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의 불완전함이야말로 사람들이 음악을 찾아 듣는 이유 중의 하나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정말로 어떤 음악은 언어 너머에 있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그런 음악을 만났을 때 우리는 망연한 침묵 속에 머문다. 이 낯선 경이에 어울리는 단어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때까지 갖고 있던 언어로는 방금 다가온 감동을 설명할 수가 없다. 그때, 말하고 싶지만 말할 수 없는 순간에 세계는 확장된다. 우리는 언어를 뒤늦게 발명하고 재조합해 세계의, 음악의, 감동의 뒤를 좇아야 한다.
그 추적은 여정의 형태를 띨 것이다. 클래식 음악의 한 곡 한 곡이 바다라면 각 곡들의 수많은 연주들은 사람들에게 알려진 각각의 해변들이다. 이 수천 개의 바다와 수만 개의 해변 중에서 '나의' 바닷가를 발견하고 거기에 마음을 누였다가 그때 떠오른 상념을 단서 삼아 다시 다른 영토를 찾아 떠나는 것. 이는 점진적으로 세계를 넓혀가는 모험이다. 한 장의 음반은 하나의 여정이다. 16-17
덫에 걸린 기분이었다. 분열하는 패턴이라는 둣 화려한 색조의 키치적 요소라는 둥 작가의 특징이랍시고 알아두었던 사전 지식은 그 검은 방안에서는 아무런 효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나는 거리를 두지 못하고 멱살을 붙잡힌 채 분열 운운하는 해설이 지시하려던 '야요이 쿠사마'를 향해 곧장 끌려 들어갔던 것이다.
쿠사마 야요이 - 점에 대한 강박. 무한한 거울방
작품을 이해하고 분류하려는 두뇌의 오랜 욕망에 앞서 몸과 마음이 먼저 작품과 연결되는 순간은 각별한 데가 있다. 전시물이라는 매개를 통해 관람자인 '나'의 일부와 작가의 일부가 만나서 예기치 못한 방향으로 감상을 이끈다. 일종의 공명 현상이다. 누군가가 자기 삶의 일부를 떼어 만든 작품은, 그 떼어진 삶이 가지고 있던 인식 및 감정의 파장을 품고 있다. 이 파장은 감상을 통해 다른 이에게 전달된다. 이때 작품의 파장이 관람하는 이의 삶이 갖고 있는 다양한 파장 중의 일부와 비슷한 형태를 그리면, 관람하는 이의 내면은 공명 현상을 일으키면서 크게 출렁이는 것이다. 출렁인다. 예상치 못했던 체험 또는 인식을 향해 자기도 모르게 떠밀려간다. 44-45
쿠사마 야요이
대부분의 교양 미술 교육이 실패하는 지점이 여기다. 작품들을 범주화시키고 거기에 인덱스를 붙이고 정리가능한 데이터로 만들어 주입하는 방식은 질문이 던져질 가능성을 높이기는커녕 일축하려고 애쓴다. 이는 근대에 들어 발생한 '일반 대중'이 만들어낸 중산층-교양-지식의 부작용이다. 부르주아를 향한 계급적 열망이 투영된 '교양'은 당혹하기를 두려워한다. 미술에 대한 '당혹하기'는 교양-지식의 미달, 따라서 자격 미달의 신호로써 (숨기고 싶었던) 본래 계급의 발각으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해시켜주고 조직시켜주고 분류시켜주는' 지식만이 당혹스러움을 두려워하는 이들을 구원할 수 있다. 이 지식들은 작품을 대면했을 때 그것을 질문의 대상이 아니라 이미 알고 있는 것들의 세계, 섭렵하고 정복한 세계 안에 구겨넣으려 애쓴다. 이때 지식은 수렵과 착취의 도구로 전락한다. 이런 마음가짐으로 임하는 전시 관람은 작품 앞에 '가서' 발견하고 탐험하는 모험이 아니라 작품을 이미 구획지어진 자신의 좁은 박물관 안으로 '데려와서' 수탈하는 행위로 변질된다. 45-46
<트리스탄과 이졸데>전주곡의 불온한 매력이 집요한 반음계 화음에서 온다는 점을 확인하고 온음계에 비해 반음계가 어떤 식으로 미완의 느낌을 주는지를 대략적으로나마 이해하고 나면 반음계 화성이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이교도적인 주제를 어떻게 펼쳐내고 있는지를 알게 된다. 작품의 주제와 선율이 반음계에 대한 이해를 통해 하나로 합쳐지는 순간은 특수상대성이론 공식 속의 에너지 변환값을 바라볼 때처럼 경이롭다. 59
각각의 예술 작품은 예술 행위의 종착지가 아니라 창작자와 감상자 사이에 놓인 촉매이며, 그 촉매에 의해 빛과 열을 뿜는 것은 작품을 만들고 감상하는 인간들 자신이다. 85
언제나 열려 있는 문은 밀고 닫는 행위를 불필요하게 만듦으로써 문의 의미를 잃고 만다. 그것은 문과 닮은 무엇이지만 문은 아니다. 문을 문답게 만드는 것은 그럴듯한 생김새나 재질이 아니라 열고 닫고 두드리는 행위들이다. 묻지 않고서 얻은 지식은 언제나 열려 있는 문과 같다. 그 지식은 답과 비슷한 모양이지만 답이 아니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문구는 아는 것에 따라 보이게 된다는 뜻이기도 해서, 구하고 묻는 과정을 생략한 채 쌓은 지식들은 어떤 신비나 놀라움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 설계도 없이 재료만 쌓아놓고 집이 지어지기를 기다리는 것과 비슷하다. 이런 비극을 막기 위해서는 '아는 만큼 보인다'를 더 능동적으로 적용해야 한다. 더 잘 보기 위해 더 잘 알고 싶어하자는 것이다.
