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형은 말을 멈추고 침을 삼켰다.

  바싹 마른 입술이 눈에 들어왔다.

  말을 많이 하면 목도 타고 입술도 마른다. 나이가 들수록 심해진다. 그게 사실이라 할지라도 지금은 소형의 마른 입술이 타는 가슴으로 느껴진다.

  <그래도 단비야, 상황이 달라졌잖아. 그 전이랑 비교할 수가 없어. 안 그래?>

  <맞아. 비교 못해. 대소변 가리는 거랑은 천지 차이지. 그건 직업이다 생각하고 누군가 전적으로 붙어서 해야 될 일이지, 다른 일 하면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냐. 환자를 봐서라도 그렇고.>

  <내가 전화를 두 번씩이나 했으니까 적어도 퇴근길에는 들러볼 줄 알았어. 난 무엇보다 의논할 사람이 절실했거든. 놀랐고 힘들고 마음도 아프고……. 혹시 싶어 밥도 넉넉히 해놓고 기다렸지. 그런데 저녁때가 지나고 아홉 시가 넘도록 아무 소식이 없는 거야. 그런데 정말 묘하더라. 내가 또 전화하려니까, 꼭 빚 독촉 하는 것 같아 하기 싫은 거 있지.

  그래 전화도 하기 싫고 대책은 없고 그냥 무작정 앉아 있으려니까 온갖 생각이 다 들더라. 물론 나도 자식이지만, 이런 어려운 일에 갑자기 내가 왜 이렇게 중한 자식이 되었나. 막말로 내가 결혼도 안했으니 집에서 결혼 비용을 대 준 것도 아니고. 자기들은 다 기둥뿌리 한 뿌리씩 뽑아가며 결혼들 했으면서.

  독립하는 것도 허락 받느라 눈치 본 것 밖에 없다. 독립 자금? 그런 거 일 원 한 푼도 없었다. 받아야 한다는 생각도 없었지만. 우리 사회가 아직 결혼이 아닌 독립을 당연하게 보는 건 아니잖아. 무슨 떳떳하지 못한 일을 저지르는 것처럼 보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한 마디로 어른으로 취급하지 않았어. 오빠들? 허락이 큰 선심이었지.

  그 동안은 결혼 안 했다는 이유만으로 애물단지처럼, 철없는 애처럼 취급하더니. 나를 애처럼 취급들 하길래, 자기네들은 엄청 어른인줄 알았지. 어른 노릇 잘 할 줄 알았어....

  전화하기 치사해서 망설이다 11시가 다 돼서 전화했는데, 조카가 전화 받더라. 오빠 찾으니까 뭐라는 줄 아니? 두 부부 외식 중이시란다. 그 날이 결혼기념일이라더라. 결혼기념일! 그래 그것도 좋아. 중요하고 의미 있는 날이지. 한 기분 내는 거 좋다 이거야. 그래도 11시면 저녁은 벌써 먹었을 시간이고, 그 때까지 안 들어왔다면 2차라도 갔단 얘기 아니니? 너 그거 말 된다고 생각해? 외식하러 간 건 또 그렇다고 쳐. 그래도 내가 아침부터 전화했으면 상황이 어떠리라는 건 짐작할 거 아냐. 웬만할 일로 바쁜 아침에 전화했겠니? 그리고 그런 전화를 밥 먹듯이 했으면 말도 안 해. 처음이었거든. 무슨 일인지 궁금한 게 당연한거 아닌가? 저녁 먹었으면 그때라도 바로 와야 되는 거 아니니? 내가 이상해? 너라면 이해하겠어?>

 

  소형은 화가 많이 나 있었다.

  오빠에 대해, 가족에 대해 이런 식으로 말하는 건 처음이었다.

  <나는 할 말 없어. 처음부터 너처럼 못 했을 테니까. 네가 어머니하고 같이 있게 됐다 했을 때, 사실 얼마나 속으로 놀랐는지 몰라. 쟤가 뭘 모르고 저러지. 얼마나 할 수 있을까. 어떤 일인지 알고나 받아들였을까. 그런데 너 그동안 감탄할 정도로 잘했어. 너무 잘해서 내가 알고 있는 내 친구 같지 않았으니까.>

  <그랬니? 근데 한 번도 칭찬 안하더라?>

  <무슨 소리, 늘 장하다, 했지.>

  <---, 아무 때나 하는 소리 가지고...>

  소형은 눈을 흘기며 조금 웃었다.

