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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자는 가방을 베고 드러누웠다.

  소나무 사이로 낮게 내려앉은 구름이 천천히 흘러가고 있었다.

  처음 단비와 놀러 다닐 땐 참 답답했다. 보고 싶고 가고 싶은 데는 많은데 단비는 어딜 가면 빨리 움직이려 하질 않았다. 힘이 들어 그럴 때도 있지만, 자연의 음미, 그게 단비의 취미란 걸 나중에야 알았다. 단비는 어디든 도착만 하면, 그 곳이 최종 목적지든 중간 쉼터이건 관계없이, 겨울에는 제일 양지 바른 곳, 여름에는 시원한 그늘을 찾아 아무 데나 엉덩이를 대고 앉았다. 단비가 그렇게 자리를 잡고 앉으면 우리는 단비를 버려두고 곳곳을 쑤시고 다니다 오곤 했다.

 

  그러다 언제부턴가, 우리도 나이가 들었는지, 점점 구경하는 범위가 줄었다. 며칠씩 여행을 해도 행선지는 몇 곳이 되지 않았다. 경치 좋은 콘도라도 잡게 되면 며칠을 콘도에만 머물기도 한다.

  수자는 하늘을 보며 자기도 단비의 취미에 물이 좀 든 거 같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나쁘지도 않았다. 한가하게 누워 이런 저런 생각도 하고, 또 그렇게 한 곳에 머물면 전에 보이지 않던 것도 보이곤 했다.

 

  오늘은 구름이 끼어 정말 좋다.

  맑은 햇살은 다른 계절에나 가치가 돋보이지 더운 여름엔 그저 피하고 싶을 뿐이다. 더구나 들이나 산을 헤매고 다닐 때는. 더구나 와불이 누워있는 이 산마루엔 그늘다운 그늘이 없다. 그늘이라도 깊게 드리워줄 큰 나무가 있다면 몰라도 햇살 아래 그리 오래 머물 순 없을 것이다.

  날이 흐려 눈부심 없이 하늘도 볼 수 있으니 오늘 같은 날은 구름이 보배다.   솔개인지, 아주 높은 곳에 새가 한 마리 꼼짝 않고 떠 있었다.

  벌써 유월이다. 수자는 얼마 남지 않은 아버지 칠순을 떠올렸다. 자식이라곤 달랑 수자뿐인 집이라 아버지의 칠순은 수자의 어깨를 무겁게 만들었다. 잔치를 하기는 해야 할 텐데. 괜히 부모를 원망했다. 왜 동생이라도 하나 더 낳아주지 않았나. 이럴 때 의논이라도 같이 하게. 그런 생각을 하다가 코웃음을 쳤다.

 

  어릴 땐, 혼자라는 게 하나도 불편하거나 외롭지 않았다. 오히려 좋았다. 오로지 자기만 바라보는 부모, 삼촌, 이모가 있다는 게 얼마나 그녀를 흡족하게 했는지 모른다. 집에 사촌들이 놀러오는 것도 싫어했다. 엄마가 그들에게 관심을 쏟는 게 왜 그렇게 싫었던지. 엄마가 사촌들 밥숟가락에 반찬이라도 얹어주면 그 반찬을 안 먹겠다고 떼를 썼다.

  나서기 좋아하는 삼촌이 알아서 떡 벌어지게 잔치 준비하겠다고 떠들어대지만, 자식이 없는 것도 아닌데 그렇게 맡겨두고 뒷짐 지기는 싫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뒷짐 지기 싫은 게 아니라 삼촌의 설레발에 밀려날까봐 은근히 걱정이 되는 중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충돌이 꽤 강할 것이라 예상하고 있다. 삼촌이 제 일처럼 나서주면 편하지 무슨 소리냐고 할지도 모르겠다. 글쎄 그게 좀 묘하다. 편하지가 않다는 것이다.

  삼촌이 하는 일은 수자도 다 할 수 있는 일이다. 아버지 환갑 때도 그랬다. 아버지와 어머닌 여행을 다녀오시기로 했고 여행을 가시기 전에 가까운 친지들이 모여 식당에서 저녁을 먹었다. 삼촌은 여행사에 전화하고 음식점을 예약했다. 그뿐이었다. 모여서 밥을 먹는 자리에서 삼촌은 자기가 예약한 곳인데 맛이 어떠냐고 물음으로써 공치사를 했고 예약한 여행지가 얼마나 좋은지 장광설을 풀어놓는 것으로 생색을 냈다.

  듣고 있는 친지들은 어떤 생각들을 했을까. 삼촌의 공로를 치하했을 지도 모르고 삼촌이 수자를 많이 도우고 있다고 생각했을 지도 모르고 어쩌면 수자는 언제 어른이 될까 걱정했을 지도 모른다.

 

  삼촌이 고맙지 않다고 한다면 옹졸하다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수자는 고맙지 않았다. 그건 수자가 할 일이고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어려울 때 도운 게 아니었다. 더 솔직하게 말하면 식당도, 여행지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식당도, 여행사도 수자의 부모를 배려한 곳이 아니었다. 배려를 받은 쪽은 오히려 식당과 여행사다. 삼촌의 문어발 속에 들어있는 사람들과 관계있는 곳일 뿐이다. 누이 좋고 매부 좋고,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삼촌의 목적이 문제다. 삼촌은 그가 아는 사람에 초점이 더 맞추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환갑노인에게 신혼여행 단체 여행이라니. 젊은 사람들과 어울리면 젊은 기를 받고 어쩌고 그래봤자 속셈이 다 보였다. 수자는 조용한 온천 여행지를 선택하려고 했었다. 특히 어머닌 온천을 정말 좋아하신다. 은근히 내비쳤던 장소도 있었다. 하지만 삼촌의 설레발에 입을 다무셨다. 식당도 점잖지 못했다. 세련되고 현대적이지만 나이 드신 분들이 훨씬 많은 그 날의 모임엔 어울리지 않았다. 음악은 너무 시끄러웠고 멋만 부린 의자도 불편했다.

