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대체 대구에는 봄이 없다. 오월이 내일 모렌데, 화사한 봄옷은커녕 긴 내의까지 벗기가 설렁할 정도다. 물론 정직하게 말하면 내가 추위를 좀? 아니 심하게 타는 편이긴 하지만. 어찌 되었건 특히 학교 사정은 더 살벌해서 선생들은 긴 내의를 벗으면서 바로 반소매 옷을 입는다. 대구의 봄보다 더 짧은 봄이 아마 학교의 봄일 것이다.
사월을 봄으로 규정하고 난방을 꺼버린 교무실은 마음 단단히 먹고 겨울 채비를 해오는 한겨울 보다 더 견디기 힘든 시련의 장소다. 난방 문제에 관해선, 추위에 약한 나로서는 정말 할말이 많다. 난방기가 인간의 체온 유지와 안락을 위해 필요한 건지, 계절을 표시하는 데 필요한 건지 모르겠다.
시간을 정하고 달을 나누고 계절을 구분한 건 인간이다. 그럼 그런 복잡한 건 왜 만들어 내었을까. 분명 좀더 편리한 삶을 위한 목적에서 시작된 지식과 지혜의 산물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어느 순간 목적은 희미해지고 형식만 점점 뚜렷해지고 있다. 난 뜨겁게 그걸 느끼고 있다. 그리고 그 형식을 맹신하는 무지함에 두려움까지 느끼고 있다.
인간답게, 추위와 더위라는 자연의 심술에 상관없이 당당하게 어깨와 허리를 편 채 일하고 살게 하기 위해 만든 게 문명의 이기(利器)들 아니던가. 그리고 현 인류는 그런 문명을 낳은 과학을 무지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계절이 무슨 똑같이 잘라야 하는 가래떡도 아니거늘 네 등분을 한 것도 모자라 그 등분한대로 난방기를 가동하는 몰융통성은 어느 별에서 하던 짓이란 말인가.
계절을 등분 하고 이름을 붙이는 것까진 좋았다. 그건 인류가 정한 것이고 인류가 정한 건 인류가 바꿀 수도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니까. 상황이 바뀌면 언제든지 말이다. 그것이 쓸모 있는 법이 아니겠는가. 조선시대 법을 그대로 현대에 적용하지 않듯이 말이다. 하지만 인간은 변하는 상황보다 습관에 더 익숙한 모양이다. 습관이 모여 관습이 되고 관습은 신처럼 존중받는다. 그래서 공식에 맞춰 수학을 하듯이, 규정해 놓은 대로 살지 않는 것을 마치 신의 명령을 어기는 것처럼 불편해한다. 그 관습에 항의를 하다간 자칫 질서의식이나 도덕성을 의심받기도 한다. 모든 규정의 원조는 신이 아니라 인간인데도 말이다.
난 신의 영역을 침범하려는 게 아니었다. 그저 상황 따라 문명의 이기를 좀 이용하자는 것뿐이었다. 아직 기온이 겨울 뺨치게 낮으니 난방을 좀 더 하자고. 교무실에 우물을 파자는 것도 아니고 휴게실에서 칠순 잔치를 열겠다는 것도 아닌데 내 의견은 규정 앞에서 당당히 거절당했다. 게다가 도덕성을 의심받는 눈총을 받은 것도 물론이다.
봄에(인류가 규정한 봄에) 멋모르고 퇴근길에 바로 백화점엘 갔다간 완전히 산골 소녀 상경기가 되기 십상이다. 백화점 옷은 늘 한 계절을 앞당겨 선보인다. 그래서 사월의 백화점 의류 코너는 여름 옷 일색이다. 하늘빛 민소매 티셔츠에 분홍색 얇은 면바지를 입힌 마네킹 곁을, 어두운 모직 회색 정장에 목이 올라오는 셔츠까지 받쳐 입은 사람이 지나간다고 상상해 보라. 그가 어떤 고매한 인격의 소유자인지, 얼마나 배운 사람인지, 어떤 사람일지는 상관이 없다. 그냥 촌스럽고 이상한, 도무지 화사한 백화점 분위기완 어울리지 않는 외계인일 뿐이다.
웃옷을 벗어 팔에 걸어도 목까지 올라오는 셔츠에 조인 목은 답답하고 땀이 난 허리와 엉덩이는 발걸음을 뗄 때마다 따끔거린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나를 보는 백화점 아가씨들의 눈길은 묻지 못하는 호기심으로 반짝인다. 도대체 어디에서 온 사람인가? 중국 동폰가? 모르긴 몰라도 뭐 그런 생각들로 잠시 다리 아픈 것도 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