오로지 매혹만이 이러한 능동성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무언가를 탐구하고자 할 때에는 언제나 그 대상에 대한 매혹을 마음속에 품어야 한다. 교양에 대한 막연한 욕구 같은 부차적인 욕망은 지식을 얻는 것 자체에 만족해버리므로 결코 대상에 대한 애정을 대신하지 못하다. 93-94
빛과 소리와 시간이 서로 엮이고 풀리기를 반복하며 구축한 이 아름다운 구조물은 어디로 향하는 것일까? 월터 머치는 바흐나 젤렌카가 푸가에 대해 말했을 법한 이야기를 한다. 즉, 모른다. 영화는 다 만들어진 순간에조차 완결되지 않는다. 심지어 상영이 끝난 뒤에도 영화는 끝없이 나아가며, 그 영화를 감상한 이는 솟아올라간 영화의 궤적을 따라 시선을 옮김으로써 우주의 어떤 지점을 바라보게 된다. 영화 속의 어떤 순간이 아무리 아름답더라도 그 자체가 목적이 되지는 않는다. 그것들은 로켓 혹은 은하철도이며, 관객들은 그 순간들에 탑승해 결국에는 우주로 향한다. 한 편의 영화는 활주로이며 비행은 영화가 끝났을 때 관객들의 마음과 머릿속에서 비로소 시작되는 것이다. 그렇게 당도할 저 너머의 우주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129
그가 보는 것은 영원한 과정이다. 너무나도 많은 우연들과 예기치 않은 발견들, 의도하지 않았던 효과들, 앞뒤로 이어진 쇼트들의 물결 위로 던져진 돌처럼 마음에 파문을 일으키는 짧은 순간들.....
월터 머치는 관객들이 영화에서 감동을 받는 건 바로 그 모호함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영화 안의 복잡한 서사 및 편집 구조에는 객관적인 해답이 주어지지 않는 빈 공간이 발생하는데, 관객의 내면이 그 빈 공간을 점유하는 과정에서 비로소 그 영화는 관객의 일부가 된다. 즉 '이 영화는 나를 위한 영화'라고 느낀다는 것이다. 영화 내의 가능한 모든 요소를 효과적인 원칙을 통해 배치한 와중에도 미처 발견하지 못한, 태어나버린, 마치 성소처럼 남겨진 빈방. 1인실. 누군가가 그 작은 방에 들어가 각자의 문을 잠그는 순간 영화는 완성된다. 비행이 시작된다. 130
사진이 동시대에서 벗어나 노스탤지어로 진입하는 순간, 사진이 품고 있는 고발의 메시지는 '그떄는 그랬었지'라는 회고의 형식으로 바뀌거나 아예 '겪어본 적 없는 시대의 일'로 타자화된다. 이 두 가지 반응의 공통점은 '무해하다'는 것이다. 이 무해함은 '우리(시공간을 넘어선 희로애락의 공동체)는 같은 인간'이라는 <인간 가족전>적인 반응으로 이어진다. 질문을 필요로 하지 않는, 타성에 젖은 휴머니즘은 어떤 고발도 발견하지 못한다. 205
화가 밀레는 <만종>이나 <이삭 줍는 사람들>과 같은 대표작에서 노동하는 농민들의 삶을 많이 다루었다. 이 그림들 속의 노동은 정적이며 거의 종교적일 정도로 엄숙해 보인다. 그 엄숙함은 자기 완결적이어서 질문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밀레의 그림 속 인물들은 노동을 노동 이상의 행위로 치환함으로써 노동과 농민의 삶에 대한 질문을 차단시킨다. 질문을 던지지 않았기 때문에 밀레의 농민 그림들은 열렬한 대중적 인기를 끌었다. 인간과 노동을 감동과 숭고함으로 치환하면서 불안의 그림자를 지워버렸기 때문이다. 206
