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2일에 열린 노동자연대 온라인 토론회 ‘마르크스주의와 우울한 마음’의 발제와 시청자 토론 요약을 글로 옮겼습니다.
오늘날 정신적 고통은 그야말로 핵심적인 사회 문제가 됐습니다. 도대체 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우울한 것일까요? 심리 상담을 해주는 TV 프로그램이 인기를 끌고 서점에도 심리 서적이 넘쳐납니다. 정신적 고통은 개인의 맘먹기와 행동 교정에 달린 문제일까요? 더 넓은 사회의 문제와 연결돼 있는 건 아닐까요? 우울과 불안 등 정신적 고통의 원인은 무엇이고, 어떻게 해야 그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 마르크스주의 관점에서 살펴봤습니다.
아직 못 보신 분이 계시다면 영상도 꼬~옥 보시기를 권해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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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내용
이 기사는 같은 제목으로 열린 5월 12일 노동자연대 온라인 토론회(영상 보기)의 발제와 시청자 토론 요약을 문서화한 것이다. [ ] 안의 말은 독자의 이해를 돕고자 편집팀이 첨가한 것이다.
반갑습니다. 스코틀랜드에서 연대의 인사를 보냅니다. 오늘 저를 이 자리에 초청해 주신 노동자연대 동지들께 감사드립니다.
오늘 저는 제 책 《마음의 정치학: 마르크스주의와 정신적 고통》을 토대로 이 주제에 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책은 정신분석, 반(反)정신의학 등 여러 내용을 다루는데, 오늘 그 모든 내용을 다루지는 않을 것입니다. 시청자 토론에서 그런 내용을 추가로 다룰 수도 있겠지요.
정신적 고통은 사회적 쟁점
미국의 급진적 사회학자 C. 라이트 밀스가 1950년대 중엽에 쓴 글을 인용하면서 시작하겠습니다. 밀스는 실업에 관해 쓰면서 “개인적 어려움”과 “사회 문제”라고 하는 것을 구분했습니다.
인구 10만 명 도시에서 1명이 실업자라면 실업은 그 사람의 개인적 어려움이다. 이를 해결하려면 그 개인의 성격, 능력, 그에게 주어진 기회 등을 살펴봐야 한다.
그러나 노동 가능 인구가 5000만 명인 나라에서 1500만 명이 실업자라면 이것은 사회 문제다. 실업자 개개인에게 열린 기회만 봐서는 그 해법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런 사회는 기회를 낳는 구조 자체가 붕괴한 것이다. 문제를 제대로 규정하고 해법을 모색하려면 사회의 경제적·정치적 제도를 살펴봐야지 개개인의 처지나 성품만 봐서는 안 된다.
오늘날 정신 건강 악화와 정신적 고통은 21세기의 중요한 “사회 문제”가 됐습니다.
그리고 이번 토론회를 준비하면서, 한국도 청년·노년층의 우울증 발병률이 매우 높고 자살률이 OECD 국가들 중 가장 높은 등 정신적 고통이 심각한 문제임을 알게 됐습니다.
팬데믹
코로나 팬데믹은 분명 지난 2년 동안 더 많은 사람들을 정신적 고통에 빠뜨린 한 요인이었습니다.
시간 관계상 자세히 얘기하지는 않겠지만 사별, 고립, 수익 감소, 두려움 등이 정신 건강 문제를 일으키거나 기존의 정신 건강 문제를 악화시켰습니다.
이렇듯 팬데믹 때문에 정신적 고통이 매우 심해졌지만, 팬데믹 이전인 2017년에 제가 쓴 책에서 지적했듯이 이미 정신 건강 위기는 심각했습니다.
따라서, 저는 두 가지 물음에 답하고자 합니다. 첫째,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이런 정신적 고통의 대유행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둘째, 여기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마지막으로, 오늘날의 극심한 정신적 고통은 전혀 자연스럽거나 불가피한 것이 아님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다른 종류의 사회, 즉 이윤이 아니라 인간의 필요에 기초한 사회주의 사회에서는 정신적 고통이 오늘날보다 훨씬 덜한 문제일 것입니다.
모두 뇌 때문이다? 의학 모델
먼저, 의학 모델은 정신적 고통의 증상들이 뇌에서 비롯한다고 봅니다. 예컨대 세로토닌이나 도파민이라는 신경 전달 물질이 부족하면 우울증에 걸리고, 유전적 결함이 조현병을 낳는다는 식이죠. 그리고 이런 ‘질병’을 진단하면 다른 신체적 질병처럼 치료해야 한다고 하는데 여기서 치료란 대개 약물 치료입니다. 영국의 어떤 지역에서는 매달 평균 인구 6분의 1이 항우울제를 처방받기도 합니다.
