분에 유튜브 접속 링크를 보내드립니다.

현재 시·도 교육감 17명 중 14명이 진보 교육감입니다. 2010년 6명의 진보 교육감이 탄생한 이래 가히 진보 교육감 시대였죠.
그러나 이 기간 한국 교육의 변화는 대중의 기대에 한참 못 미쳤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교육청을 활용해 교육을 바꾸려고 전교조 교사들도 많이 뛰어들었는데요.
지난 12년 진보 교육감 시대를 돌아보며 그 성과가 왜 이렇게 초라한지, 더 나은 교육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살펴보려 합니다.

- 문의: 02-2271-2395, 010-4909-2026(문자 가능), mail@workerssolidarity.org

- 카카오톡 1:1 오픈채팅 ‘노동자연대 온라인 토론회’ https://open.kakao.com/o/sE3M42Ud

※ 노동자연대TV 채널에서 지난 온라인 토론회 영상들을 보실 수 있습니다.
https://youtube.com/c/노동자연대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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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진주 경상국립대에서 박사학위 청구논문 발표하고 조건부 통과했습니다. 심사위원들의 평가가 전보다 좋아졌습니다. 구술평가하러 6월 3째 주에 또 진주에 갈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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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2일에 열린 노동자연대 온라인 토론회 ‘마르크스주의와 우울한 마음’의 시청자 토론을 정리한 글입니다.
자본주의 체제가 만들어 내는 다양한 정신적 고통에 맞서, 체제를 바꾸는 투쟁에 참여해야 할 필요성에 대해 다양한 주장이 제기됐습니다.

https://wspaper.org/article/277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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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내용
“ADHD를 정신적 질환으로 보는 게 과연 합당할까요?”
저는 초등학교 교사입니다. 교사로 일하다 보면 소위 ‘주의력 결핍 과잉 행동장애(ADHD)’라고 불리는 걸 가진 듯 보이는 아동들을 종종 만나게 됩니다. 그에 관한 고민들을 나누고 싶습니다.

저는 사실 ADHD 같은 작은 문제를 정신적 질환으로 이름 붙이는 게 과연 합당한지 문제의식을 갖고 있습니다. 다른 아이들보다 집중력이 떨어지고 사회적 맥락을 잘 파악하지 못하고 과도한 행동을 할 때가 많다는 이유로 이것이 치료해야 할 질환이 된다면, 그것은 오히려 이 사회와 학교가 얼마나 틀에 박힌 인간만을 원하는지를 보여 주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또 다른 고민도 있는데요. 분명히 과잉 행동이나 주의력 결핍이 남보다 심한 아동들이 있는 게 사실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아동들이 이 체제와 학교에 내재된 시선 즉, 틀에 박히고 획일적인 시선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것이죠.

특히, 최근에 성인이 돼서도 ADHD가 남아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더 복잡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성인이 돼서야 ADHD로 진단받은 사람들은 하나같이 ‘내 학창 시절이 왜 그렇게 힘들었는지 지금이라도 알 수 있게 돼서 다행이다’, ‘좀 더 일찍 알았더라면 더 좋았을 텐데’ 하고 얘기합니다.

이 사회는 틀에 박힌 인간만을 길러 내려 하면서 거기서 벗어난 사람들을 낙인을 찍습니다. 그런데 ADHD라는 이름으로 진단받고 ‘치료’를 받는 게 오히려 당사자들한테 위안이 될 때가 많다는 점이 참 아이러니합니다. 동시에 다시금 ADHD라는 이름이 낙인이 돼서 당사자와 부모들을 괴롭히기도 하고요.

저는 이제 학교 안에서만 고민하다가 보면 답이 없음을 많이 느낍니다. 이런 사회에 맞서 투쟁할 때만이 우리가 희망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장시간·차별적 노동이야말로 우울 유발 요인입니다”
저는 25년차 직장인입니다. 올해로 50대에 접어든 저를 가장 우울하게 만드는 것은 제가 노동하는 데 너무 많은 세월을 허비했다는 생각입니다. 누군가는 행복한 소리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매주 끔찍한 월요일을 견디면서 쉬지 않고 25년을 일해 보니까, 좀 허무한 생각이 듭니다. 퇴직하면 여행도 가고 싶고 그런데, 벌써부터 무릎도 안 좋고 퇴직 전에 병이라도 얻으면 내 인생은 뭔가 하고 허망한 생각이 들 때가 많아요.

