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우리나라 계절을 봄, 여름, 가을, 겨울로 나누는데 동의하기가 싫다. 내가 보기엔 여름과 겨울 두 계절이 있을 뿐이다. 봄과 가을은 계절이 바뀌는 길목에서 적응을 위해 잠시 주춤거리는, 그야말로 환절기라고나 할까. 사실, 초목에 새싹이 돋고, 개나리 진달래가 산천을 수놓고, 화사한 자태를 자랑하는 목련이 어쩌구, 만개한 벚꽃이 저쩌구 하면서 마치 봄이 화려한 축제인 것처럼 떠들지만, 그런 불안한 축제도 세상에 있는가.

                                                                                                                                                                                             뾰족이 내밀기 시작한 아기 입술 같은 목련 봉오리가 갑작스런 기온 강하로 피지도 못해보고 나무껍질 같은 색으로 얼어 죽기도 하고, 화사함을 뽐내던 조화 같은 벚꽃이 하룻밤 비바람에 걸레처럼 처참하게 도로에 깔리기도 한다. 그 뿐인가. 아침엔 바바리를 걸치고도 서글프던 날씨가 낮에는 반소매조차 벗어버리고 싶게 만든다. 이런 변덕을 버젓한 계절로 인정해주어야만 한단 말인가. 변덕도 미덕이라면 모르지만. 그 짧은 변화무쌍한 기간을 나는 단지 여름을 낳기 위한 진통이라고 여기고 싶다.

                                                                              꽃이 핀다는 것, 꽃을 피움으로써 목적이 끝나는 게 아니다. 식물의 세계에서 꽃이란, 꽃 그 자체에 가치를 두는 게 아니다. 향기와 색과 독특한 모양으로 벌과 나비를 모으고 덕분에 꽃가루받이를 하여 열매를 맺고 씨를 만들어 그들의 종족을 퍼뜨리려는데 목적이 있다. 새싹도, 꽃도, 무성한 여름, 즉 열매를 맺기 위한 준비 작업에 불과하다. 왔나 하면 어느새 사라져버리는 그 변덕스럽고 짧은 순간을 나는 도저히 한 계절로 인정하기가 싫은 것이다.

                                                                                                             가을도 봄과 크게 다를 게 없다. 온도와 습도와 일광 조건이 맞지 않아 식물이 더 이상 번식하거나 자랄 수 없을 때, 생존을 위해 최소한의 생명 유지에 필요한 것만 남기고 나머지는 과감히 버린다. 식물의 그 과감한 취사선택 기간에다 우리는 가을이라는 이름을 붙여 놓았다 단풍! 단풍! 하고 떠들지만 산천초목이 정말 가을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한꺼번에 그렇게 단풍이 들어주는 건 아니다. 위도에 따라, 그리고 고도에 따라 차례로 물들고 떨어져버리는 나뭇잎들. 소위 절정이라고 말하는 화려한 단풍 숲을 구경하기는 쉽지 않다. 그저 아직 몇 나무만 물들었거나 아니면 거의 떨어져버렸거나 말라붙은 잎을 구경하기가 고작이다.

                                               어떤 옷을 입을까, 도무지 기온에 딱 맞아떨어지는 옷이 없어 고민하다가, 어느 날 내리는 서늘한 비로 갑자기 겨울을 맞곤 한다. 그래서 나는 나일론 옷이 덥게 느껴지면 여름이고 차게 느껴지면 겨울이다, 그렇게 규정을 지어버렸다. 차가운 비로 시작된 겨울은 정말 다시 여름이 올까 싶을 정도로 길다. 이렇게 긴 겨울과 여름 사이에 잠깐 존재하는 짧은 순간들이 사람들이 정해놓은 봄이고 가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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