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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오는 길에 보성을 지나 왔다.
산기슭에 차밭이 많았다. 찻잎의 초록은 다른 초록과는 다른 빛깔로 고왔다. 줄을 지어 동글동글하게 자란 차나무들의 행렬 속에서 문득 흰 수건을 머리에 쓴 배우, 전도연을 보았다. 그녀가 찻잎을 따고 있다는 착각이 들었다.
처음 그녀가 텔레비전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 풋사과 같다는 생각을 했다. 모습도, 느낌도 그랬다. ‘사과 같은 내 얼굴, 예쁘기도 하지요……’로 시작되는 동요를 떠올리며 왜 사과가 예쁜 얼굴로 표현되는지 알 것 같았다. 상큼하고 고운 모습이었다.
그 배우가 신인시절 출연한 텔레비전 단막극이 있었다. 차밭을 배경으로 찍은 아름다운 단막극이었다. 오래 전 텔레비전에서 방영한 것이다. 나는 멋대로 바로 그 차밭이 이 곳이라고 결정을 내렸다. 제목도 확실히 기억난다.
‘한 번 기억된 것은 잘 잊히지 않는다’
긴 제목인데 신기하게 한순간에 글자들이 주르르 떠오른다. 정말 한 글자도 틀리지 않고 맞을까. 그제야 의심이 난다. 너무 일순간에 떠오른 것이라 새삼 의심하는 마음이 된다. 의문 없이 쉽게 떠올랐다 해서 반드시 정답인 것은 아니다. 그런데 가끔 속는다. 자신의 기억에 속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다른 제목도, 의심스런 부분도 발견할 수가 없다. 그냥 그대로 회상을 계속한다.
찻잎을 따는 일을 하는 벙어리 소녀인 전도연, 도시에서 잠깐 다니러 온 오토바이 탄 청년. 스치듯 본 청년이 벙어리 소녀의 가슴에 자리를 잡게 되고, 그게 사랑인지도 모르고 사랑을 하게 된다. 말 한 마디도 건네 보지 못한 채, 아무에게도 말 못할, 상처가 되어버린 사랑을 품고, 한 번 기억된 것을 잊지 못하고 결국은 떨어진 꽃잎처럼 죽어간다는 이야기.
여자의 죽음을 상징한 꽃잎의 행로. 개울물에 떨어진 꽃이 소용돌이에서 맴을 돌다, 결국은 물살에 떠내려가던 장면이 오래도록 가슴에 남아 있었다. 대사가 별로 없었던 그 단막극의 영상들은, 잘 찍은 사진처럼 아름다웠다.
차밭은 한참을 달릴 동안 계속되었다.
차나무는 공기가 더러운 곳에서는 잘 자라지 않는다더니, 그래서 그런가? 유난히 산빛도 맑아 보였다. 산을 돌고 돌며 닦여진 국도엔 달리는 차도 많지 않았고, 수자는 한 팔을 창턱에 걸친 채 느긋하게 운전을 하고 있었다.
소형이 노래를 불렀다. 그녀가 노래를 부르는 이유는 둘 중 하나다. 아주 기분이 좋을 때나, 잊고 싶은 게 있을 때.
누가 바람을 보았나, 나는 바람을 보았네.
당신이 잊고 간 손수건, 작별 인사의 손짓 같네.
가슴을 시리게 적셔오는, 손수건의 눈물 자욱
바람처럼 사라져 간, 당신의 추억이,
머무를 때는 보이지 않고, 떠난 뒤에야 보이네.
누가 사랑을 보았나, 나는 사랑을 보았네.
이별은 쉬운 것이었는데, 어려운 건 혼자 남는 것,
그것이 사랑은 아니던가. 이제야 알 것 같은데.
그리움을 아는 이는 나의 슬픔 알리라
떠난 뒤에야 보이는 건가, 눈물로 보이는 그대.
역시 그녀는 조용필 마니아다. 그리고 그의 노래는 그녀의 구세주다.
언제 어디서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그의 노래는 다 알고 있다.
그녀의 마음을 표현하지 못할 그의 노래는 없다.
구불구불 느리게 달리는 자동차의 속도와 길게 뽑는 구성진 소형의 노래.
가까워졌다 멀어졌다 하는 줄 이은 차밭들.
소형의 노래는 조용한 마을들을 향해 별똥이 떨어지듯 사라져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