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경은 우리 중 가장 먼저 독립했다.
딸만 넷인 집안의 맏이인, 독립심 강한 미경이를, 미경이 아버지는 아들처럼 믿고 든든해하셨다. 그 강한 독립심이 결혼이 아닌 정말 독립을 원했을 때, 자주 독립 좋아하시던 미경이 아버지도, 당시엔 ‘독립’ 말만 들어도 자다가 벌떡 일어나 앉으실 만큼 충격을 받으셨다.
그렇게 집안에 큰 파문을 일으키며, 말리다 지친 어머니한테는 독하다는 말을 들으며 당당히 독립한, 그 하늘을 찌를 듯한 기개는 독립할 당시만 유효했다.
독립을 하고 난 직후,
미경은 거의 매일 퇴근길에 집에 들렀다. 식구들과 같이 저녁을 먹고 시간을 보냈다. 말하자면 재롱둥이 노릇을 제대로 한 것이다. 자식이 떨어져나갔다는 허전함을 희석시키기 위해 당분간만 그렇게 하기로 한 것이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차츰 횟수를 줄이지’는 희망으로만 남았고 갈수록 일은 벌어지기만 했다.
그것도 보상심리라고 해야 할까.
미경은 불효했다는 죄책감이 깔려 있고 어머니는 딸을 아무리 자주 봐도 만족되지 않는 서운함이 깔려 있었다. 같이 살지 않는다는 서운함. 미경은 그런 죄책감을 덜기 위해 매일 본가로 출근하고 어머닌 그래도 밤에는 집으로 가버리는 딸이 서운했다. 그 서운함을 상쇄시키기 위해 휴일엔 같이 장을 보러 가게 되었고 그렇게 시작된 것들은 고정 행사가 되었다. 미경이 딸로서 하던 투정과 거부가 점점 사라지는 대신 어머니의 투정과 거부가 늘어났다. 그들도 모르는 사이에 관계가 서서히 그렇게 변해갔다. 그리하여 결과적으로 그들은 미경이 독립하기 전보다 더 많은 시간을 함께 했다. 잠들어 있는 시간을 뺀다면.
미경은 활동적인 여자였다.
평일에도 퇴근 후엔 친구, 동료들과 잘 어울렸고 휴일이면 가까운 곳에라도 나가 바람을 쏘여야 했다. 방학 땐 물론 우리와 여행도 많이 했다. 하지만 독립 후 그 시간들은 거의 ‘집과 함께’ ‘어머니와 함께’로 변해버렸다. 그래도 얻어먹는 밥에 늘 허기를 느끼듯 어머니는 충족감을 느끼지 못했다. 미경은 미경대로 바쁘고 어머닌 어머니대로 섭섭함이 기본으로 깔려있었다.
늘 보는 사람들끼리는 서서히 변해가는 모습을 잘 감지하지 못한다. 얼마나 주름이 늘었는지, 얼마나 체중이 변했는지는 시간을 좀 건너뛰어야 확실히 보인다. 미경과 가족은 늘 함께였고 그래서 그들의 모습이, 관계가 어떻게 변했는지, 어떻게 달라졌는지, 그들의 눈엔 보이지 않았다.
일요일마다 어머니와 장보러 가는 게 고정 일거리가 되었고, 돈 버는 딸이니까 계산도 자연스럽게 미경이가 했다. 어머닌 미경이 독립한 후에야 경제적으로 독립이 되어 있다는 걸 제대로 인식한 것 같았다. 아마도 어머니가 제대로 인식한 건 그것뿐인지도 모른다.
정신적 독립도 자주 독립도 아닌 경제적 독립만.
가족들은 미경의 지출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고 지출의 용도는 점점 다양해지고 커졌다.
주중에 들를 때마다 사들고 가는 푸짐한 간식거리.
월급 때마다 고정적으로 나가는 생활비와 용돈.
간식은 주로 아직도 입이 달아 남아나는 것이 없는 동생들을 위한 것이었고, 그러고도 어머니껜 따로 생활비를, 동생들에겐 용돈을 챙겼다. 물론 강요한 사람은 없다. 집안 형편이 그렇게 흘러갔고 미경이는 돈을 벌고 있었다.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결혼을 하지 않았다.
자식이니까 당연히 해야 되는 일이라 하면 할 말은 없다.
결혼하지 않은 자식의 의무가 따로 있는 거라면 말이다.
그동안,
동생들은 결혼을 하고, 집을 사고, 자식을 키웠다.
그리고 미경에겐 아직 자기 이름으로 된 집 한 칸이 없다.
어머니로부터 독하다는 말을 들으며, 동생들로부터는 종종 인정 없다는 말을 들으며, 제부들로부터는 혼자 산다는 이유만으로 이기적이라는 생각을 품게 하며, 미경은 정작 利己하고는 거리가 먼 삶을 살고 있다. 나아지지 않는 형편이 바로 그 증거다. 자식도 없이 혼자 사는 여자가 도대체 돈을 어디에 다 쓰는지 동생들이 차례로 집을 사는 동안 미경의 집은 아직도 처음 독립할 때 융자받아 얻은 원룸이다. 해마다 집세를 올려주면서도 제집을 갖지 못하고 있는 걸 식구들은 알까. 안다면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아니 생각이나 하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