제가 다니는 회사에서 10년간 아르바이트를 했던 친구가 있었습니다. 이 친구는 우울증이 너무 심해서 정신과 치료까지 받아야 했는데요. 이 사회가 아르바이트생을 어떻게 대우하는지 적나라하게 보여 주는 〈나의 아저씨〉라는 유명한 드라마도 있죠.

이 친구가 1년 전에 정규직으로 취직했다고 연락이 왔어요. 그런데 정신과 선생님이 갑자기 왜 이렇게 상태가 좋아졌냐며 놀랐다고 합니다. 명함도 나오고, 직급도 생기고, 월급도 올랐습니다. 정규직이 이렇게 좋은 건지 몰랐다며 친구가 기뻐하는 모습을 봤습니다.

친구는 자신의 우울증이 개인 탓이 아니고 이 사회의 비인간적인 대우 때문이라고 말해 줬던 저에게 고맙다면서 한턱 크게 쓰기도 했습니다. 오늘 이 토론회에 초대했는데 이 토론이 친구에게도 큰 도움이 됐을 것 같습니다.

우울한 마음은 단지 개인의 정서적인 나약함이 아니라, 이 사회가 사람들의 삶을 파괴하고 피폐하게 만들기 때문에 생겨납니다.

“자신에게 향했던 화살의 방향을 체제로 돌려야 합니다”
저는 최근에 성인 ADHD를 진단받은 청년입니다.

저는 어렸을 때부터 ADHD 증상을 겪고 있었지만 언제나 제가 더 많이 노력하지 않았기 때문에 집중력이 약하고 매번 실수를 저지르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정신없이 굴러가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 증상을 가진 사람들이 우울이나 불안을 겪는 건 너무나 당연해 보입니다. 이 증상은 굉장히 흔하고 약 몇 알로 관리가 가능하지만, 약은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닙니다. 증상을 완화시키는 정도이죠.

당신이 매일 회사에 돌아와서 무력하고 우울한 이유는 명상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가 어디에서나 정신적 고통을 자라게 하는 끔찍한 사회이기 때문임을 알려 줘야 합니다. 그래서 스스로를 향했던 화살의 방향을 돌려서 자본주의를 공격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지금 겪는 고통도 자본주의가 사라지는 순간 갑자기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를 뒤엎는 과정 속에서 동지를 발견하고 자신이 무력한 개인이 아니라 사회를 뒤바꿀 수 있는 존재임을 깨닫는 과정에서 사라질 것입니다. 제가 느낀 어떤 힘도 그런 과정 속에서 생겨났습니다.

이번 토론회가 인상 깊었던 분들이 계시다면, 저처럼 혁명적 사회주의 단체인 노동자연대 가입하셔서 활동해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자본주의적 의학은 정신적 고통을 해결할 의지도 능력도 없습니다”
저는 의사입니다. 자본주의하에서 정신의학에 대해서 얘기하려고 합니다.

자본가는 노동자의 건강 문제를 아예 무시하지는 못합니다. 노동자들 없이는 이윤도 없기 때문이죠. 하지만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의 건강을 기계의 고장이나 소모 같은 문제로 여깁니다.

이런 문제들은 대부분 대증 치료라는 이름으로 이뤄지는 시간 끌기에 의존하죠.

노동조건과 직결된 근골격계 질환은 물론이고, 당뇨, 고혈압, 관절염, 갱년기 증상에 적용되는 처방들이 다 그런 식인데, 정신적 고통에 대한 정신의학의 대응도 마찬가지라고 봅니다.

물론 저는 시간 끌기식 처방이 무용지물이라고 생각지는 않습니다. 인체는 스스로 회복하는 능력이 있으므로 충분히 회복할 시간과 자원을 공급받을 수 있다면, 어설픈 개입보다 나은 효과를 볼 수도 있습니다. 자본주의적 의학이 인체와 정신에 대한 이해를 발전시키지 않는 상황에서, 섣부른 개입이나 약물 처방은 상황을 개선하지는 못하면서 부작용만 낳기도 합니다.

