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뷰티플 라이프
기타가와 에리코 지음, 김난주 옮김 / 해냄 / 2004년 2월
평점 :
품절
그 여자, 쿄코의 이야기
17살이 되서 다시는 일어설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리고 13/43의 확율 속에 내 생사가 걸려있다는 것도 알았다. 하지만 웃었다. 자신을 위해 목숨이라도 걸 수 있는 엄마, 아빠, 오빠 가 있었다. 때문에 항상 행복했다. 고타츠에 다리를 넣고 앉아 귤을 까먹는 것도, "잔돈 삼백만엔.."따위의 뒤떨어진 유머감각을 구사하는 오빠에게 잔소리를 하는 것도, 너무나 소중했다. 이미 죽음이 예정되어 있었기에 남들은 그냥 무심히 보내버리는 그 순간순간이 너무나도 소중하고 아름다웠다. 그리고 죽음이 한발자국씩 더 가까이 왔을때, 세상은 마지막 선물을 보내주었다. 너무나 눈이 부셔서, 내 인생마저도 반짝거리게 만들어주는 그 사람, 슈지. 이미 남들보다 죽음에 더 가까이 다가가 있는 처지이기에 처음엔 그를 피해도 봤고, 또 이렇게 소중하고 사랑스러운 사람을 마지막에서야 보내준 하늘을 원망도 했다.
하지만 결코 변하지 않는 것은, 그로 인해 휠체어에 앉아 바라보는 지상 100cm 의 풍경이 아름답다는 것을 알았고, 살아있다는 것을 느끼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 남자, 슈지의 이야기
대대로 의사의 집안에 장남으로 태어나, 가업을 이어야한다는 중압감에 시달렸다. 동생이 명문의대에 진학하던 그 날에도 의대에 진학하기 위해 재수를 결심했다. 하지만 결국 집안의 중압감으로부터 도망치듯 떨어져나와 미용사의 길을 걸었다. 천부적인 재능으로 아오야마 [핫 립]의 톱 스타일리스트가 되었지만 언제나 고객을 우선으로 생각했고, 때문에 미용실 안에서 동료들과 잘 어울리지는 못했다. 그리고 어느날 도로 한복판에서 운명같은 그녀를 만났다. 장애가 있지만 언제나 당당하고 언제나 웃을줄 아는, 그런 그녀와 투닥거리며 어느새 사랑에 빠졌다. 비록 언제나 함께할 수는 없는 운명이 예정되어 있었지만, 주저하지 않고 용감히 그녀와의 사랑에 뛰어들었다. 꿈이 있다면 해변에 미용실을 내고, 마당에는 개를 기르며, 가끔씩 여자 아이돌의 사진을 쥐고 미용실을 찾을 여자아이의 머리를 다듬어 주는 것이었다. 물론 쿄코와 함께. 하지만 예정된 시간은 너무 빨리 지나갔고 운명은 성큼 다가와 있었다.
기타가와 에리코의 [뷰티플 라이프]는 소설보다는 드라마로 더 유명하다. 기무라 타쿠야가 슈지로 분해 멋지게 연기해낸 그 작품. 사실 나도 드라마로 [뷰티플 라이프]를 먼저 접하게 되었다. 그리고 슈지와 쿄코의 마지막 이별장면이 너무나 가슴에 남아있던 어느날 서점에서 우연히 책을 보게 되었다.
아.. 그렇구나.. 드라마도 내 마음대로 스킵하며 보는 탓에 내가 보고서도 잊고 있었던 장면들이 책을 읽으니 고스란히 되살아났다. 이부분에서 쿄코는 어떤 마음이었구나, 슈지는 이때 어떤 상황이었구나.. 하는 사실들을 깨달으면서 왠지 내가 슈지의 [핫립] 동료, 쿄코의 친한친구 사치가 된 듯한 기분이었다.
너무나도 뻔한 새드엔딩의 사랑이야기였지만 이 책이 너무나도 소중하게 느껴졌던 건, 슈지와 쿄코의 천천히 안으로 젖어드는 사랑때문이었던 것 같다. 장애와 죽음을 각오하고 시작된 그들의 사랑이었지만, 그들의 사랑은 결코 타오르는 불처럼 열렬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런일로 사랑이 시작되었던 걸까? 하고 생각하게 만들정도로 평범하고 느렸고 평화로왔다. 그리고 오히려 그런 부분에 신선함을 느낀 것 같다. 그리고 이 책을 좋아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