그러나 화면 전체를 장악한 피사체가 강렬한 감정적 제스처를 뿜어내는 순간, 사진이 주는 이야기는 완결되어버린다. 사진을 장악한 강력한 표정과 몸짓은 사진을 보는 이의 시야를 제한하고 질문을 던질 기회를 앗아간다. 하나의 피사체가 이야기의 시작과 끈을, 한 장의 사진이라는 작은 세계의 의미계를 장악하는 순간에 그 피사체는 사진 속의 신이 된다. 이것은 휴머니즘이라는 이름으로 인간의 부조리를 일거에 상쇄시키는 편리한 숭고함이다. 던져질 수도 있었던 질문과 불편함은 피사체의 표정과 몸짓을 통해 희로애락이라는 '인류 보편적'인 형질을 획득하면서 보는 이를 안심시킨다. 보는 이는 마음 편히 감동에 임하기만 하면 된다.
이렇게 되면 사진은 고발할 힘을 잃어버린다. 최민식의 사진들이 휴머니즘적인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작품들이라고 불리는 순간, 휴머니즘은 고발이라는 본래의 의도를 무력화시키는 방향으로 작동한다. 감동의 형태로 번역된 휴머니즘은 민중을 위한 것일 수 있는가? 207
그럼 속도는 포기하더라도 보다 정확한 대응을 할 수 있다면 어떨까? 이쪽도 어렵다. 기초적인 행동심리학을 소개하는 10장은 위기에 직면한 인간이 판단 오류를 저지를 확률이 높아진다는 점을 지적한다. 자신이 믿는 것을 가장 객관적으로 좋은/옳은 것이라고 믿는 확증 편향, 그리고 불리한 상황에 처할수록 도박적인 선택에 이끌림을 증명한 전망 이론의 관찰 결과가 그 증거로 제시된다. 실제로도 적을 눈앞에 둔 상태에서 도박하듯 정책을 결정한 경우는 역사 속에서 수없이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강경 성향의 더 큰 문제는 해당 정책이 실패했을 경우 그 원인이 정책 자체의 방향이 아니라 강경함의 부족에서 온다고 판단하는 것이다. 이는 판돈을 잃을수록 더 큰 판돈을 걸어 만회하고 싶어지는 도박의 늪과 비슷하다. 위기 상황에서 반사적이고 즉흥적인 대응은 대부분 좋지 않은 결과로 향한다. 248
무엇보다도 우선 완벽한 대응책을 가지려는 불가능한 열망과 그 열망에 따른 자기최면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러면 실패를 일찍 받아들이고 가능한 한 최단시간에 자기 체계를 재조정하는 신속한 '포기'를 '얻을' 수 있다. 미리 여러 개의 계획을 세우는 과정은 이를 위한 훈련이다. 계획을 수립하는 사람이 누구건 간에 더 많은 가능성을 시야에 넣을 수 있다면, 그래서 다양한 선택지를 함께 관찰하는 버릇을 들일 수 있다면 상황은 최악의 경우에도 최악으로 치닫지는 않을 것이다. 253
사진의 가장 강력한 힘은 사진의 이미지 바깥에서 온다. 바로 이미지를 둘러싼 욕망의 힘이다.
설명없이 주어진 한 장의 사진은 사진을 보는 이의 마음속에 있는 욕망을 불러와 자신만의 이야기를 찾도록 이끈다. 인간은 언제나 자신이 몸담은 세계를 이해하려들기 때문이다. 세계를 작가 자신의 방식으로 변환시켜 작품 자체를 독립된 작은 세계로 완성시키는 고전적인 미술 장르에 비해, 사진은 세계를 그대로 옮겨 보여준다는 착각을 일으킴으로써 감상자들로 하여금 이미지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이해하고자 하는 욕망을 자연스럽게 불러일으킨다.