사람들이 왜 의학 모델에 솔깃하는지는 이해할 만합니다. 우울감이나 극도의 불안감을 느끼거나 환청을 듣는 사람들에게, 그 증상이 진단명을 가진 의학적 질환이고 치료 가능하다 얘기는 커다란 안도감을 줄 수 있습니다. 통제가 가능하다는 느낌을 줄 수 있죠.
또, 약물이 우울감을 완화하거나 환청을 조절하는 등 증상 완화에 효과가 있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러니 그런 증상을 겪는 사람들이 그런 도움을 구하려 한다고 해서 낙인을 찍거나 수치심을 느끼게 해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그런 증상들을 치유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더구나 약물에는 체중 증가, 무기력 등 잘 알려진 부작용도 허다합니다.
질병?
반면, 우울증·불안증 같은 증상들을 질병으로 치부하는 관점에 반대하는 강력한 논거들도 있습니다. 그중 네 가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정신적 고통과 신체적 질환 사이에 가장 눈에 띄는 차이는 대부분의 정신적 고통에는 생물학적 표지가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치매나 간질처럼 조직 손상에서 비롯한 정신적 고통도 있죠.
둘째, 많은 경우 정신과 의사들은 분명 선한 사람들이지만, 그런 의사들과 긴밀히 연결된 제약 산업은 고통의 경감이 아니라 이윤을 추구합니다.
셋째, 정신적 고통의 원인을 설명할 때 의학 모델은 사회가 조직된 방식이 아니라 개인에 초점을 맞춥니다. 지배자들이 의학 모델을 적극 지지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죠. 지배자들에게 면죄부를 주기 때문입니다.
이는 전혀 새로운 일이 아닙니다. 역사를 보면 정신의학 이론과 진단이 과학적 증거가 아니라 대중적 편견과 우파 사상에 기초한 경우가 허다했습니다.
예컨대 나치가 집권했던 1930년대 독일에서는 정신의학자들이 우생학적 사상을 퍼뜨렸습니다. 정신 건강에 문제가 있거나 학습 장애가 있는 사람들은 유전적으로 열등하다는 것이었죠. 이에 따라 수많은 사람들이 강제로 불임 시술을 당하거나 학살당했습니다. 1973년까지도 미국정신의학회(APA)는 동성애를 정신병의 일종으로 규정했습니다.
넷째, 아동 학대 같은 경험으로 인한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가 정신 건강을 허약하게 만든다는 풍부한 과학적 증거가 있습니다.
그런 연구들에서 도출되는 핵심 메시지는, 우리가 성인이 돼서 겪는 정신적 고통들을 타고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고통은 삶의 경험과 타인과의 상호작용에서 비롯하는 것입니다. 누군가의 표현처럼 “험한 꼴을 많이 당하니 사람이 미치는” 것이죠.
자본주의와 정신적 고통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런 ‘험한 꼴’과 정신적 고통이 무작위로 분포하는 것이 아니라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분단선·불평등·천대를 반영한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50년 넘게 축적된 연구 결과를 보면, 카리브해 연안 국가에서 영국으로 이주한 사람들 사이에서 정신적 고통이 나타나는 비율이 높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반면, 카리브해 연안 국가들에서 정신적 고통이 나타나는 비율은 다른 곳들과 별 차이가 없습니다. 결국 영국의 인종차별이 원인인 것이죠. 이슬람 혐오와 정신적 고통 사이에도 분명한 연관성이 있습니다.
젠더에 따른 분포를 보면, 여성이 우울증·불안증 진단을 받는 비율은 남성의 2~3배에 달합니다.
1950년대 이래 여러 연구에서 가장 일관되게 나타나는 점은 빈곤과 계급이 정신적 고통의 핵심 결정 요인이라는 것입니다. 예컨대 영국에서는 1958년에 태어난 사람 1만 명의 생애를 추적하는 대규모 연구가 시행된 적이 있는데요, 이 연구 결과를 보면 7세에 가난했던 사람들이 45세에 각종 정신 건강 문제를 겪을 확률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훨씬 높았습니다.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이 연구가 제2차세계대전 종전 후 영국 경제가 지속적으로 성장하던 장기 호황 시대에 나고 자란 사람들을 대상으로 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1980년대 초 이래로 우리는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하에서 살고 있지요. 그리고 저는 이것이 오늘날 정신적 고통의 대유행을 이해하는 데서 핵심적이라고 주장하고자 합니다.