  장하다는 내가 자주 쓰는 말은 맞다. 사실 내 기분이 흡족할 때 남용하는 말이기도 하다.

  마주 앉아 밥을 먹다가도,

  길을 걷다가도,

  찻집에 앉아서,

  ‘장하게 밥도 잘 먹네’,

  ‘굵은 다리로 잘도 걷는 장한 소형이’,

  ‘또 커피를 원샷하셨어요? 장하십니다’,

했으니까.

  남용은 하지만 거짓은 아니었다. 대놓고 칭찬하기 어색할 때 농담처럼 했지만 말이다. 그리고 어머닐 모시고 있는 소형에게 뜬금없이 장하다를 남발했는데 그게 사실은 내 나름의 칭찬이자 감탄이었다.

  그런데 소형은 진짜 그걸 눈치 채지 못했는가?

  잘 모르겠다.

  <조카한테 자세한 이야기 늘어놓을 수도 없고, 부글거리는 속을 억지로 가라앉히고 전화 끊었지. 끊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전화왔더라. 오빠 목소리 듣는 순간 얼마나 열이 나든지 나도 모르게 소릴 질렀어. ‘오빠 지금 뭐하는 사람이야, 지금 당장 와. 안 오면 내가 간다.’ 하고. 얼마나 큰소릴 질렀는지 내 소리에 내가 놀라 얼굴이 화끈하더라.>

  <그랬더니?>

  <내 악 쓰는 소리가 워낙 커서 옆에 있던 새언니에게도 들렸는지, 새언니가 수화기를 뺏어서 하는 말에 내가 더 참담해졌지.

  ‘어머, 아가씨, 오빠가 아침에 가보라고 얘기했는데, 내가 너무 바빠 정신이 없어 깜빡했네요. 내 잘못이니까 오빠보고 너무 그러지 마세요. 오늘은 늦었으니까 내일 내가 시간 내서 가볼게요.’

  목소리는 비단이더라. 남의 일이라 이거지. 남의 일은 좋게 말할 수 있잖아. 새언니 목소리를 들으며 그런 생각이 들었어. , 새언니에겐 남의 일이구나!데이트가 즐거웠는지 목소리도 들떴고.>

  <요즘은 부부 싸움 안 하나봐.>

  <싸움 원인이 제거됐는데 싸움은 뭐. 엄마 때문이 아니라고 펄펄 뛰던 일 생각 안 나는지 몰라. 그렇게 봄 눈 녹는 소리를 하고. 들뜬 목소리 억지로 가라앉히며 어머니, 어떠세요?’ 묻는데, 새언니에겐 엄마 대소변 얘긴 직접 하기 싫더라. 대답 안하고 오빠 바꾸라 했지.>

  <네 오빠도 할 짓은 아니다. 우리나라 남자들도 할 짓은 아냐. 아직도 장남에게 무게가 실려 있잖아. 부모 봉양의 무게가 말이야. 자기가 봉양의 짐을 직접 짊어지면 문제도 줄겠지만 그런 평등 의식은 또 못 따라주고. 사랑을 따르자니 부모가 울고, 부모를 따르자니 사랑이 울고.>

  <농담하니?>

  소형이 픽 웃었다.

  <미안해, 너 기분 좀 바꿔주려고.>

  <기분 괜찮다니까. 이제 다 정리됐어.>

  <그래도 네 얘기 듣고 있으니 숨 차. 네 말이 얼마나 빠른지 모르지?>

  <그랬나?>

  <그랬어. 비록 지나간 기억이지만 뇌는 기억을 떠올리는지 실제 상황인지 구분 못 한대잖아. 내용이 격하면 그 때마다 흥분되는 거지.>

  <똑똑하다. 신단비.>

  <좀 그런 편이지.>

  소형은 웃으며 빈 잔을 만지작거린다. 고불거리는 앞머리가 눈을 찌를 듯이 자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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