문제는 노동계급에게는 시간 끌기 처방만 있을 뿐 회복을 위한 지원이 제공되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특히 정신적 고통과 관련해서는 건강한 사회적 상호작용이 회복에 필수적인데요. 친구나 동료들 사이는 물론, 가족 사이의 관계도 뒤틀리게 만드는 자본주의의 압력 속에서 이런 지원을 받으려면 엄청나게 많은 시간과 돈이 필요합니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건강한 집단에 속해 협력적 관계 속에서 고통에서 회복되는 경험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정부에 이를 위한 지원을 더 하라고 요구해야 합니다. 급성기의 고통을 경감시켜 줄 약물 사용을 반대할 수는 없지만, 그걸로 ‘땡’ 치거나 그것조차 제공하기를 아까워하는 지배자들을 비판해야 합니다.

근본에서는 노동자들이 아래로부터 민주적으로 통제하는 사회에서만 정신적 고통은 크게 완화될 것이고, 정신과 육체에 대한 이해를 높일 진정한 과학도 발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투쟁 동참은 스스로를 구하고 다른 이를 구하는 방법입니다”
집단적 투쟁에 참가하는 게 정신 건강에도 좋다는 발제자의 지적에 크게 공감합니다. 또, 발제자도 언급했듯이 정신적 고통이 차별받는 집단에게 더 심각하다는 점에 대해서도 완전히 공감합니다.

저는 성소수자인데요. 한국에서도 조사를 보면 성소수자는 우울증을 겪거나 자살을 시도할 확률이 훨씬 높습니다. 최근에도 연이은 성소수자들의 죽음이 있어서, 정말 남의 일 같지가 않았는데요.

저는 10년 전쯤에 〈노동자 연대〉 신문에서 성소수자 차별의 뿌리에 대해서 쓴 글을 읽고서는 굉장히 충격을 받은 적이 있었는데요. 인류 역사에서 성소수자가 차별받지 않았던 때가 있었고, 우리가 앞으로 해방될 수 있는 사회가 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 기사를 읽고 당시 큰 위로를 받았어요. 내가 잘못된 게 아니라 세상이 잘못됐다고 얘기해 주는 것 같았거든요.

이후에 저는 사회를 바꾸는 여러 투쟁들에 연대하고, 때때로 그런 투쟁이 승리하는 경험을 했습니다. 이것은 저한테 굉장히 해방적인 경험이었습니다.

이런 투쟁 속에서 내가 무기력하거나 혐오스러운 존재가 아니라 다른 이들에게 힘을 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느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의 동등한 동지로서 살 수 있다는 그런 연대감이 주는 안정감과 자신감이 굉장히 컸어요.

자본주의에서 사는 한, 무기력이나 가족에게서 오는 여러 압력이 계속 침투해 올 수밖에 없을 겁니다.

그러나 이런 고통, 심지어 죽음에 이르는 고통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은 결국 그런 세상에 함께 맞서는 것입니다. 그런 투쟁만이 스스로를 구하면서 또 다른 사람도 함께 구하는 방법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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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2일에 열린 노동자연대 온라인 토론회 ‘마르크스주의와 우울한 마음’의 발제와 시청자 토론 요약을 글로 옮겼습니다.
오늘날 정신적 고통은 그야말로 핵심적인 사회 문제가 됐습니다. 도대체 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우울한 것일까요? 심리 상담을 해주는 TV 프로그램이 인기를 끌고 서점에도 심리 서적이 넘쳐납니다. 정신적 고통은 개인의 맘먹기와 행동 교정에 달린 문제일까요? 더 넓은 사회의 문제와 연결돼 있는 건 아닐까요? 우울과 불안 등 정신적 고통의 원인은 무엇이고, 어떻게 해야 그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 마르크스주의 관점에서 살펴봤습니다.
아직 못 보신 분이 계시다면 영상도 꼬~옥 보시기를 권해 드립니다.

https://wspaper.org/article/277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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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내용
이 기사는 같은 제목으로 열린 5월 12일 노동자연대 온라인 토론회(영상 보기)의 발제와 시청자 토론 요약을 문서화한 것이다. [ ] 안의 말은 독자의 이해를 돕고자 편집팀이 첨가한 것이다.

반갑습니다. 스코틀랜드에서 연대의 인사를 보냅니다. 오늘 저를 이 자리에 초청해 주신 노동자연대 동지들께 감사드립니다.

오늘 저는 제 책 《마음의 정치학: 마르크스주의와 정신적 고통》을 토대로 이 주제에 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책은 정신분석, 반(反)정신의학 등 여러 내용을 다루는데, 오늘 그 모든 내용을 다루지는 않을 것입니다. 시청자 토론에서 그런 내용을 추가로 다룰 수도 있겠지요.