신자유주의
신자유주의는 1970년대 말에 장기 호황이 끝나고 이윤율 위기가 불거지자 전 세계 지배계급이 취한 대응입니다. 복지를 삭감하고, 노동조합 조직을 약화시키고, 민영화를 단행하고, 더 일반적으로는 노동자들을 ‘요람에서 무덤까지’ 서로 경쟁하게 했죠.
업무 관련 스트레스는 노동강도 강화뿐 아니라 노동자들이 자기 일에 대한 통제력이 줄어드는 것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특히 교육, 보건, 사회 복지 같은 부문의 작업은 성과 지표와 예산 삭감에 점점 더 짓눌리고 있죠.
이렇게 일과 삶에 대한 통제력을 잃은 상태를 마르크스는 소외라고 불렀습니다. 소외는 우리의 정신 건강 문제에서 핵심적으로 중요합니다. 소외는 자기 발전 능력, 창조적 노동 등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것들을 부정하고 짓밟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르크스에게 통제력 상실, 즉 소외에 맞선 투쟁은 인간 해방 투쟁의 핵심이었습니다.
계급투쟁
이와 관련해, 오늘날 정신적 고통의 대유행의 마지막 원인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지난 30년간 영국에서 (다른 나라들에서도) 정신적 고통이 크게 증대된 배경에는 계급투쟁 수준의 저조가 있습니다.
저는 이것이 오늘날의 심각한 정신 건강 악화를 이해하는 데에서 핵심이라고 주장하고자 합니다. 어떤 사람이 썼듯이 지난 30년 동안 사람들이 “피켓 라인에서 걱정 라인으로” 이동한 것이죠.
반면 집단적 투쟁에 나서면 외로움이나 무력감을 덜 느끼게 됩니다. 그러니 투쟁은 정신 건강 서비스를 지키고 쟁취하는 데에뿐 아니라 정신 건강에도 좋은 것입니다.
2020년에 영국에서 파업을 벌이던 한 대학 강사는 〈소셜리스트 워커〉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파업 중일 때의 대학이 그렇지 않을 때보다 더 대학답다고 말하는 동료들이 많다. 정작 파업을 하니 서로 대화와 토론을 나눌 시간이 생긴다. 수많은 토론이 벌어지고 있고 아주 들뜬 분위기다.”
정신 건강 악화를 없앨 수 있을까?
마지막 물음은 ‘무엇을 할 것인가?’ 입니다. 두 가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더 나은 정신 건강 서비스를 위해 투쟁해야 합니다. 즉 약물 치료에 덜 의존하고 상담 치료를 더 많이 하고 정신 건강 문제를 겪는 사람들의 경험에서 더 많이 배우려 하는 서비스를 쟁취해야 합니다. 예컨대 오늘날 많은 나라에는 ‘목소리 듣는 사람들의 네트워크’(HVN)가 있습니다. 환청을 겪는 사람들이 약물 치료 없이 증상을 다스리는 법을 배우는 네트워크죠.
둘째, 이토록 심각한 정신적 고통을 낳는 원인에도 맞서 싸워야 합니다.
1970년대 말 여성들의 우울증에 관한 중요한 매우 중요한 연구가 있었는데, 이 연구의 두 공저자는 매우 중요한 지적을 했습니다. “슬픔, 불행, 비통함은 모든 사회에서 불가피하지만 임상적 우울증은 전혀 그렇지 않다고 본다.”
그러니 우리는 더 많은, 더 나은, 그리고 약물을 덜 쓰는 서비스를 위해 투쟁해야 하지만, 무엇보다도 다른 종류의 사회, 즉 이윤이 아니라 인간의 필요에 기초한 사회주의 사회를 위해 투쟁해야 합니다.
발제자의 정리
정말 좋은 발언과 흥미로운 질문들 매우 감사합니다. 흥미로운 토론이었습니다.
질문들에 하나하나 답해 보겠습니다. 먼저, ADHD에 관한 질문에 답하겠습니다.
제 생각에, ADHD 진단과 약물 처방을 남발하는 것은 해결책이 아닙니다. 신경 다양성을 인정하는 관점이 필요합니다.
영국에서 큰 문제 하나는 학급당 학생 수가 너무 많아서 교사가 개별 학생들에게 쓸 수 있는 시간이 너무 적다는 것입니다. 미국에서는 너무나 많은 아이들이 리탈린[집중력 강화제]이나 항우울제를 처방받고 있습니다.
더 근본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예컨대 영국에서는 아이들이 아주 어린 나이 때부터 갈수록 심한 압력에 노출됩니다. 4~5세 아이들에게도 시험을 보게 하죠. 이건 아동 학대입니다.
