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경도 결코 결혼에 관련된 영혼 없는 관심을 좋아하진 않는다. 그러나 그녀와 내가 다른 점은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절대 내색을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우리 사이에선 예외다. 말 없는 미경이도 대놓고 투덜거린다. 특히 명절 후유증은 제법 과격하기까지 하다. 어느 집보다 손님이 많은 집이라서 더한지도 모르겠다.
모든 결혼한 사람들이 결혼하지 않은 나이든 남녀에게 제일 흔하게 던지는 말이 ‘결혼해야지?’ 아니던가. 무슨 큰 의무나 져버린 것처럼 말이다. 미경은 명절이면 그 소리를 몇 번이나 들을까? 8남매 맏이인 어머니가 외할머니를 모시고 있어 외가 손님까지 굉장한 집이니까.
창문턱에 기대어 있던 소형이 내 눈치를 보았다. 수자도 나를 돌아보며 혀를 날름 내밀었다. 순간 얼굴이 달아올랐다. 내놓고 신경질을 부릴 수 없는 상황에서, 아무리 허물없는 사이라 하더라도, 그녀들이 내 마음을 꿰뚫고 있다는 걸 안다는 건 유쾌한 일이 못 되었다. 내 발끈함의 이유를, 그래서 달아오른 내 얼굴을 소형 어머니가 못 보신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병문안을 와서 환자의 기분을 상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쯤은 나의 신경질도 알고 있으니까. 그리고 아는 것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상황에 따라 표정관리도 할 정도로, 나도 사회를 살아가는데 숙달된 어른이다.
냉커피에 꽂혀있는 빨대를 소리 나게 빨며 수자가 깔깔 웃었다.
<단비 너 아까 얼굴 볼만하더라. 시집 소리 나오니까 정말 자동이대? 빨개졌다 또 금방 제 색깔로 돌아오고. 야, 카멜레온 저리 가라더라.>
나는 수자의 말에 대꾸는커녕 들리지도 않는 양 눈을 내리깔고 커피를 한 모금 빨았다. 그리곤 입에 담은 커피를 천천히 삼키며 눈길을 찻집 창 밖으로 돌려버렸다.
‘그런 건 좀 그냥 넘어가면 안 되나? 아무리 알 거 모를 거 다 아는 친한 사이지만, 친구가 싫어하는 줄 알면서 굳이 또 들출 건 뭐냐구!’
내 얼굴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을 것이다.
사람마다 생김새가 다르고 취향이 다르듯이 감정의 반응도 다르다. 감정적으로 유난히 싫어하는 어떤 것들이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난 이런 표현들에 감정의 알레르기를 일으킨다.
진지하게 이야기하고 있는 내 얼굴 빤히 쳐다보고 있다가 갑자기 말을 자르며 ‘어머, 너도 이제 눈 밑에 주름 많네.’ 식의 지적. 그런 지적이 왜 그런 때, 아닌 밤중에 홍두깨 식으로 튀어나와야 하는가 말이다. 말이 잘린 것도 맥이 빠지는 일이지만 그 상황에 그런 지적이 어떻게 가능하단 말인지. 내 얼굴에 쏟아지던 집중은 도대체 무엇에 대한 집중이었단 말인가. 내 이야기가 아닌 자기 생각, 아님 엉뚱한 상상에 빠져 있었단 말이 아닌가. 그런 불쾌한 경험이 또 있을까.
전력 질주하는 단거리 선수의 슬로우 모션을 보고 기껏 한다는 소리가 ‘어머, 저 선수 얼굴 봐라. 볼 살이 출렁출렁한다.’ 식의 감동. 그런 힘차고 역동적인 모습을 보고 어쩌면 그렇게 기운 빠지는 소리를 할 수 있는지. 달리고 있는 선수에게 잔뜩 몰입해 있던, 들뜬 내 감정이 같이 수모를 당하는 기분까지 든다.
몹시 화가 나 흥분해 있는 사람을 보고 ‘쟤 좀 봐라, 입술이 벌벌 떨린다.’ 식의 지적. 설사 당사자가 듣지 못한다 하더라도 실례가 될 것 같지 않은가. 내 기분이 아니라고 조롱할 필요까지는 없는 것 아닌가. 때로는 못 본 척 하는 것도 예의가 아닌가 말이다.
나는 왜 그런 지적들에, 내가 당한 것같이 화가 날까.
그런 일엔 당사자가 나이건, 남이건 상관없이 감정이 상한다.
수자가 종종 이런 식이다. 그래서 이야기 주제를 흐리게 만든다.
그럴 때마다 친구라서 애써 넘어가기도 하지만 친구라서 더 화가 나기도 한다. 그럼 소형과 미경은? 그런 상황이 벌어질 때마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해서 그 상황에 내가 분통을 터뜨릴 때마다 둘은 웃기만 한다. 그 웃음의 의미를 완전하게 알 수는 없다. 화를 낸 나에게 공감한다는 웃음인지, 과민한 내 반응에 대한 웃음인지, 둘 다 그럴 수도 있다는 웃음인지.
어떤 의미의 웃음이건 친구 사이에서 그들이 취할 방도는 웃음밖에 없는 지도 모르겠다. 물론 내 문제라 생각한다. 이성적으론. 그래서 반성도 해보고 노력도 해보지만 부딪칠 때마다 증세는 여전하다. 면역이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