정신적 고통은 사회적 쟁점
미국의 급진적 사회학자 C. 라이트 밀스가 1950년대 중엽에 쓴 글을 인용하면서 시작하겠습니다. 밀스는 실업에 관해 쓰면서 “개인적 어려움”과 “사회 문제”라고 하는 것을 구분했습니다.

인구 10만 명 도시에서 1명이 실업자라면 실업은 그 사람의 개인적 어려움이다. 이를 해결하려면 그 개인의 성격, 능력, 그에게 주어진 기회 등을 살펴봐야 한다.

그러나 노동 가능 인구가 5000만 명인 나라에서 1500만 명이 실업자라면 이것은 사회 문제다. 실업자 개개인에게 열린 기회만 봐서는 그 해법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런 사회는 기회를 낳는 구조 자체가 붕괴한 것이다. 문제를 제대로 규정하고 해법을 모색하려면 사회의 경제적·정치적 제도를 살펴봐야지 개개인의 처지나 성품만 봐서는 안 된다.

오늘날 정신 건강 악화와 정신적 고통은 21세기의 중요한 “사회 문제”가 됐습니다.

그리고 이번 토론회를 준비하면서, 한국도 청년·노년층의 우울증 발병률이 매우 높고 자살률이 OECD 국가들 중 가장 높은 등 정신적 고통이 심각한 문제임을 알게 됐습니다.

팬데믹
코로나 팬데믹은 분명 지난 2년 동안 더 많은 사람들을 정신적 고통에 빠뜨린 한 요인이었습니다.

시간 관계상 자세히 얘기하지는 않겠지만 사별, 고립, 수익 감소, 두려움 등이 정신 건강 문제를 일으키거나 기존의 정신 건강 문제를 악화시켰습니다.

이렇듯 팬데믹 때문에 정신적 고통이 매우 심해졌지만, 팬데믹 이전인 2017년에 제가 쓴 책에서 지적했듯이 이미 정신 건강 위기는 심각했습니다.

따라서, 저는 두 가지 물음에 답하고자 합니다. 첫째,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이런 정신적 고통의 대유행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둘째, 여기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마지막으로, 오늘날의 극심한 정신적 고통은 전혀 자연스럽거나 불가피한 것이 아님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다른 종류의 사회, 즉 이윤이 아니라 인간의 필요에 기초한 사회주의 사회에서는 정신적 고통이 오늘날보다 훨씬 덜한 문제일 것입니다.

모두 뇌 때문이다? 의학 모델
먼저, 의학 모델은 정신적 고통의 증상들이 뇌에서 비롯한다고 봅니다. 예컨대 세로토닌이나 도파민이라는 신경 전달 물질이 부족하면 우울증에 걸리고, 유전적 결함이 조현병을 낳는다는 식이죠. 그리고 이런 ‘질병’을 진단하면 다른 신체적 질병처럼 치료해야 한다고 하는데 여기서 치료란 대개 약물 치료입니다. 영국의 어떤 지역에서는 매달 평균 인구 6분의 1이 항우울제를 처방받기도 합니다.

사람들이 왜 의학 모델에 솔깃하는지는 이해할 만합니다. 우울감이나 극도의 불안감을 느끼거나 환청을 듣는 사람들에게, 그 증상이 진단명을 가진 의학적 질환이고 치료 가능하다 얘기는 커다란 안도감을 줄 수 있습니다. 통제가 가능하다는 느낌을 줄 수 있죠.

또, 약물이 우울감을 완화하거나 환청을 조절하는 등 증상 완화에 효과가 있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러니 그런 증상을 겪는 사람들이 그런 도움을 구하려 한다고 해서 낙인을 찍거나 수치심을 느끼게 해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그런 증상들을 치유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더구나 약물에는 체중 증가, 무기력 등 잘 알려진 부작용도 허다합니다.

질병?
반면, 우울증·불안증 같은 증상들을 질병으로 치부하는 관점에 반대하는 강력한 논거들도 있습니다. 그중 네 가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정신적 고통과 신체적 질환 사이에 가장 눈에 띄는 차이는 대부분의 정신적 고통에는 생물학적 표지가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치매나 간질처럼 조직 손상에서 비롯한 정신적 고통도 있죠.

둘째, 많은 경우 정신과 의사들은 분명 선한 사람들이지만, 그런 의사들과 긴밀히 연결된 제약 산업은 고통의 경감이 아니라 이윤을 추구합니다.