  비용은 물론 수자네 집에서 모두 나갔다. 답례품 준비는 소형이와 같이 했고 공항 배웅과 마중은 수자가 직접 했다.

 

  여행을 많이 해본 사람이고 얼마든지 분위기 좋은 식당도 물색할 수 있다. 그게 훨씬 좋았다. 부모의 취향을 제일 잘 아는 딸을 두고, 삼촌이 굳이 나설 일이 아니었다. 수자가 비용 지불 통보만 받는 일을 할 필요가 없었다. 계산 능력만 있는 게 아니라 사회도 알고 안목도 있다. 삼촌도 그걸 알고 있다. 애써 모른 척 하고 싶어한다는 것도 알고 있다.

  마음 보드라운 아버지와 어머니는 그저 좋은 게 좋은 분들이다. 삼촌과 수자의 은근한 알력을 모르는 게 아니다. 비록 마음에 들지 않아도 표를 내지 못한다. 분란이 생길까봐 노심초사하시는 것도 알고 있다. 딸밖에 없다는 현실에서 힘을 얻지 못하는 느낌이다. 그것도 화가 난다. 그래서 더 당당하게 자식 노릇을 하고 싶다. 좀 덜컥거리더라도 삼촌의 개입을 몰아내고 싶었다. 그런 생각을 한 지는 오래다.

  수자가 지금까지 용기를 내지 못하고 있었던 이유는 단 하나다.

  부모의 마음.

  다치게 하는 게 싫어서다.

  엄마는 입버릇처럼 잔치는 무슨 잔치냐 둘이 여행이나 다녀올란다 하면서도, 누구네는 어디서 어떻게 했다더라, 자식들 죽 나서서 절하는 거 보기 좋더라 하면서 부러운 눈치였다. 아들이 없는 집이라고 쓸쓸해하는 아버지의 칠순 잔치를 더 쓸쓸하게 해 드릴 수는 없었다. 똑 부러지게 수자가 나서서 해야 했다.

  어떻게 할 것인지 대충 계획도 세워놓았다. 소형이 강의 나가는 대학의 동료로부터 칠순 잔치 계획서도 하나 얻어 놓았다. 얼마 전에 부모님 칠순 행사를 한 걸 알고 소형이 얻어다 준 것이다. 식당을 빌려 한 것이라 비슷하게 하면 될 것 같았다. 계획서에 적힌 식순대로 하면 어려울 건 없었다. 음식 준비는 직접 하는 게 아니니까 계획만 꼼꼼하게 짜서 빠뜨리지 않고 잘 주문하고 예약하면 될 것이었다. 문제는 수자가 계획한대로 삼촌이 그대로 따라주느냐 안 따라주느냐이다.

 

  사람들은 여자가 일을 맡아하면 왜 못미더워 하는지 모르겠다. 여자가 나서서 주문하고 계획하면 꼭 남자는 어딨냐는 눈치다. 삼촌도, 아들이 없는 수자네 집안일에 항상 필요 이상으로 책임감을 갖고 있다. 충분히 수자가 할 수 있는 일도 삼촌이 나서서 뒤흔든 경우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이 번에도 삼촌이 자기 고집을 피우고 그래서 주도권이 어영부영 넘어가서, 칠순 잔치까지 자식 아닌 다른 사람에 의해 치러지는 것 같은 느낌을 부모에게 느끼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혼자서도 잘 할 일을, 바쁘면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충분히 할 수 있는 일도, 삼촌이 중간에 나서서 자기가 다한 것처럼 거들먹거리기 일쑤였다. 여자가 뭘 하겠냐는 표정으로 폼을 잡으며 설쳐댈 상상을 하니 벌써부터 속이 거북하다.

칠순 잔치 때는 이 친구들을 초대하고 싶었다. 수자가 믿고 무슨 일이든 맡겨도 되는 편한 사람들이 이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친척 어른들이나 삼촌의 눈빛이 어떨지. 수자가 아직 미혼인 것도 못마땅한데, 친구들까지 그런 눈길을 받게 할 수는 없다.

  딸 하나 달랑 믿고 잔치 자리에 앉을 부모도 쓸쓸하겠지만, 터놓고 의논하고 걱정할 형제자매 하나 없이 친척들 사이에 끼어있을 자신을 생각해도 한심하긴 마찬가지였다. 이미 결혼을 해 가정을 이룬 사촌들도 친구들보다 허물없진 않았다. 그런데 제일 가까운 친구들은 그 날 같이 있을 수가 없다. 무슨 이런 경우가 있나 싶은 게 억울한 생각까지 들었다. 잔치 준비는 이들과 의논하고 준비하고 할 텐데 초대할 수도 없다니. 수자는 혼자 생각에 분해 눈물까지 솟았다. 귀 쪽으로 주르르 흐르는 눈물에 깜짝 놀라 주변을 둘러보았다.

  단비는 여전히 등을 보인 채로 앉아 있고 소형은 카메라를 만지고 있었다. 그리고 미경은 두 무릎 위에 얹은 손에 턱을 괸 채 꼼짝 않고 있었다.

  하늘은 여전히 흐리다.

  친구들이 눈치 채지 못하게 귀 쪽으로 흐른 눈물을 손으로 가만히 닦았다. 코가 맹맹했다. 코를 풀고 싶었지만 대신 옆으로 돌아누워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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