그러한 이해는 꼭 논리적일 필요는 없다. 오히려 어떤 기억이나 이야기에 가깝다. 사진 이미지 속 피사체들은 이 세계에 실제로 존재했던 것들이므로, 즉 이 세계의 일부이므로 감상자는 사진 이미지를 자신의 실제(라고 믿는) 세계 속으로 아무 의심 없이 끌어다 배치시키는 것이다. 그 순간 사진은 감상자의 삶 속 일부가 된다. 따라서 사진으로부터 촉발되는 이야기의 구조는 그 사진을 바라보는 이가 누구인지, 언제인지, 어떤 상황 하에서인지에 따라 달라진다. 이야기는 서사일 수도 있고 묘사일 수도 있다. 감상자가 겪었던 사건이 덧씌워질 수도 있고 그가 겪지 못했기 때문에 마음속에서만 존재했던 꿈이 그 자리를 대신할 수도 있다. 사진은 한때 존재했으나 이제는 사라져버린 한 순간을 보여주면서 그 순간을 둘러싼 과거와 미래를 감상자의 몫으로 남겨둔다. 세계는 단 한 번도 정지한 적이 없었으므로, 사진을 보는 이는 사진 속 정지한 세계의 과거와 미래를 자신도 모르게 써내려가고 만다.
그러나 너무 예쁜 사진들이 있다. 보는 순간 즉각적인 감탄을 불러내는 사진들이다. 다채로운 색의 대비로 눈을 사로잡거나 고전 미술의 전통적인 구도를 충실히 따름으로써 회화처럼 인식되는 사진들이다. 그 아름다운 구도 속에서 세상은 이미 질서를 확충한 것처럼 보인다. 이런 사진들의 시각적 완결성은 철저히 계산적이고 합목적적(이런 인상을 주기 위한 피사체, 저런 느낌을 주기 위한 색 배치)이어서 좀처럼 질문의 여지를 남기지 않는다. 이런 사진은 익숙하고 편안한 즐거움을 제공한다. 사진을 찍은 사람과 그 사진을 보고자 하는 사람들 사이에 시각적 쾌락에 기인한 암묵적인 합의가 있었고, 이 합의는 순조롭게 이행된다. 보여주려고 하는 것과 보고자 하는 것이 일치하므로 궁금할 것이 없다. 감상자는 사진 너머를 보고자 할 이유를 찾지 못한다. 그 너머는 이미 시각적 스펙터클의 텅 빈 놀라움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
반면에 수수께끼로 가득한 사진들이 있다. 즉각 감탄하기에는 너무 잔잔하고, 그래서 가만히 바라보게 되고, 그 과정에서 마음속에서 알 수 없는 감정들이 서서히 솟아오르는 사진들이다. 필립 퍼키스의 사진들이 그런 부류에 속한다. 그의 사진에서는 강렬한 피사체나 완벽한 구도가 시선을 압도하는 일이 없다. 사진을 보면 무엇을 찍으려고 했는지는 알 수 있지만, 그 주요 피사체는 사진 속에 등장하는 다른 피사체들을 내리누르지 않고 평등하게 프레임 속에 머문다. 그의 사진들 속에 있는 세계는 아직 깨어나지 않은 것 같다. 거기에는 어떤 힘의 평형 상태가 존재한다. 세계는 가만히 종이 위에 내려앉아 있고, 여기에 주제와 리듬을 부여하는 것은 보는 이의 몫이다. 감상자는 어느새 깨끗하고 고요한 사진 위에 자신의 사색을 투사하게 된다. 325-327
소개된 책은 <한 장의 사진, 스무 날, 스무 통의 편지들>로 안목 홈페이지에서만 구입가능하다고 함.
침묵은 아무리 증폭시켜도 침묵이다. 침묵은 무엇을 주장하거나 강조하지 않는다. 고요함은 앞으로 나서는 순간 또는 어떤 단어로 규정지어지는 순간에 사라져버릴 것이다. 정적은 자신을 내보일 수 없다. 정적은 오로지 끌어들이고 수신한다.
결국 필립 퍼키스가 찍은 사진들의 주제는 일종의 미스터리라고 볼 수 있다. 그의 사진은 지시하거나 가르쳐주는 대신에 수신한다. 묻는다. 필립 퍼키스의 사진이 들려주는 주제는 '당신이 침묵 속에서 홀로 빛나는 세계를 마주했을 때 당신의 마음속에서 들려오는 이야기들'이다. 질문은 답을 얻기 전까지는 완결되지 않을 것이며, 그 답도 하나로 수렴되지는 않을 것이다. 이는 마치 가수 - 그의 사진을 보게 될 이들 - 의 등장을 기다리며 끊임없이 울려퍼지는 베이스 라인 같다. 완결되지 않음으로써 영영 계속될 음악의 골조와도 같은 것. 329-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