셋째, 정신적 고통의 원인을 설명할 때 의학 모델은 사회가 조직된 방식이 아니라 개인에 초점을 맞춥니다. 지배자들이 의학 모델을 적극 지지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죠. 지배자들에게 면죄부를 주기 때문입니다.

이는 전혀 새로운 일이 아닙니다. 역사를 보면 정신의학 이론과 진단이 과학적 증거가 아니라 대중적 편견과 우파 사상에 기초한 경우가 허다했습니다.

예컨대 나치가 집권했던 1930년대 독일에서는 정신의학자들이 우생학적 사상을 퍼뜨렸습니다. 정신 건강에 문제가 있거나 학습 장애가 있는 사람들은 유전적으로 열등하다는 것이었죠. 이에 따라 수많은 사람들이 강제로 불임 시술을 당하거나 학살당했습니다. 1973년까지도 미국정신의학회(APA)는 동성애를 정신병의 일종으로 규정했습니다.

넷째, 아동 학대 같은 경험으로 인한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가 정신 건강을 허약하게 만든다는 풍부한 과학적 증거가 있습니다.

그런 연구들에서 도출되는 핵심 메시지는, 우리가 성인이 돼서 겪는 정신적 고통들을 타고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고통은 삶의 경험과 타인과의 상호작용에서 비롯하는 것입니다. 누군가의 표현처럼 “험한 꼴을 많이 당하니 사람이 미치는” 것이죠.

자본주의와 정신적 고통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런 ‘험한 꼴’과 정신적 고통이 무작위로 분포하는 것이 아니라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분단선·불평등·천대를 반영한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50년 넘게 축적된 연구 결과를 보면, 카리브해 연안 국가에서 영국으로 이주한 사람들 사이에서 정신적 고통이 나타나는 비율이 높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반면, 카리브해 연안 국가들에서 정신적 고통이 나타나는 비율은 다른 곳들과 별 차이가 없습니다. 결국 영국의 인종차별이 원인인 것이죠. 이슬람 혐오와 정신적 고통 사이에도 분명한 연관성이 있습니다.
젠더에 따른 분포를 보면, 여성이 우울증·불안증 진단을 받는 비율은 남성의 2~3배에 달합니다.
1950년대 이래 여러 연구에서 가장 일관되게 나타나는 점은 빈곤과 계급이 정신적 고통의 핵심 결정 요인이라는 것입니다. 예컨대 영국에서는 1958년에 태어난 사람 1만 명의 생애를 추적하는 대규모 연구가 시행된 적이 있는데요, 이 연구 결과를 보면 7세에 가난했던 사람들이 45세에 각종 정신 건강 문제를 겪을 확률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훨씬 높았습니다.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이 연구가 제2차세계대전 종전 후 영국 경제가 지속적으로 성장하던 장기 호황 시대에 나고 자란 사람들을 대상으로 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1980년대 초 이래로 우리는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하에서 살고 있지요. 그리고 저는 이것이 오늘날 정신적 고통의 대유행을 이해하는 데서 핵심적이라고 주장하고자 합니다.

신자유주의
신자유주의는 1970년대 말에 장기 호황이 끝나고 이윤율 위기가 불거지자 전 세계 지배계급이 취한 대응입니다. 복지를 삭감하고, 노동조합 조직을 약화시키고, 민영화를 단행하고, 더 일반적으로는 노동자들을 ‘요람에서 무덤까지’ 서로 경쟁하게 했죠.

업무 관련 스트레스는 노동강도 강화뿐 아니라 노동자들이 자기 일에 대한 통제력이 줄어드는 것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특히 교육, 보건, 사회 복지 같은 부문의 작업은 성과 지표와 예산 삭감에 점점 더 짓눌리고 있죠.

이렇게 일과 삶에 대한 통제력을 잃은 상태를 마르크스는 소외라고 불렀습니다. 소외는 우리의 정신 건강 문제에서 핵심적으로 중요합니다. 소외는 자기 발전 능력, 창조적 노동 등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것들을 부정하고 짓밟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르크스에게 통제력 상실, 즉 소외에 맞선 투쟁은 인간 해방 투쟁의 핵심이었습니다.

