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란다에는 소형이 애지중지 가꾸어 놓은 화초들이 사랑 받고 있는 티를 듬뿍 내며 푸릇푸릇 자라고 있었다. 빼곡하게 들어찬 화분들로 손바닥만한 베란다가 터져 나갈 듯했다. 벤자민 한 그루만 덜렁 있는 내 베란다가 떠오른다.

  참 부지런하기도 하다.

  한 그루 있는 것도 한 번씩 기아 상태에 빠뜨리는데.

 

  <노래 들을래?>

  소형은 더 이상 말이 하고 싶지 않은 모양이다.

  나도 마찬가지다.

  소형은 너무 많은 말을 해서, 나는 할 말이 없어서.

  이 상황에 내가 무슨 말을 주절주절 하겠는가.

  어떤 말이 위로가 될까.

  위로될 말을 찾기는 참 어렵다. 위로가 필요한 상황일 땐 더구나 그렇다. 문상을 가 본 사람이라면 한번쯤 느껴봤을 것이다. 지극한 슬픔에 빠져있는 사람에게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어떤 말도 슬픔을 어루만지기엔 너무 너절하거나 가볍다. 그래서 차라리 말문을 닫아버리게 된다. 그저 안타까워하는 마음이 전해지기를 바라면서.

 

  ‘노래 들을래?’란 말은 조용히 있고 싶다는 뜻이다.

  하지만 둘이 앉아 있으면서 말이 없으면 공기가 무겁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근심 걱정 없을 때나 조용함이 곧 평화로움으로 이어지는 법이니까. 평화로 가지 못하는 고요함은 무거운 적막으로 변해 마음을 짓누를 것이다. 그 무거운 적막을 메워주는 덴 노래만큼 좋은 것도 없다.

  ‘노래란 말을 듣는 순간 생각나는 노래가 있었다.

  대답도 하지 않고 C.D.가 꽂혀있는 책장으로 기어갔다. 그랬다. 기어갔다. 좁은 아파트의 장점이랄까. 몸을 조금만 굽히면 물건들이 손닿는 곳에 있는 까닭에 굳이 일어서서 걸어갈 필요가 없다. 집에서 하루 종일 그렇게 지내노라면 마치 애완 햄스터 같은 기분이 들 때도 있지만.

  <뭐 찾는데?>

  <들어 봐. 화분들을 보니까 생각나는 노래가 있어서. 지금 우리 기분에도 딱 어울리는 노래로 틀어 줄게.>

  드디어 찾았다.

  나는 조용필의 꽃이 되고 싶어라를 끼우고 계속 그 노래만 나오도록 조작을 했다.

   눈물이 나네, 눈물이 나를 적시네.

   한숨이 나네, 한숨이 나를 떠미네.

   바람 부는 이 저녁, 어디로 가야 하나.

   뜨거운 정으로 밀려오는 달빛, 어얼싸 취해서,

   사랑하는 이와 단 하루 살아도, 어야, 좋겠네.

   보아주는 이 없어도, 고운 꽃이여.

   나는 나는 죽어서 꽃이 되고 싶어라.

 

   처연하고 깊은 목소리가 좁은 방을 가득 채웠다.

  소형이 늘 정신적인 남편이라고 떠드는 조용필의 뛰어난 가창력.

  그의 노래 솜씨는 정말 부럽다.

  그때그때의 기분에 맞는 노래를 저렇게 멋지게 부를 수 있다면, 그 기분이 그대로 예술이 될 것 같았다. 허공으로 총을 쏘아 올리듯 거침없이 올라가는 고음. 바다에 떠가는 거대한 배를 연상시키는 저음.

 

  같은 노래가 세 번째 돌아가고 있었다.

  소형은 머리를 바로 든 채 정면을 보는 자세로 움직이지 않았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노래를 듣고 있는 걸까.

  사람을 앉혀놓고 이렇게 오래 동안 말이 없기는 처음이다. 아무리 큰 걱정거리가 있어도 5분 정도 침묵하면 평상으로 돌아온다. 잊지 못하면 잊은 척이라도 한다.

  머리가 복잡하긴 복잡한 모양이다. 그녀에게 가장 훌륭한 해결사였던 시간도 무용지물이다. 걱정거릴 잊는 게 아니라 내가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린 것 같다.

  이런 소형을 처음 겪는 나는 어떻게 할지를 모르고 있다.

  무슨 이야기라도 꺼내어야 하는지.

  그냥 가만히 두는 게 나을지.

  소형에게 내가 이렇게 무능한 사람이었던가.

  대책 없이 자책의 구덩이만 파 내려가고 있던 나의 삽 끝에 뭔가 부딪치는 게 있었다. 소형이 사 준 옷 생각이 났던 것이다. 다 캐버린 감자밭에서 굵은 감자를 발견한 것처럼 그 생각이 대견했다.

  <네가 사 준 옷 있잖아.>

  그러나 소형은 대답이 없었다. 머쓱해진 내가 그 머쓱함을 밀어버리기라도 하듯이 그녀의 어깨를 어깨로 밀며 다시 말했다.

  <저 번에 사 준 옷 있잖아.>

  이번에는 약간 긴장한 내 목소리가 꽤 크게 나왔다.

  소형이 후드득 놀라면서 나를 돌아봤다. 정말 내 존재 자체를 잊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돌아보는 그녀의 얼굴에 표정이 하나도 없었다. 슬프다거나 기쁘다거나 하는, 어떤 감정의 실마리도 찾을 수 없는 백치 같은 얼굴이었다

 가면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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