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고통의 내용을 상상하기 어려운 상태에서 타인의 고통을 만나면 어떻게 될까? 대부분의 사삶들은 연민, 동정, 공감이 아니라 그 고통을 보지 않거나 듣지 않으려 한다. 혹은 너무나 잘 상상할 수 있는 고통이라면 또 어떨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신체절달이나 이와 유사한 고통에 대해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괴로워한다. 고통은 보지 않으려 하는 것만큼이나, 고통에 대해 '잘 알고 있다'는 감정들은 타인의 타자성을 인정한 상태에서의 공감이 아니라 일종의 정신적인 전이 상태에 불과하다. 때문에 이런 고통스러운 전율은 아지 잠깐 나타났다가 곧 잊혀진다. 감정적 동일시만으로는 공감의 연대를 만들어내는 정치를 지속하는 것이 어려운 이유다. '바로 당신'이 겪고 있는 고통은 어쩌면 '나 대신' 견뎌내고 있는 것이라는 깨달음, 이것이 바로 공감과 연민이 연대의 정치로 전환되는 순간이다. (...) "살아남은 우리는 무엇을 할것인가"라는 질문은 우리 사회의 가장 강력한 정치적 구호이다. 우리는 더욱더 '정치적'이 되어야 한다. <해제- 권김현영>
강남역 여성살해 사건의 피의자는 30년 형의 중형(?)을 선고 받았다. 조현병을 이유로 감형되었다고 한다. 30년...후에도 피의자는 살.아.있.겠.지.
여성혐오로 인한 여성살인 사건을 억지로 묻지마 살인으로 정신질환자의 범행으로 덮어 버리려는 사회.
여성이라서 단지 그 이유만으로 죽임을 당한 피해자의 안타까운 생이 아니라
목회자가 꿈이었다는 피의자에게 감정이입을 하는 사람들.
그 속에서 우리들이 말하기 시작했다.
여성발언자 전원은 여성혐오 발언, 성추행, 성폭행을 당한 경험이 있다. 집에서, 학교에서, 회사에서, 길거리에서, 대중교통안에서. 다시말해 모든 장소에서 모든 시간대에 그런 경험을 한것이다.
말해질수 없었던 이야기들. 말할 공간도 들어주는 사람도 없었던 시간들을 깨고 우리들이 내가 그녀가 말하기 시작했다.
우연히 살아 남았고, 죽어가고 있는지도 모르겠지만 "살아남은 우리는 무엇을 할것인가 끈임없이 묻고 행동하겠다.