계급투쟁
이와 관련해, 오늘날 정신적 고통의 대유행의 마지막 원인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지난 30년간 영국에서 (다른 나라들에서도) 정신적 고통이 크게 증대된 배경에는 계급투쟁 수준의 저조가 있습니다.

저는 이것이 오늘날의 심각한 정신 건강 악화를 이해하는 데에서 핵심이라고 주장하고자 합니다. 어떤 사람이 썼듯이 지난 30년 동안 사람들이 “피켓 라인에서 걱정 라인으로” 이동한 것이죠.

반면 집단적 투쟁에 나서면 외로움이나 무력감을 덜 느끼게 됩니다. 그러니 투쟁은 정신 건강 서비스를 지키고 쟁취하는 데에뿐 아니라 정신 건강에도 좋은 것입니다.

2020년에 영국에서 파업을 벌이던 한 대학 강사는 〈소셜리스트 워커〉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파업 중일 때의 대학이 그렇지 않을 때보다 더 대학답다고 말하는 동료들이 많다. 정작 파업을 하니 서로 대화와 토론을 나눌 시간이 생긴다. 수많은 토론이 벌어지고 있고 아주 들뜬 분위기다.”

정신 건강 악화를 없앨 수 있을까?
마지막 물음은 ‘무엇을 할 것인가?’ 입니다. 두 가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더 나은 정신 건강 서비스를 위해 투쟁해야 합니다. 즉 약물 치료에 덜 의존하고 상담 치료를 더 많이 하고 정신 건강 문제를 겪는 사람들의 경험에서 더 많이 배우려 하는 서비스를 쟁취해야 합니다. 예컨대 오늘날 많은 나라에는 ‘목소리 듣는 사람들의 네트워크’(HVN)가 있습니다. 환청을 겪는 사람들이 약물 치료 없이 증상을 다스리는 법을 배우는 네트워크죠.

둘째, 이토록 심각한 정신적 고통을 낳는 원인에도 맞서 싸워야 합니다.

1970년대 말 여성들의 우울증에 관한 중요한 매우 중요한 연구가 있었는데, 이 연구의 두 공저자는 매우 중요한 지적을 했습니다. “슬픔, 불행, 비통함은 모든 사회에서 불가피하지만 임상적 우울증은 전혀 그렇지 않다고 본다.”

그러니 우리는 더 많은, 더 나은, 그리고 약물을 덜 쓰는 서비스를 위해 투쟁해야 하지만, 무엇보다도 다른 종류의 사회, 즉 이윤이 아니라 인간의 필요에 기초한 사회주의 사회를 위해 투쟁해야 합니다.

발제자의 정리
정말 좋은 발언과 흥미로운 질문들 매우 감사합니다. 흥미로운 토론이었습니다.

질문들에 하나하나 답해 보겠습니다. 먼저, ADHD에 관한 질문에 답하겠습니다.

제 생각에, ADHD 진단과 약물 처방을 남발하는 것은 해결책이 아닙니다. 신경 다양성을 인정하는 관점이 필요합니다.

영국에서 큰 문제 하나는 학급당 학생 수가 너무 많아서 교사가 개별 학생들에게 쓸 수 있는 시간이 너무 적다는 것입니다. 미국에서는 너무나 많은 아이들이 리탈린[집중력 강화제]이나 항우울제를 처방받고 있습니다.

더 근본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예컨대 영국에서는 아이들이 아주 어린 나이 때부터 갈수록 심한 압력에 노출됩니다. 4~5세 아이들에게도 시험을 보게 하죠. 이건 아동 학대입니다.

아이들이 항상 친구들과 경쟁하지 않아도 되는 다른 교육을 위해 싸워야 합니다.

산후 우울증에 관해 질문한 동지가 있었습니다.

정신과 신체는 분명 서로 연결돼 있습니다. 호르몬이나 신체적 변화 같은 요인들은 분명 정신 상태에 영향을 미치죠.

스트레스가 문제인 것입니다. 문제의 출발점은 뇌나 몸이 아닙니다. 물론 분명 마음은 몸에 영향을 주고, 몸도 마음에 영향을 미칩니다.

부모 탓인가?
또 정신적 고통을 부모의 양육 탓으로 돌리는 것에 관한 매우 흥미로운 질문이 있었습니다.

당연히 그런 경우가 있을 겁니다. 예컨대 부모의 학대를 당하며 자란 아이가 정신적 고통을 겪는 경우에는 분명히 부모의 잘못이 있겠죠.