아이들이 항상 친구들과 경쟁하지 않아도 되는 다른 교육을 위해 싸워야 합니다.
산후 우울증에 관해 질문한 동지가 있었습니다.
정신과 신체는 분명 서로 연결돼 있습니다. 호르몬이나 신체적 변화 같은 요인들은 분명 정신 상태에 영향을 미치죠.
스트레스가 문제인 것입니다. 문제의 출발점은 뇌나 몸이 아닙니다. 물론 분명 마음은 몸에 영향을 주고, 몸도 마음에 영향을 미칩니다.
부모 탓인가?
또 정신적 고통을 부모의 양육 탓으로 돌리는 것에 관한 매우 흥미로운 질문이 있었습니다.
당연히 그런 경우가 있을 겁니다. 예컨대 부모의 학대를 당하며 자란 아이가 정신적 고통을 겪는 경우에는 분명히 부모의 잘못이 있겠죠.
하지만 더 중요한 문제는 자본주의하에서 가족이 하는 구실입니다. 자본주의하에서 가족은 피난처이자 천국인 동시에 지옥입니다.
마르크스주의로 개인들의 차이를 설명할 수 있는지 묻는 매우 흥미로운 질문도 있었습니다.
당연히 사람마다 삶의 경험이 다릅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수많은 사람들의 정신 건강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분명 구조적 요인이죠. 예컨대 최근 정신적 고통의 수준이 이토록 높아진 것은 개개인의 문제 때문이 아니라 신자유주의가 사람들의 삶에 가하는 압력 때문입니다.
이와 관련해 한 동지의 발언이 생각납니다. 노동자들이 아프면 자본가들은 그런 노동자들을 고장난 기계처럼 취급한다고 하셨죠.
정신적 고통의 수준이 오늘날처럼 높은 것은 지배계급에도 문제입니다. 마치 목축업자들이 자기가 키우는 소가 행복하기를 바라듯, 지배자들은 행복한 노동자를 원합니다. 사용자들이 보기에 정신적 고통을 겪는 노동자들은 생산성이 떨어지니까요.
하지만 그들은 다른 자본가들과 경쟁하고 수익을 내야 하기에 노동자들이 최대한 빨리 복귀하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그 동지가 지적하신 것처럼 지배계급의 관심사는 온통 땜질식 처방에 있습니다.
조현병에 유전적 요인이 있냐는 질문도 있었습니다.
제 대답은 ‘아니오’입니다. 인간 게놈 프로젝트는 조현병은 물론 다른 어떤 정신 건강 문제를 유발하는 유전자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한 가지 희소식은, 오늘날에는 정신적 고통을 겪는 사람과 그 주변 인간관계에 주목하고 상담 치료에 기반해 그 정신적 고통의 근원을 찾는 접근법들이 발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핀란드에서 개발된 “열린 대화”라는 접근법이 있습니다. 약물 처방이 아니라, 치료받는 사람과 그 가족·지인들과 대화를 통해 지원책을 모색하는 방식입니다. 효과가 탁월합니다.
이처럼 관계를 중시하는 서비스, 사람들의 말에 진정 귀 기울이는 데에 기반한 서비스가 더 절실히 필요합니다.
투쟁
마지막으로, 한 동지가 성소수자 등 차별받는 집단에서 정신적 고통이 더 심각하게 나타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자본주의는 우리들에게 스스로를 혐오하도록 가르친다고 하셨는데, 전적으로 옳은 말입니다.
마르크스는 두 가지 이유에서 혁명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첫째, 오직 혁명을 통해서만 자본주의를 없앨 수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 혁명에 집단적으로 참여할 때에만 사람들은 마르크스가 말한 “과거의 오물”을 털어 낼 수 있습니다.
투쟁 과정에서 사람들은 인종차별적·성차별적 사상에 도전할 뿐 아니라, 우리 자신이 느끼는 열등감과 수치심도 떨쳐 낼 수 있습니다.
러시아 혁명의 가장 큰 성취는 물질적 성과나 소비에트가 아니라 러시아 노동계급의 정신적 성장이라고 영국 사회주의노동자당(SWP)의 창립자 토니 클리프는 지적했습니다.
우리가 오늘날 정신적 고통의 대유행에 맞서 싸우려면, 듣는 것을 중시하고 인간관계에 기초한 정신 건강 서비스를 요구하며 싸워야 할 뿐 아니라 다른 사회, 즉 소외·착취가 아니라 인간의 정신적·물질적 필요를 충족하는 데에 기초한 사회를 쟁취하기 위해 싸워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