하지만 더 중요한 문제는 자본주의하에서 가족이 하는 구실입니다. 자본주의하에서 가족은 피난처이자 천국인 동시에 지옥입니다.

마르크스주의로 개인들의 차이를 설명할 수 있는지 묻는 매우 흥미로운 질문도 있었습니다.

당연히 사람마다 삶의 경험이 다릅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수많은 사람들의 정신 건강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분명 구조적 요인이죠. 예컨대 최근 정신적 고통의 수준이 이토록 높아진 것은 개개인의 문제 때문이 아니라 신자유주의가 사람들의 삶에 가하는 압력 때문입니다.

이와 관련해 한 동지의 발언이 생각납니다. 노동자들이 아프면 자본가들은 그런 노동자들을 고장난 기계처럼 취급한다고 하셨죠.

정신적 고통의 수준이 오늘날처럼 높은 것은 지배계급에도 문제입니다. 마치 목축업자들이 자기가 키우는 소가 행복하기를 바라듯, 지배자들은 행복한 노동자를 원합니다. 사용자들이 보기에 정신적 고통을 겪는 노동자들은 생산성이 떨어지니까요.

하지만 그들은 다른 자본가들과 경쟁하고 수익을 내야 하기에 노동자들이 최대한 빨리 복귀하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그 동지가 지적하신 것처럼 지배계급의 관심사는 온통 땜질식 처방에 있습니다.

조현병에 유전적 요인이 있냐는 질문도 있었습니다.

제 대답은 ‘아니오’입니다. 인간 게놈 프로젝트는 조현병은 물론 다른 어떤 정신 건강 문제를 유발하는 유전자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한 가지 희소식은, 오늘날에는 정신적 고통을 겪는 사람과 그 주변 인간관계에 주목하고 상담 치료에 기반해 그 정신적 고통의 근원을 찾는 접근법들이 발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핀란드에서 개발된 “열린 대화”라는 접근법이 있습니다. 약물 처방이 아니라, 치료받는 사람과 그 가족·지인들과 대화를 통해 지원책을 모색하는 방식입니다. 효과가 탁월합니다.

이처럼 관계를 중시하는 서비스, 사람들의 말에 진정 귀 기울이는 데에 기반한 서비스가 더 절실히 필요합니다.

투쟁
마지막으로, 한 동지가 성소수자 등 차별받는 집단에서 정신적 고통이 더 심각하게 나타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자본주의는 우리들에게 스스로를 혐오하도록 가르친다고 하셨는데, 전적으로 옳은 말입니다.

마르크스는 두 가지 이유에서 혁명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첫째, 오직 혁명을 통해서만 자본주의를 없앨 수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 혁명에 집단적으로 참여할 때에만 사람들은 마르크스가 말한 “과거의 오물”을 털어 낼 수 있습니다.

투쟁 과정에서 사람들은 인종차별적·성차별적 사상에 도전할 뿐 아니라, 우리 자신이 느끼는 열등감과 수치심도 떨쳐 낼 수 있습니다.

러시아 혁명의 가장 큰 성취는 물질적 성과나 소비에트가 아니라 러시아 노동계급의 정신적 성장이라고 영국 사회주의노동자당(SWP)의 창립자 토니 클리프는 지적했습니다.

우리가 오늘날 정신적 고통의 대유행에 맞서 싸우려면, 듣는 것을 중시하고 인간관계에 기초한 정신 건강 서비스를 요구하며 싸워야 할 뿐 아니라 다른 사회, 즉 소외·착취가 아니라 인간의 정신적·물질적 필요를 충족하는 데에 기초한 사회를 쟁취하기 위해 싸워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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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온라인 토론회 영상] 유우성 간첩 조작 사건과 이시원 공직기강비서관

https://youtu.be/IraLbVD6G8c

2013년 검찰과 국정원은 탈북민인 서울시 공무원을 간첩으로 몰려고 증거를 조작하고 진실을 은폐했습니다. 중국 공문서까지 위조했죠. 유우성 간첩 조작 사건입니다.
이 사건의 담당 검사로 증거 조작에 관여한 이시원이 윤석열 집권과 함께 대통령실 공직기강비서관으로 돌아왔습니다.
박근혜 정부 첫 해 왜 이런 간첩 조작 사건이 벌어졌을까요? 윤석열 정부 첫 해 이시원의 금의환향은 무엇을 뜻하는 걸까요? 이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살펴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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